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준태의 시.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첫 번째 문학작품으로,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現 광주일보의 전신)에 실린 109행에 달하는 장시다. 최초 게재 당시에는 군부의 검열 때문에 전체가 실리지는 못했으며 지면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고작 1/4 남짓인 33행뿐이었다.
전남매일신문은 이렇게 광주의 참상을 알렸지만 정작 항쟁 이후에는 신군부 체제에 순응했고 11월에 국보위의 언론통폐합에 따른 1도 1사 정책에 따라 전남일보와 통합되어 폐간되었다. 사회부장 김원욱과 시인 김준태도 두달여 후 해직됐다.
2. 전문
검열 때 잘리지 않은 부분은 밑줄 처리했다.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3. 상세
5.18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울린 작품이다.그것은 광주의 파국을 지켜보던 시인의 언어 폭발이었다. 광주의 참상과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광주 시민들의 불사조와 같은 공동체정신 등 항쟁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한 109행의 장시로 분출했다. 김준태 특유의 강한 남성 톤과 항쟁의 열기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숨 가쁜 호흡에도 단숨에 읽게 하는, 그야말로 당시의 절박함과 절심함이 시심으로 승화한 것이다.
<오월의 문화정치>
발표 날짜가 날짜인지라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히 알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6월 2일이면 5.18 민주화운동이 5월 27일 새벽을 끝으로 강제로 진압당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인데 돌아오지 않은 가족을 가진 사람이 '혹시나'하고 산이며 빈터며 온갖 곳을 뒤지며 암매장된 시신을 찾아헤매고 있을 때고 시민군 등 붙잡혀간 사람들은 불법 감금과 엄청난 고문에 시달리며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때였다.<오월의 문화정치>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문학작품인지라 2012년에 출간된 '5월문학총서'[1]에서 당당히 맨 첫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8연의 독백체는 실제 사연에 근거한 부분인데 임산부(!) 희생자였던 최미애의 사연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가정주부로, 결혼 후 친정집 바로 곁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 김충희는 학생들 걱정 때문에 아침부터 시내에 나갔다. 그녀는 정오까지 들어오겠다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돼 골목에 나가서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전남대 정문에서 평화시장으로 들어가는 고목의 맨홀 뚜껑 위에 홀로 서 있었다가 시위대를 추격하던 공수대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친정어머니 김현녀를 비롯한 식구들이 뛰어나갔을 때 그녀는 피를 흘리면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충격적인 것은 식구들이 숨진 그녀를 집으로 옮긴 후에도 뱃속의 태아가 한참 동안 격렬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태동으로 배가 울룩불룩 튀어나오고 이리저리 요동을 쳤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임산부가 사망해도 태아가 잠시나마 살아있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다고 한다. 산모가 사망해 산소공급이 끊기자 태아가 살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친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때 긴급히 제왕절개를 해서 태아가 꺼내졌다면 아이라도 살았겠지만... 가족들이 인근 병원에 아무리 연락해도 병원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으며 당연히 달려와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후 4시경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태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향년 24세였다. 막 돌 지난 첫째아들이 있었고 뱃속의 둘째가 임신된 지 8개월째 되던 무렵이었다.[2]
4. 분석
- 전반부: '광주'가 감당한 사건을 개관했다.
- 1연: 광주, 즉 무등산이 겪은 패배와 그 패배를 부정하고 광주를 '영원한 청춘의 도시'로 부르며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민중의 넋을 위로했다.
- 2연: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의 죽음과 같은 시민들의 실제적인 피해를 드러낸다.
- 3연: 하느님도 새떼들도 폐허의 광주를 떠나가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피투성이 도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불사조의 땅이 되었음을 역설한다.
- 중반부
- 4~7연: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예수의 죽음과 투쟁, 또 충장로, 금남로, 화정동, 산수동, 용봉동, 지원동, 양동, 계림동,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광주 시내 전체가 비극으로 점철되는 상황. 시인은 언어도단에 빠지고 숨마저 막혀버린다.
- 8연: 시인에게 여인의 혼령이 접신한다. 죽음의 의미를 그녀의 목소리로 전언한다.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행복했던 여인. 또 한 생명의 어머니가 될 그녀조차도 학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인의 진술은 시 전체의 의미를 집약하면서 삶과 죽음의 비극을 웅변했다.
- 후반부: 구체적으로 드러난 죽음을 뚫고 시인은 다시 의미를 새긴다.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청춘의 도시 광주를.
김준태가 항쟁 시기에 창작했던 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집중적으로 모색하는 것은 ' 죽음'과 ' 부활'이다. 사라져 버린 거족들을 찾으며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라는 자문을 통해 시인이 본 것은 골고다를 넘어가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죽음으로 삶을 찾는 불사조의 이미지와 접합하여 드러난다. 즉 광주의 죽음에서 부활을 보며, 그것에 근거를 둔 광주는 '영원한 청춘의 도시'로 탄생했다. 이는 광주민중항쟁의 패배와 좌절을 넘어서는 '부활'의 이미지를 부여하며, 압제와 죽음에 절망하지 않고 새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시대적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3]
5. 비화
자칫 발표되지 못할 뻔했던 이 시는 당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취재한 전남매일신문 편집국 기자들에 의해 극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알렸다.당시 전남매일신문(석간)은 1980년 6월 2일 오전 8시 30분 사장실에서 사장과 한상운 부사장, 상무, 신용호 편집국장이 모여 편집국장 주재로 회의를 갖고 제작 방향을 논의했다. 제작 방향을 결정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5월 20일부터 외근 기자들이 사실보도를 주장하면서 신문 제작을 거부했던 일[4], 항쟁 기간 중 그나마 전남매일은 괜찮았지만 모든 언론이 시위대에게서 어용이라고 엄청나게 욕먹은 일들을 얘기한 끝에, 계엄사의 검열도 있으니 이날만큼은 기사와 사설을 기자들이 쓰는 대로 맡겨두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5]
그래서 다음날(2일) 1면에 5.18을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시'를 싣기로 결정했다. 5월 18일부터 신문 발행을 중단해오다가 2주일만에 재발행된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은 속간으로 4면만 제작되었다. 문순태 부국장[6]이 이 생각을 한 것은 항쟁 기간 중 도청 앞에서 만난 시인 송수권이 '분노와 격정을 못 이겨 밤새워 시를 썼다'고 한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남매일신문은 2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문순태 부국장이 추천한 모 시인의 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참석자 대부분의 의견은 ‘내용은 좋으나 너무 밋밋하고 5.18 참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다른 시인을 찾았다고 한다. 문 부국장이 두 번째로 추천한 시인이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이다.
김준태 시인은 오전 10시경 '오늘 오전까지 항쟁을 형상화한 시를 써서 신문사로 직접 들고 오라'는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청탁이었음에도 김준태는 단번에 청탁을 수락했다. 그런데 청탁 전화가 걸려온 순간 마침 동료 교사가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학교가 휴교 중이라 일부러 찾아온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다보니 김준태는 그와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고, 그가 떠난 후 단칸 셋방 방바닥에 엎드려 창문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신들린 사람처럼 시의 첫 줄을 쓰더니 불과 50분여 만에 시를 완성했다.
"그 어떤 거대한 음악이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눈물과 그리고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의 온몸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정말 나도 모를 일이었다. 창문을 뚫고 내게 달려오는 저 무등산을 나는 온몸에 받으며 109행이나 되는 꽤 긴 시를 써버린 것이다."
은우근, '김준태 그의 인간과 문학', <시인은 독수리처럼>, 한마당, 1986, 13쪽.
당시 김준태는 여전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그가 직접 겪은 두 가지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첫째로 그 유명한
5월 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때, 가톨릭센터 앞 시위대에 섞여 있다가 15명 정도의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았다.
베트남 전쟁 참전 경력이 있던 그였지만 가슴에 정통으로 총을 맞아 피가 솟구치는 사람을 붙잡아 안고 급한 김에 인근 산부인과로 뛰어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은우근, '김준태 그의 인간과 문학', <시인은 독수리처럼>, 한마당, 1986, 13쪽.
두 번째는 시 본문에도 인용된 최미애의 죽음이다. 최씨의 남편 김씨가 바로 김준태의 한 직장 동료였다. 그가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갔을 때 김 교사는 '내 처, 머리가 없다'며 실신 상태로 울고 있었다고 한다. 뱃속에서 한동안 태아가 뛰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다 들었으며,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충격이 내재된, 상처받은 나의 마음속 또 다른 내가 시를 써내려간 것이었다. 평소라면 도저히 그런 짧은 시간에 쓸 수 없는 장시였다." - 김준태
김 시인이 시가 완성되자마자 임박한 마감 시간에 맞추고자 직접 택시를 타고 편집국장실로 향해 시를 전달하자 신용호 국장과 김원욱 사회부장을 비롯한 편집국 간부들은 “바로 이것이다. 5.18을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다”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계엄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기엔 시가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어서 계엄당국의 사전검열 통과와 신문 게재이후 발생될 수 있는 사태가 우려됐지만 김원욱 사회부장이 "많은 시민들이 죽은 마당에 시 하나 싣는 게 뭐가 문제냐”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김 부장은 마침내 편집회의는 시를 게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형이 조판되었다고 해도 도청 안의 계엄사에서 검열을 받아야 인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청에는 보안사에서 파견 나온 언론검열반이 있었는데 이들은 김준태의 시를 제목부터 '아아, 광주여!'로 수정하여 확 줄이고 3분의 2를 쳐내고 33행으로 줄였다.
보면 알겠지만 시의 배경이 되는 무등산과 광주의 전경을 담은 사진 밑으로 시가 실렸는데 대부분에 빨간색 펜으로 '삭'표시가 되어 있다. 절반이 넘는 분량이 삭제당하면 시의 원형, 흐름, 문맥이 훼손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지만 이런 일을 미리 예상했던 김준태는 시를 쓸 때부터 검열로 일부 삭제되더라도 독자가 시적 문맥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적 기교를 발휘했다.
이날 오후 신문이 시내에 배포됐다. 이 신문은 전남북은 물론, 보급망을 통해 서울 등 수도권과 부산 대구 대전 등의 주요 기관에 배포됐다. 내용이 대부분 삭제되긴 했지만 신문을 본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의 전문은 윤전기에 돌리기 전 식자 상태에서 미리 10만부 이상 찍어 외신 등을 통해 퍼져나갔고 원문은 시민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7]
시가 발표되자 계엄사의 군인들은 김준태의 시를 게재한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을 보안사로 연행하려고 편집국을 급습했다. 그 와중에 신문사 간부에게 빨리 도망가는 게 좋겠다는 연락을 들은 김준태도 한동안 선후배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지냈다. 후배 윤우근의 방에서 3일 동안 함께 지낼 때는 혹시 자신이 체포되고 시 원문을 빼앗길 경우에 대비하여, 달력 뒷장에 시 전문을 베껴서 전해주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네가 잘 가지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다 잠행 23일째, 두고 온 가족이 눈에 밟히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더 이상 숨어다닐 수 없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구속되더라도 학교로 가자."는 심정에 결국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5분도 안 되어(!) 수사요원이 들이닥쳤고, 김준태는 화정동 505보안대로 연행되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있는 곳이었다. 김준태는 보안대 옥상으로 끌려가 수사요원들에게 밤새 문초를 당했고, 20일간 조사받고 사표를 강요받은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사표는 이미 수리된 상태였다고 한다.
6. 기타
유명세 덕에 5.18 관련 행사에서 자주 낭독되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를 수입하여 사진과 더빙을 덧붙인 뒤 몰래 돌려보던 일명 '광주비디오'에서도 덧붙인 부분에 이 시가 포함되었다. 5.18 힌츠페터 스토리에서도 해당 영상이 일부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6연 1~4절 부분이 인용되었다.
[1]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작품들을 모아놓은 선집. 1권 시, 2권 소설, 3권 희곡, 4권 평론 순이다.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판), 창비, 219쪽
[3]
출처: <오월의 문화정치>
[4]
기자 일동이 사측에게 합동으로 제출한 사직서의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는 문구가 유명하다.
[5]
<5.18 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 5.18기념재단, 2014. 중 손정연, 박화강 <1980년 전남매일신문사 기자들의 언론자유 운동> 에서 인용.
[6]
그도 유명한 소설가로, 여러 편의 '오월문학'을 발표한 작가이다. 그중 20주년 기념 소설집 <밤꽃>에도 실린 <녹슨 철길>이 가장 유명하다.
[7]
김태현, '광주민중항쟁과 문학'. <5.18 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 20006, 3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