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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15:51:40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아산 이충무공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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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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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적112호아산이충무공묘전경.jpg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112호
아산 이충무공묘
牙山 李忠武公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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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순절지
수량/면적 9,600㎡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광해군 6년(1614)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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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상세4. 여담5. 외부 링크6. 사적 제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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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忠武公 李舜臣 將軍墓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조선의 명장이자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안장된 묘소.

사적 제112호 아산 이충무공 묘(牙山 李忠武公墓)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투 도중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자, 시신을 처음에는 노량해전의 전장이던 남해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순신 재직 시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겼다.

그해 말(대략 음력으로 12월 즈음)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고향인 아산[1]으로 운구하여 이듬해 선조 32년(1599) 2월 인근 금성산(음봉면 산정리 70-2)에 모셨다가, 이순신이 선무공신 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되자 광해군 6년(1614)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정조 18년(1794)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정조가 어제신도비를 하사하였는데, 임금이 신하에게 신도비를 직접 내린 경우는 이순신이 유일하다.[2] 해방 이후인 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3. 상세

파일:사적112호아산이충무공묘좌측전경.jpg
묘소는 둥근 봉분으로 이순신 장군과 부인 상주 방씨 방수진의 합장묘이다.

묘비와 상석, 망주석 등이 있는데, 숙종 때 정승을 지낸 이이명이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게 부탁을 받고 묘비문을 지었다. 봉분 우측 앞 비각 안에 정조 어제신도비, 묘소 입구 쪽에는 순국 400주년인 1998년 충무공파 후손들이 새로 세운 석비가 있다. 1998년에 후손들이 세운 묘비의 글씨는 강영훈 국무총리가 썼다.

4. 여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면서 영정을 모신 현충사[3]와는 같은 아산에 있으면서도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편[4]이라 만약 묘소를 참배하려면 이곳으로 가야 한다. 현충사와 함께,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봄에는 근처에 자리한 위토에 모내기를 해 가을에 수확하는데, 이 위토는 과거 충무공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은행에 저당 잡혀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였으나, 1931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2천 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면서 그 어려움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 다음 날부터 위토를 구하기 위한 성금이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불과 한 달 만에 빚 2272원 22전을 모두 갚았고, 1년여 동안 모인 성금 총 1만 6021원 30전 중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는 현충사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한편 충무공과 동명이인으로 알려진 무의공 이순신의 묘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광명역 인근 서독산에 있다.

5. 외부 링크

6. 사적 제112호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무덤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노량·당포·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을 맞고 숨졌으나, 사실을 숨기고 조카인 완이 대신 지휘하여 왜적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을 갔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망주석 1쌍·석상 1쌍·문인석 1쌍·광명등·묘비석이 있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와 비각이 있다.

※(이충무공묘 → 아산 이충무공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본래 이순신이 태어난 곳은 서울 한복판이지만, 소년기 시절부터 아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안장하려 했던 것 같다. 이순신의 묘가 있는 곳 입구에는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의 무덤도 있고,이순신을 모신 아산 현충사 경내에는 이순신의 아들 이면의 묘가 있다. 서울이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이라면 아산은 자라오고 잠에 든 고향인 셈 [2] 물론 그 이전에 신도비를 받기는 하였다. 묘소에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비석 두 기 중에 비각이 있는 비로서 숙종 19년(1693)에 세워진 것이며, 글씨는 김육이 쓴 것이다. 그 옆의 비는 5대손 이봉상의 신도비이며, 정조가 친히 지은 신도비는 봉분 안쪽 우측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3] 물론 현충사 경내에도 묘소들이 있는데,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과 후손들의 묘 일부가 모셔져 있으며, 삼거리의 이충무공 묘소 옆에도 부모와 형제, 일부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하였다. [4] 현충사는 염치읍 백암리, 묘소는 음봉면 삼거리에 위치하는데, 두 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대중교통은 없으며, 45번 국도 경유하는 거리가 약 8km에 이른다. 다만, 대중교통도 온양민속박물관 앞에서 환승이 가능하지만, 묘소 앞까지 다다르는 버스는 아산 버스 503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