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36:51

우쥔성

오준승에서 넘어옴
파일:오준승.jpg
중화민국 헤이룽장성 독군 겸 성장
본명 오조은(吳兆恩)
정체 吳俊陞
간체 吴俊陞
한국식 독음 오준승
영문 Wu Junsheng
흥권(興權)
출생 1863년 3월 19일
청나라 산둥성 지난부 리창현[1]
사망 1928년 6월 4일 (향년 65세)
중화민국 봉천성 봉천시 제9구 황고둔촌[2]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봉천군벌의 핵심 인물이자 원로로 헤이룽장성 독군 겸 성장을 지냈으나 1928년 황고둔 사건으로 주군인 장쭤린과 함께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3년 3월 19일에 태어났는데 진지양의 군신정권에서는 산둥성 리청현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고, 쉬처의 장쭤린 평전에는 봉천성 창투현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아마도 산둥성 지난부(濟南府) 리청현(歷城縣)에서 태어나 이후 성경장군부(盛京將軍府) 창투부(昌圖府)[3]로 이주하여 오래 산 것으로 보인다.

17세에 군에 입대했으며 봉천부 순방영 후로통령으로 승진했다. 1911년 조이손이 동삼성 총독에 임명된 이후 무창봉기가 발생했는데 만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혁명당원 장용을 중심으로 소요가 일어났다. 해외시찰 중이던 조이손은 황급히 귀국하여 순방영 후로통령 우쥔성을 불러들여 봉기에 대비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방영 전로통령 장쭤린이 선수를 쳐서 조이손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 순방영 중로통령을 겸하게 되었다.

우쥔성은 신해혁명 이후 기병 제2여단장, 요녕진수사를 역임했다.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 이후 12월 23일에 2등 남작에 봉해졌다. 청나라가 붕괴된 이후 왕정을 복고하려고 시도하는 몽골 왕공들의 시도를 진압하였으며 1917년 봉천후로순방영과 기병 제2여단을 통합하여 육군 29사단을 편성, 29사단장에 취임했다.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나자 환봉동맹을 체결하려는 쉬수정의 주선에 따라 남방으로 출병, 손열신, 급금순과 함께 후난전선에 파견되어 5월 9일 장사에 도착, 후난에서 호법군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행했으나 쉬수정의 전횡으로 봉계와 환계의 동맹이 결렬된 이후 동삼성 순열사에 임명되어 원했던 정치적 이익을 모두 챙긴 장쭤린이 회군을 결정하면서 소련의 적화시도를 막기 위한다는 구실로 철수하였다.

장쭤린의 초기 유력경쟁자 중 한명이었던 지린독군 멍언위안이 몰락한 후 지린독군 자리를 두고 장쭤샹과 다투었으며 1920년 안직전쟁에 참여했다.

2.2. 직봉전쟁

1921년 3월 손열신의 뒤를 이어 헤이룽장성 독군 겸 성장에 취임했고[4] 1차 직봉전쟁에 참여하였다. 1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이 패하자 직계는 장쭤린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쥔성을 봉천독군에 임명했다. 대총통 쉬스창 명의의 임명장이 도착하자 우쥔성의 부하들은 기뻐 날뛰며 소하연에 있는 우쥔성의 공관에 찾아와 그의 승진을 축하했지만 우쥔성은 비서를 시켜 쉬스창에게 임명 거절을 알리는 전보를 치게 했고 참모장 응선일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봉천독군에 추대하려 하자 응선일의 말만 듣고 정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전보를 친 비서를 크게 욕하며 두들겨 패서 쫓아내버렸고 응선일은 백주대낮에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부관 진진지와 경호원 두명만 데리고 산해관으로 가서 장쭤린을 예방, 싸늘하게 자신을 맞이하며 인수인계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는 장쭤린에게 자신이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다고 피력하였고 이어 장쭤린을 동삼성 보안총사령관에 추대, 동삼성과 중앙의 단절을 선포했다.

1924년 9월, 강절전쟁을 계기로 직예군벌 봉천군벌의 2차 접전인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봉군 육군 5군군장에 임명, 2차 직봉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했다. 1925년, 신임 강소독판 양위팅, 안휘독판 장덩쉬안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은 쑨촨팡이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취임, 봉천군벌 토벌을 선포하면서 손봉전쟁이 일어났는데 전횡으로 민심을 잃었던 양위팅과 장덩쉬안을 삽시간에 무너져 북방으로 도주했다. 이에 우쥔성은 6방면군군단장에 임명되어 직계의 북상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다. 그해 궈쑹링 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진압에 참여했고 헤이룽장성에서 데려온 기병부대를 지휘하여 궈쑹링의 후방 보급기지를 불태워버리고 궈쑹링 격파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반봉사건 진압 이후 양위팅 등과 함께 반란에 참여한 여단장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주장했으나 장쭤샹의 반대로 온건한 대응이 결정되었다. 장쭤린은 반봉사건 진압 이후 동삼성의 대권을 우쥔성에게 넘겨주겠다는 하야 쇼를 벌였으나 우쥔성은 자신은 하루도 맡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어 장쭤린이 장쉐량이 궈쑹링과 결탁했으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 역시 만류하여 철회시켰다.

2.3. 국민혁명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보경안민을 주장하며 개입에 반대했다. 하지만 우페이푸, 쑨촨팡이 차례로 몰락하고 국민당이 장강 이남을 지배하게 되자 쑨촨팡 지원에 동의하게 되고 그해 11월 29일 장쭤린을 안국군 총사령관에 추대했다. 국민당이 저장, 장쑤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허난, 산둥 성경에 이르자 국민당에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면서 만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할 것을 주장했으나 쑨촨팡, 장쭝창, 저옥박 등 남방이 기반인 군벌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6월 16일, 쑨촨팡, 장쭝창과 함께 장쭤린을 대원수로 추대하였고 안국군 6군단장에 임명되어 나머지 군단장들과 의형제 결의를 맺었다.

2.4. 죽음

허나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장제스가 영도하는 국민혁명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1928년 6월 2일,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퇴각길에 올랐다. 우쥔성은 유관에서 봉천까지의 안전을 책임졌고 6월 3일, 장쭤린이 산해관에 도착하자 장쭤린을 맞이하기 위해 봉천에서 산해관으로 달려와 창인화이(상음괴) 등과 함께 열차에 탑승하여 장쭤린이 탄 10번째 칸에 올라타 장쭤린의 말동무 노릇을 했다. 봉천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던 6월 4일 새벽에는 장쭤린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장쭤린에게 날씨가 추우니까 옷을 더 입을 것을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5시 23분,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 등 관동군 강경파가 매설한 폭탄이 터지면서 기차가 통째로 날아갔다. 바로 황고둔 사건이었다. 장쭤린이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사망했으며 우쥔성은 쇳조각에 머리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즉사했다. 동삼성 보안총사령부는 혼란을 숨기기 위해 장쭤린과 우쥔성 모두 경상을 입고 치료 중이라는 거짓 보고를 내놓았으나 장쉐량이 후임 보안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봉천의 대권이 안정되자 마침내 그의 죽음을 공표하였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지난시 리청구(歷城區). [2]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 황구구(皇姑區). [3]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시 창투현(昌圖縣). [4] 이후 죽을 때인 1928년 6월까지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