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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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洛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기주(冀州) 중산군(中山郡) 포음현(浦陰縣) 출신.
2. 생애
전연의 백성으로 살던 중 징발되어 동생 유흥(劉興)과 함께 전쟁터에 나섰다. 그러나 이때 전연군이 싸움에서 패하니, 유락은 적을 뒤로 한 채 도망치고 말았다. 유락의 고향인 포음현에서 이를 두고 유락이 돌아오면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겠다 선언하니, 유흥이 스스로 관청에 출두하여 자신이 전장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라 자수하였다.이 소식을 들은 유락 또한 나와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유흥 대신 죽겠다 청하는 동시에, 집행 절차가 법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항변을 펼쳤다. 이를 들은 헌무제 모용위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형제의 우애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면하였고, 절차에 대한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