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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폰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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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알폰소 1세(아라곤).jpg
Alfonso I de Aragón
가문 히메네스(세메노) 왕조
생몰년도 1073년 또는 1074년 ~ 1134년 9월 7일
출생지 아라곤 왕국
사망지 아라곤 왕국 폴레니노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의 국왕 1104년 - 1134년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1104년 - 1134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1109년 - 1134년
아버지 산초 레미리스
어머니 루시의 펠리시아
형제 페드로 1세(이복형제), 페르난도 산체스, 라미로 2세
배우자 우라카
종교 기독교 (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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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4대 국왕, 팜플로나 왕국 14대 국왕,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별명은 '엘 바탈라도르(El Batallador)'로, 전사라는 의미이다. 왕위에 오른 이래 30년의 치세 동안 무슬림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왕국의 영역을 2배 이상 확장한 정복군주다.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알폰소 1세(Alfonso I)', 아라곤어로는 '알리폰소 1세(Alifonso I)', 바스크어로는 '알폰초 1세(Alfontso I)'이다.

2. 생애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국왕 산초 레미리스와 몽디디에 백작 힐두앵 4세의 딸인 루시의 펠리시아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복형으로 페드로 1세가 있었고, 친형제로 페르난도 산체스, 라미로 2세가 있었다. 출생 장소는 공식 기록에 전해지지 않으나, 전승에는 우에스카 인근 에초(Echo)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출생년도 역시 명시되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몇몇 연대기에서 그가 사망했을 때 61세였다고 기술한 것을 근거로 1073~1074년 즈음에 태어났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복형 페드로 1세과 친형 페르난도 산체스에 이은 세번째 왕자였던 그는 장차 페드로 1세의 믿음직한 부관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러 장교들로부터 군사 기술을 익혔으며, 산 살바도르 델 페요 수도원의 수도자이며 훗날 갈린도 데 아르보스(Galindo de Arbós)로부터 기독교 교리와 교양 등을 배웠다. 갈린도는 훗날 우에스카와 사라고사의 주교로 발탁되어 알폰소의 고문으로서 활약했다. 알폰소는 일찍이 알안달루스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킨코 빌라스와 라 자케타니아의 비엘, 루나, 아르다네사, 발리오의 영주로 발탁되어 통치 경험을 쌓았다. 이 땅은 본래 페르난도 산체스에게 주어진 영지였는데, 1084년에 페르난도 산체스가 사망한 뒤 그에게 주어졌다.

1094년 6월 4일 우에스카 시를 포위공격하던 아버지 산초 라미레스가 전사한 뒤 이복형 페드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복형의 부관으로서 무슬림과의 전쟁에 열렬히 참여했다. 특히 1096년 우에스카 공방전과 1096년 11월 15일 알코라스 전투에서 맹활약해 아라곤군이 우에스카를 접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었을 때 참여하려 했지만, 교황청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과 동등하다"라며 막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104년 9월 28일, 페드로 1세는 사라고사 공략에 실패한 뒤 우에스카로 귀환하던 중 발다란에서 사망했다. 페드로 1세는 생전에 아들 피에르와 딸 아그네스를 낳았지만 둘 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는 알폰소에게 돌아갔다. 알폰소는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선왕이 공략에 실패했던 사라고사를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선포했고, 1105년에 왕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해 타우스테를 공략했고, 1106년 말 아라곤 왕국 남서쪽 국경과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인 마디나(현재 에헤아 데 로스 카바예로스)를 공략했다. 또한 사라고사 주변의 엘 카스텔라, 폴라, 산타 이네스 등 산초 라미레스와 페드로 1세가 지은 요새들을 보강하게 해, 사라고사 토후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1106년 중반 우르헬 백국이 무슬림으로부터 발라게르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레리다 북쪽의 무슬림 방어선이 뚫렸고, 알폰소는 이를 잘 활용해 라 호야 데 우에스카 일대를 평정하는 등 동쪽에서 사라고사 토후국을 압박했다. 다만 에브로 강 북쪽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무슬림의 손에 남아 있었다. 특히 프라가와 메퀴넨자는 아라곤 왕국의 공세를 번번이 격퇴하면서 사라고사 토후국과 레리타 토후국간의 연결망을 보장했다. 여기에 사라고사 북쪽의 갈리고 강둑에 자리잡은 주에라,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등지는 사라고사의 방위를 책임졌다.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도모하려면 이들을 별도로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1109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Alfonso Raimúndez)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고메스 곤잘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9일,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장인의 직위를 그대로 승계받았다며 알폰소 6세가 생전에 누렸던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자기 것으로 삼아 '전히스파니아의 여제' 우라카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직후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문제에 몰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고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무슬림과의 전쟁에 전념했다. 우선 툴레도를 포위했던 무슬림군을 격퇴했으며, 1117년에 피테로, 코렐라, 신트루에니고, 무르칸테, 몬테아구도, 카산테 일대를 공략했다. 1118년 툴루즈 공의회가 사라고사 정복을 지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면서 많은 프랑스인이 아라곤군과 합세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쥐라를 점령하고 그해 5월 말부터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6개월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12월 18일 사라고사가 마침내 함락되었고, 알폰소는 사라고사에 입성한 뒤 이곳을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치하에 들어간 무슬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그들이 세금을 바치는 한 이슬람교를 그대로 믿도록 허용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파일:쿠탄다 전투.jpg
아구스틴 살리나스 테루엘(Agustín Salinas Teruel) 작, <죽음의 계곡>, 1891~1892.

1119년 세르베라, 투데옌, 카스텔론, 타라소나, 아그레다, 마갈론, 보르하, 알라곤, 노비야스, 말렌, 루에다, 에필라를 공략하고 소리아로 진군한 뒤 칼라타유드를 포위하다가 1120년 무슬림들이 사라고사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거두고 그들을 향해 진군해 쿠탄다 전투에서 격파했다. 얼마 후 칼라타유드를 공략한 그는 여세를 이어가 부비에카, 알하마 데 아라곤, 아리사, 다로카를 공략했다. 1123년에는 바르셀로나 백국을 공격해 레리다를 공략했다. 이후 1124년 겨울부터 1125년 9월까지 알 안달루스 깊숙이 침입해 그라나다 인근까지 진군하여 많은 현지 기독교도들을 생포한 뒤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1125년부터 1126년까지 그라나다와 코르도바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127년 롱가레스를 재정복했다. 한편 1126년 우라카 여왕이 사망한 뒤, 우라카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로 즉위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127년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1129년 몰리나 데 아라곤과 몬손을 공략한 뒤 엘 시드 사후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발렌시아를 포위했다. 그러다가 피레네 산맥 너머 아키텐에서 공작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자, 그 여파가 아라곤 왕국에 미칠 것을 염려해 군대를 물렸다. 이후 1130년 10월에서 1131년 초 사이에 피레네 산맥을 건너 아키텐으로 가서 바욘을 포위 공격한 끝에 아키텐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아라곤으로 귀환한 뒤, 알폰소는 무슬림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1133년 메퀴넨차를 공략했으며, 1134년 프라가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1134년 여름 가스코뉴에서 온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의 땅으로 한꺼번에 돌아가는 바람에 프라가 요새 포위전에 투입된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발렌시아 총독이 이끄는 무슬림군이 이 때를 틈타 프라가 구원에 나섰다. 1134년 7월 17일,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군의 급습을 받았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해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사라고사로 귀환하다가 9월 7일 폴레니노 마을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숨을 거두었고 바욘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에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왕국을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수도 생활을 하던 알폰소의 형제 라미로를 속세로 끌어내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로 즉위시켰다. 한편 팜플로나에서는 몬순의 영주 라미로와 엘 시드의 딸 크리스티나 사이의 아들인 가르치아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산초 레미리스 이래로 동군연합 관계였던 아라곤 왕국과 팜플로나 왕국은 갈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