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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20:07:56

염계군벌

중화민국의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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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북양정부 시기2.2. 국민혁명2.3. 중흥과 몰락
3. 타이위안 병공창4. 주요인물5. 참고문헌

1. 개요

閻系軍閥

산시성을 중심으로 하는 옌시산 휘하의 군벌집단을 의미한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산서군벌, 진계군벌, 산서성을 뜻하는 한자인 진(晉)과 옌시산의 염을 따서 진염군벌, 역시나 산서성의 지배영역이었던 수원성을 합쳐 진수군벌(晉綬), 산서의 또다른 이름 산시를 따서 산시군벌 이라고도 한다.

2. 역사

2.1. 북양정부 시기

진군 43협 산하의 85표와 86표가 염계군벌의 시초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했을 때 산서성의 동맹회 회원이었던 북양군 제85표 소속 양팽령, 장황, 요이가, 86표 표통 옌시산 등이 초기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산서도독 육종기와 43협통 담진덕(譚振德)을 살해하고 산서성을 장악한 후 옌시산을 산서도독으로 옹립했다. 이후 차오쿤이 지휘하는 제3진의 공격에 수원성으로 밀려나 항전을 계속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옌시산을 산서도독으로 재임명하였고 옌시산은 이후 중앙을 옹호하며 산서의 대권을 장악하는데 힘썼다. 옌시산과 부도독 온수천(溫壽泉)은 약탈을 금지하고 산서의 치안을 회복하였으며 타성 출신인 85표 표통 황국량(黃國梁)이나 초기 태원기의를 주도하였던 요이가를 밀어내고 산서군벌을 영도하게 되었다.

옌시산은 중앙에 복종하여 1913년 복드 칸의 내몽골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는 한편 요이가, 온수천, 공경 등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산서의 유일한 지배자로 등극하였다.1915년 홍헌제제에 찬동했으며 호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참하지 않았다.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오른 후에도 그 기조는 계속 이어졌다. 이후 황국량, 온수천의 심복인 진군 제1여 여장 이명풍(李鳴風), 하동관찰사 장사수(張士秀) 등을 숙청하면서 옌시산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후 옌시산은 지방의 군사장관을 독군으로 개칭하면서 산서독군 겸 성장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옌시산은 돤치루이 안휘군벌에 충성하고 무력통일정책에 동조했으나 근본적으로 산서성 바깥의 혼란에 얽히려들지 않고 산서성의 공업화와 금융산업 발전을 통해 산서성의 개발에 매진하였다. 이때 옌시산의 정책을 3불 2요 정책이라 하는데, 당에 가입하지 않고, 다른 성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3불, 중앙에 복종하고 지방의 치안을 보호한다는 것이 2요였다.

2.2. 국민혁명

산서군벌이 산서 바깥의 충돌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1924년의 2차 직봉전쟁으로, 옌시산은 봉천군벌에 호응하여 직예군벌이 석가장으로 북상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펑위샹의 국민군이 산서성에서 재기를 노리자 장쭤린, 우페이푸와 손을 합쳐 직봉풍전쟁에서 이들을 격파하였고 1926년 3월, 산서성의 국민군을 모두 축출한 후 수원성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초기에는 장쭤린의 편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고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대세가 국민당의 편에 기울었다고 판단, 국민혁명군 3집단군 사령관 겸 북방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봉천군벌과 교전하고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이 공으로 옌시산은 산서성 정부주석, 경진위수사령 등에 임명되고 탕산회의, 편견회의의 핵심 4거두로 참가하는 등 국민정부의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으로 등극하였다.

1928 ~ 1929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편견이 시작되면서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상당히 불만을 품게 되었다. 리쭝런, 바이충시, 펑위샹, 탕성즈 등이 잇달아 일으킨 반란에 옌시산은 일단은 눈치를 보며 장제스의 편을 들었으나 결국 1930년 중원대전에서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중앙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중원대전은 장쉐량이 장제스를 옹호하면서 참전함에 따라 반장군의 패배로 끝났고 반장전쟁은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옌시산은 관동주로 망명하여 관동군의 보호를 받았고 산서군벌은 그동안 쉬융창이 임시로 이끌었으나 산서성 바깥의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정치적으로 장쉐량에게 완전히 복속된 처지였다.

2.3. 중흥과 몰락

하지만 1931년,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획책하면서 산서군벌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옌시산은 산서로 돌아와 다시 산서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 자치를 인정받았으며 1932년 2월 20일, 태원수정공서 주임에 임명되었다. 이후 옌시산은 전쟁으로 파괴된 산서성의 재건, 공산당을 막기 위한 농업 개혁 등을 추진하였고 대장정을 통해 이웃한 섬서성으로 퇴각한 마오쩌둥이 일으킨 동정항일을 장제스의 도움으로 격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산서군벌은 항전의 최일선에 서게 된다. 2전구 사령장관에 임명된 옌시산은 초기에 일본군을 상대로 격렬히 맞섰으나 화북과 화중 전선의 붕괴, 한푸쥐 등의 태업으로 인해 결국 성도 타이위안을 내주고 퇴각하게 된다.

이후 산서군벌은 일본과 비공식적으로 휴전하고 전투를 회피하였으며 한때 전우였던 팔로군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산서군벌은 타이위안을 회복하였으나 공산군이 산서성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국공내전이 본격화되면서 산서군벌은 군벌 중에서 공산군에 가장 격렬히 맞서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1949년 4월 타이위안이 함락됨에 따라 영토적 기반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옌시산은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으로 국부천대를 수행했으나 1950년, 천청이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됨에 따라 숙청되었다.

3. 타이위안 병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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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요인물

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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