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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푸스

올림푸스 주식회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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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푸스
オリンパス | OLYMPUS
파일:올림푸스 로고.svg
<colbgcolor=#08107b> 기업명 일본어: オリンパス株式会社
영어: Olympus Corporation
한글: 올림푸스 주식회사
국가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업종명 정밀 기계기구 제조 판매
설립일 1919년 10월 12일 ([age(1919-10-12)]주년)
대표자 타케우치 야스오(竹内 康雄)
(이사·대표집행사·사장 겸 CEO)
링크 파일:올림푸스 로고.svg 공식 홈페이지
파일:올림푸스 로고.svg 한국 공식 홈페이지
{{{#!wiki style="color: #000; margin: -0px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color: #ddd"
<colbgcolor=#08107b> 법인형태 <colcolor=#373a3c,#ddd> 주식회사
법인번호 5011001005222[1]
시장정보 상장시장: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일: 1949년
종목코드: 7733
자본금 1,246억 ( 2020년 3월 31일)
총매출 7,974억 ( 2020년 3월)
본사 소재지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신주쿠 2-3-1 신주쿠 모노리스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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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카메라 역사
3. 필름 카메라
3.1. PEN 시리즈3.2. PEN F 시리즈3.3. OM 시스템3.4. XA 시리즈3.5. μ(뮤) 시리즈
4. 디지털 카메라
4.1. E-system4.2. PEN E 시리즈와 OM-D 시리즈
5. 사건 사고 및 논란6. 광고7.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광학 계측기, 의료기기 제조회사.

한국에는 주로 카메라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2020년을 기점으로 카메라 사업에서 손을 뗐다. 과거의 올림푸스 카메라는 현재 다른 회사에 매각되어 OM Digital Solutions가 되었다. 주력 사업은 의료기기와 계측기, 비파괴검사용(NDT) 장비다. 특히 내시경 분야에서는 전 세계 75%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2022년, Clarivate Analytics(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구 톰슨 로이터 IP&S)가 선정한 탑 100 글로벌 혁신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

2. 역사

1919년 10월 12일 高千穂製作所(타카치호 제작소)를 설립하고 현미경 온도계 등의 계측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상표를 OLYMPUS로 바꾸게 된다.

일화에 따르면 원래 高千穂(타카치호)라는 것이 신들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인데,[2] 브랜드를 서양식으로 바꾸면서 서양의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를 상표로 등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개 일본 회사가 올림푸스 주식회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1923년 온도계 분야를 매각, 1949년에는 회사명 자체를 オリンパス光学工業株式会社(올림푸스광학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한다. 2003년에는 회사명을 オリンパス株式会社(올림푸스 주식회사)로 교체하며, 2004년 의료 분야와 광학 분야를 별도의 자회사로 분리하여 그룹 체제로 개편한다.

1949년은 올림푸스가 본격적인 의료장비 회사로 성장하기 시작한 해였다. 한 도쿄대학 소화기내과 의사가 "이런 거 만들 수 있나요?" 하고 올림푸스에게 던진 말이 씨가 되었다. 환자의 위 속을 촬영하고 싶은데, 그런 카메라를 만들 수 있느냐는 것. 이 아이디어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올림푸스는 제품 개발을 시작한다. 사실 환자 몸속으로 뭘 집어넣어서 보고 싶다는 수요는 의료계에서 진작부터 있어 왔다. 1868년에 독일의 의사들이 비슷한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내시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삽입되는 관을 가늘게 만드는 동시에, 빛이 없다시피한 사람 몸속에서 조명을 비추고, 그 얼마 안되는 빛에 반사된 사람 몸속 모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또 몸속에 들어갈 테니 완전 방수는 기본이었다. 한마디로 방수 기능을 갖추고 강력한 스트로보를 끝에 매단 화질 수준급의 카메라를, 가느다란 고무관 형태로 만들라는 정신나간 요구였던것. 더구나 기술이 지금같지 않았던 1949년이었다는 걸 기억하자.

1년간의 공밀레 끝에 올림푸스의 엔지니어들은 프로토 타입을 개발한다. 지금 보면 저걸 어찌 삼키나 싶을 정도로 관이 굵다.
파일:olympus_endoscope.jpg

처음 테스트할 때 올림푸스 엔지니어 한명이 모르모트가 되었는데, 내시경을 위한 마취 기술 따위가 있을리 없어서, 생고생을 해서 겨우 엔지니어의 위장까지 집어 넣었다고 한다. 내시경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당하던 엔지니어는 구역질 나고 침 질질 흘리고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급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내시경을 빼냈는데, 그만 깜박하고 카메라에 필름을 안 넣은 상태였다고... 공밀레 묵념

그 후로 거듭된 개량이 더해지면서, 올림푸스는 최초로 내시경을 양산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괜히 의료 광학 부분의 절대강자가 된 것이 아니다. 한편, 카메라 사업부는 의료 부분의 분투로 벌어들인 현금으로 카메라 덕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카메라 부분의 역사는 아래를 참조하자.

2.1. 카메라 역사

1936년 올림푸스제 최초의 카메라를 만들며, 유명 메이커인 마미야 등에 렌즈를 납품한다. 이후 1948년부터 35mm 규격의 올림푸스35 시리즈를 발매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올림푸스 특유의 컴팩트함과 미래지향적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입사한 마이타니 요시히사라는 천재적인 엔지니어에 의한 누구나 손쉽고 편리하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은, 현재까지도 올림푸스 카메라의 디자인 철학이 되고 있다. 2009년 발표된 올림푸스 PEN E 시리즈의 경우엔, 그가 처음 만들었던 올림푸스 PEN시리즈의 디자인 철학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나오는 PEN-FT라는 모델과 외모도 상당 부분 닮아있다.[3]

한국에서는 현대에서 수입을 했기 때문에 '현대 올림푸스'로 브랜딩되어 유통되기도 했었다. 2000년대 이전까지 많은 제품들이 현대 로고를 달고 출시되었다.

2020년 5월 20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 국내 카메라 사업 종료"를 발표했다. 한국 카메라 시장의 급격히 축소됨에 따라 국내 사업 종료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2020년 6월 30일 오후 6시를 기점으로 종료되며, A/S는 2026년 3월 31일까지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올림푸스는 일본 시장에서는 캐논, 니콘, 소니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캐논, 니콘, 소니의 공격적인 행보로 인해 그 입자가 많이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세계 카메라 시장이 가파르게 축소됨에 따라 올림푸스의 카메라 시장 철수설도 간혹 제기되고 있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했다.

결국 2020년 6월 24일, 올림푸스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미징 사업부를 사모펀드 JIP(일본 산업 파트너즈)[4]에 매각한다는 보도자료를 공지했다.

디지털카메라 영상 부분을 매각했다. # 이제 대표상품이었던 올림푸스 카메라는 올림푸스와 별개의 기업이 되었다. 새 회사명은 OM Digital Solutions이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OM Digital Solutions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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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름 카메라

3.1. PEN 시리즈

※ 본 내용은 http://www.maitani-fan.com에 주로 기반한다.

파일:attachment/올림푸스 주식회사/a.jpg

마이타니 요시히사는 중학교 시절부터 아버지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놀았고, 혼자서 현상하는 법까지 익힌 사진 오타쿠였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자동차 공학을 전공했는데, 사진으로 밥먹고 살기는 쉽지 않을거라는 오타쿠답지 않게 현실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이타니는 대학[5]을 다니면서도 사진에 빠져 살았는데, 그러는 와중에 사진에 대해 특허를 하나 얻는다. 그 특허를 후일 올림푸스의 이사로까지 승진하는 사쿠라이 에이치가 발견했고, 졸업 후 자동차 회사로 가기로 되어 있던 마이타니를 올림푸스로 스카우트해 왔다.[6] 이 결정이 마이타니의 인생과 올림푸스 카메라의 역사를 바꿨다.

마이타니는 1956년에 입사하여 2년간의 수습기간 후에 개발실로 배치된다. 개발실의 막내였던 마이타니에게 주어진 과제는 6,000엔짜리 카메라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카메라는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기에, 이 정도의 가격은 당시로서는 상상 외로 낮은 수준이었다. 이런 가격이면 장난감 수준의 카메라 정도나 만들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 올림푸스의 주력 카메라 가격이 마이타니 1년 봉급의 절반 정도였다고 하는데, 6,000엔은 대략 마이타니 1달 월급의 절반이었다. 사실 신입 디자이너에게 개발실 적응도 시킬 겸 진행하던 소소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마이타니는 사진 오타쿠로서, "취미가 카메라"라서 올림푸스에 입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난감 카메라 수준의 안이한 타협을 한 디자인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렴하면서도 "라이카의 서브 카메라로 사용할 소형 카메라"[7]라는 컨셉을 설정하고 개발에 착수한다. 어쨌든 회사의 대부분의 개발 역량이 주력 카메라에 집중되어 있었고, 저가형은 별로 신경쓰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마이타니는 간섭받지 않고 마음대로 카메라 덕후로서의 구상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카메라 오덕으로서 평소 연구해 왔던 디자인에 따라 카메라의 핵심은 렌즈라고 보고, 저가형 카메라임에도 당시로서는 최고의 렌즈 구조였던 Tessar형[8]으로 설계된 D.Zuiko[9] 렌즈를 내부의 "채산성이 없다"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입한다.[10] D.Zuiko 하나만으로도 목표 가격인 6,000엔이 금세 넘어갈 상황이라, 마이타니는 다른 곳에서 필사적인 원가 절감을 시도한다. 마이타니는 사진 덕질을 하다보면 필름이 엄청나게 소모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한 장의 필름으로 2장을 찍도록 한다는 대담한 발상을 도입했다. 즉, 카메라의 판형을 절반으로 줄여 버렸다. 이렇게 하면 화질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티도 잘 안날 뿐더러 렌즈빨로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고 보았다. 판형을 줄이자 카메라의 전반적인 크기가 확 줄었고 원가도 내려갔다.[11] 다음으로 그가 주목한 부분은 필름 감개 레버와 사진 장수를 세는 카운터였는데, 이것들이 당시에는 최신 기술의 결정체라 원가가 비쌌다고 한다. 그래서 플라스틱 기어로 감는 방식으로 바꾸고 카운터도 초단순화 시켜 원가를 절감한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구조는 저가형 카메라나 일회용 카메라 등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올림푸스 PEN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즉 렌즈 외엔 다 초저가 올림푸스에서는, 렌즈가 카메라를 답니다!

1959년 발표된 OLYMPUS PEN은 저가형 소형 카메라이면서도, 고성능의 D.Zuiko 렌즈를 장착하여 우수한 화질을 보장했으며, 하프 사이즈라 일반적인 필름으로 2배의 매수를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12], 당시 대중과 전문가 양 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월 5천대씩 생산해도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는 대박이 나게 된다. 처음에 생산 공장에서 '뭐 이딴 걸 만드냐'며 퇴짜를 놨다가, 나중에 제발 만들게 해달라고 싹싹 빌었다고.

하루는 마이타니가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엄마가 아이 사진을 PEN으로 찍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뿌듯한 마음에 열심히 지켜봤는데, 아이 엄마가 카메라를 세팅하는 게 엉망이라 찍어봤자 초점이 나갈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카메라 오덕으로서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수는 없다고 생각, 이 아이 엄마처럼 카메라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세팅 없이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구상하게 된다. 이것이 PEN EE 시리즈였다. 이 때 회사 내에서 반대가 꽤 있었는데, 여성 카메라 구매자는 시장의 2.7%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런 작은 시장에 집착하느냐' 이런 식. 그러나 마이타니는 여성들도 카메라 덕질을 할 수 있다는 확신하에 개발을 밀어붙인다. 그의 구상은 하프 프레임에 광각 렌즈를 쓴다는 것이었다. 이 조합이면 심도가 깊어 고정 초점 구조에도 흐릿하게 나오는 일이 적다는 점에서 착안, 아예 고정 초점[13]에 자동 노출로 만들어서, 복잡한 세팅없이 찍을 수 있도록 만들게 된다.[14] 이러한 극단적인 단순화를 감행한[15] PEN EE가 1959년 발매되자, 당시까지 2.7%에 불과하던 여성 카메라 구매자의 비율이 무려 33%까지 치솟아오르면서, PEN의 월 5천대의 14배에 달하는월 7만대씩 생산해도 수요를 맞추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로서 누적 1200만대 이상 팔린[16] PEN의 전설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1960년대를 통틀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며, PEN이라는 것은 하프사이즈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다.[17][18]

1962년 발표된 후속작인 PEN-EES는 세계 최초로 프로그램 노출 셔터를 장착한 카메라로 알려져 있으며 바로 뒤이어 풀 프레임 카메라인 올림푸스 TRIP-35를 발표한다.

3.2. PEN F 시리즈

파일:attachment/올림푸스 주식회사/b.jpg

이후 1963년에는 PEN을 렌즈교환식 하프프레임 SLR카메라로 개발한 PEN F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다. 이는 펜타 프리즘을 사용하지 않고, 포로 프리즘을 활용한 '사이드 스윙 미러[19]'를 사용하여 플랜지백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나온 것이다. 이후 FT라는 모델은 TTL 노출계[20]까지 포함해서 나온다.

폭풍간지를 뿜어내는 디자인 역시도 PEN F 시리즈의 강점이다. 이 디자인은 근 50년의 세월을 넘어 2009년 발매된 PEN E 시리즈에까지 적용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은 디자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2016년 올림푸스는 PEN F 시리즈의 전통의 디자인을 좀 더 강하게 물려 받은 개뿔 바르낙 라이카에 더 가까운[21] 미러리스 PEN-F를 출시하기에 이른다.

18가지의 전용 마운트 렌즈가 함께 출시되었다. 현재까지도 하프 프레임의 명품으로 취급받고 있어, 구매하려면 상당한 웃돈을 얹어줘야 할 정도이다.

이때 나온 사이드 스윙 미러 시스템은, 올림푸스 E-system의 E-300 및 E-330에 적용되어 독특한 디자인을 갖게 했다. 또한, 위의 PEN과 PEN F 시리즈의 디자인 철학은, 이후 50년이 지나 발표된 OLYMPUS E-P1의 설계 철학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역시 폭풍과도 같은 인기를 얻게 된다.

다만 PEN F 시리즈는 시장에서 대참패했는데, 마이타니의 강연 내용에 따르면 개발 과정에서 특허를 너무 많이 취득한 바람에[22] 경쟁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3. OM 시스템

파일:attachment/올림푸스 주식회사/c.jpg
1972년 올림푸스의 유명한 SLR카메라인 OM 시스템을 선보이게 된다. 처음 발표된 OM-1[23]은 그때까지의 크고 무거운 카메라[24]라는 SLR의 편견을 정면으로 깨뜨리는 작고 가벼운 바디와 정숙한 셔터음으로 카메라 업계에 일대 충격을 주게 된다. 이 모델을 의식한 펜탁스에서 치졸하게 정확히 이 모델보다 상하좌우 1mm씩 작은 MX라는 모델을 발표할 정도.

또한, 우주에서 박테리아까지라는 컨셉을 내걸고 280종에 이르는 방대한 악세사리를 함께 발표하여, 다양한 촬영 업무에 대응하게 한다.[25] 심지어 2000년대 말 필름카메라의 황혼기까지만 해도 많은 실험실에서는 촬영을 위해 올림푸스 현미경에 올림푸스 OM마운트링을 장착, OM바디를 사용하기도.[26] 이는 이후 DSLR역시 E-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시스템 형식으로 발매하는데도 영향을 끼친다.

기존의 SLR과는 여러 가지로 차별되는 점이 특징인데, 특히 바디 뿐만 아니라 렌즈 또한 컴팩트했으며, 셔터 스피드 다이얼을 렌즈마운트 부분에 위치하게 하여 극한의 소형화를 추구했다는 점 등 여러 가지로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 때 정립된 펜타프리즘 부위의 오각형 디자인은 이후 출시된 DSLR인 올림푸스 E-System에도 채택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다.

이후 발표된 OM-2는 TTL 다이렉트 측광을 채택하여 자동 노출을 지원한다.[27] 그 이후 나온 보급형 모델인 OM10에서는, 매뉴얼 어댑터라 하여 아예 셔터 스피드 노브를 외장형(!)으로 장착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등 소형 경량화에 박차를 가했으며, OM-4에서는 8포인트 벌집형 측광 모드를 내장하는 등 최신 기술을 탑재한다. OM-3은 OM-1의 후속작으로서, 수동 전용기인데, 그 특유의 내구성과 희소성때문에 많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는 중. 물론 흑역사급인 OM2000도 있긴 하다.[28]
OM 10 광고(1979년)

3.4. XA 시리즈

파일:attachment/올림푸스 주식회사/d.jpg
1978년 포토키나에서 발표한 35mm 초 컴팩트 카메라이다. 이때 발표된 XA는 거의 담배갑 크기정도밖에 안되는 엄청나게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의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였다. 이후 올림푸스 μ(뮤) 시리즈에 계승되는 렌즈 바리어[29]시스템을 처음 선보였고, 초소형 카메라임에도 고성능의 Zuiko렌즈를 사용하고, 자동 노출을 지원하여 바로 쉽게 찍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캔디드용 카메라로서 현재까지도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마이타니씨 최후의 걸작"[30]

후속작인 XA1은 고정초점 렌즈와 노출계를 갖춘 매우 간단한 카메라였고[31], XA2, 3, 4는 목측식 카메라였다.

3.5. μ(뮤) 시리즈

파일:attachment/올림푸스 주식회사/e.jpg
올림푸스의 소형 카메라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생활방수를 탑재하고 나오는 개념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침동식 렌즈와 렌즈 바리어를 사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1년 발표된 첫 모델 OLYMPUS μ[32] 은 그 전설의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500만대 이상 생산되어 팔려나가는 대히트작이었으며, 올림푸스가 세계 소형 카메라시장을 장악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상품군이다. 무려 2000만대 이상 팔려나간걸로 추산된다.

2003년부터는 뮤 디지털 시리즈로 디지털 카메라로 출시된다. 이 시리즈 역시 올림푸스의 소형 카메라에서의 점유율을 상징하듯이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동급 중 생활방수나 방진방적 등 스펙이 높은 카메라로 휴대하고 다니는 카메라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때 같이 출시했던 후지-올림푸스의 XD 메모리 시스템은 흑역사화...[33]

1990년대 중반에 대한민국의 현대전자에서 출시한 적이 있었다.

4. 디지털 카메라

4.1. E-system

2003년, 디지털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올림푸스는 코닥과 함께 새로운 DSLR의 표준으로서 포서드 시스템을 제창하며 E-system을 발표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포서드/DSLR 참조.

4.2. PEN E 시리즈와 OM-D 시리즈

2009년, 올림푸스는 PEN E-P1 이라는 마이크로 포서드 규격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출시하면서 폭풍과 같은 인기를 끌게 된다. PEN 시리즈에서 설명한 마이타니씨의 철학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이 시스템은, 기존의 렌즈 교환식 디지털 카메라(주로 DSLR 계통)에 비해 '쉽고' '작고' '가벼우며' '화질도 동등하며' '디자인이 예쁘다'는 점이 큰 주목을 받아 입문자와 여성 사용자들에게 선풍적인 지지를 얻었고, 그 범용성으로 전문 사진가들에게 서브 카메라로도 각광받게 된다.[34] [35]

어느 정도였냐면, 예판 물량인 1000대가 순식간에 매진되고, 정식 판매에서는 물량이 달려서 500대밖에 못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몇시간만에 매진됐다. 국내에 초도 물량으로 수입된 1000대는 단 5시간만에 매진, 한 국내 홈쇼핑에서는 단 8분만에 모든 물량이 매진되는등...가히 폭풍과도 같은 인기였다. 국내에서의 인기

이후 삼성 NX, SONY NEX시스템에 큰 영향을 준 모델.[36]

자세한 내용은 마이크로 포서드 참조.

PEN 시리즈의 아버지 마이타니 요시히사는 새로운 PEN이 성공적으로 팔려 나가는 것을 보며 2009년에 타계했다.

5. 사건 사고 및 논란

2011년 11월 8일, 20년 동안이나 회계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회사가 위기를 맞이했다. (オリンパス事件) 전 CEO였던 마이클 우드포드가 2008년 영국의 의료기기 업체였던 자이러스 인수에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조사에 나서자, 이사회에서 그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러나 그는 해고에도 굴복하지 않고 해당 문제를 적극적으로 언론에 제기하는 한편 영국과 미국·일본의 기업비리 조사기관에 사건을 제보하는 등의 노력을 한다. 10월 26일 회장이 물러났지만 논란을 수습하지는 못했고, 결국 11월 8일 "1990년대부터 유가증권의 손실을 메우고자 기업 인수시 외부 자문 수수료 등을 과다 지불하는 방식으로 분식 회계를 했다"고 공시했다. 2011년 11월 11일 상장폐지의 우려가 있는 감리종목으로 지정됐으며 12월 6일 제3자 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나왔는데.. 2003년까지 분식회계 액수가 1177억 엔에 달했고, 이를 메우기 위해 2008년부터 기업인수 등으로 위장해 유용한 액수가 1348억 엔이라고 한다.

이후 2012년에 소니가 500억엔을 출자, 올림푸스 주식을 대거 획득해 최대주주로 올랐다. 그러나 현금이 궁해진 소니는 보유주식의 절반을 팔고 최대주주 자리에서 내려왔다. 같은 기간 동안 올림푸스 주식 가격이 약 2배로 올랐기 때문에 상당히 이득을 본 듯 하다.[37]

이러한 여파인지 몰라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도 2014년 북미 시장에서 사라질 브랜드 리스트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2015년과 2016년 잇달아 영업이익이 계속 증가하는 등 분식회계의 후유증을 극복했다.

이 사건이 다른 의미로 유명한건 처분이 엄청나게 솜방망이[38]이고 애초에 마이클 우드포드가 일본의 대형 뉴스 미디어들에게 정보들을 흘렸을 때도 일본내 미디어들은 아무도 보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사건도 우드포드가 강제 귀국당한후 미국을 포함한 해외 미디어들이 특보한후 이를 알게된 해외 주주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3자 감사에 의해 드러난 사실이다. 올림푸스 실적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판매하는 의료기기 렌즈에 있으며 카메라는 오히려 적자다. 주주회나 출자도 미국 쪽이 가장 규모가 커서 해외 주주총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39] 실제로 당시 일본 매스미디어에 オリンパス事件으로 검색해도 공식견해만이 작게만 나타나고 보도가 축소되어 있으며 만천하에 드러난후 매스미디어는 신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굳어지자 안티테제라도 하는듯이 관련 기사를 내며 미디어들은 서로 우리는 아니라는 듯이 발뺌했다. 후에 더 이상 감싸돌면서 압박으로 쉬쉬하던 것을 들통이라도 났다는 듯이 앞다투어 이 기사를 내보냈다[40] 이런 일본 매스 미디어를 보고 일본내 미디어의 신뢰도가 바닥임을 한탄하는 모습을 オリンパス事件 マスコミ로 검색만 해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웃기는 것은, 미디어들은 서로 쉬쉬해놓고 이제는 서로 입다물고 있었다고 상대방 미디어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물 만났다듯이 비판을 퍼붓는건 각색언론의 최선방인 황색언론지들이었다. 더 웃기는건 이 사건이 수면위로 올라오고 3자 감사까지 간 것은 결국 외국 미디어가 주로 보도하여 해외주주들의 반발이 강건했기 때문인데 정작 일본에서 가장 먼저 보도했다는 이유로 첫 보도지인 FACTA 소속 기자는 올해의 저널리스트 상까지 받았다는 것. 이 사건의 전체를 알아보면 일본 미디어의 뉴스언론이 자국민들 향한 각색언론의 방식과 실패시 자폭하는 방법을 여러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비판을 할수 있는 공정한 언론이라 생각한다는 일그러진 점을 엿볼수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 대단하다. 같은 부류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있는 상태이며 일본 국민들은 매스미디어를 신용할 수 없다고 욕하면서도 입맛에 맞는 뉴스는 골라 믿으면서 현재 22년 기준으로도 일본 미디어들은 이렇게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변한게 없다.[41] 예를 들면 닛케이신문이 거짓 보도한다고 야후 재팬 웹 뉴스가 비판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42]

2016년에는 미국에서 뇌물 스캔들이 터졌다. 의료기기 납품을 따내면서 리베이트, 연구보조비 등의 명목으로 6억불(약 7000억원) 이상을 뿌렸다고. 대략 2017년 기준 올림푸스의 1년 순이익이 7800억인데, 거의 그 정도 만큼을 뇌물로 돌렸다는 것. 물론 5~6년에 걸친 액수라고는 하지만. 연방정부에 6억 4600만불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벌금 액수가 약 7000억원 정도로 올림푸스의 1년 순이익이 한방에 날아갔다.

6. 광고

국내에서 사용했던 광고 문구인 Eye Want OLYMPUS / My Digital Story OLYMPUS / Digital Creator OLYMPUS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올림푸스만 사용했던 광고 문구[43]이다. 이후로는 글로벌 공통 슬로건인 Your Vision, Our Future로 교체되었다. (참고로 당시 세계 공통 올림푸스 광고 문구는 Focus on life.)

2000년 올림푸스 코리아 설립 이전에는 현대그룹 산하의 현대전자[44]에서 수입하여 판매를 한 적도 있다. 당시 광고

e스포츠와는 연관이 깊은 회사로, 2003년에는 2003 Olympus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스폰하기도 했고,[45] 그 후에는 카트라이더 리그를 장기간 후원했다. 2012년에는 LOL Champions League의 스폰을 맡게 되었다. 지금은 메인 or 서브 스폰서쉽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후원을 할 것 같다 라는 기업으로 인식을 갖게 된 기업이다.

7. 기타


[1] 일본국 국세청에서 발행하는 번호이다. [2] 타카치호미네, 규슈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 사이에 걸친 높이 1,574미터의 화산이다. [3] 또한, 올림푸스의 DSLR 종류는 저가형이라도 기능이 별로 제한되지 않고 나온다는 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만 XA의 경우에는 작은 크기에 너무 많은 기능을 집어넣었다가 잔고장크리로 후속모델에선 기능을 빼버리기도 했다. [4] 과거 소니의 PC 브랜드였던 VAIO도 인수했다. [5] 무려 와세다대학이다. [6] 이게 별거 아닌것처럼 들리지만 1950년대의 일본에서 한번 가기로 한 회사를 바꾼다는 것은 인생을 거는 모험이었다고 한다. 종신고용을 당연히 생각하는 50년대의 일본 사회에서, 회사는 단순히 일하는 곳이 아니라 평생을 몸바쳐서 충성해야하는 대상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가기로 한 회사 놔두고 딴 곳으로 간다는 건, '충성심이 없는 사원'으로 찍혀버리기 쉬워서 자칫하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7] 이는 현재의 올림푸스 바디들의 위치와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올림푸스의 바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8] 칼 자이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걸작인 Tessar 렌즈를 본뜬 3군 4매 구조의 렌즈들을 통틀어 호칭하는 용어로, Tessar 렌즈 자체를 사용했다는 게 아니다! [9] 이전 판본의 서술과는 달리 주이코 (瑞光) 브랜드 자체는 1934년부터 사용했다. 펜에 도입한 렌즈는 그 중 테사형으로 신규 개발한 D.Zuiko 렌즈였다. [10] 이후 올림푸스까들은 올림푸스의 바디는 까지만, 올림푸스의 렌즈는 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저가형은 싸게 적당히 만드는 건 똑같지만, 지켜 주는 '선'은 다른 회사보다 높은 편이다. [11] DSLR~미러리스 시대에도 남들이 크롭 사이즈에서 판형 키우느라 낑낑댈때 올림푸스는 오히려 센서 크기가 작은 포서드를 출시한다. 덕분에 포서드 시스템과 마이크로 포서드 시스템은 카메라와 렌즈 크기가 기존 DSLR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으며, 미러리스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한다. 판형 줄이기는 남들이 보면 기존 상식의 파괴인데, 오히려 올림푸스에게는 마이타니가 만들어 놓은 전통의 계승인 셈. [12] 36장을 72장으로 뻥튀기 해주는 이 '놀라운' 능력은 현상비가 부담되던 PEN 이용자 층에게 대 호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프 사이즈가 되면서 당연히 화질은 좀 떨어지게 되었지만 이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다. [13] 대략 1.5m 이후부터 무한대까지 초점이 맞는다. [14] 필름 넣고 ASA 감도 맞추고 셔터 감고 찍으면 끝. 역광 등 상황에 따라 별도의 기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 [15] 이는 기술의 발전을 믿고 센서 크기를 줄인 포서드 시스템에서도 볼 수 있는 올림푸스의 성향이다. [16] 지금도 옥션, 이베이, 그리고 가까운 카메라 점포에 가면 쉽게 PEN을 볼 수 있고, 장롱 속이나 땅 속에서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17] 이후 이와 비슷한 컨셉을 가진 하프판형 카메라가 타사에서도 나왔지만 PEN 시리즈 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묘하게 현재 마이크로 포서드의 상황과 닮았다. [18] 폭발적인 수요와, 여성들을 공략했다는 점은 이때 확립된 컨셉으로 보인다. [19] 일반적으로 '포로미러' 라고 불린다. [20] 작동에 필요한 1.33v PX625 배터리는 현재 단종되었으므로 1.5v의 유사 규격 알카라인 전지 등을 사용한다. 물론, FT도 기계식 셔터이기 때문에 안 넣어도 쓸 수는 있다. 물론 뇌출계를 써야한다. [21] 마이타니 요시히사가 라이카를 선망했던 걸 보면 이상한 건 아니다만... [22] 셔터 부분을 오로지 자체 기술로만 개발해야 했는데, 완전 기계식(설계 과정에서 컴퓨터나 전자장치의 도움을 받지 못하던 시대이다보니...)에다가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하긴 했어도 당시 일본에서 그 정도의 정밀도를 갖춘 곳은 올림푸스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23] 원래 모델명은 마이타니씨의 이니셜을 딴 M-1이었으나, 라이카의 너 고소요구로 얼마 못가 변경했다. 따라서 M-1과 OM-1의 기계적 성능은 상동. [24] 비교적 최신의 SLR카메라만 보아온 세대라면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SLR카메라는 상당히 컸다. [25] 그래서 OM시리즈가 아니라 OM 시스템인 것이다. E-system도 마찬가지. [26] 이것과 관련된 변환링이 존재해서 E-system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27] 그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예를 들어 노출을 지정해 놓으면 일정 시간동안 셔터를 열고 닫는게 아닌 지정한 노출만큼 빛이 들어오면 닫는 형식이다. 쉽게 말해 방 안에서 장노출 촬영을 하다가 불을 켜면 셔터가 닫힌다! [28] 코시나에서 OEM. 나쁘진 않지만 올림푸스에 명성에 비하면... [29] 침동식 렌즈를 활용하여 렌즈 뚜껑을 미닫이식으로 바디에 일체화. [30] 그러나 작은 크기에 너무 많은 기능을 욱여넣는 바람에 잔고장이 많은 카메라가 되어버렸고 그 복잡한 구조 탓에 카메라 수리소에서 기피하는 카메라가 되었다. 사실 XA는 문제가 아니다. OM-2부터가 수리소 기피대상 1호 [31] XA의 가격 및 고장률 때문에 일부러 단순화. 펜 EE를 XA의 껍데기에 넣은 수준이다. [32] 흔히 다른 모델과의 구별을 위해 μ-I 이라고 불림. [33] 2009년에 이르러서야 E-P1부터 겨우 XD를 포기하고 SD슬롯을 넣었고, 컴팩트 제품군의 경우 XD 포기 직전의 라인업에는 XD-MicroSD 어댑터를 끼워줬다. (물론 올림푸스 카메라의 XD슬롯에서만 정상적으로 인식되는 어댑터였다.) DSLR의 경우, 2010년 후반 출시된 E-5를 제외한 현행 전기종이 CF+XD 듀얼슬롯이다. 부동의 최경량 DSLR인 E-4x0마저도 CF+XD슬롯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34] 물론 이 제품은 엄밀히 말하면 DSLR은 아니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올림푸스에서 한국 시장에 이 제품을 'Hybrid DSLR'로 광고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35] 게다가 파나소닉 G1등과 같은 모델은 아예 DSLR모양이라 일반인들을 혼동하게 만든 점도 있다. [36] 실질적으로는 두 회사 모두 올림푸스보다 반 년 이상 일찍 나온 파나소닉의 제품으로부터 영감 내지는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파나소닉 G1같은 경우 DSLR과 거의 같은 디자인에 크기조차도 올림푸스 E-420과 비슷한 수준이라, 현재 정립된 미러리스 카메라의 컨셉을 제시한 곳은 올림푸스라고 보아야한다. 하지만 파나소닉 G1에 비해 올림푸스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좀 안다는 사람들조차 미러리스를 언급하면서 G1이나 GH1은 고려조차 하지 않는 (특히 NX10과 파나소닉을 비교하면서 뷰파인더가 없다고 까는) 병맛나는 상황이 벌어져 버렸다. [37] 실제로도 소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2010년대 초반 대부분의 자회사들이 엄청난 적자를 내는 와중에서 그나마 이익을 낸 부분은 금융 부분이었다. [38] 결국 그냥 벌금형이었고 상장유지했다 [39] 일본 내에서만 주주총회가 있었다면 변함없이 어둠에 묻혔을 것이다 [40] 단 그것 마저도 각색되어 내보냈지만 [41] 여전히 각색하고 쉬쉬하며 국민들은 매스미디어는 신용도가 없다고 말만 하고 자주 보이는 것만 쉽게 믿는다 [42] 그리고 비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43] 그 중 Eye Want OLYMPUS는 눈을 뜻하는 Eye와 나를 뜻하는 I 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이용한 재치있는 언어유희다. 다만, 영어 문법을 제대로 적용하면 "Eye wants OLYMPUS"가 되어야하므로 문법상으론 틀린 문구이다. [44] 지금은 SK 하이닉스로 넘어갔다. [45] 우승자는 퍼펙트 테란 서지훈이었다. [46] 자주 쿠팡에서 깜짝 세일을 하다 보니 붙은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