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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사산 제국기에 세워젼 1944년 보수된 성 마리아 성당
1278년 세워져 18-19세기 보수된 금요 모스크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ارومیه 우르미아 | Urmia |
||
지역 | 서아제르바이잔주 | |
인구 | 736,224명 (2016년) | |
주 인구 | 3,265,219명 (2016년) | |
해발고도 | 1,332m |
1184년 세워진 세흐 곤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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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ارومیه
시리아어 ܐܘܪܡܝܐ
아르메니아어 Ուրմիա
쿠르드어 ورمێ
영어 Urmia
1. 개요
이란 서북부 서아제르바이잔 주의 주도. 코이에서 남쪽으로 80km, 타브리즈에서 서쪽으로 9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80만명으로, 이란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다. 시가지는 남, 서, 북쪽에서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우르미아 호까지 10여 km 가량 평원이 펼쳐져 있다. 지명은 고대 아람어로 '도시'를 뜻하는 우르와 '물'을 뜻하는 미아가 합쳐진 것으로, '물의 도시'란 의미이다. 중세 시기까지 중소 도시였지만 17-19세기 아프샤르 부족의 우르미아 칸국이 세워지며 발전하기 시작했고, 1795년 아가 모하마드 칸이 이 곳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엽 우르미아는 주민의 40%가 아시리아 / 아르메니아 계일 정도로 기독교세가 매우 강한 도시였고, 따라서 19세기 서방 선교사들의 이란 지역 첫 선교 대상지였다.다만 1차 대전 중인 1915년과 1918년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여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한 결과 현재는 약 5천 명만이 남아있다. 유대인 역시 다수 거주했으나 1940년대 페르시아 침공과 마하바드 공화국 설립 등의 혼란기에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현 주민의 대다수는 아제리인이고 그 외에 페르시아인, 쿠르드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다. 다양한 민족과 함께 이란의 주요 교육 도시 중 하나로, 시내에는 우르미아 대학교와 말레크 아슈타르 대학교 및 이슬람 아자드 대학교의 우르미아 캠퍼스 등 16개의 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고지대에 있어서 기후는 여름에도 35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는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등 제법 서늘한 편이다. 주력 스포츠는 배구로, 2010년 아시아 남자 배구 대회를 개최하였다.
오루미예(Orumiyeh)라고도 하고, 팔라비 왕조 시대에는 태조 레자 샤 팔라비의 이름을 따서 '레자이예(Rezaiyeh, رضائیه)'라고 불렸다.[1] 하지만 근처 호수 이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르미아 호이다. 북쪽 5km 지점에는 우르미아 국제 공항이 자리한다.
2. 역사
문화적으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쿠르드, 아시리아 문화의 접경지이고 자지라 평원, 아나톨리아 고원, 이란 고원을 이어주는 교통로 상에 위치했기에 먼 옛날부터 도시가 있었다.16-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가 사파비 왕조를 공격할 때에 타브리즈와 함께 종종 점령했으나 결국 이란 수중으로 남았다.
3. 갤러리
노루즈 행사의 전야제 격인 차하르샨베 수리 (불의 축제) 때의 우르미아
3.1. 자메 모스크
파일:이란 우르미아 8.jpg3.2. 세흐 곤바드
[1]
'레자'라는 이름은 궁극적으로는
12이맘파의 제8대
이맘
알리 이븐 무사 알 리다의 통칭 '이맘 레자'에서 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