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이묭의 여담을 정리한 문서.2. 가족
-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아이묭, 여동생, 남동생 3명의 8인 대가족이다.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가족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집안 전체가 대가족이다. 사촌이 20명이 넘으며, 조카도 많다. 언니와 여동생은 이미 결혼을 해서 각각 아이를 다섯과 넷을 낳았다. (2023년 기준)
- 아버지 집안이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오키나와 음악을 많이 들었다. 아이묭 가족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아이를 많이 낳았다고 하는데, 오키나와 출신이라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2위와의 격차도 크다.
- 한 살 위의 언니가 노래를 제일 잘하고, 아이묭과 여동생은 그보다 실력이 못해서, 할머니로부터 둘 다 음치라는 소리를 어렸을 때 듣고 자랐다.[1] 목욕하면서 노래를 같이 연습하는 등, 음악적인 집안 분위기였다. 가족 전체가 노래를 잘 한다.
- 6남매 중 본인만 음악에 흥미를 가져 기타를 배우는 등 음악 쪽으로 진출했다. 6남매 중 막내가 2020년에 들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묭이 영상 통화로 愛を伝えたいだとか를 치는 법을 알려 준 적도 있는데, 지금(2022)은 기타를 굉장히 잘 치고 노래도 잘 한다고 한다.
- 아버지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웬만한 악기는 다 연주할 수 있었다. 특히 어쿠스틱 기타를 잘 쳤다. 집에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에 민속 악기까지 있었으며, 아버지가 소장한 레코드가 워낙에 많아서 TSUTAYA 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버지 컬렉션에서 처음으로 귀기울여 들어 본 아티스트는 비틀즈였지만, 처음으로 빠져든 것은 하마다 쇼고의 <J.BOY> 앨범이었다.
-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아버지를 뽑은 적이 있다. 박식한 남자가 이상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남성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다. 여러 인터뷰를 보면, 아버지를 거의 완벽한 남자이자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아빠 같은 남자를 잡다니 엄마가 얄밉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결혼하고 싶다고.
3. 출신지
- 일본 내에서 니시노미야의 이미지는 '잘사는 동네'이다. 아이묭은 형제도 많았기 때문에, 돈 있는 집 딸이 아니냐는 추측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경제적으로 유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강남에도 다 잘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 니시노미야의 본가가 한신 타이거스의 홈 구장인 고시엔 구장과 매우 가깝다. 출신지를 물으면 자동적으로 '니시노미야입니다, 고시엔까지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할 정도이다. 본가 옥상에서 야구장이 보인다. 본인 출신지와 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고시엔 구장에 대한 언급을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거의 살던 동네 그 자체. 집과 학교 사이에 고시엔 구장이 있었다. 2022년의 고시엔 단독공연이 아이묭에게 금의환향이라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이유이다.
- 말할 때 고향의 간사이벤 사투리가 역력하다. 억양이나 어휘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4. 학창 시절
-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가 잘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는 노트 필기도 열심히 하면서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하는데도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고등학교도 간신히 진학했다고 하는데, 2학년을 마치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겨야 했을 때는 충격을 받아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 진짜 바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그런데도 부모님은 결코 야단을 치시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고, '공부가 안 되더라도, 뭔가 하나는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꼭 있을 거다'라며 격려를 해주셨다.
- 중학생 때 육상부에 가입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부부장도 맡았다고 한다. 종목은 100M 허들. 22년 7월 출신지를 돌아보는 방송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은사의 영상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 중학교 때 수학 여행에서 육상부원들 앞에서 개구리옷을 입고 코다 쿠미의 '큐티하니'를 불렀더니, '노래 엄청 잘하네'라는 칭찬들을 해줘서 자신이 생겼다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작사를 시작했던 중학생 때부터 작문 실력이 좋았다. 독후감을 잘 썼다고. 한 번은, 친구에 대해서 쓴 작문이 높은 평가를 받아서 무언가의 대표로 중국에 파견될 뻔 했었다고 한다.
- 원래 미술 쪽으로 진학하려고 했다. 공부는 못했지만 미술 시간에는 칭찬받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종이를 오려 내 그림을 만드는 것을 잘한다고 한다.
- 다녔던 고등학교는 현립 니시노미야미나미고등학교( 兵庫県立西宮南高等学校)였다. 이 학교에 다니던 아이묭은 당시 "공부하는 의미를 이해 못하겠다."며 보건실로 자주 수업을 빠진 적이 늘어나면서, 결국에는 퇴학당했다. 2학년 때 일시적으로 학교를 그만둔 적도 있어, 출석 일수 부족으로 인해 유급 또는 자퇴를 선택해야 했다. 이지메를 당했다거나 반항을 했던 것은 아니고, 단지 교실에 있고 싶지 않았었다고 한다.
- 고등학교는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에게 부탁하여 정시제(定時制) 고등학교인 현립 니시노미야코후고등학교( 兵庫県立西宮香風高等学校)로 옮겼다.[2] 원래도 친구를 잘 못 사귀는 편이였는데, 학교를 옮기고 나서는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한다고.
- 고등학교 2학년~3학년 시기에 출석 일수 부족, 유급, 중퇴, 전학 등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진짜 소중한 친구인지를 깨달았다고. 아이묭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ちゃん 이라는 친구도 이 시절에 돈독해진 친구라고 한다. 자립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그때였다.
5. 데뷔 경위
-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후, 취직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프리터로서 돈을 벌면서 음악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진학을 했기 때문에, 혼자만 이래도 되는지, 통신 교육으로 자격증이라도 따야 할지 고민했다. 이 시절의 심정을 19歳になりたくない(19살이 되고 싶지 않아)에 담았다. 프로 뮤지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고,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음악을 거의 포기했던 시기에 운명처럼 기획사에서 트위터를 통해 연락을 주었다.
- 음악계는 한 줌의 사람들만 성공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였지만,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 도전을 결심했다.
- 기획사에 소속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수입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기에, 인디즈 데뷔 후에 도쿄로 상경하기 전까지 계속 프리터로서 돈을 벌었다. 대가족이었기에 집에도 돈을 조금 보탰다. 경마장이나 이벤트 행사, 음악 페스티벌 등에 가는 푸드트럭을 메인으로, 음식점 계통에서 일했다. 닭꼬치/ 야키토리집, 불고기/ 야키니쿠집, 소바집, 등. 특히 야키니쿠집에서는 서빙을 한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직접 고기를 다뤘다. 그래서 고기를 잘 썬다고 한다. 일했던 푸드트럭은 가라아게나 야키소바를 파는 곳이었는데[3], 상사와 동료들과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갑자기 음악 관련 스케줄이 생겨서 일을 못 나가는 경우에도, 괜찮다며 이해해 주었다. 푸드트럭이 경마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묭으로선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밖에도, 나고야나 규슈까지 가는 경우도 있어서 즐거웠다고 한다. 음악 페스티벌에 갔을 때는, 다음에는 제가 저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손님에게 선언하기도 했다.
- 현 소속사인 unBORDE 의 대표인 스즈키 료마가 아이묭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서둘러 데뷔시키지 않고 충분한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게 했으며, 아이묭의 음악과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다나카 유스케田中ユウスケ 라는 스타 프로듀서를 붙여 주었다. 기본 편성을 밴드로 한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아이묭이 이렇게 빠르게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아티스트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 돌이켜 보면, 소속사에서는 작든 크든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묭 본인은 소속사에 들어간 후에도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금방 버려지겠지,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으로 계속 불안했다. 다만 어쨌든 줄기차게 노래를 만들었다.
- 아티스트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는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고 한다. 2015년 인디즈 데뷔 후 순조롭게 히트곡을 내면서 3년만에 정상급 아티스트들의 무대인 홍백가합전에까지 나간 것을 두고, 주변에서는 짧은 시간에 어려움 없이 성공을 거뒀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느냐 살아남느냐의 각오로 그 3년간 긴장하면서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평을 들을 때 화가 난다고 한다. 도저히 더 이상 이렇게는 못 하겠다는 순간까지 간 적도 많았다고. 음악은 승패가 갈리는 게임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 스무 살이던 2015년 인디즈 데뷔의 약 1년 후 메이저 데뷔가 결정된 시점에서, 도쿄에 오가는 교통비도 아낄 겸[4] 상경했다. 돈을 절약하고자 외삼촌이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할머니와 함께 밤새 8시간을 달려서 이삿짐과 함께 도쿄에 올라갔다. 워낙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지내던 시절이라, 신칸센을 타고 상경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도중에 차가 고장 나서 집으로 다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나가부치 츠요시의 東京와 아라시의 GUTS! 를 들었다. 밤 10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 6시에 도착했기 때문에, 올라가던 고속도로의 풍경 같은 것은 없었고 캄캄했던 기억뿐이라고 한다.
- 상경 후에 처음 살았던 집이 채광이 좋지 않았다.[5] 이 시절을 회상할 때 집에 볕이 잘 안 들었다는 이야기를 유독 자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당시 우울하게 지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집에서 출세작인 < 君はロックを聴かない>를 만들었다.
- 도쿄에서는 시부야 TSUTAYA 앞 등지에서 버스킹을 했지만 사람이 잘 모이지 않았고, 라이브하우스에서도 관객이 잘 모이지 않았는데, 두어 살 어린 교복 입은 여고생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도쿄로 이사 후, 한동안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힘들었는데 친구도 가족도 없으니 향수병에 걸렸다고 하며 매일 바쁘게 음악 활동을 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우울한 때가 많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가수가 되고 싶었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 시절 만든 노래들은 어두운 곡들이 많다. 그러던 중 < 君はロックを聴かない>를 작곡하고서는 싱어송라이터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 막상 도쿄에 올라 오니, 간사이 지역에 비해서 뮤지션으로서의 기회가 압도적으로 많았더라고 한다. 단적으로 아이묭의 고향인 니시노미야에는 당시에 라이브하우스도 없었다. 간사이 지역에서도 뮤지션으로 웬만큼 활동하고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도쿄에 정착을 해보니 기회의 양이 차원이 달랐다고 한다.
6. 기타(Guitar)
- 아이묭의 아버지는, 기타를 누구에게 배우기보다는 독학할 것을 권했다.
- 어쿠스틱 기타를 치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을 통해서 친해졌던 Brent라는 이름의 미국인 영어 선생님[7]이 미국으로 다시 가면서 기타를 주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저도 어쿠스틱 기타 치고 싶은데" 라고 선생님에게 말하곤 했었다. "이삿짐으로 부치는 것보다 미국에 가서 새로 사는 것이 싸다" 라면서 주셨다. 교복을 입고 자기 몸 만큼이나 큰 기타를 둘러메고 들떠서 집으로 돌아가던 것을 기억한다고. 본인은 자신의 10대에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기타를 받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한다.
- 선생님이 주셨던 기타는 야마하의 드레드넛 바디 기타[8][9][10]이다. 모델은 FG 시리즈로 보인다[11]. 60년대부터 일본의 포크 음악과 함께하며[12] 야마하 통기타를 대표해온 인기 라인이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FG 시리즈 중에서는 FG-830이 가장 가깝다. 상판도 통판이며 썩 괜찮은 기타이다.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준비하던 고등학교 때까지도 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2022년)은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막내 남동생이 사용하고 있다.
-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첫 기타를 다섯 번째 디지털 싱글인 < ノット・オーケー> 의 뮤직비디오에 사용했다. 처음으로 이 기타를 공적인 자리에서 노출한 것이다.
- 아이묭이 사용한 기타들은 여러 브랜드가 있다. 우선, 처음으로 사용한 어쿠스틱 기타는, 위에서 설명한 야마하 FG 시리즈이다. 그 후에, 고등학교 때 타카미네의 고급형 일렉트릭 어쿠스틱(세미어쿠스틱) 기타 PT-507[13] 영상[14][15][16][17] 한 대를 더 구했다. 그 후, 소속사가 생기고 나서 레코딩을 의식하면서 조금 더 고급형인 History NT301/CA 기타[18]를 구하여 인디즈 시절부터 애용[19]했다. 버스킹하던 시절에 이 기타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메이저 데뷔 후에도 History 기타를 주로 사용[20]하다가, 2019년부터는 Gibson J-45 Standard 가 메인 기타가 되었다. 그 외에도 History NT-C/R, Martin 000Jr-10[21], 0-18[22], 000-28[23], Taylor[24] 등을 사용한다.
- 공연에서는 메인 기타인 Gibson J-45 를 애용하고, PV 등에서는 Martin 기타들을 쓰는 경향이 있다. 어두운 톤(썬버스트)의 Gibson 보다는 밝은 색상의 Martin 기타들이 영상 만들기에 더 좋다고 느끼는 듯. 더불어 J-45 보다는 000-28 등의 Martin 계열 기타들이 더 컴팩트하기 때문에 촬영 시에 좀 더 자유로운 포즈들이 가능한 점도 있을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기타 메이커나 기종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25] 기타도 한 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일렉트릭 기타는 몇 번 쳐보려고 했지만, 무거워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 기타를 처음 만지게 되면 Cadd9 코드부터 잡는 버릇이 있다.
7. 작곡
- 어쿠스틱 기타를 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1~2학년 때쯤, 작사 작곡을 시작했다. 어차피 자기는 공부가 약하니까 기타 공부를 하기보다, 노래부터 만들자고 생각했다.
- 위의 기타 사진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 홈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뮤지션이 되기 위한 노력을 했다.
- 노래를 만들 때는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스마트폰에 녹음한다.
- 기타를 치면서 가사와 멜로디를 동시에 만든다.
- 노래를 만드는 시간대는 보통 낮이다. 저녁이나 밤에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 다작에 가까운 스타일인데도, 2023년 기준으로 미발표곡이 400곡을 넘을 정도로 싱어송라이터로서 왕성한 창작력을 가지고 있다. 많게는 한달에 10곡, 하루에 3곡을 쓰기도 한다.
- 노래 제목을 14글자에 맞춰서 짓는 걸 좋아한다. #
- 작곡의 영감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얻는다고 한다.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목욕할 때 같이 항상 생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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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안 써질 때는 무리하지 않고, 그냥 그날은 아무것도 안 한다.
8. 한국 관련
- 한국과 K-POP, 특히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를 굉장히 좋아했었다.[26][27][28][29][30][31][32] 아이묭이라는 별명도, 당시 K-POP에 푹 빠져 있던 아이묭에게 친구가 그렇게 한국이 좋으면 한국인스러운 이름을 만들어 주겠다며 본명인 모리이 아이미의 아이미와 한국스러운 울림인 용(?) 을 합쳐 아이묭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라고 과거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밝힌 적 있다. 다만 지금은 K-POP에 대한 열광적인 사랑은 졸업(?)했다고 한다.[33]
-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묭'이 왜 한국스러운 느낌인 것인지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 이름, 특히 여자들 이름이 일본어로는 ヨン(욘/용)으로 표기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용'을 한국적이라고 느낀다. 가령 정/전/영/연/현/형/경/용 등이 모두 ~ヨン(용)이 된다. 배용준은 욘(용)사마고, 이정현은 이죵(죤)횬[34], 뷔 김태형은 기무테횽이 된다. TWICE에도 채영(체용), 나연(나용)이 있고, 아이묭이 중학생이었을 당시 2010년에 일본에서 데뷔한 카라와 소녀시대의 14명 중 승연(슨용), 지영(지용), 태연(테용), 효연(효용), 수영(스용), 서현(소횽)까지 무려 6명이나 이름이 ヨン(용)으로 끝나므로, 일본인들은 '아이미+용=아이묭'에서 한국스러운 느낌을 받는 것이다.[35][36]
- 2018년 타이페이 공연시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장 좋아했던 K-POP 아이돌은 동방신기이고[37], 고등학교 시절에 여러 번 공연을 보러 갔었다. 아직도 동방신기 음악을 듣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너무나 잘생긴 창민. 아직도 동방신기를 우러러보기 때문에 감히 콜라보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 슈퍼주니어의 SUPER SHOW 4 오사카돔 공연을 2011년 12월 11일에 관람한 것으로 보인다[38]. 그 시기에 사용하던 무명시절 트위터 계정명이 SS4 13日参戦 인 것으로 보아 다음해인 2012년 5월 13일의 도쿄돔 공연까지 관람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소바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도쿄까지 K-POP 원정 관람을 다녔다. 학교 시험을 빼먹고 K-POP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다.
- 아이묭이 점점 메이저 아티스트가 되면서, 예명의 한국적 유래나 과거 K-POP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고시엔 구장 부근 출신이고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굳이 한신 타이거스 팬임을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 일본 내에서 재일 한국인 설이 돌기도 했다. 예명이 한국적인 느낌이고, 출신지가 재일 교포들이 많은 간사이이며, 피부가 좋고[39] 얼굴과 골격에 일본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 사람 느낌이 있다는 게 그 이유이다. 한국인이냐고 직접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듯하다. 다시다를 '최강의 조미료'라고 생각한다면서 여러 요리에 애용하고 있다. 아침 식사로 다시다를 넣은 한국풍 계란 죽[40]을 종종 만들어 먹는다. 또한 K-POP에 한창 빠져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에 K-POP 공연 영상을 보면서 친구들과 떡볶이, 호떡, 잡채를 만들어 먹은 적도 있다[41][42]. 2023년 7월경에 TXT로부터 꿀유자차를 선물받고서 사진을 찍었다.[43]
- 조카들이 아이묭에게 아이묭이 방탄소년단과 합동 공연을 할 때까지는 아이묭을 인정하지 못 한다고 말해서 너무하다는 트윗을 올린 적이 있다.
- 2023년 6월에 처음으로 한국 여행을 왔다. 친한 친구인 TWICE의 채영이 소개해 준 가게 등을 다니며 즐겁게 보냈다.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무한 연어 육회 식당에도 간 듯하다. 이 여행을 계기로 해외여행의 즐거움에 눈을 떠서, 더 많은 나라들에 가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 2024년 4월 중순에 한국에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시 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떡볶이, 김밥, 닭한마리, 간장 게장, 막국수, 낙곱새 등을 먹었다. 방문식당목록 실내포차에서 술도 마셨고, 더현대 서울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묭 인스타 친한 친구인 채영, 모모와도 스티커 사진 등을 함께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링크
9. 좋아하는 것
- 도라에몽을 매우 좋아한다.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에서 생일을 보낸 적도 있을 정도. 극장판을 매년 빠뜨리지 않고 관람한다.
- 지브리 작품을 좋아한다. 전부 좋아하지만 굳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자면 천공의 성 라퓨타. 아이묭의 집 부엌엔 지브리 작품들에서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장면 사진이 붙어 있다. Casa BRUTUS 와 함께 특집호를 발간했다. 결국 2023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성우로 캐스팅되며 성덕이 되었다.
- 야구를 좋아한다. 니시노미야의 본가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인 고시엔 구장과 매우 가까우며, 아버지가 한신의 열렬한 팬이라 어렸을 때부터 매일같이 야구 중계를 접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의 라이벌전을 응원복을 입고 직접 보러 가거나 고시엔 고교 야구를 관람하러 가곤 했다.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히야마 신지로.[46] 2022년 고시엔 구장 라이브를 앞두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할 때, 히야마 신지로가 서프라이즈 응원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아이묭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감격하며 히야마 신지로의 응원가를 그 자리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47]. 지금은 한신을 특별히 응원한다기보다는 여러 팀의 경기를 다 재미있게 본다. 사사키 로키와도 친분이 있다.
- 야구뿐 아니라 여러 스포츠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 주로 투어 중에 책을 많이 읽는다. 이동 시간이 길기 때문에 3권 정도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물을 좋아하고, 다자이 오사무도 많이 읽었다. 불행한 여자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을 좋아하며, 행복한 연애 소설이나 영화 등은 안 본다고 한다. 에로틱한 표현을 배우는 차원에서 관능 소설도 많이 읽어 봤다.[48] 그 외에도, 명언집이나 시집도 자주 읽는다.
-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예술가는 오카모토 다로라고 한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오사카에 있는 태양의 탑의 작가이며 미술 작품과 글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의 사상과 글에 큰 위로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묭은 태양의 탑 아래에서 노래하는 것이 꿈 중 하나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 태양의 탑을 제목으로 한 tower of the sun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가사를 통해 자신이 매우 힘들었던 시절을 토로하고 있다. 2016년에 시부야역에 설치된 오카모토 다로의 작품인 내일의 신화(明日の神話) 아래에서 今日の芸術[49]의 버스킹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무크지인 Casa BRUTUS 와 함께 오카모토 다로 x 아이묭 특집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 여유 시간이 나면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 맥주를 좋아해서 하루에 2캔 정도 마신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도 맥주 사진을 많이 올리며 투어 공연이 끝날 때마다 밴드 멤버들과 맥주를 마시는 듯하다. 자기 얼굴만한 맥주도 마셨다.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린 맥주이고,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창란젓[50].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즐기는 편이다. 집에 여러 종류의 술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사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51]
- 싫어하는 음식은 뼈가 많은 구운 생선, 버섯, 팥소 그리고 녹차이다. 버섯은 맛도 별로고, 어릴 때 새송이버섯이 목에 걸린 적이 있어서 싫어한다. 생선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먹는 사진이나 영상에 생선이 들어간 음식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 중국 요리에 자주 들어가는 팔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밴드 신세이 카맛테쨩의 팬이라서 팬레터를 쓰는 기획에 참가하기도 했다.
10. 다른 연예인들과의 교류
- 기본적으로 다른 아티스트나 연예인들과 많이 알고 지내는 편은 아니다.
- 배우 스다 마사키와 가수 이시자키 휴이와 친하다. 스다와 이시자키가 야밤에 공원에서 놀던 중에 그런 곳으로 여자애를 부르긴 좀 그랬지만, 아이묭은 괜찮을 것 같아서 불렀는데 진짜 나왔다고 한다.
- 2022 홍백가합전에서 TWICE와 같이 사진을 찍어서 트위터에 올리고, 인스타그램으로도 채영과 교류했다. TWICE의, 특히 채영의 팬이다. 23년 1월 1일 트윗 인스타교류1 인스타교류2
- 2023년 1월 31일에 TWICE의 채영과 커플 기타, 커플 티셔츠를 맞추고 시모키타자와에서 놀러가서 같이 찍은 사진을 각자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기종은 Fender의 American Acoustasonic Telecaster 이며,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합친 정도의 모델이다. 아이묭은 내추럴 색상을 선택했다. 공연이나 뮤직 비디오에서 사용한 적은 아직 없다. 채영은 그 때 구매한 기타를 투어에서 솔로무대에서 사용하고 있다. 아이묭 1월 31일 인스타 채영 1월 31일 인스타
- 2023년 5월 TWICE 월드투어에 채영의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 처음 가봤다고 한다. TWICE도 아이묭의 대표곡에 맞추어 춤을 췄다. #
11. 그 외
- 가수지망생 고등학생이었던 2012년 3월에 예명을 아이묭에서 아이뽕으로 바꿀지 고민했었다.
- 대만에서는 愛繆(àimiào, 아이먀오) 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 메이저 데뷔 이후 앨범의 아트워크와 일명 very short movie(혹은 very short teaser)라는 이름으로 올라오는 티저 영상은 전부 아티스트 톤다바야시 란(とんだ林蘭)이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아이묭의 비주얼적인 면도 컨설팅해 주고 있다.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경우에는 아이돌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무대에서는 절대 치마를 입지 않는 등의 컨셉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 팬들도 많다고 자평한다.
- 뮤지션이 되지 않았다면 빵집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렸을 적 꿈이 빵집 주인이었다. 그러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는 못했다. 빵집은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학생 신분으로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야후! 뉴스를 보고, 아침 식사로는 주로 식빵과 계란후라이를 먹는다.
-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묻는 질문에 볼에 있는 점이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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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초단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 키에 비해 발 사이즈가 큰 편으로 255mm이다.
- 이마가 넓다. 그래서인지 앞머리를 깐 적이 많이 없으며 자신도 이마가 넓다고 했다. #
- 운전면허가 없다. 따라서 이동할때는 매니저가 차를 운전한다.
- 치아 교정을 했다. 2020년 영상과 2016년 영상을 비교해보면 토끼 앞니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래 치열이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교정을 하며 치열 때문에 돌출 입처럼 보이던 입술과 턱선이 정리되며 외모 보정 효과를 상당히 잘 봤다.
- 몸이 유연하다. 그래서 유연성을 과시하는 듯한 포즈를 자주 취한다. 선 자세에서 브릿지가 가능하다.
- 곱슬머리다. 고등학교 때는 돈키호테에서 산 2천엔 짜리 고데기로 머리를 스트레이트로 펴고 다녔지만, 어른이 되니까 곱슬머리가 오히려 편한 면이 있다고 한다.
- 목소리가 여자치고는 좀 낮고 허스키한 편이라, 어렸을 때는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극복했다.
- 굉장히 밝은 성격이다. 더불어 눈물도 많다. 낯가림도 없다. 예전에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지만 '낯가림 많은 아이'로 소개되는 것이 너무 싫어서 성격을 바꿨다. 스스로 나는 낯가림이 없다라고 계속 말하다보니 성격이 바뀌었다.
- 굉장히 수다스러운 편이다. 소속사 밴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끊임없는 수다를 펼친다. 주변에서 말을 재미있게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해줘서, 스스로 나 좀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라면서 콧대가 높아진 상태라고.
- 君はロックを聴かない의 자켓 사진을 촬영할 때, 햇볕이 너무 강해서 햇빛 알레르기가 올라왔었다.
-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27기 신혼여행 허리케인 ~사라진 아빠~에 카메오로 등장했다.[57]
- 아이묭 사전 시리즈를 종종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한다.
- 2023년 8월 28일 본인의 SNS를 통해 신용카드 부정 사용 피해를 입었고 부정 사용에 대해서 분노했다. #
- 일본의 록밴드 크리프하이프의 보컬 오자키 세카이칸과 교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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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이묭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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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야간 고등학교와 비슷하다. 다만 아이묭은 아침반을 다녔다.
TWICE 의
미나와
AKB48의
야마네 스즈하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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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아게를 담는 것이 워낙 빨라서 '가라아게 머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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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도쿄를 오가던 심정이 夜行バス(야행버스)의 가사에 담겨 있다. 국내 교통비가 비싼 일본에서 야간 고속버스(
야행버스)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젊은이들이나 서민들이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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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가 높지 않은 곳을 고르느라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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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코끼리 기타ぞうさんギタ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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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 교사에 해당하는 ALT(Assistant Language Teacher). 수업 시간 마지막에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노래를 불러주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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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하 FG 시리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델 업데이트가 일어난다. 마지막 업데이트는 2016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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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G가 포크 기타(Folk Guitar)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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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산되지 않아 중고로만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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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는 일본 시마무라 악기사의 어쿠스틱 기타 브랜드이다. 프로 활동을 위한 좋은 기타로서 니시노미야 고향집 부근 라라포트의
시마무라 악기점에서 구입했다. 점원이 처음 권해준 모델이었는데, 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른 기타들은 쳐다도 안 보고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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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사운드 홀 부근의 코팅이 벗겨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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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바디 옆구리에 'The Beatles' 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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双葉 PV 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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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ルノヒ, 朝陽 의 PV 와
淡麗グリーンラベル New Green編 CM 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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満月の夜なら PV 에서 사용되었고,
에릭 클랩튼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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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사용 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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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뮤지션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특성이다.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그렇다. 주로 사용하는 기종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며, 그 모델들을 고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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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무명시절 트위터 프로필사진도 동방신기의
창민인데, 2018년 타이페이 공연 시에 대만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동방신기 멤버중 사귀고 싶은 사람은? 이라는 질문에 주저없이 '창민' 이라고 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유는 '잘생겨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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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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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존)이 아니라 죵(죤)이냐 하면, 일본에서는 한국어 정/전을 ゾン(종/존)이 아니라 ジョン(죵/죤)으로 적기 때문이다.
UN
김정훈의 일본 활동명이 죤훈(ジョンフン, John-Hoon)이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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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묭'에 해당하는 한국어 이름은 '명'/'미영'이 될 것이다. 아이명? 아이미영?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선 보기 힘들지만. 아니면
면/미연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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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는
쿙쿙(KYON², キョンキョン)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쿈(キョン)이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용(ヨン)에서 한국을 떠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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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신기의 무대의상을 그대로 흉내낸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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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한국 여성들의 피부가 좋다는 이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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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묭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韓国風おじや. 이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계란과 다시다가 들어가는 레시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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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부터 도쿄의 신오쿠보 한국 타운에서 한국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으로 떡볶이와 호떡을 같이 파는 문화가 생기면서, 일본에서는 그 두 가지가 한국의 군것질거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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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진도 찍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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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린이 용품의 대부분을 호빵맨 캐릭터가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호빵맨을 좋아하지 않은 일본인은 찾아보기 힘들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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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의 재일 교포 3세 선수로서 오직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20년 넘게 뛴 프랜차이즈 스타. 2016년 일본에 귀화했다. 한국명은 황진환(黄進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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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외운 선수 응원가'가 히야마 신지로 응원가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히야마가 그것을 전해 듣고 '아직 제 응원가를 기억하고 계시는지'를 물으며, 한신 고시엔 구장의 대선배로서 여러 가지 응원의 덕담을 녹음해서 보냈다. 아이묭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대체 이 노래를 몇 번을 불렀는데'라며 그 자리에서 목청껏 불렀고, '지금 당장 아빠한테 전화해야 돼'라거나 '공연 날 오시면 좋겠다'라며 매우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히야마 신지로가 결국 공연에는 오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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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いことしましょ(좋은 거 합시다)의 가사에 잘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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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의 가사가 오카모토에 대한 오마주이다. 음악 스타일은 아이묭이 가장 좋아했다는
오자와 켄지 스타일과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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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창자(チャンジャ) 라는 이름으로 현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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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사케는, 나이 든 남자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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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타벅스 한정 메뉴 https://menu.starbucks.co.jp/452478546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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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잠깐 나온 배역이라 성우나 본인의 더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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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쇼헤이는 94년 7월, 하뉴 유즈루는 94년 12월생이다. 일본에서는 4월에 신입학을 하므로 둘은 95년 3월생인 아이묭과 같은 학년 세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