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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3:38:47

수리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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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ria I.a Nafarroakoa
가문 에브뢰(에브레우슈) 왕조
출생 1387년 7월 6일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사망 1441년 4월 1일 (향년 53세)
나바라 왕국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
(現 스페인 세고비아)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의 왕비 1402년 ~ 1409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425년 ~ 1441년
아버지 카를로스 3세
어머니 레오노라
형제 호아나, 마리아, 베아트리체, 이사벨라, 카를로스, 루이스, 마르가레타
배우자 마르티누 1세, 추안 2세
자녀 마르틴, 카를로스 4세, 후안, 수리아 2세, 레오노르 1세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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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제29대 여왕. 나바라 왕국 에브뢰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한때 시칠리아 왕국 마르티누 1세 왕비로 지내기도 했다.

2. 생애

1387년 7월 6일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 레오노라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호아나, 마리아, 베아트리체, 이사벨라, 카를로스, 루이스, 마가레타가 있었다. 카를로스 3세는 약소국인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결혼 동맹을 맺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1402년 1월 21일, 그녀와 시칠리아 국왕이자 장차 아라곤 국왕이 될 것으로 예정된 마르티누 1세와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5월 21일 시칠리아 섬의 카나티아 시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404년 10월 마르티누 1세가 아버지 마르틴 1세를 돕기 위해 시칠리아를 떠났을 때, 수리아는 왕실 평의회의 도움을 받으며 국정을 돌봤다. 메시나에서 이 때를 틈타 아라곤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시칠리아 귀족들의 음모가 있었지만, 전 메시나 시 행정관이었던 후안 크루일레스의 고발로 실패했다. 1405년 8월 마르티누 1세가 시칠리아에 돌아오면서, 그녀는 국정에서 물러났다. 1406년 12월 17일 아들을 낳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이름을 따 마르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마르틴은 1407년 8월 생후 8개월 만에 사망했다.

1408년 8월 13일 남편이 사르데냐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시칠리아 왕국의 대리인으로 재차 임명되었다. 이후 샤르데냐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마르티누 1세는 1409년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그녀의 직위를 유지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그녀는 이에 따라 시칠리아의 대리 통치자로서 계속 군림했다. 아라곤 왕국의 국왕 마르틴 1세는 '마르티누 2세'로서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지만, 그녀가 시칠리아에서 통치하는 것을 용인했다.

한편, 나바라 국왕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는 그녀를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루트비히 7세와 약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1410년 초 약혼은 취소되었고, 같은 해에 바르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두아르도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에두아르도가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와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듣지 않고 대신 아라곤의 시칠리아 대리 통치자로 계속 군림하기 위해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 페데리코를 상대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1]

게다가 1410년 마르틴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라곤 국왕이 수 년간 세워지지 않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 별다른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디카 백작 베르나르도 카브레라는 이 때를 틈타 수리아를 납치한 뒤 프리드리히 3세의 후손인 니콜라스 페랄타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녀는 1411년 5월 베르나르도 카르베라를 재판에 회부하면서, 자신은 나바라 왕국이나 아라곤 왕국에 자신을 돕기 위해 외국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은 전혀 한 적이 없다고 맹세해, 시칠리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한편 몇몇 귀족들은 왕비 랭커스터의 필리파와 사별하여 홀아비가 된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주앙 1세와 그녀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1413년 7월 장녀 호아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카를로스 3세는 수리아를 왕위 계승자로 삼는 동시에 든든한 사위를 얻어서 왕국의 미래를 보장받으려 했다. 이에 따라 딸에게 당장 귀국하라고 거듭 요청했고, 1412년 6월 카스페 타협에 의해 아라곤 국왕이 된 페르난도 1세 역시 시칠리아가 왕국의 통제에 벗어나는 것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1415년, 페르난도 1세가 파견한 아라곤 군대가 시칠리아의 혼란을 진정시켰고 4명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결성해 내치를 담당했다. 이후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보내졌고, 아버지와 재회한 뒤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확인되었다.

카를로스 3세의 장녀 호아나의 남편이었던 푸아 백작 장이 수리아와 재혼하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카를로스 3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1세의 장남인 알폰소 왕자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이미 약혼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페르난도 1세는 그 대신 셋째 아들 엔리케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얼마 후 페르난도 1세의 차남 후안이 카를로스의 작은 딸 이사벨라와의 약혼을 파기하자, 카를로스는 분개해 페르난도 1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아라곤 왕국 측은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빼내서 자신들에게 복속시키려면 반드시 수리아와 후안 왕자의 결혼이 성사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라곤 국왕에 등극한 알폰소가 군대를 동원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무력시위를 벌이자, 카를로스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이후 후안 왕자의 어머니인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의 중재 하에 후안 왕자와 수리아가 대면했고, 1420년 6월 10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수리아의 권리는 그녀와 후안의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후안은 나바라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를로스는 다른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수리아 1세가 아들 카를로스 4세와 딸 수리아 2세를 낳자, 카를로스 3세는 귀족들을 소집해 두 손자와 손녀를 수리아 다음의 후계자로 소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425년 9월 8일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한 뒤 수리아가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남편 후안이 그녀를 카스티야 내 자신의 영지에 붙들어놓는 바람에, 그녀의 대관식은 지연되었다. 그러다 남편이 1428년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게 밀려 카스티야에서 추방된 뒤에야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고, 1429년 5월 1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와 맞서는 남편을 지원하다가 국경의 여러 영토를 잃었지만, 1436년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간의 평화 협약이 톨레도에서 체결되고나서 딸 수리아와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의 결혼이 성사된 후 지참금 형식으로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았다.

1440년 9월 16일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엔리케 왕자와 딸 수리아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카스티야로 간 뒤 무슬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던 과달레테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순례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친 그녀는 본국으로 귀환한 후 1441년 4월 1일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오늘날 세고비아)에서 사망했다.

3. 사후

수리아 1세는 죽기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자신의 왕권을 아들 카를로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히면서도 다음의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스런 왕자,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우리의 죽음 이후 상속의 권리로 나바라 국왕과 네무르 공작이 될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왕이신 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간청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의와 축복 없이는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되니, 할 수 있는 가장 큰 부드러움으로 아버지에게 승인을 구하길 바란다."

수리아 1세는 아마도 남편의 동의를 받고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모양새를 연출해 부자간의 사이가 원만하게 후계를 해결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후안이 나바라 왕국의 왕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후안은 수리아 1세의 유언장을 확대 해석해 아들을 나바라의 총독으로 삼을 뿐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나바라 국왕 직위를 독차지했다. 이후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인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한 후안은 1451년 후아나 엔리케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나바라 총독을 맡던 카를로스를 해임하고 아내를 나바라 총독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카를로스는 나바라 귀족들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가 진압되었고, 한동안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후안이 죽을 때까지 왕을 칭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강요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석방된 후 맹세를 어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레린 백작 루이스 데 보몽과 손잡고 아버지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1453년 12월 7일 카스티야 왕비 마리아[2]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바야돌리드에서 1년간 휴전 협약이 맺어졌을 때, 카를로스 역시 아버지와 휴전하기로 했다. 1년간 휴전이 끝난 후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1455년 3월 27일 보몽 가문의 사병대가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를 공략했으며, 1455년 8월 4일에는 토랄바 전투에서 아라곤 왕국군을 격퇴했다. 이에 분노한 후안은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 2세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는 1456년 투델라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데다 푸아 백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아라곤군의 반격이 거세자 나폴리에 있는 삼촌이자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 국왕 알리폰소 5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그해 5월에 나바라를 떠나 나폴리 왕국으로 향했다. 이후에도 보몽 가문을 비롯한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위해 아라곤군과 격전을 치렀고, 1457년 3월 16일 카를로스를 나바라 국왕으로 선포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안 2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국왕에 오른 엔리케 4세는 바야돌리드 협약에서 합의된 대로 아라곤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나바라 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1454년에 후안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던 알폰소 5세는 조카를 위해 아우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후안과 카를로스의 갈등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렌시아 귀족이며 자신의 측근이었던 루이스 데스푸이그를 중재자로 보내 양자를 화해시키게 했다. 카를로스와 후안 모두 이에 동의해, 1458년 3월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알폰소 5세가 합의안을 제시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1458년 6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458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가 사망한 뒤 후안이 추안 2세로서 아라곤 국왕이 되었다. 이때 카를로스는 카탈루냐의 통치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후안 2세는 1460년 아내 후아나의 부추김에 따라 카를로스를 긴급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봉기의 규모에 경악한 후안 2세는 1461년 카를로스를 석방하고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했지만, 감옥에서 건강을 해친 카를로스는 1461년 9월 23일에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이에 나바라인들은 수리아 2세를 나바라 여왕으로 옹립하고 후안 2세에 대항했지만, 수리아 2세는 1464년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그 후 후안 2세가 나바라 왕위를 이어가다 1479년에 사망했고, 후안 2세와 수리아 1세의 막내딸 레오노르가 나바라 여왕으로 즉위했다.

수리아 1세는 죽기 전에 산타 마리아 데 우후에 교회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남편 후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내의 유해를 사망지 어딘가에 묻고 매장지를 숨겼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훗날 딸 레오노르가 나바라 여왕에 등극한 뒤 어머니의 유골을 수색한 끝에 일부 유해를 찾아내서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 성당에 안장했지만, 2008년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 결과 그 유해는 수리아 1세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유해의 소재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4. 가족 관계



[1] 페데리코의 지지자들은 시칠리아가 아라곤과 별개의 독자적인 왕을 가지길 원했다. [2]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자 후안의 여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