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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4:40

왕립 홍콩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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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왕립 홍콩 경찰 로고.svg
명칭 Royal Hong Kong Police Force
皇家香港警察隊
약어 RHKP[1]
설립일 1844년 5월 1일
해체일 1997년 6월 30일
본부 1 Arsenal Street, Wan Chai, Hong Kong
경찰대장 Eddie Hui Ki-on (许淇安)
(1994년 7월 3일 - 1997년 6월 30일)[2]
상급기관
[[영국령 홍콩|]][[틀:국기|]][[틀:국기|]] 보안국 (Security Bureau)
전신 파일:RoyalMarineBadge.svg.png Corps of Royal Marines (왕립 해병대)[3]
후신 파일:홍콩 경무처 로고.svg 홍콩 경무처
경찰기 파일:왕립 홍콩 경찰기.svg
경찰가 Highland Cathedral (高地大教堂)[4]
홈페이지 왕립홍콩경찰 협회[5]

1. 개요2. 역사
2.1. 일제강점기2.2. 67폭동2.3. 해체
3. 미디어에서

1. 개요

파일:03_01.jpg
기지에서 사열을 받는 경찰대. 저 건물은 센트럴 경찰서
(Central Police Station)로 명명된다.
왕립 홍콩 경찰가
《Highland Cathedral》, 高地大教堂(고지대교당)[6]
1986년(영어)
광동어 버전
1990년
광동어 오토바이 버전
왕립 홍콩 경찰 당시의 모집 홍보 광고

영국령 홍콩의 경찰기관이다.

영국령 홍콩 시절을 대표하는 기관 중 하나이며, 현대 국가의 군대 역할 또한 일부 맡았다. 홍콩에 국가원수 총독, 또는 국빈 방문 때의 행사 등에 주홍콩영국군이 아닌 왕립 홍콩 경찰이 행사를 진행했으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홍콩이 반환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영국령 홍콩 시절, 영국 국기와 영국령 홍콩기 게양식과 하기식 진행도 왕립 홍콩 경찰이 도맡았으며, 홍콩 반환식 때도 영국 국기와 영국령 홍콩기와 중화인민공화국 국기 및 새로 지정된 홍콩특별행정구 상징기 또한 모두 왕립 홍콩 경찰관이 각각 하기 및 게양하였다. 이는 현재, 중국 국기와 홍콩특별행정구기 게양 및 하강할 때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경찰관들은 거수경례를 자주 하지 않는 반면[7], 왕립 홍콩 경찰은 영국 육군식 거수경례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최근까지도 유지하였으나, 2022년을 기점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식 제식으로 교체되면서 영국식 경례는 폐지하고 중국식 경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홍콩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건 같기에, 중국기 및 홍콩기 게양 및 하기, 그리고 국빈 행사 진행 등은 여전히 홍콩 경무처가 이어맡는다.

2. 역사

영국령 홍콩 경찰의 시작은 아편전쟁 홍콩섬을 점령한 영국 해군 육전수병, 즉 해병대에서 유래했다. 1841년 센트럴에 상륙한 영국 해군 수병들이 해안선에 요새를 설치해 화포를 배치해 방어에 나서는 한편 육전수병들이 점령지 질서유지에 나선 것이 기원이다.[8]

영국령 홍콩 시기에 왕립 홍콩 경찰(Royal Hong Kong Police, 皇家香港警察隊)을 두었는데 이 경찰 조직은 최초에는 인도 출신의 시크교 신자들을 고용했으며 식민지로 파견된 영국 해군 장교들이 간부를 맡았다.

그러다 구룡반도 신계 등 육지 부분까지 할양되어 영국 홍콩 영유권이 확실해진 후 중국인 경찰관을 선발하기 시작했으며 소방 업무와 구급 업무를 맡는 홍콩 소방처가 경찰에서 분리되어 별도 조직이 되었다.

이 때 해안경비대 역할을 하는 수상경찰(水上警察)과 일반 경찰과 갈등이 있었고 영화 < 프로젝트 A>[9]에서 다루기도 했는데 당시 해적들이 남중국해에서 깽판치고 다녀서(...) 해안경비대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 해군이 홍콩에 주둔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곤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현지 바다를 잘 아는 중국계 경찰관들이 단속한 뒤에야 해적들의 횡포가 잠잠해졌다. 대략 1900년대 초에는 그 흔하던 해적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광둥 앞바다가 툭하면 해적들이 나타나던 곳임을 생각하면 이는 홍콩 경찰의 첫 쾌거다.

2.1. 일제강점기

1941년 일본군 제국주의적 침공은 중화민국을 넘어 홍콩까지 들이닥쳤다.

1차 영일동맹으로 홍콩의 영국 영유권을 보장한 일본은 갑자기 이 동맹을 일방 파기하고 육군 병력과 해군 육전대 광둥성에서 홍콩으로 국경을 넘어 쳐들어갔다.

영국군은 이 기습에 소수의 해병대 수병을 포함한 영국 해군, 식민지 인도 제국 용병대나 캐나다군 중국인 홈 가드로 구성된 역시 1개 사단 급의 소수인 육군만으로 중요한 식민지인 홍콩을 지키려고 했으나 역부족으로 방어선은 일본군 해군의 육전대의 홍콩섬 상륙과 일본 육군의 국경 돌파로 간단히 뚫려 버렸다.

이때 법관 출신이던 홍콩 총독 일본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침사추이 소재 페닌슐라 호텔에서 194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촛불을 켠 방에서 영국 해군 장교 예복 차림으로 일본군 남양군도 원정대 총사령관인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에게 항복해 홍콩은 일본 점령지로 전락했다.[10]

일본군의 점령 후 군정 기간 중 당연히 포로로 잡힌 영국군과 현지 영국인 중국인 등 홍콩 시민들은 고초를 겪었는데 영국인 남자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여자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중국인들은 툭하면 감시나 당하고 2인 이상 못 모여 다니게끔 했으며 일본군 스타페리 홍콩 트램 좌석 중 백인에게만 허락되던 2층에 앉아 위세를 부렸다.

기독교 교회도 전부 폐쇄 조치했는데 기독교 교회들이 저항의식을 선동한다는 이유였다. 당시 성공회 본부교회 역할을 하는 세인트 존 대성당[11]의 경우 일본 육군 장교클럽으로 전락했으며 일본군은 절대 손으로, 그것도 비신자가 먹으면 안 되는 성체를 마구 집어먹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기도 했다.

당시 영국군과 함께 저항세력의 한 축이던 경찰은 해체되어 일본 육군 헌병들이 이 역할을 대신했고 소방처도 해산되어 육군 헌병대가 역할을 대신했으며 일본 육군 헌병대는 공포정치를 펼쳐 저항을 난폭하게 억눌렀고 이 시기는 홍콩의 흑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짧은 일제강점기 탓에 홍콩은 친일 성향이 있는 대만과 달리 반일 감정이 은연 중에 있다. 어느 정도냐면 문화는 일본 문화를 좋아하고 일본으로 여행도 자주 가며 일본산 브랜드도 흔하지만 막상 역사 문제로 언급되면 날을 세우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대만과는 달리 욱일기 일식집에서조차 함부로 걸기 힘들다.[12]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경찰관들은 패배가 확정되자 철수를 시도했으며 일부는 성공했으나 일부는 철수에 실패했다. 철수하지 못한 경찰관들은 항일 게릴라에 합류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운 좋게 영국군을 따라 호주로 후퇴한 경찰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대일 항전을 지원하거나 실제로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홍콩의 호국경찰 시기인 셈인데 많은 경찰관들이 이때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혔다.[13]

이렇게 투쟁을 이어가다가 1945년 8월 15일까지 살아남은 경찰들은 여건이 되자 하나 둘 홍콩으로 복귀했다.

1945년 패망한 일본 제국은 홍콩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홍콩을 수복한 영국이 왕립 홍콩 경찰을 재조직시켰다.

2.2. 67폭동

파일:archive_scmp_22may67_riot95-3itd3_3157889.jpg

1967년에는 구룡반도 침사추이, 조던, 야우마테이, 몽콕, 자운산 일대에서 대규모의 반영 공산폭동이 일어났다. 일명 67폭동으로 중국공산당이 사주한 폭동인데 어이없게도 스타페리 요금을 조금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라 사람들이 중국의 문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데다 아직 중국이 개방 안 되던 죽의 장막 시절인지라 문혁의 실상에 대해 대부분 무지했고 홍콩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영국의 식민지이자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다. 그래서 문혁을 따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1967년 한 해 동안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는데 상점이 약탈당하는가 하면 멀쩡한 건물에 방화를 하거나 폭도들이 밤만 되면 강도 패거리로 변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그 때는 홍콩 경찰에 경찰기동대 같은 조직도 없어 일반 순찰경관들이 나무 방패와 진압봉 등을 들고 나가 진압해야 했다.

파일:lZRN7l.jpg
파일:h5NQzl.jpg

1968년 결국 영국령 홍콩 총독부는 보다 못해 경찰에 무소불위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법[14]을 적용했으며 1968년 이후 급속히 정국이 안정되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15]

경찰은 67폭동의 진압 후 전술부대의 필요성을 느껴 1968년에는 다중범죄 진압과 무장강도 등 특수범죄 제압, 주요시설 경비를 맡는 경찰기동대 PTU가 창설되었고 1974년에는 대테러부대로 SDU[16]라는 경찰특공대가 조직되얶다. 이들 신설 비호대원들은 영국군 SAS에서 교관까지 모셔와 최고의 대테러 기술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무법 천지였던 구룡채성을 때려잡는가 하면 홍콩 마피아 삼합회도 PTU와 함께 때려잡아서 1990년대 이후 삼합회는 세력이 위축되어 버렸다.

67폭동의 성공적 진압으로 인하여 본토로부터 홍콩 경찰은 Royal, 즉 왕립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영국령 홍콩의 경찰력은 Royal Hong Kong Police Force, 즉 왕립 홍콩 경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2.1. 염정공서의 설치

1974년에는 같은 보안국 소속이 아닌 홍콩 총독 직속의 염정공서가 설치되어 부패 수사를 전담하면서 기존에 부패로 악명높던 경찰 조직에는 사정의 칼바람이 불었다. 서슬 퍼런 감찰에 소위 말하는 차 값; 즉 뇌물 받아 챙겨먹으며 잘 살았던 경찰 간부들의 대부분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이때 경찰관 총원의 절반 이상을 해고 한 후 감옥으로 보내거나 직위해제 조치하고 그 자리엔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제대로 된 미국식 경찰교육 후 경찰관으로 임용했다.

이때 경찰을 한번에 너무 많이 잘라서 도저히 홍콩 자체 인구만으로는 새로 인원을 충당할 수가 없자 영국 본토에서 경찰관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모집 공고를 내기도 했다.[17] 미국 등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느와르 영화의 단골소재였던 부정부패는 1979년 무렵이면 완전히 사라졌다. 진정한 질적 선진국이 된 것이다.

2.3.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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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30일 홍콩 예빈부에서 개최된 마지막 하기식. 좌측은 왕립 홍콩 경찰 의장대장 랜스 브라운, 우측은 의장대장으로부터 국기를 전달받는 크리스 패튼 당시 홍콩 총독
1997년 6월 30일 홍콩 예빈부에서 개최된 마지막 하기식 영상
한편 중영공동선언이 체결된 1985년 이후 영국은 왕립 홍콩 경찰 경무처의 처장 자리를 중국인 경찰 간부들에 오픈했다. 원래는 처장만은 백인만이 할 수 있었다.[18] 그래서 1989년 12월부터는 백인 대신 홍콩인 처장이 부임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인 경찰관인 Eddie Hui가 1994년 7월 3일부로 왕립 홍콩 경찰의 마지막 경찰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초대 홍콩특별행정구 경찰 경무처장으로 2001년 1월 1일까지 직위를 이어받았다.

왕립 홍콩 경찰은 홍콩 반환식에서 영국 국기와 영국령 홍콩기를 하기, 중화인민공화국 국기 홍콩특별행정구 상징기를 게양하면서 마지막 공식 임무를 수행하였고, 1997년 6월 30일 23시 59분을 끝으로 공식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0년 홍콩경찰학교 졸업생의 임관식. 이 행사가 홍콩 경무처의 영국식 제식으로 진행한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다.
그나마 남았던 영국령 홍콩 경찰의 잔재는 제식과 제복, 그리고 경찰악단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제식은 중국 인민해방군식으로 2020년에 전면 교체되었고, 제복은 영국식을 유지[19], 경찰악단내 백파이프와 연주자는 존치, 행진곡은 중국 인민해방군과 과거 영국령 때의 행진곡을 섞어 쓴다. 현재 영국식 제식을 유치하고 있는 홍콩내 기관은 JROTC나 일부 민간 구급대[20] 정도 뿐이다. 반응은 대부분 "옛 영국식 제식이 훨씬 나았다."

3. 미디어에서



[1] Royal Hong Kong Police [2] Eddie Hui는 왕립홍콩경찰의 마지막 경찰대장이자 홍콩특별행정구 경찰 제1대 경무처장을 지냈으며, 홍콩특구 경찰 경무처장으로서의 복무기간은 1997년 7월 1일부터 2001년 1월 1일까지였다. [3] 홍콩에 제대로 된 행정망이 갖춰지기 전까지 영국 해병대가 홍콩 방어 임무와 함께 치안 유지 업무까지 맡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할 내용을 참조 바람. [4] 고지대교당 [5] 전직 영국령 홍콩 경찰의 전우회이다. 한국으로 치면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6] Highland Cathedral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83년으로, 홍콩 경찰의 150년이 넘는 역사에 비해 별로 오래되지는 않았다. 크리스 패튼 전 홍콩 총독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백파이프 음악이 바로 이 곡이라고 한다. 1997년 홍콩 반환 전날 오후에 총독 관저에서 영국 국기를 내릴 때 연주한 음악도 바로 이거다. 원래는 독일인 작곡가가 스코틀랜드에게 럭비 우승곡으로 선물한 것인데 영국에서 단시간에 유명해져 현재는 군가 겸 웨딩마치 겸 장송곡(...)으로 쓰인다. 왕립 스코틀랜드 용기병 연대(Royal Scots Dragoon Guards)가 연주 음반을 내기도 했다. [7] 이는 영국 경찰도 마찬가지이다. 행사 때만 영국 육군식 거수경례를 아주 가끔 한다. 예)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중 행사인원으로 선발된 경관 등 [8] 원래 해병대는 해군 헌병 역할과 해안선 육상 해군기지 방어 역할이 평시 역할, 적국 영토 상륙이 전시 역할로 출발하였다. 이 중 해안선 해군 육상기지/항만방어와 전시 적 해안 상륙이 현재까지 남은 임무고 해군 헌병은 지금 대부분 국가가 분리하여 별도로 갖고 있다. [9] 성룡, 홍금보, 원표 주연의 영화로 한국인들은 옷 보고 해군인 줄 알았지만 사실 해경이다. 이 때 해경은 해군 수병 세일러복을 말단 경찰들이 착용했고 간부들은 영국 해군에서 파입된 장교들이었다. [10] 총독 문관이라도 유사시를 대비해 군복을 갖추고 있다. 홍콩은 섬이라 해군 군복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 왕실에서도 군복 차림으로 집무를 보았는데 군 통수권자 국왕이기 때문이었다. [11] St. John Cathedral로 Cathedral은 대성당 혹은 성전이라는 뜻이며 큰 교회를 캐시드럴(Cathedral), 작은 교회를 Church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예배당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성 요한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피크트램 타는 곳 바로 옆이다. [12] 가끔 보이기는 하는데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이나 노인들이 거칠게 욕하며 당장 치우라고 항의한다. [13] 지금도 센트럴의 성공회 교회인 세인트 존 대성당에 가면 이때 산화한 경찰관들을 추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4] 정식명칭은 공안조례로 계엄령보다 낮은 조치이며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선에서 총독에게 가장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 질서를 단시간에 잡도록 한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때도 적용하려고 했으나 뜻밖에 위헌 크리를 맞아 적용되지 않았다. [15] 한편 이 폭동을 계기로 영국 정부가 구룡반도와 홍콩섬 간 연결을 고려하면서 MTR 쿤통선(당시에는 야우마테이역(당시 워털루역)에서 타절하지 않고 지금의 췬완선처럼 센트럴역(당시 채터역)까지 운행했다. 췬완선 개통 후 지금처럼 바뀐 것.)과 크로스 하버 해저터널을 1975년 이후 만들었다. 물론 삶의 질을 높이고자 1976년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파크인 오션파크를 개관한 것은 덤이다. [16] 특별임무부대, 통칭 비호대로 불린다. [17] 그 전에도 영국인 경찰관들은 대부분 본토에서 모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물갈이를 한다고 날려 버렸는데 새로 지원하는 인원으로는 부족하자 영국에서 뽑는 인원이 팍 늘어 버렸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경찰 갈아엎고 나서 한동안 백인 경찰관 비중이 늘었다고... [18] 고드버 사건 이후 중국인 부처장들이 몇몇 나왔다. 염정공서 출범 이후 부패 경찰 간부들이 대거 제복을 벗으면서 생긴 결원을 충당하기 위해 영국 경찰에서 영국인들을 모집했기 때문에 1980년대 경찰 고위직에는 영국인의 비중이 높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핸디캡은 처장을 못 한다는 것 정도였던 셈이다. [19] 이마저도 영국령 홍콩 경찰의 제복을 유치했다기보다, 중국 공안의 제복 자체가 영국식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중국은 경찰의 선진화를 위해 기존 사회주의식 제복을 2000년대 들어서 폐지하고 영국 경찰의 제식 스타일을 도입했다. [20] St. John Ambulance 사 등 [현] 우크라이나 국가경찰 [22] 소련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