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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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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명칭4. 성격과 구성5. 한국사에서의 왜구
5.1. 삼국 시대5.2. 남북국시대5.3. 고려 시대5.4. 조선 시대
6. 중국사에서의 왜구7. 왜구와 서양의 충돌8. 평가9. 기타10. 인물
10.1. 14세기10.2. 16세기
11.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왜구()는 전근대에 활동했던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바다를 따라 가까운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와 관계를 맺고 사략 해적이나 일종의 수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잉글랜드 사략선, 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적 등이 있다.

2. 원인

고대 일본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1] 도래인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폭발적이었기 때문에[2] 이를 해결할 약탈 경제가 발달했다는 설이 있다. 다른 가설로는 지진해일로 인해 경제기반이 무너지자 해안가에 거주하던 이들이 약탈에 뛰어들면서 왜구가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3]

고려 말 왜구는 일본의 남조 정부가 북조와의 전쟁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침략하면서 발생하였고 남조가 멸망하는 1392년 이후로 격감하게 된다. #

3. 명칭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은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의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10년(1223년)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어로는 와코(わこう)라고 하여, 일본에서 도적의 상징으로 경멸조로 불렀다.

4. 성격과 구성

賊掠得二三歲女兒,剃髮剖腹淨洗,兼奠米酒祭天。分左右,張樂羅拜。祭畢,掬分其米而食,飮酒三鍾,焚其兒,槍柄忽折。

왜적은 두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납치해다가 머리를 삭발시키고 배를 갈라 물에 깨끗이 씻은 후 쌀, 술과 함께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좌우편으로 나뉘어 서서 풍악을 울리고 절을 하였다. 제사가 끝난 후에 그 쌀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나눠 먹고 술을 석 잔씩 마신 다음 그 아이를 불에 태우니, 창자루가 꺾어졌다.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변안열전
절강에 상륙한 일단의 해적들은 젖먹이 아이를 긴 장대 끝에 매달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어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를 잡으면 그 태아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내기를 걸고 즉석에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술을 실컷 마시게 하며 흥겨워했다. 그들의 술자리에는 임신부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

왜구라는 이름대로 초창기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후기 왜구들 중에는 왕직 등 다수가 명나라 사람이었고, 조선인이나 동남아 계통,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도 섞여 있었다. 실록에는 사화동이라는 조선인이 왜구에 투항하여 순왜로 활동한 기록이 나오고, 중국 기록인 명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진짜 왜인은 열 중 셋 정도였고, 그에 따르는 자(중국인)가 일곱이었다.
大抵真倭十之三,從倭者十之七。
명사 일본전

왜구에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섞인 기간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오랜 기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 중 한시적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런 후기의 사례를 과장하여 무리한 주장을 했다.[4]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란 주장을 처음 들고 나온 인물은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이다.[5] 그는 저서 ‘일선관계사 연구(1966)’에서 "고려사에 왜구의 소행으로 기록된 것 중 상당수는 왜구를 가장한 고려인 하층민의 반란이었으며, 일본인들이었다 하더라도 대마도나 규슈 해안가 일대 민간인들의 소행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30년 가까이 왜구를 연구해온 이영 방송통신대 일본학 교수에 따르면, 위와 같은 나카무라의 사관은 예단과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로 인해 왜곡된 왜구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왜구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규슈 일대 중소, 지방 다이묘의 지휘를 받고 움직인 일종의 군사, 사략 집단이었으며, 고려인이나 조선인 또는 민간인이 왜구로 기록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나카무라는 왜구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고려사와 조선사를 교묘하게 취사 선택하여 역사에 기록된 왜구의 상당수가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이라는 학설을 유포했다. 그는 이를 지칭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가왜(假倭)’라는 용어를 썼다. # 실록 등의 가왜는 왜구인 척하며 약탈하는 조선인이었는데 나카무라는 가왜의 사례를 이용해 왜구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로 비약시킨 것이다. 이는 야쿠자인 척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인과 야쿠자에 소속돼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인만큼 다른 것이다.

이영 교수는 저서 <왜구와 고려·일본관계사>,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와 다수 논문[6]을 통해 왜구의 다수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이영의 학설에 따르면 전후기 왜구는 비공인 해적인 파이러츠(pirates)가 아니라 군량과 물자를 약탈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영주의 지원을 받은 사략 해적인 코르세어즈(corsairs)였다.

근거로 고려 말 왜구가 급증한 시기가 1350년 이후인데 일본의 남북조 시대(1333~1392) 중 남조와 북조 간 투쟁이 극심해지는 시점과 일치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1392년 남조의 몰락 직후 왜구가 격감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왜구들은 무려 500척의 함대에 노획한 말만 1600필 이상이었던 기병을 포함한 7000명의 군대까지 대동한 이들을 민간 무력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 #

또한 16세기 활동한 명나라 출신 왕직은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비호를 받았고, 서해는 사쓰마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의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일본의 남북조시대 때 중앙정부가 사실상 붕괴되자, 덴노가 있던 교토까지 와서 대놓고 노략질을 했다. 특히 왜구는 중앙정부의 붕괴로 인해 통제가 안 되는 지방군벌들이 날뛰는 것이기에 한반도와 중국대륙, 일본 열도를 가리지 않고 노략질을 했다. 이들은 주로 이키 섬, 쓰시마 섬, 키타큐슈, 세토내해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세토 내해는 아예 이들이 제해권을 장악해버려서 일반 무역선은 물론이고 타지방 유력 다이묘의 배나 조정, 막부의 배마저도 통행세를 내고 지나가야 했다.

일본도 수군이 고되기에 일반 서민들은 징집령에 대하여 죽어라 거부했던 게 많았다. 할 수 없이,일본 조정이나 각 영주들도 왜구들을 잡아다가 수군으로 복무하면 살려주는 것도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패한 수군 장수 쿠리 요시히데도 왜구 두령이었으나, 오다 노부나가가 생포하여 수군 장수로 등용한 경우였다.

다이묘들이 해적질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와 전국 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전쟁을 위한 군량미, 자금,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죄 없는 시민을 납치해와서 노예로 쓰거나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마즈, 쇼니 가문으로, 시마즈 가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의 진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류큐 왕국( 오키나와)을 침략, 약탈하여 결국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점유한다. 그리고 쇼니 가문은 한반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다.

5. 한국사에서의 왜구

5.1. 삼국 시대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신라 혁거세 거서간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0년이다(!) 서기 11년 남해 차차웅 때에도 왜구의 침입 기록이 있는 등 고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 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하도 시달리다보니 유례 이사금 때는 진지하게 왜국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일본측 기록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결국 왜구의 침략이 절정에 달한 내물 마립간 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는 그 대가로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를 떨쳐낼 때까지 몇십 년 동안 고구려의 반속국신세로 떨어지기도 했다.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은 동안에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이고 백제와 왜국이 동맹인데도 왜구는 꾸준히 신라 해안을 노략질했다. 일본서기 기록에는 600년 진평왕 때 신라공격 기록이 있는데 이는 향가 혜성가에서도 알 수 있다.[7]
초대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 -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2대 남해 차차웅 11년(14년) -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4대 탈해 이사금 17년(73년) -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6대 지마 이사금 10년(121년) - 여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0대 내해 이사금 13년(205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1대 조분 이사금 3년(232년) -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11대 조분 이사금 4년(233년) -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14대 유례 이사금 4년(287년) -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14대 유례 이사금 9년(292년) - 여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14대 유례 이사금 11년(294년) -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다.
16대 흘해 이사금 37년(346년) -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9년(364년) - 여름 4월,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24년(379년) -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17대 내물 마립간 28년(383년) - 여름 4월,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17대 내물 마립간 38년(393년) -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18대 실성 마립간 4년(405년) - 여름 4월,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18대 실성 마립간 6년(407년) -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18대 실성 마립간 14년(415년) -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19대 눌지 마립간 15년(431년) - 여름 4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19대 눌지 마립간 24년(440년) -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19대 눌지 마립간 28년(444년) - 왜병이 열흘간 금성을 에워쌓다가 양식이 다하자 물러났다. 왕은 신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싸워 군사와 장수의 반을 잃었다. 말을 버린 눌지왕이 포위되었을 때 홀연히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왜병들은 신령이 돕는다고 생각해 그냥 돌아났다.
20대 자비 마립간 2년(459년) -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군사를 보내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였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20대 자비 마립간 5년(462년) -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20대 자비 마립간 6년(463년) - 봄 2월,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
20대 자비 마립간 19년(467년) - 여름 6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들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21대 소지 마립간 4년(482년) -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8년(486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19년(497년) -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21대 소지 마립간 22년(500년) -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번역문

위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며 삼국사기가 아닌 기록에도 수없이 많은 왜구 기록이 등장한다.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 295년)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 동사강목 제 2상(안정복)

유례이사금 때 왜 정벌을 논하는 모습인데, 이때 신라는 진짜 원정을 단행한다.
일본 응신천황 22년(291년?), 신라 군사가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阪:오사카)과의 거리가 백 리였으므로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달라고 애걸하여 백마를 잡아서 맹세하였다. 호원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으나[8] 겨우 일기도(一岐島:이키 섬)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하였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 여암고(신경준)

이 원정에 대한 기록이 일본에서도 여럿 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 없다. 단지 그 『연대기』를 보면 왜왕 응신 22년, 신라 군사가 명석포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오사카에서 겨우 1백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이 이것을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을 애걸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1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이다. 그러나 동사(東史:한국사)에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해사록(김세렴)
(민달천황) 6년 신축에 경당으로 연호를 고치고 3년 만인 계묘(583년)에 신라군이 서쪽 변방으로 쳐들어 왔다. - 해동제국기(신숙주)
링크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일본측의 역사서인 '연대기(年代記)'[9] 일본 국학의 시조격인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저술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10] 그리고 또 다른 사서인 해동기(海東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는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大阪)까지 공격 하였으며, 그 이후 진평왕 시절에도 일본의 서쪽 변방을 공격하였고 또한 태종 무열왕 시절에는 신라가 일본의 대마도를 공격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남북국시대인 성덕왕 시절에 또 다시 현재의 미야자키 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신라가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 하였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에서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진평왕 태종 무열왕 그리고 남북국시대 성덕왕의 일본 공격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 기록상 서로 차이가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이 시기의 왜구는 흔히 생각하는 해적이 아니라 왜 조정에서 파견한 반정규군이었다. 14~16세기 왜구의 성격도 정규군에 가까운 성격과 규모로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시기 일본은 군소 국가들이 난립했던 시대[11]였고 이 중에서는 백제와 친한 국가, 가야와 친한 국가, 신라와 친한 국가가 다 따로 있었다. 그 중에 왜구가 신라를 침공한 경우는 매우 빈번한데 반해 가야나 백제를 침공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변한 때부터 이들과 교류하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영락 10년(400년) - 경자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보내 신라를 돕도록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로 가득 차 있었다.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고 (...)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즉각 귀순하여 복속하였다.
- 광개토대왕비문
내물왕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고 왜와 가야를 격파하는 내용인데 나오는 '뒤를 그히 쫓아 임나가라[12]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즉각 귀순하여 복속하였다.'에서 보이듯이 왜구는 신라를 침공하다가 위급하면 가야로 퇴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금관가야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삼국통일전쟁 당시 동맹이였던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적도 많았다. 삼국통일전쟁 때는 백제가 망하자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부어 1000여 척 전선에 수만명의 대군을 보내기도 했지만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되었다.

한편 신라만큼 아니었지만 가야도 왜구에 의한 피해를 입을 때도 있었다. 물론 가야는 신라와 달리 왜와 그래도 우호적이었기에 왜구로부터 피해를 받는 일이 적었다.

5.2. 남북국시대

나당전쟁이 끝난 681년 신라 문무대왕은 죽을 때 자신을 화장해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에 따라 세운 무덤이 문무대왕릉이다. 성덕왕 21년(722년) 10월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모벌군[13]에 관문성을 쌓았다. 이 관문성은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 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여졌다.
“왜의 여군(女君) 원정(元正) 6년 경신(庚申)(서기 720년, 성덕왕 19년)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쳤다.”하였다.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성덕왕 21년에도 신라가 왜 원정을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신라가 통일하기 전 경상도의 소국일 때는 그렇게 뻔질나게 쳐들어왔지만 훨씬 커져버린 통일신라의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침략이 줄었다. 신라가 경주 일대 방어망을 꾸준히 강화했기도 하고, 이 때쯤 되면 일본도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연안의 해적을 관리할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있었지만 발해가 협조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었다. 오히려 신라 말 혼란기에는 신라구가 규슈를 탈탈 털었다.

5.3. 고려 시대

14~15세기에 쓰시마와 이키, 마쯔우라 및 큐슈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들이다. 이들은 사무라이 세력이었으나 전란으로 근거지를 잃고 결국 인근의 유력한 다이묘들에게 사략선으로나마 몸을 의탁, 남조 정부가 북조와의 전쟁에서 군량을 동원하기 위해 1350년 사략함대를 파견하기 시작함으로써 대대적인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일어났다.[14]

이 당시의 왜구는 흔히 생각되는 이미지와 같이 단순히 무법스런 해적 집단과는 다르게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였고, 이에 따라서 당시 고려의 정치 상황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가령 기존에는 공민왕과 같은 경우 겉으로는 소위 "개혁 군주"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나라 꼬라지는 해적들한테나 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기도 했으나,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에 가까운 것이 밝혀진 현재 와서는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생겼다. 때문에 이는 당시 고려가 이웃국가인 일본의 정치적 혼란에 휘말린 것이며 이는 국왕 개인이 딱히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왜구들이 한반도에 침입했다는 사실보다는, 결국에는 왜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더 높은 비중을 두어 평가를 재고할 수 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 111부 동북아시아의 적, 왜구의 등장
왜구들의 활동 영역은 대개 한국과 중국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본토도 그들의 활동 영역 중 하나였다.[15] 사극 등 현대 매체들의 경우 왜구들을 야만인 집단인양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올바른 묘사로 보기 힘들며 이들은 사실상 당시 일본 열도에 퍼져 있던 다이묘들의 사략함대로 보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 이들은 막부에 소속된 정규군인 수군에게까지 통행세를 받아낼 정도였으니 규슈에서 수입한 조선이나 명나라의 물건들이 교토를 넘어 동쪽으로 갈수록 물류비가 더해져 값이 몇 배나 뛰었다. 또한 일본과 무역하던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상선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동남아에 진출하기도 했다.[16]

한·중 양국의 역대 왕조가 외교 사절을 보내서 왜구의 약탈 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수도 없이 일본의 쇼군에게 요구했고 일본의 쇼군도 이 해적 떼를 토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문제는 당시 일본에서 막부가 제대로 기능했던 역사 자체가 매우 짧았고,[17] 애당초 막부라는 것 자체가 봉건제의 토대에 있는 마당에 이러한 요구가 완전히 제대로 지켜지긴 힘들었다.[18]

하지만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막부가 완전히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왜구가 최악으로 극심했던 1350~80년대 즈음은 그래도 무로마치 막부가 어느 정도는 기능하고 있었을 때였고, 막부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큐슈 및 쓰시마, 이키를 비롯한 섬지대 세력가들은 막부 입장에서도 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능하면 막부는 이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진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막부 진압군 혹은 막부가 후원하는 외래 호족에게 털린 이 일대 호족들은 더욱 더 열심히 고려를 털긴 했지만. 관련 글

고려-조선과 명나라는 현대 한국인의 생각보다 정세를 꽤 정확히 파악했는데, 일본 본토 세력을 일반적인 '왜'와는 구별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고, 조선은 이들을 주로 '삼도'란 명칭으로 통틀어 언급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런 왜구 세력들을 수군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마국 일대의 해적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수군 세력으로 활동한 구키 요시타카 세토내해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해적으로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리 가문 측 수군 세력으로 활동한 무라카미 타케요시, 구루지마 미치유키,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정반대로 왜구 토벌을 벌여 이름을 떨친 일본 수군 장수들도 있었지만.
토크멘터리 전쟁사 - 112부 왜구를 막자, 고려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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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였는데, 당대 한반도 해안 지역은 동서남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 대상이었다. 조운선을 습격해 조세를 털어가고, 육지에 상륙해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하며 노예로 잡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해안가 근처가 아닌 충주, 청주, 단양같은 완전히 내륙에 있는 곳도 왜구에게 털린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약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관료들의 녹봉도 못줬을 정도. 그래서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는 대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해적을 넘어서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군대 수준이었다. 왜구의 수장인 아기발도 항목을 보면 전신갑주로 무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무장을 갖출 정도면 사실상 정규군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19] 그러다보니 왜구를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왜구한테 고려군이 역으로 참패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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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 극심한 왜구의 활동은 사실상 국력이 침체된 고려의 해군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왜구가 5백여 척을 몰고와 고려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최무선이 화포를 자체 개발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함포 테크를 완성하여 진포 대첩으로 왜선 500여 척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원래 고려 시대에는 수군 조직으로 선병도부서라는 관청이 있었다. 동북 양계에 2개씩, 그리고 전라, 경상, 양광도를 아울러 관장한 동남해도부서로 나눠 해역경비를 맡았다. 하지만 무신정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이름만 남아 사실상 제대로 된 수군이 사라지게 되는데 얼마나 심각한 정도였는지 충정왕 당시 왜구가 강화도와 한강 하류를 점거하고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싹쓸이했을 때 130여척의 배를 끌고 왔는데 당시 고려군은 100여척의 함선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함선의 규모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 고려로 넘어올 정도의 배라면 정규군의 배와 그렇게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생각해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의 왜구를 겪으면서 고려도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1358년에 이번에는 400척의 왜구가 몰려와 각산이라는 곳에 정박해있는 고려의 함선 300척을 불태우고 가버리는 바람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왜구는 육지에서 막자는 육방론같은 이상한 전술이 나오는 단계까지 가버렸을 정도였다. 만약 고려에 제대로 된 수군이 있었다면 괜히 육지까지 올라와서 왜구가 설치는 걸 보느니 처음부터 바다에서 때려잡았을 것이다.

최영이 경상도부터 충청도까지의 전 해안선을 아우를 정도의 해군을 만들어야한다고 하면서 2,000여 척의 수군 증강 계획을 세웠으나, 무리한 인력 징발과 당시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기도 했고 우선 수군으로 왜구를 이긴 전력이 없다보니 배를 타면 죽는다는 인식이 있었던 터라 백성들의 원성을 사 실패해 왜구가 강화도까지 들어와서 설치는데도 제대로 몰아내질 못했다. 해전에서 고려가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상황을 뒤집은 것이 바로 전술한 최무선의 화포 테크에 이은 진포해전이고, 그 다음이 이희와 정지의 수군 정예화 계획에 힘입은 관음포 전투.[20] 이 시점에 이르러서 고려-조선의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후 박위의 1차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21]

자세한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조.

5.4. 조선 시대

조선 건국에 이르러서도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건국 시조인 이성계부터가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들을 크게 소탕함으로서 입지를 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왜구들 역시 고려 때만큼이나 골칫거리였다. 또한 아유타야와 마자파힛의 화교 사신 진언상이 일대기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조선,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에 큰 방해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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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의 지휘 아래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었고, 1419년 세종 초에 상왕 태종과 이종무의 지휘 하에 다시 대마도 정벌이 이뤄져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공격은 제법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간 왜구들도 몰살당한데다 일본 내부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적인 왜구들을 토벌하며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약 50여년 간 왜구의 활동은 잠잠해진다.

그러나 세조 말 즈음 오닌의 난을 계기로 일본의 최대 혼란기인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 열도 전역에 다이묘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자 당연히 왜구들도 다시 준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중종 때 삼포왜란을 시작으로 사량진 왜변 명종 을묘년에는 수천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선조 초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왜구의 준동도 서서히 줄어드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왜구가 아니라 대규모 정규군이 조선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일본도 안정화되어 왜구는 사라지게 된다.

6. 중국사에서의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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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세기경 왜구의 활동과 침입 지역
후기 왜구라 불리는 16세기 왜구는 조선보다는 주로 중국 해안에 침입했다. 짙은 색은 산둥반도, 한반도가 포함된 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고, 연한 색은 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다. 전기는 일본의 남북조시대, 후기는 센고쿠시대의 혼란기에 영향을 받았고, 보통 혼란기가 진정되면 왜구도 함께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중국사에서의 왜구는 크게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의 2시기로 나뉘어진다. 전기 왜구의 경우 명나라 초기 원나라의 멸망-명나라의 등장 사이의 혼란과 공백을 틈타서 왜구가 중국의 동해안을 대대적으로 약탈하며 사람들을 살육하고 노예로 잡아갔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왜구는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건국 초부터 왜구에 대한 토벌전을 벌여야 했고, 산동에서 수만 단위의 왜구를 토벌했다. 결국 1420년 명나라 수군이 대련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정리된다.

이 시기 명나라에 침입한 왜구에 대해서는 이들이 규슈의 대영주인 쇼니 가문[22] 사략함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아예 이 시기의 다이묘들 중 특정인을 주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강력한 군장비와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사실상 하나의 군대로 보아도 틀리다 할 수 없는 규모였다. 심지어 배를 통해 말을 수송해서, 기병대까지 운용한 사례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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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왜구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16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약탈이 본격적으로 벌어졌으며 이때부터 약 20-30년 동안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다. 이 때가 가정제 시기였기 때문에 '가정왜구'(嘉靖倭寇)라고도 부른다. 2017년작 중국 영화 탕구풍운(蕩寇風雲, 한국 개봉명은 풍운대전)이 이 가정왜구를 소재로 한 영화. 여러 사서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후기 왜구의 규모는 오히려 전기 왜구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며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해도 그 이하로는 볼 수 없었다.[23]

후기 왜구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통제력을 잃고 지방의 다이묘들이 독립한 전국시대가 되자 감합무역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시작되었다. 감합무역이란 조공과는 달리 외교 관계 없이 오직 무역만 허가되는 형태로써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이 전국시대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명나라 황제의 인장이 찍힌 가짜 서류가 난무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감합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했고 밀무역이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사이를 밀무역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으나 중국 해안의 방어를 뚫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장을 하게 되었고 결국 밀무역 대신 일방적인 약탈을 가하게 되는게 후기 왜구의 등장이다. 후기 왜구는 16세기 말 명나라 군대의 적극적 대응으로 소탕이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16세기의 후기 왜구는 쓰시마와 이키를 근거지로 하였으나 일부 일본학자는 구성원 중에서 7할이 중국인이고 이들이 가왜라는 주장을 하였다. # 이 주장에는 오늘날 많은 비판이 있다. 왜구왕으로 불린 왕직이 대표적인 명나라 출신인데 왕직 또한 독자적 세력이 아니라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밑에서 비호를 받으며 활동한 해적이다.[24]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우리도 아는 명나라의 해금령 때문이다. 명나라의 해안 지방에서 거주하던 상인 집단이 자신들이 먹고 살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나 일본 등의 섬으로 이주하여 살 길을 찾았으나, 명나라가 해금령을 실시한 이상 상거래가 가능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무역루트인 명나라 항구를 이용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도자기나 비단 등을 목표로 약탈 및 해적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1557년에 명나라군이 토벌하러 왔을때 저항하다 패하고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왕직의 죽음으로 왜구는 내부 분열을 맞게 된다.

덧붙여서 일본 사학계에서 가왜(假倭)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는 것은 이 가왜를 과대포장해서 왜구와 일본과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다. 실제로 이런 주장 즉 왜구들은 주로 고려인,조선인,중국인이지 일본인이 아닌 가왜(假倭)라는 주장은 일제시대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해 황국사관을 전파하던 '나카무라 히데다카'라는 일본인 사학자가 최초로 한 주장이기도 하다. 남조 정부가 왜구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매우 큰 흠결이기에 왜구는 다민족 연합체로서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으로 이끌어내려는 의도라는 것. 남경을 공격한 왜구들도 있는데, 이들은 약탈보다 전투에만 관심[25]을 보이는 등 명실록에서도 평민인 중국인처럼 보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전체 병력은 수천 명 규모[26]이긴 했으나 소수로도 덤벼서 명의 관군과 소수 민족 병력을 학살하기도 했다.[27]

명나라 시기의 왜구는 명나라 말기의 명장인 총병 척계광의 활약에 의해 1567년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탕된 것으로 간주된다. 척계광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병법서인 " 기효신서"를 집필하는데,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원앙진 당파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을 돕기 위해 파병 나온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군에 전파했고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기본적인 군사 교본이 되었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아[28]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일환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29] 그 결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7. 왜구와 서양의 충돌

15세기 이후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30] 이들은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가를 노략질하곤 했으며 이러한 왜구들을 가왜(假倭)라고 했다. 어차피 동북아에서 해적=왜구였으니 이들을 왜구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서양 세력의 진출 뒤에는 동남아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일부 서양인들도 왜구로 활동했다고 한다. 동남아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선이나 심지어 영국 해적(!)을 털려다가 역관광 당하기도 했다. 1602년 영국해적 vs 왜구의 싸움. 승자는?

왜구는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상선을 자주 공격했으나 정규군도 아닌 선원들에게 번번히 역관광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60명의 스페인 병사와 1,000명의 왜구가 싸워 왜구가 패한 카가얀 전투[31]와 같은 사례도 있을 지경이다. 카가얀 전투-유럽 군대와 사무라이 최초의 격돌, 의외로 서로 맞다이 떠본 사이
또 중국 해적 리마홍과 손잡고 마닐라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한 마닐라 전투도 있다. 왜구는 동아시아 정규군과 싸워 높은 교환비로 이길 정도로 위협적이었지만[32] 유럽의 화력과 기술력 앞에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33] 이는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들이 명나라 정벌 계획을 펠리페 2세에게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왜구 따위에게 중국이 초토화되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고 중국인들의 배를 임검해보니 무장수준이나 화약 무기의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

또한 1610년에 있었던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Nossa Senhora da Graca) 사건에서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 막부측에 매우 큰 피해를 입히고 자폭했다. 이 때 막부측이 동원한 병력 수는 무려 1,200명이었는데도 제대로 승기를 잡지 못해서[34] 백병전도 제대로 못해보고 계속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당하던 중 일본 대형선에 설치된 탑에서 발사한 총탄에 한 선원이 들고 있던 수류탄이 깨지면서 배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 뒤에야 전투가 겨우 종료되었다고 한다. #

8. 평가

왜구란 조선 반도 중국 대륙 등지에 배로 침략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가끔 역사 교과서를 보면 출병했다느니 하고 쓰여있긴 합니다만, 그건 해적이라고요. 약탈을 하러 간 거라 이겁니다. 나쁜 녀석들이에요.
원피스의 작가 - 오다 에이이치로
왜구와 관련해서 유명한 책으로 무라이 쇼스케의 "중세 왜인의 세계"가 번역되어 있는데, 해양사적 관점에서 왜구를 다루고 있다. 현재 왜구 개념의 큰 틀을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방송통신대 이영 교수[35]가 펴낸 <왜구, 잊힌 전쟁>, <팍스 몽골리카의 동요와 고려 말 왜구>,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등의 서적이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왜구를 "동양의 바이킹"으로 평하기도 한다. 바이킹과 왜구는 일단 본질적으로 해적이었고, 당시 해당 해역에서 가장 악명 높았다는 것이나, 활동 범위가 매우 국제적이라는 것 등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서양의 일부 와패니즈들 역시 왜구를 동양의 바이킹으로 치켜세우며(?) 왜구에 대해 동양의 바다를 평정한 사나이들이라는 식의 로망을 가지기도 한다.[36]

그러나 바이킹은 왜구와는 달리 특정 민족 전체를 지칭한다는 것과 약탈 이외에 교역도 많이 했고 상륙한 지역에 아예 나라들을 세워 눌러앉기도 하는 등 여러 모로 차이점도 있다. 사실 활동범위도 신대륙을 발견한 바이킹이 훨씬 더 넓다. 그에 비하면 왜구는 비록 기본바탕은 일본인이었으나 중국인을 포함한 여러 부류들이 섞이기도 했으며,[37] 그들이 자체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정치체를 건설하려 하지도 않았고 노략질 말고는 역사적으로 이룩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38] 오히려 동양의 바이킹에 걸맞은 집단은 퉁구스계인 여진족들과 몽골계, 튀르크 제족 등 아시아 대륙의 유목민족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바이킹의 활동 시기는 원래 시대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던 고대시대였던데다가 바이킹이 근거지에서 튀어나와 노략질을 한 이유도 근거지인 북유럽이 그 시기에는 정말 자원도 식량도 없는 경치만 아름다운 버려진 땅이었기 때문이라 환경적 압력이 있었고 여러 요인으로 이것이 제거되자 지금의 북유럽 이미지처럼 변화되었지만 왜구들은 거의 근대 들어서도 저런 짓거리를 하고 다녔으며 이미 본토에 중앙정부가 있었음에도 통제하지 않고 저런 짓을 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9. 기타

10. 인물

10.1. 14세기

10.2. 16세기

11. 같이 보기



[1] 간토와 오사카 평야 등 일본 열도의 평야 대부분이 선사시대에는 바다였고 고대에는 해수면이 낮아지고 퇴적으로 생성된 뻘과 염습지였다. 그래서 농경이 불가능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으나 자연퇴적과 간척이 진행되면서 지금의 평지로 바뀐 것이다. 아스카 시대 때부터 오사카 평야가 에도시대 때부터 간토 평야가 만들어진다. 참고로 토카치 평야는 야산과 숲이 울창한 지역이었지만 일제시대에 개척되어 면양을 얻기 위한 목축업이 행해졌으며 패망 이후 일본령 조선의 호남평야를 잃게 되자 농업을 위한 개척을 하여 평야크기가 2~3배 가량 늘어났고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 고대 일본 인구는 죠몬 말기 약 7만5000명에서 야요이 시기에는 60만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자연적인 인구증가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3]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지진이 잦은 해안국가들은 옛부터 해적이 성행했고,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소말리아에 지진해일이 강타하자 많은 주민들이 해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수렵채집민족이나 유목민족들은 조드 같은 혹한으로 인해 가축들이 몰살하면서 정주민족을 공격하는 약탈경제가 발달했다. [4]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2기) <14~15세기 동아시아의 해역세계와 일한관계 - 사에키 고지(佐伯弘次) #> <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 세계와 한일관계 - 왜구의 구성문제 포함 - 손승환 #> [5] 나카무라는 1926년 스물넷의 나이에 일본 도쿄제국대(일본사 전공)를 졸업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으로 촉탁이 됐다. 이후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무려 19년간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에서 이런 경력을 발판 삼아 일본으로 돌아와 나고야대학과 덴리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6] 우왕 2(1376)년 10월, 왜구 최초의 기병(騎兵) 동원에 관한 고찰 - 임파현 전투(9월)와 행안산 전투(10월)의 비교 고찰을 통하여 # [7] , 혜성가의 진평왕대 왜구 침공도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견해(강고운, 《향가신해독연구》, 한국문화사, 2004)와 혜성과 함께 연상된 상징적 부연으로 보는 견해(이승남, 「혜성가의 배경적 의미와 문학적 형상화」, 《국어국문학》 123, 1999)가 둘 다 있다. [8] 원나라의 일본원정 [9] ‘임진왜란’ 이후 ‘제2회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 했었다. [10] 1688년(겐로쿠 원년)에, 에도시대의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11] 적어도 일본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면 서기 600년대까지는 가야한다. 서기500년 이전만해도 일본열도는 통일국가가없는 군소국가들이 난립한 시대였다. [12] 금관가야 [13] 현 지명 경주시 외동읍. [14] 1221년 조큐의 난에서 막부군에 참패한 공가 무사들이 토지를 가마쿠라 막부에 몰수당한것 때문에 이때부터 서서히 세력이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5] 사실 도적들의 특성상 털어먹을 게 있다면 자국이든 외국이든 가리지 않는다. 도적들이 해외로 침범하는 경우는 자국의 경제가 파탄상태라 털어먹을게 없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왜구들이 한반도나 중국으로 침범할 당시 일본열도 내부는 이미 다이묘들간의 전쟁과 사방팔방 도적들이 활개치고 다녀 혼란에 빠지던 상황이었다. [16] 사실 굳이 왜구가 아니라도,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일본 역사에서 꽤나 유래가 깊다. [17] 사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와서야 막부의 영향력이 지방세력에까지 제대로 미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이내 혼노지의 변으로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과 대륙진출이라는 망상에 불타 무리해서 전쟁을 준비하느라 일본 본토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도 않은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망했다. 결정적으로, 신라의 사심관제도처럼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감시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참근교대(参勤交代)와 같은 제도가 에도시대에 와서야 나타났다. 즉,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시도가 에도시대 즈음 되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 일본의 봉건제는 중원 제국의 봉건제보다는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막부는 사실상 수많은 번국들을 대표하는 대표자에 불과했던 경우가 많았고, 쌍무적 계약관계의 형태로 맺어진 막부와 다이묘 사이는 중앙 정부가 강력하게 기능했던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서 그 관계가 느슨했다. 또한 막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19] 심지어 고려사를 보면, 고려를 침입한 왜구들 중에서는 무려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철기, 즉 중무장 기병 부대까지도 있었다! 물론 14세기 일본에서는 중무장 기병들이 많이 활동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무사들은 쇠사슬로 만든 마갑을 씌운 말에 올라타서 칼과 창을 쥐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백병전이 주특기였다. 출처 보병이 주력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과 달리 아직 기병이 건재했던 것이다. [20] 물론 2000척을 만들어 전군 수군화를 주창한 최영은 이 계획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21] 덤으로 왜구 수천명 포로를 상상 이상으로 잔인한 여진족에게 넘겨서 찢어발겨 죽여버렸다고 한다. [22] 대마도의 도주로 유명한 소씨는 이 당시에는 쇼니씨의 가신이기도 했다. [23] 사실 중국은 급기야 후기 왜구도 궤멸된 이후 시대인 청나라 시기에도 서태후 집권 이전까지는 계속 해적에 시달려왔고 이는 정일수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후술하듯 이는 근본적으로 해금령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었는데, 결국 전기 왜구의 횡포 때문에 선언한 해금령이지만 실제로는 이 해금령 때문에 해적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기만 한 것이다. 이는 오히려 중국이 서구 국가들의 강압에 의해 대대적 개항을 실시한 뒤에야 해결된다. 범죄 집단에 대한 풍선 효과의 전형적인 예시라는 점에서 현대 미국에서 있었던 마약과의 전쟁과 거의 판박이다. [24] 조선인 왜구 이야기 또한 이 가왜에 포함된다. 다만 이들은 왜구와 같이 움직였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해적이나 도적들이 왜구를 사칭하고 다닌 경우가 많다는 설이 있다. 특히 제주 출신 사학자들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 해안 도서에서, 특히 먹고 살기 어려워서 뭍으로 나가서 김 캐고 미역 팔던 두모악(豆毛岳)이나 포작인(鮑作人)으로 불린 사람들이 왜와 지리적 근접성으로 교류 좀 하고 일본 옷 좀 입고 다닌 것 뿐인데 일본에서 이들을 뭉뚱그려서 왜구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하며, 오히려 포작인들이 왜구들만 보면 사납게 공격해서 왜구들이 피해 다녔다는 주장도 있다.( 링크) [25] 이들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보이기는 하나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약탈이나 정복 및 현지인 징병도 거의 하지 않고 군인들만 죽이고 다녔기 때문에 점점 밀리게 되었다. [26] 물론 중간에 합류한 왜구일 수도 있다. [27] 명세종실록(明世宗实录)에 의하면, 명나라 군사들이 쏜 화살을 왜구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다 잡아내어(!) 명나라 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하다가 왜구들의 공격을 받아 궤멸당했다는 무협지 같은 이야기도 실려 있다(...) # [28] 태합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히데요시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남아 있었으며, 개중에는 히데요시의 세력에 반기를 드는 세력도 있었기에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일본 열도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29] 왜구가 한국과 중국만 털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국인 일본도 같이 털었다. 이들은 근본이 약탈이 목적인 해적들이고 중앙의 관병이 아니었다. 설사 지방세력의 사략선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정부군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제일 먼저 털리는것은 본국인 일본이었다. 그리고 특히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는 절정에 달해서 일본 내의 해상 무역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안 유지와 안정된 무역을 위해 막부로서는 왜구를 반드시 없애야만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신라의 신라구와 조선의 수적(水賊)이 같은 한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왜구가 같은 일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30] 비슷한 사례로 중세기 지중해를 휩쓸었던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 중에도 유대인이나 유럽 출신들이 꽤 있었다. 다만 바르바리 해적이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것과 왜구에 중국인이나 조선인도 많았던 것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일단 바르바리 해적이라 할 때 바르바리(Barbary)는 베르베르(Berber)인에서 온 말이지만 베르베르인을 가리키기보다는 북서부 아프리카 해안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인 반면, 왜구라고 할 때의 왜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직접 가리킨다. 또한 왜구는 진왜든 가왜든 말 그대로 범죄자 취급이었던 반면, 바르바리 해적들은 해적이라고 직업을 대고 다녀도 자국 정부에 체포될 일이 전혀 없었으며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아예 영웅으로 대접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바르바리 해적은 서양 상선 상대로 약탈을 편하게 했을지언정 무슬림 상선 상대로는 약탈을 하지 않았지만. 왜구는 조선, 중국, 동남아 뿐만 아니라 자국 상선까지 약탈을 해댔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막부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31]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영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 참조. [32] 척계광 이전 왜구는 명나라 난징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다. 이때 명군의 졸전이 얼마나 심했냐면, 겨우 100명의 왜구에게 10,000명의 정규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양학당할 지경이었다. [33] 동시대 유럽에도 위협적이었던 바르바리 해적과 비교하면 왜구의 무장이나 훈련도는 비참한 수준이다. [34] 막부측이 동원한 일본군은 거의 전부 보트른 타고 달라붙다가 포르투갈 상선인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의 사격과 척탄에 대부분 격퇴됐고,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소수 일본군이 등선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격퇴되었다.(The combat now reached its height. A few Japanese succeeded in boarding the carrack, but they were either cut down forthwith or forced leap into the sea.) [35] 한국인 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왜구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일본 도쿄 대학에까지 유학을 다녀올 만큼, 고려 말 왜구에 대해서만 10년 이상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왜구=고려인 다수 설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36] 그러나 이런식의 왜구 치켜세우기는 와패니즈들 사이에서도 대중적인 편이 아니다. 상술된 서양 세력과의 교전때 압도적인 교환비로 털린것이 서양 인터넷에서도 알려졌기 때문인것도 있고, 무엇보다 왜구를 묘사하는 그림들은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멋진 갑옷과 투구를 입은 사무라이, 검은 옷에 가면을 착용한 닌자와 달리 그냥 하얀색 팬티만 입고 있는 외견상 볼품없어 보이는 묘사가 많기 때문에 "일본인이 저럴리가 없다."는 식의 절규와 함께 와패니즈들의 역린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더 많다. [37] 대표적으로 왜구들이 특히 악명을 떨쳤던 명나라 가정제 시기에 왜구들의 세력을 규합한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정작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 왕직이었다. [38] 몇몇 왜구들이 해적을 그만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마저도 새로운 정치체를 건설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현지 사회에 동화되기만 했다. [39] 이때문에 척계광 이전까지는 조선인들 스스로 왜구 토벌에 대해서는 명나라보다 조선이 한수위라고 여겼는지 "왜적들이 중국에 죄를 얻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가 쉽게 왜적들을 사로잡는 것을 보고 우리 나라를 통하여 통분함을 씻으려고 한다면, 원 세조(元世祖)처럼 우리 나라로 하여금 일본을 함께 정벌하도록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라고 명나라가 조선에 왜구 토벌 협조를 요청할까 우려하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