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채드윅 조지 하헤오 로언(Chadwick George Haheo Rowan) 아케보노 타로(曙 太郎) |
링네임 | 아케보노(Akebono) |
출생 | 1969년 5월 8일 |
미국 하와이 주 와이마날로 | |
사망 | 2024년 4월 11일[1] (향년 54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체중 | 204㎝ / 233㎏[2] |
종합격투기 전적 | 4전 4패 |
승 | 없음 |
패 | 3서브미션, 1판정 |
입식 전적 | 10전 1승 9패 |
승 | 1판정 |
패 | 5KO 4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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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kebono Taro(曙 太郎). 하와이 출신으로 하와이 원주민 혈통이었으며, 1996년 4월 22일에 일본으로 귀화했다.일본의 전직 스모 선수, 킥복서, 종합격투기 선수, 프로레슬러.
2. 스모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해 올스타 대표팀에 뽑혔을 정도로 기대받은 유망주였지만 하와이 퍼시픽 대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코치와 갈등이 생겨 결국 3개월 만에 중퇴하고 타카미야마 다이고로의 권유로 스모계에 입문했다.
1993년 3월, 스모의 프로 리그인 오즈모에서 제64대이자 외국인 최초로 요코즈나에 등극한 위대한 스모 선수였다.[3] # 스모에서는 거의 최종 보스 기믹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하와이 출신이며 약간 앞 세대 선수인 고니시키의 단순한 스모보다는 츳빠리를 이용한 박진감 넘치는 손기술, 거체를 이용한 요리키리 스타일 등 피지컬과 기술 모두 접목한 스모 선수였다. 덕분에 고니시키가 끝내 요코즈나에 오르지 못하고 바로 아랫 등급인 오제키에 머문 것과 달리 요코즈나 승진에도 성공했다.[4]
그와 동시에 입문한 일본 스모계의 초특급 유망주였던 와카노하나·다카노하나 형제의 요코즈나 승급을 저지하는 철의 장벽 기믹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며 또 한 명의 하와이 출신 요코즈나(제67대) 무사시마루[5]와 함께 '일본 대 하와이' 구도로 스모계의 흥행을 책임졌다.
당시 90년대 스모계는 아케보노와 와카·다카 형제[6]의 등장에 힘입어 기존의 시청률에서 40%나 올라갔을 정도로 스모 선수로서의 아케보노의 위엄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후 2001년 1월 22일, 고질적인 무릎 부상 악화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감독이 되어 후배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3. 입식격투기
그런데 갑자기 2003년 11월 5일, 일본 스모 협회에 퇴직서를 제출하더니, 11월 6일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뜬금없이 K-1에 참전한다고 발표하였다. 98년 결혼 당시 요코즈나가 외국 여성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후원회가 해산되었고, 은퇴 이후 스모 협회가 제공하는 배당금 만으로 생활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스모 요코즈나 출신이 격투기에 참전한건 아케보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아케보노의 격투기 진출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전적을 보면 알겠지만 승리와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K-1에서 유일하게 거둔 1승마저도 상대가 격투가로써의 전성기를 한참 넘긴 심판 카쿠다 노부아키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사실상 무승. 심지어 이 승리조차도 카쿠다가 흥행을 위해 일부러 져줬다는 루머가 있다. 사실상 워크다. 상식적으로 카쿠다 입장에서는 아웃파이팅만 해도 상대의 체력을 깎을 수 있다.
이 시합이 결정되었을 당시 카쿠다는 나이 43세로, 체중은 100㎏ 근처에 키도 171㎝ 정도로 이미 노화가 와서 신장도 줄었고(전성기 시절 174cm) 게다가 격투기 선수들은 워낙 수명이 짧다. 그렇기에 체급부터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슈를 만들기는 충분했는데, 카쿠다 자신은 젊었을때 부터 가라데 파이터로서 경력을 쌓았고( 극진공수도의 전일본 대회 순위권자) 앤디 훅 등과도 싸운 경력이 있다. 게다가 킥복싱을 배워 초창기 K-1에선 종종 자신이 직접 현역선수로 출전하기도 하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게다가 그 나이때에도 가라데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며, 실제로도 시합당시 도복을 벗자 나타난 나이를 초월한 우람한 근육에 관객들의 감탄사가 대단했다…즉, 훌륭한 자버였던 것.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아케보노는 카쿠다의 그냥 킥에 맞고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떡밥 매치도 간신히 집어먹은 것.
사실 이 시합도 굉장히 말이 많았던 게 아케보노는 거듭되는 연패로 스트레스성 탈모까지 생길 정도로 심한 부담감을 가진 상태였고, 다음 시합에서도 패배한다면 격투기에서 은퇴한다는 폭탄선언을 던져 k-1 사무국이 뒤집혀 버린 상황이었다. 흥행 머신이지만 아케보노의 기량이 워낙 기대 이하라 떡밥상대조차 찾기 쉽지 않았고, 결국 은퇴 후 k-1에서 일하던 카쿠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링에 올라 아케보노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세간에선 아케보노의 은퇴를 막기 위해 k-1 관계자로 일하던 카쿠다를 제물로 삼아 일부러 져주게 하여 아케보노의 위신을 세워주고 은퇴를 막은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 시합의 영상을 보면 카쿠다는 평소와는 달리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아케보노의 공격을 일부러 받아주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추가로 카쿠다는 이 경기 이후 독일의 마브릭 하비를 상대로 전성기 때 움직임으로 돌아와 1라운드에 KO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벤트 파이터로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있어서 밥 샙과의 경기는 42.5%라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홍만과는 총 3차례 대결했지만 전패했다. 이 둘의 대결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한국의 천하장사가 일본의 요코즈나를 이겼다는 카타르시스를 국내 격투기 팬들에게 안겨줬다.
최홍만과의 3차전까지 지면서 이후 아케보노는 K-1 입식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FEG 대표 타니가와 사다하루가 K-1 출전은 없을 것이라고 직접 못박았다.
2015년 연말에 격투기 이벤트 RIZIN에서 12년만에 밥 샙과 재대결하게 되었다. 다만, 밥 샙도 12년 전과 달리 종합격투기와 입식 대회에서 연전 연패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2년 넘게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지 않아서 경기 감각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 좋은 의미로) 막상막하의 결투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역시나 밥 샙에게 판정패. 상대가 아케보노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밥 샙은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공격을 했다. 그러나 기량이 떨어진 지 한참 된 밥 샙이어서 그런지 평소처럼 KO당하진 않았다.
4. 종합격투기
종합격투기에는 2004년에 데뷔했다. 데뷔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무려 UFC의 레전드 호이스 그레이시였는데 아마 엄청난 체급차로 꽤 비등한 경기가 될 거라 생각한 모양. 초반 거체를 이용해 호이스 그레이시를 테이크다운시켰지만 하프 가드 상태에서 파운딩도 제대로 못 넣다가 리스트 록에 걸려 패배했다. 이 경기는 '셔독 선정 괴상한 경기 베스트 10'에서 10위로 랭크되었다.이후 2005년 다이너마이트에서, 한국에선 최홍만의 MMA 데뷔전 상대로 유명한, 개그맨 출신 바비 올로건과 대결했는데 여기서도 졌다. 역시 초반에 올로건을 눕히고 암 트라이앵글을 걸어보았으나 결국 올로건은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체력이 다 빠져버려 노골적으로 등을 보이며 이리저리 도망가는 올로건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짤짤이에 고전하며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의 시합을 보여준 뒤 판정패를 당했다.[8]
2006년 히어로즈에서 돈 프라이의 복귀전 상대로 낙점되었다. 밥 샙, 최홍만과 마찬가지로 드물게 자신에게 인파이팅을 시도하는 프라이를 상대로 클린치 상황에서 의외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라운드 막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프라이가 바로 길로틴 초크을 걸어 패배를 당했다.
K-1에서는 연패의 사슬을 끊을 제물로 브라질의 약체 거인 자이언트 실바를 불러들여 싸우게 했지만 스탠딩 기무라에 잡혀 초살당하면서 오히려 자이언트 실바의 연패를 끊었다. 이 패배를 통해 그 한계가 확실히 드러났다. 실바가 아케보노에게 대놓고 기무라를 잡았는데 풀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이언트 실바에게 패한 후 타니가와 사다하루 프로듀서는 K-1 무대에 다시 서고 싶으면 곰과 싸워서 이기고 와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상의 퇴출 선언이나 다름 없는 내용.
2007년 다이너마이트 USA에 출전 예정이었으나 전적이 너무 안좋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5. 프로레슬링
위의 인물이 아케보노이고 사진의 아래에 있는 남자는 무토 케이지의 기믹인 그레이트 무타다.
종합격투기에서는 비록 처참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프로레슬러로 전업하고 나서는 오히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무토 케이지에게 교육을 받은 뒤 2005년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하였다. 데뷔전에서는 그레이트 무타에게 독무를 맞으며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이후로 전일본 쪽에는 꾸준히 참가했다. 게다가 WWE 레슬매니아 21에서 빅 쇼와 스모매치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HUSTLE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레이트 무타의 아들[9]이란 기믹으로 나타났다. 이때의 명의는 보노쨩.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경위가 상당히 충격적인데, 무타가 인링사마[10]의 사타구니[11]에 독안개를 뿜었고 그대로 인링사마는 실신. 그 때문에 임신했다는 설정이 붙더니 얼마 뒤 태어난게 보노짱이다.[12] 뭐 이딴 설정이 다 있나 싶지만 원래 HUSTLE이 이렇게 4차원 콘셉트의 프로레슬링 단체이다. 이후 무타, 인링과 함께 훈훈한 가족 태그팀으로 나오기도 했다. 본 항목의 메인 사진도 그레이트 무타와 동일한 컨샙의 그레이트 보노라는 캐릭터로 등장했을 시의 모습.
2008년부터는 역시 스모 선수 출신으로 데뷔한 신인 프로레슬러인 하마 료타와 SMOP[13]이란 태그팀을 결성해 2013년까지 같이 활동했는데, 이 둘의 태그는 2009년 도쿄 스포츠가 주최하는 프로레슬링 대상에서 최우수 태그 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태그팀 타이틀, 드래곤 게이트에서 3인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했다. 하시모토 신야가 세웠던 ZERO1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고 2012년에는 ZERO1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했다.
데뷔한 후 약 8년 동안 프리랜서 신분으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러나 전일본 대량이탈 사건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선수가 많이 줄어들자, 2013년 9월에는 전일본에 정식 입단했다. 입단하자마자 왕도 토너먼트에서 우승했고, 우승자 자격으로 스와마에게 도전해 10월 27일에 삼관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5년 들어서 전일본 사장 아키야마 쥰과의 삼관 해비급 타이틀전에서 패배한 이후, 프리 선언과 격투기 참전을 선언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전일본의 바바 모토코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레슬링 단체인 '왕도' 설립을 발표했다.
6. 투병 생활
2017년 4월 11일, 급성 심부전으로 입원했다. 평소와 같이 거친 프로레슬링 경기를 마치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느닷없이 가슴에 심한 통증이 찾아와 그 다음날 겨우겨우 근처 병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심장이 37분이나 멈추는 바람에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다가 겨우 소생할 수 있었다.이후 2018년 투병 중인 모습이 TV에 방송되었다. # 210킬로에 달했던 몸무게는 투병으로 인해 140㎏까지 감소했고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신체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다 하며 당연히 외출도 무리였다. 게다가 심장마비로 뇌까지 데미지를 입어서 기억장애로 인해 자신의 자식도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그나마 위 방송에서는 옛 스모 라이벌이자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하나다 마사루[14]가 문병을 오자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는 등 완전히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종합격투기에서는 시련을 겪었지만 그래도 스모계에서는 올타임 레전드 중 한 명으로 스모 역사에 한획을 그었고,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아케보노의 무력한 모습에 지인들과 팬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6.1. 사망
결국 2024년 4월 1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심부전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11일에 확인되었다. 향년 54세. # 또한 아케보노의 가족들과 스모 및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별식을 거행했다.6.1.1. 미국
- 램 이매뉴얼 주일미국대사는 자신의 X 계정에 추모글을 올렸다. 아케보노가 일본에서 35년 동안 미국과 제2의 고향인 일본을 향한 문화적인 유대감을 강화시켰다며 그의 가족, 친구, 전 세계 스모 팬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
- WWE도 X 계정에 아케보노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6.1.2. 일본
- 일본 올림픽 공식 X 계정이 추모글을 올렸다. #
- 전직 프로레슬러인 무토 케이지는 자신의 X 계정을 통해 진지한 자세로 프로레슬링을 느낀 것은 물론 무토 자신이 은퇴하기 전 지금 한번 더 싸우고 싶었으나 결국에는 이루지 못했다며 애도를 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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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보노의 스모 동기 입문생 타카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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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수많은 싸움과의 추억이 있지만, 스모 교습소에서 반년 동안 연습했던 추억이 드러났습니다.
도효는 3개가 있는데 130명 정도 A,B,C로 나뉘어 쓰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A 도효에서 적반하장으로 맞붙는데 힘을 썼습니다.
하와이 제도에서 일본으로 오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문화를 느끼고 수많은 고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와이를 순회했을 때 고향 출신 가족들도 오셔셔 온화한 인사를 주고받은 건 새로운 기억과도 같이 떠오릅니다.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은 인생관이었다고 느끼지만 이제 마음 편히 쉬십시요.
제65대 요코즈나 타카노하나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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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보노의 스모 동기 입문생 와카노하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현재 아케보노의 부고 소식이 나왔을 즈음에 언급을 요구받고 있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충격에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글로만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보내야 할 말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서로 협회에서 떠나 열심히 해 왔지만
떠나 있어도 항상 마음에 있었습니다.
선의의 경쟁에 전념하며 라이벌로서 싸워 왔던 애정의 몫이 깊었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또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고
나이를 먹으면 하와이의 나무 밑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만나자고 아케보노와 말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지 못해서 그저 허전합니다.
천천히 기다려
하와이 나무 밑에서 다시 만나자
만나러 갈게}}}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도 K-1을 본 격투팬들 사이에서 추모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7. 기타
- 아케보노의 격투 활동은 여러모로 실패한 사례로 꼽혔다. 화젯거리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량도 최악이었거니와 발전을 위해 노력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안티만 늘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2ch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지는 게 당연한 선수라는 야유를 담아서 마케보노(負け/마케:패배)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한국에서의 별명은 약해보노.
- 2009년에 K-1에서 그의 고향 하와이에서 열린 대회의 프로모터를 그에게 맡긴 적이 있었는데, 대진표가 나온 순간부터 까였다. 미국 GP 수준을 뭐 이따위로 만들어놨냐는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흥행 실적도 시원치 않았기에 그 후로 프로모터 자격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 2006년 경 그의 어머니가 암으로 시한부였을 때, 아케보노는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가시기 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 브록 레스너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했을 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선수였다. 브록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를 팬들에게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기를 바라는 훌륭한 선수였던데다가 성격도 좋았다고. 실제로도 서로 프로레슬링으로 붙은 경험이 있었다.
- 한때는 스테이크 하우스를 운영했지만 투병 생활 이후 폐점했다. #
- 한국인 파이터 김재훈이 연전연패를 하자, 아케보노가 떠오른다는 소리가 많았다. 단 아케보노는 스모에서 최고 등급인 요코즈나까지 올라갔으며 인성적인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아케보노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8. 둘러보기
<colbgcolor=black><colcolor=#000000> | |||||
나가타 유지 | |||||
{{{#!folding 【 전 멤버 】 | 아케보노 | 캡틴 뉴 재팬 | 킹 파레 | ||
슈퍼 스트롱 머신 | 이노우에 와타루 |
역대 신춘 배틀로얄 우승자 | ||||
2009 | → | 2010 | → | 2011 |
조디악 | → | 아케보노 타로 | → | 무토 케이지 |
2014 | → | 2015 | → | 2016 |
오오모리 타카오 | → | 아케보노 타로 | → | 아오야기 유마 |
역대 챔피언 카니발 우승자 | ||||
2014 | → | 2015 | → | 2016 |
오오모리 타카오 | → | 아케보노 | → | 세키모토 다이스케 |
역대 왕도 토너먼트 우승자 | ||||
창설 | → | 2013 | → | 2014 |
- | → | 아케보노 | → | 시오자키 고 |
[1]
참조
[2]
현역시절, 당시 건강악화로 140㎏까지 급감했다.
[3]
정확하게는 1월 대회 후에 요코즈나로 승진했고, 3월 대회 때부터 요코즈나로서 출전했다.
[4]
1992년 5월 대회 후 오제키에 승진했으며, 다음해인 1993년 1월 대회에서 2연속 우승을 달성하고 요코즈나로 승진했다. 이는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와카·다카 형제나 무사시마루가 오제키에 오른 후 요코즈나 승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과 달리 상당히 빠르게 승진에 성공한 케이스이다.
[5]
미국령 사모아 태생이지만 어릴 때 하와이로 이주했다.
[6]
특히 다카노하나는 사상 최연소 오제키 기록을 썼으며 요코즈나 시절엔 그야말로 일본 스모계의 자존심이었고, 형인 와카노하나도 동생의 후광에 다소 가려진 선수였지만 동생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최후의 일본인 요코즈나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레전드였다. 와카노하나가 요코즈나로 승진한 후, 19년 동안이나 일본인 요코즈나가 없었던 걸 보면 이들의 업적과 실력이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년 만에 일본인 요코즈나가 된 키세노사토는 기준에도 다소 미달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협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요코즈나가 될 수 있었지만, 와카·다카 형제는 몇 번이고 요코즈나의 문턱에서 아케보노에게 막혀 우승을 놓쳤으나, 기어코 쟁취한 선수들이었다.
[7]
정확히 2차전은
슛복싱 룰로 치렀다. 밀어내고 던져버리는 스모의 정점에 올랐던 아케보노에게 어드벤티지를 준 룰이었던 셈
[8]
사실, 바비 올로건은 개그맨 출신이긴 해도 데뷔전에서 입식 선수이긴 하지만
시릴 아비디를 꺾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만큼 아케보노 입장에선 만만한 선수도 아니었다.
[9]
실제로는 7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즉, 정확히는 그레이트 무타의 동생이라고 볼 수 있다.
[10]
대만 출신 그라비아 아이돌 인링 오브 죠이토이가 여왕님 컨샙의 기믹으로 활동하던 캐릭터.
[11]
인링은 대전 상대 위에 올라타고 M자 개각을 하는것이 피니쉬 홀드였다.
[12]
한마디로 인링이 낳은 아기. 보노짱은 첫등장 시에
공갈젖꼭지까지 물고 나왔다. OME
[13]
SMAP과
스모를 결합한 말장난.
[14]
제66대 요코즈나 와카노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