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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1-31 17:06:20

스코틀랜드/역사



1. 역사
1.1. 연합 이전
1.1.1. 고대사1.1.2. 스코틀랜드의 성립1.1.3. 중세1.1.4. 독립 전쟁 (14세기)1.1.5. 중근세 (15 ~ 17세기)
1.2. 연합 과정
1.2.1. 스튜어트 왕조 (동군연합)1.2.2. 잉글랜드와의 재대결1.2.3. vs 의회파 (크롬웰)1.2.4. 정치적 혼란과 연합 요구
1.3. 연합 이후
1.3.1. 잉글랜드와의 갈등


1. 역사

#redirect 틀: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1706년 12월 31일까지는 스코틀랜드 왕국(Rìoghachd na h-Alba)이었으나 1707년 연합법으로 동군연합 관계인 잉글랜드 왕국과 통합,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1] 잉글랜드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남쪽 잉글랜드와 사이는 좀 소원한 편.

우리가 흔히 쓰는 영국인(English)은 잉글랜드를 가리키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에게 잉글랜드인(English)이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일 수 있다. 물론 처음 대화를 나눌 땐엄청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마주하기 전까진 상대방이 몰랐을 거라 생각해 넘어가겠지만, 스코틀랜드인임을 안 이후에도 그를 잉글랜드인(English)이라고 하면 큰 실례가 된다. 조금 더 포괄적인 호칭인 British는 인정하는 스코틀랜드인은 많지만 스코틀랜드에서 현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의견이 나뉘듯 이 British라는 것조차 거부하는 스코틀랜드인도 꽤 있다. 그러나 통합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스코틀랜드 지역에 거주하면서 잉글랜드 지역 출신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게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 출신의 J. K. 롤링이 에딘버러에 살면서 집필한 소설이 바로 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이다.

1.1. 연합 이전

1.1.1. 고대사

기원전의 시기 동안 브리튼 섬에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즈 할 것 없이 모두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사실상 역사의 분열은 고대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하드리아누스 성벽으로, 성벽 이하는 브리타니아로서 이후 잉글랜드로 발전했고, 그 북쪽은 켈트계열이 계속 남아 이후 스코틀랜드로 발전했다. 로마 제국 시기 스코틀랜드 지역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렸고,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정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칼레도니아의 켈트 인들은 자주 방벽을 넘어 요크 일대를 침공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그에 대한 반격에 나서던 중 요크에서 병사하기도 하였다.

1.1.2. 스코틀랜드의 성립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 로만 브리튼)


1.1.3. 중세

중세 스코틀랜드의 형성은 11세기 후반의 군주 맬컴 3세로 정리될 수 있다. 그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친척인 에드가 에셀링 왕자 일가를 환대하였고 그의 여동생인 마가렛과 결혼하였다(1068년). 이후 맬컴은 브리튼 섬의 통일을 꿈꾸며 군대를 보내어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 많은 포로들과 함께 귀환하였고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앵글로 색슨족 거주자가 늘어 영어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노르만 인 중에서도 스코틀랜드로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나왔고 그들은 군대를 맡게 되어 현재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대부분 노르만 혈통을 지니게 되었다. 봉건제가 확립된 것도 그의 치세가 시작이다.

국력이 신장되자, 맬컴 캔모어는 이전까지는 잉글랜드로 간주되던 포스 만의 안토니누스 성벽을 넘어 에든버러까지 진출하였고 성을 쌓았는데, 이후에 그 곳이 스코틀랜드의 궁정이 되었다. 윌리엄 2세와의 전쟁에서도 스코틀랜드는 승패를 주고받으며 대등한 모습을 보였다. 로디언이 이때 강역에 포함되었으며, 노섬벌랜드까지 위협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093년, 맬컴 3세는 대군을 이끌고 보더스 지방의 요새 앤윅을 공격하였는데, 노르만 귀족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군대에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하였고, 본인도 장남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맬컴의 어린 아들들인 에드거, 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 1세가 차례로 즉위하였는데, 데이비드 1세는 천한 출신의 사람이 호소할 지라도 경청해 주는 군주였으며, 그의 억울한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시대에 주교구들이 설립되어 교회의 찬사를 받았으며, 재산을 기부하여 수도원들을 건립하였다. 그 예시로 홀리루드 수도원, 멜로즈 수도원, 드리버러 수도원, 뉴배틀 수도원, 캠버스케네스 수도원, 제드버러 수도원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스코틀랜드는 영토 확장의 기회를 잡았다. 바로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사후에 벌어진 마틸다와 스트븐 간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데이비드 1세는 대군을 소집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으나, 깃발 전투에서 아쉽게 패배하며 후퇴하였다. 다만 이어진 스트븐과의 협상에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과 뱀버러의 요새를 제외한 노섬벌랜드, 더럼 지역을 할양받아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다. 데이비드 1세는 1153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성 데이비드로 추존되었다. 그의 장남인 '관대한 헨리'는 1150년에 요절하였고, 따라서 손자인 맬컴이 즉위하였다.

맬컴 4세는 기질이 온순하고 상냥하여 소녀왕이라 불렸는데, 잉글랜드 왕의 가신으로서 점령지들을 통치하였고(일부는 반환하기까지 하였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따라 프랑스에서 지원군이 되어 주기도 하였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기겁하며 프랑스의 그에게 탄원서를 보내어 잉글랜드의 지배를 거부한다고 하였고, 이에 맬컴 4세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귀족들과 화해하였다. 그는 1165년에 제드버러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12월 24일에 그의 동생인 윌리엄이 즉위하였다. 그는 1174년에 노섬벌랜드를 침공한다.

1.1.4. 독립 전쟁 (14세기)

노르만족의 전래 이후 잉글랜드의 침공을 받았지만 웨일스와 달리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으나, 이 때문에 계속하여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중간에 던켈트 왕조의 알렉산더 3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고 그의 외손녀 마가렛마저 요절하면서 왕통이 끊어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귀족들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났고, 이를 틈타 에드워드 1세가 나타나 스코틀랜드를 제압하고 잉글랜드의 영토로 편입하는 등 모욕을 당했다.

당연하게도 이에 반발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이 많았는데,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라는 사람이 반란군을 일으켜 잉글랜드군을 몇 차례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기에 결국 패퇴하였다. 윌리엄 월레스와 그 부하들은 이후로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죽었다.[2]

그러나, 이후에 스코틀랜드 귀족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 1세가 윌리엄 월레스의 뒤를 이어 독립전쟁을 지속하였다. 로버트 1세는 한때 패배하여 아일랜드로 망명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베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대군을 격파하였고, 마침내 에드워드 3세 때에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국임을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독립한다.

1.1.5. 중근세 (15 ~ 17세기)

브루스 가문의 지도 아래 잉글랜드에게서 독립을 확보한 이후 다시 400년 뒤 정복이 아닌 합의를 통해 연합왕국을 형성하기 전에 스코틀랜드 역사를 요약하자면 중세와 근세 왕권의 무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추운 기후와[3] 산이 많은 지형 탓에 농업 생산력이 잉글랜드보다 달려 인구는 항상 적었다.[4] 이러다보니 국력에서 상대가 안되어 상대적으로 더 강한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5] 양국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메리 여왕이다. 특히 현대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을 형성하는 베릭-어폰-트위드는 당시 한창 잘나가던 한자동맹의 주교역도시[6]이기도 했고, 천혜의 자연요새이기도 해서 양쪽에서 먹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7] 주로 일단 인구와 조직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며, 나머지 유럽의 군사적, 정치적 기술 발전에도 더 발을 맞추었던 잉글랜드가 우세였지만 일단 스코틀랜드 측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험한 산악지방이 많은 스코틀랜드 내륙으로 끌어들이며 청야전술을 벌이다가 지친 잉글랜드 상대로 중세 스코틀랜드군의 주특기인 갑작스러운 보병 돌격으로 쌈싸먹은 적도 종종 있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가 남하하는 건 저지해도 근본적으로 복속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중세 후기부터 17세기의 동군연합과 국가 통합까지 스코틀랜드 조정의 지상 과제는 둘, 하나는 너무도 당연한 천하의 원쑤 잉글랜드에 대한 방어였고,[8] 다른 하나는 왕실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고, 맥도널드, 더글라스, 맥코넬, 켐벨, 카메론 등 지방의 강력한 하이랜드의 클랜들이 서로 끊임없이 이권 다툼을 하며 국가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하다보니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였던 잉글랜드와의 국경지대, 서부 해안과 섬들, 그리고 하이랜드의 평정과 복속이었다. 특히 중앙 집권이란 측면에서 정복왕 윌리엄 이후 둠즈데이 북이 상징하는 런던에 기반한 강력한 왕권과 체계적인 지방 행정을 꾸준히 정착시킨 잉글랜드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기본적으로 켈트계 사회가 더 수평적인 측면도 있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왕국 성립과 독립 과정에서 하이랜드 클랜 대귀족들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중앙 권력의 정착에 크디큰 난항을 겪었다. 특히 현대 내외 헤브리디스 제도(Outer/Inner Hebrides)를 기반으로 '섬들의 군주' (Lordship of the Isles)라는 직함을 가지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를 겔리선으로 오가면서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 간의 중개 무역과 용병업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맥도널드 가문은 한 때 스코틀랜드 왕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위세를 자랑했고, 르네상스 시대 들어서는 왕실의 충견을 자처하며 주로 국왕의 이름으로 다른 클랜을 두들겨 줘 패고 그 땅과 전리품은 자기들이 쏙쏙 챙겨먹으며 결국 하이랜드 최대 클랜이자 스코틀랜드 전국 내에서 왕실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던 캠밸 가문 같은 거대 클랜들의 존재는 스코틀랜드 왕실에게 영원한 골치거리였다.[9]

오래된 관습과 법제화된 봉신의 권리로 인해 함부로 봉건 귀족의 자치권과 자체적인 권력을 뺏을수 없었던 중세 유럽의 정치판에서 이 와중에 봉건 귀족들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왕실의 권위를 한방에 키울 수 있는 건 곧 전쟁.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 또한 이 점을 파악하고 왕권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정치적 전쟁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클랜들 상대로든, 잉글랜드 상대로든 종종 걸곤 했다. 이게 전쟁이 잘 풀려서 실제로 부하들도 찍소리 못하게 되고, 왕실의 권위도 커지며 이를 명분으로 봉건 귀족, 도시민, 교회의 자체적인 영향력을 하나 하나 복속시키면 참 좋은데, 인생만사가 어디 뜻대로 되던가. 게다가 왠만한 남자들은 전부 다 칼에다 활, 나중에는 권총 하나쯤은 차고 다니고, 대충 현대 글래스고-에딘버러 벨트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항시 무장한 클랜의 장정들이 서로의 양, 소, 목축지, 노예 등을 빼앗기 위해 사시사철 전쟁에 대비하며 살던 초군사화 사회가 중세/근세 스코틀랜드이다. 전쟁을 통해 군왕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당연히 싸움도 중세 기사도와 켈트 전사 집단의 마인드가 결합한 그대로 최전선에 앞장서서 싸우는 게 당연시 되었다.

이런 관습에 충실히 따르다가 자고로 적의 뚝배기를 눈 앞에서 클레이모어로 빠사버리는게 미덕인 스코틀랜드의 무사 치고 드물게 화력덕후였던 제임스 2세는 플랑드르에서 새로 사온 최신 공성포를 시험한답시고 독립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었던 록스버러 성 공성 중 야포 근처에서 알짱대다가 대포 폭발로 폭★사. 그 다음 제임스 3세는 아들내미가 필두로 자신의 실정에 반발한 대귀족 연합 상대로 1488년 스털링 근처 소키번 (Sauchieburn) 전투[10]에서 죽고, 저 애비 패죽이고 왕위 먹은 효자 제임스 4세는 그 유명한 플로든 전투에서 무쌍 찍다가 잉글랜드 잡졸의 에 처맞고 끔살, 또 그 아들이자 독립 스코틀랜드를 단독으로 정상적으로 다스린 마지막 군주였던[11] 제임스 5세는 역시 영불전쟁 중 동맹을 위해 짤짤이 넣어준다고 쳐들어간 1542년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개박살나자 빡쳐서 열병으로 급사(...).

약한 왕권과 이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전쟁이 아주 최악의 방향으로만 연달아 시너지를 내어 후계도 똑바로 준비 안 된 군주들이 연달아 전사해버려 스코틀랜드의 국내 정세는 개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국가의 통치는 캠밸 가문을 필두로 한, 연고지는 비록 하이랜드 클랜 출신이지만 로우랜드에서 교육받고 나머지 유럽식 왕실 행정에 익숙했던 대귀족들과 이와 연계했던 도시민, 성직자들 중심으로 돌아갔다.[12]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터지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예전부터 강력한 정치적 국제 후원자였으며, 문화적으로 나머지 유럽의 선진 문물의 창구였고, 경제적으로도 교역 파트너로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지방을 통해 개신교의 바람이 불었다. 결국 16세기 중후반, 공식적인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는 너무 어리거나 주변 세력에게 휘둘러 왕권과 이와 결합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정신을 못 차릴 사이 잉글랜드에서 유학하고, 프랑스에서 옥생활도 했던 존 녹스를 필두로 한 로우랜드의 개신교 도시민들과 이와 동맹한 캠밸 가문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로 개종했던 클랜들이 힘을 합쳐 1559년 퍼스의 도미니코회 수도원 와장창하는 걸 시작으로 왕권과 가톨릭 교회에게 정면 도전을 하고, 짧은 내전 끝에 승리함으로서 개신교, 그것도 반왕실, 반가톨릭 내전[13]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로우랜드 도시들의 평신도 유지들의 모임, 즉 장로회를 근간으로 하는 칼뱅교 국가가 되었다. 즉, 근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의 부상은 종교적인 문제로만 보기엔 너무나 당대의 정치적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장로회를 구심점으로 도시민, 귀족, 목사들의 동맹은 이전부터 약화되었던 왕권을 메리언 내전->언약도 혁명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만들어 버린 혁명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달리 후대에도 종교적 국가 정체성에 더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는 크게 문화, 인류학적 구분으로 늦어도 14세기부터 영어를 받아들이고 종교개혁 개신교, 그것도 장 칼뱅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일찍부터 에딘버러, 글래스고 같은 대도시를 필두로 한 도시 문화 중심의 로우랜드, 즉 저지대 지방과 늦어도 19세기 중후반 까지 게일어를 유지하며, 반유목, 수렵 중심의 클랜 씨족 사회가 중심이었고, 아일랜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비교적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까지 가톨릭이나 자코바이트 중심의 성공회가 강했던 하이랜드 지방으로 구분 된 역사를 보내왔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문화적, 사회적 차이는 뚜렷할지언정 중세 초기 부터 하이랜더 클랜의 차기 지도자들은 대부분 세인트 앤드류 대학을 비롯한 로우랜드에서 교육받고, 에딘버러 같은 로우랜드의 정계, 사회에도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두 지방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상호 교류하며 섞여 발전하면서 현대 스코틀랜드란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이를 대입하자면 에딘버러, 글래스고 등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는 게일어를 안 쓴지는 적어도 700년, 좀 멀리 잡으면 1,000년의 세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 잘라 켈트족이 아닌 것도 아니다. 로우랜드를 필두로 한 현대 스코틀랜드인들 다수는[14] 이렇게 켈트계 민족 국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영어라는 언어적 동질성을 통해 잉글랜드와 함께 영국이란 나라를 형성한 민족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1.2. 연합 과정

잉글랜드와 통일된 계기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자, 스코틀랜드의 젊은 왕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 왕세자로 삼은 것. 제임스 왕의 할머니가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였다[15]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통합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한 나라는 아니고 별개의 두 나라가 같은 임금을 모시는 동군연합 단계였다. 완전히 한 나라로 통일된 것은 여왕 때.

1.2.1. 스튜어트 왕조 (동군연합)

잉글랜드로 내려간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떠나온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종교 문제에 있어서 옛날 신하들과 다시 대립각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존 녹스의 직계 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라틴 문필가이며, 철학자, 정치학자이기도 했던 조지 뷰캐넌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강성 장로회파에 속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보다 왕권을 행사하려고 하자 장로회와 이와 동맹한 귀족, 그리고 에딘버러 시의회가 사사건건 왕권에 제한을 두려고 하고,[16] 무엇보다 이제 새로운 조국인 잉글랜드의 성공회는 익히 알다시피 개신교임에도 가톨릭의 전례, 교계제도 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렇게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왕실의 영향력이 교회에 미치는 감독제를 설치하고, 주교제를 부활시키려고 하면서 왕실과 스코틀랜드 지방 권력은 다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1618년 글래스고에 있었던 장로 총회에서[17] 가톨릭식 무릎 꿂은 성찬을 부활시키고, 이에 반발하는 장로 총회의 문을 때려 닫아 버리고 20년간 다시 열지 못하게 만드는 걸 시작으로 스코틀랜드는 종교 문제로 다시 들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결국 세월이 흘러 아버지 만큼의 정치적 센스도 없었고, 융화력도 없으며, 무엇보다 내전기에 자라 하이랜드의 강력한 귀족들과 개인적 연줄이 닿았던 아버지와 달리[18] 스코틀랜드에는 제대로 와 보지도 않았고, 그 사정에도 전무하면서도 안 좋은 의미로 비전과 추진력만은 강했던... 즉, 독단적이었던 찰스 1세가 왕이 되면서 정국은 더욱 더 악화된다. 아무리 대립하던 관계였다 한들 기본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본인 또한 애향심을 가지며 멀리서도 적극적으로 다스리며, 이런 저런 국정 프로젝트를 추진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현지 파워 엘리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던 아버지와 달리 찰스는 윌리엄 로드 추기경을 필두로 한 성공회식 전례와 주교제를 스코틀랜드에 강제하려고 들면서 결국 열받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유력 목사들, 에딘버러와 다른 로우랜드의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동맹했던 개신교계 클랜들은 1638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19] 교회에 모여 국민 언약 [20]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동맹을 선포하고 봉기를 일으켜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면서 찰스의 왕권에 정면 도전했다.

1.2.2. 잉글랜드와의 재대결

이 와중 찰스가 있었던 잉글랜드의 상황은 익히 알려진 의회와 국왕이 대립하던 끝에 찰스가 빡쳐서 의회 문닫고 혼자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소위 11년 폭정이라 불리던 시절.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Covenanter) 반란군이 정부를 장악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잉글랜드로 남진하며 영국 내전의 발단이 된 주교 전쟁이라는 전쟁이 터진다. 언약파 반란군이 국경 지대인 뉴번에서 잉글랜드 국왕군을 박살내고 거의 무혈로 잉글랜드 북부의 관문, 뉴캐슬어폰타인에 입성하자, 찰스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다시 열게 된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며 왕권을 더 약화시킬걸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왕이 요구한 반란 진압 예산 책정은 무시하고 각각 찰스의 종교적, 정치적 면에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 사형시켜버린다. 빡친 찰스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개기는 의원 다섯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가나 이들은 도망치고, 찰스를 본격적으로 못 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 없이 혼자서 민병대 소집법(The Militia Ordinance)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찰스가 맞불을 놓기 위해 의회의 비준 없이 혼자서 군열 위임령(Commissions of Arrays)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정리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매파 청교도들은 잉글랜드보다 3년이나 일찍 1638년에 이미 왕권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며 혁명을 이루었고, 스코틀랜드가 찰스 1세의 권력을 뒤흔들어놓지 않았으면 잉글랜드에서도 혁명이 터질 수가 없었다.

이 와중 신정부를 구성한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반란을 멈추면 장로회를 공식 국교회로 인정하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찰스 측과, 우리랑 편 먹으면 장로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도 장로회를 도입하겠다고 승부수를 띄운 의회 측 사이에서 고민하다 역사에는 그냥 '사건'(The Incident)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1641년 10월 반언약파, 근왕파 귀족들의 쿠데타 시도를 분쇄한 이후[21] 결국 1643년 근엄 동맹 및 언약 (Solemn League and Covenant)라는 조약을 통해 의회파와 동맹을 맺으며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내전에 뛰어든다. 언약파는 전쟁기 내내 스코틀랜드의 정부 역할을 하며, 남쪽으로는 잉글랜드의 국왕군, 그리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로우랜드 개신교도들의 통치와 무엇보다 캠밸 가문의 영향력의 확대를 질시한 하이랜드와 아일랜드의 클랜들이 소집한 근왕군, 또 바다 건너 아일랜드 얼스터에서는 카톨릭 킬케니 연맹의 반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며, 동시에 안쪽으로는 내분하면서도 올리버 크롬웰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독자적인 전시 정부를 꾸린다.

1.2.3. vs 의회파 (크롬웰)

언약파 정부 자체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질시하다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 뒷통수 치려던게 3차 내전과 던바, 우스터 전투에서 대파당하고 크롬웰에게 스코틀랜드가 정복당한 후[22] 왕정복고 시절 아버지 목이 날아간 전쟁이 터진 계기 자체를 마련한 놈들이 언약파였다는 걸 잊지 않았던 찰스 2세에게 아가일 공작 아치볼드 캠밸, 장로 총회 집사였던 워리스톤의 아치볼드 존스턴 경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그 자리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서 처형, 옥사하는 걸로 분쇄되었다.

1.2.4. 정치적 혼란과 연합 요구

그러나 언약파가 이루어 놓은 새로운 혁명 정부의 행정적 기틀, 전시 경제로 구축한 통제력 등은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가 물려 받고, 장로회 급진파도 스코틀랜드 사회 지배 계급으로 떠 오르며 17세기 말에 다시 한번 왕실과 충돌하게 된다. 이 와중 명예 혁명이 터지자 한 세대 전 언약파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한 로우랜드의 장로회측은 새로운 왕실을 받아 들이고, 역시 한 세대 전 구도 그대로(...) 가톨릭/성공회 주류의 하이랜드의 클랜들은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하면서 다시 한번 내전이 발생, 이를 진압하고 아래 하술한 다리엔 계획의 실패로 엉망이 된 스코틀랜드의 부채를 잉글랜드 측이 떠맏는 과정에서 1707년, 드디어 양국을 단순한 동군연합이 아니라 법적 차원에서 한 나라로 통합한 통합법 (Act of Union)이 통과되면서 스코틀랜드는 독립 국가로서 역사를 끝내고 영국이라는 한 나라의 파트너 민족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스코틀랜드도 17세기 후반 식민지를 건설할 다리엔 계획(Darién scheme)이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서 남미대륙의 콜롬비아 사이에 있는 이 다리엔(Darién)이라는 지방에 스코트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였는데 파나마의 스페인인의 공격과 전염병이 돌아서 완전히 망하고 스코틀랜드의 재정상태는 최악이 되었다. 사실 항목을 보면 나와 있지만 이 다리엔 지역은 현대에 와서도 지구상 극한 오지 중 하나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잇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끊어진 유일한 구간이다. 게다가 이곳을 탐험할 때는 여행자보험도 적용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당대 지정학적인 관점에서도 적대적인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 안마당에 가까운 중앙 아메리카 복판, 그리고 여길 개척하려는 스코틀랜드는 좋게 말해도 유럽 국가 중에서도 약소국 규모의 비교적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한 나라. 후대의 관점으로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개척하겠다고 나섰는지 모를 동네이지만,[23] 하여튼 이런 식민지 계획에서 국밥 말아 드시고, 또 1690년대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라고 불리는 엄청난 가뭄[24]과 경제난이 겹치며, 이 와중에 자코바이트와의 내전도 잘 안 풀리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 혹은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된다.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통합은 결국 이런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3. 연합 이후

증기기관을 근대식으로 개량한 제임스 와트와 증기선을 제작한 폴턴 등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대영 제국의 산업 혁명과 영광을 이끌었다. 스코틀랜드는 18 ~ 19세기 동안 잉글랜드를 도와 함께 대영 제국의 영광을 누렸다.

1.3.1. 잉글랜드와의 갈등

하지만 앞서 상술한 기나긴 상호 대립, 내전, 동맹, 통수의 역사 끝에 스코틀랜드는 무력으로 정복, 복속한 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과 이권을 유지하되, 독자적인 주권 자체는 분명히 런던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영국에 통합되었고,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꾸준히 분리독립 운동이 있어왔다. 1990년대 이후 타협책으로 영국 중앙 정부는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해왔다. 현재는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가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를 통치하고 있다. 2007년 처음 집권한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2011년 총선에서 단독과반수를 차지하면서 공식적인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 투표를 준비했고, 투표일시는 2014년 9월 중순으로 공시되었다.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연합왕국의 4백년 왕관이 자기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내심 우려하고 있다.

대대로 프랑스와는 동맹국인 성격이 강했다(프랑스+스코틀랜드 vs 영국+플랑드르). 왕비들도 프랑스 출신이 많다.[25]

켈트계인 스코트인의 지방이라 내심 잉글랜드를 굉장히 싫어하고, 죽어도 잉글랜드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지역성이 있다. 본격적인 무장 독립운동은 아니지만, 영국에서 독립하자는 움직임도 상당히 많은데 그런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인물로 유명한 배우 숀 코너리, 밴드 프로클레이머스가 있다. 2002 월드컵 때 스코틀랜드 출신 국회의원이 "잉글랜드를 응원하자"고 했다가 폭풍같이 까이기도 했다.
[1] 미국 독립전쟁보다 70년 전이다. [2] 이 이야기를 그린 유명한 영화로는 멜 깁슨이 주연, 감독을 맡은 ' 브레이브 하트'가 있다. 다만 실제 역사와는 다른 내용이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3] 난류를 머금은 바닷바람 때문에 한국보단 따뜻하나(에딘버러의 1월 평균 기온은 영상 4℃, 부산과 비슷하다!) 남부 잉글랜드와 비교하면 체감온도가 매우 춥고, 여름에도 추울 정도로 기온이 낮으며(7월 평균 기온 15℃ 정도. 스웨덴이나 핀란드보다도 여름에 서늘하다.), 일조량도 연간 1200시간 정도로 잉글랜드보다 더 적다. [4] 중세의 스코틀랜드 인구가 백만도 안되는 50만에 불과했다. 반면에 잉글랜드는 375만으로 7배나 넘게 차이가 났다. 1707년에 잉글랜드와 통합될 때도 인구가 125만밖에 안되어 575만의 잉글랜드와 4배나 차이가 났다. 현재는 잉글랜드와의 인구 격차가 더 심해져 무려 10배나 된다. [5] 이 동맹을 "오래된 동맹"( Auld Alliance)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맹을 맺었다고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적극적으로 도와준것은 아니었다. [6] kontor [7] 중세 내내 주인이 양쪽 사이에서 한 20번 쯤 바뀌었던 베릭은 결국 1482년 훗날 리처드 3세가 된 글로스터 공작이 공성 끝에 먹었다. 스코틀랜드 측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결국 베릭은 현대까지 잉글랜드 땅으로 남았다. [8] 왜냐하면 잉글랜드는 압도적인 국력으로 스코틀랜드를 항상 군사, 외교적으로 압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잉글랜드의 목표가 브리튼 통일이었다. [9] 제임스 4세도 스코틀랜드 전역에 행정장관들을 보내는 중앙집권 정책을 시행하다가 이에 반발한 지방의 클랜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하는데만도 5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 [10] 스코틀랜드 지명은 주로 Glaschu, Dùn Èideann, Inbhir Nis 같이 게일어에서 기원한게 영어로 음차 된 경우가 많아 현대 영어의 관점에서도 괴악한 발음이 많다. 당장 에딘버러 시내의 큰 도로 중 하나인 Cockburn Street만 해도 철자만 보면 누구 거시기(cock)에 불난듯한 흠좀무한 이름이지만 발음은 코번 도로로 읽히고, 고명한 귀족의 거대한 궁전으로 유명한 서부의 Culzean이란 마을은 쿨레인이라는 z는 어디 북해 바다 낚시배에서 떨어뜨린 듯한 이름으로 발음된다. [11] 그 딸인 메리 스튜어트는 본인이 정상적인 왕권을 휘둘렀다고 볼 수 없을 만큼 국제 정세와 대내외 이해 관계에 휘둘렸고, 스코틀랜드 단독의 국왕으로는 마지막이었던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왕 타이틀 딴 이후 제임스 1세가 되어 런던으로 내려갔다. [12] 하이랜드 클랜과 로우랜드 조정의 관계를 꼭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시기 쯤 들어가면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에딘버러에서는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처럼 활동하면서도 본거지인 고향의 하이랜드에서는 여전히 반수렵, 목축 공동체인 클랜의 사회로 돌아가는데 상당히 익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13] 역사학계에서는 메리 스튜어트를 둘러싸고 터진 내전이었다 하여 Marian Civil War라 부른다. [14] 사실 저렇게 게일어를 필두로한 씨족 사회 중심의 '순수한' 켈트 문화를 유지해 온 하이랜드 지방은 영국 전체 인구의 1/10 수준인 스코틀랜드 인구의 1/10 정도 밖에 안된다. [15]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의 어머니인 메리 여왕을 죽였다. 당시 제임스 6세는 일단 대사를 통하여 어머니의 구명을 청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태어나서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한데다가 그녀가 죽으면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계승자가 되기에 적극적이진 않았던 듯 하다. [16] 1596년에는 실제로 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기도 했던 측근 하이랜드 귀족 자문단을 당장 처형하라고 에딘버러 성 바로 앞에서 시위를 하던 장로회 목사 몇명이 군중들을 선동해 폭동이 벌어져 왕은 에딘버러 궁전에서 대로로 쭉 내려가면 있는 당시에는 새로 지었던 홀리루드 궁전의 사냥터로 도망치고, 이에 빡친 군중은 "왕을 찾아라!"하며 횃불 들고 궁전터에서 무슨 왕을 사슴 마냥 쳐잡으려고 밤새도록 뒤적이고 다녔던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에서 왕권은 사실 바닥에 떨어졌던 상황이었다. [17] General Assembly를 딱히 번역할 단어가 없어 임의로 만든 단어임을 밝혀둔다. [18] 실제로 상술된 1596년 에딘버러 폭동만 하더라도 수도에서 도망친 왕이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측근으로 지냈던 유력 클랜 대귀족들을 부르면서 진압되었다. 반면 이 문단에 서술된 언약파 혁명 때도 이들의 쿠데타에 가까운 집권 방식과 이 중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캠밸 가문의 독주에 반발한 하이랜드 클랜들이 상당한 규모의 근왕군을 일으키고, 군사적으로도 에딘버러 문턱까지 올 정도였으나, 직접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라 이들과 직접 연줄이 있고, 통제 할 줄 알았던 아버지와 달리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그냥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방관했던 찰스 때문에 딱히 제대로 된 구심점을 잡지 못하고 잉글랜드 의회파-스코틀랜드 언약파 동맹에 하나 둘씩 각개격파 당했다. [19] Greyfriars, 즉 회색 수도자란 뜻으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교회라 붙여진 이름이다. 첨언으로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의 본명인 톰 리들은 이 교회 공동묘지터에 있는 Thomas Riddell 이란 사람의 비석에서 롤링 여사가 따온 것이라 한다 [20] National Covenant. 헤일로에 나오는 그 코버넌트 맞다. 원래 구약 성서의 유대 민족과 야훼 사이의 계약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이렇게 자기 나라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자칭하며 구약적 민족주의, 반카톨릭 반보편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경향은 후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1] 찰스는 본인과 전혀 무관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근왕파 귀족들이 저질렀던 거라 주장했는데, 몬트로즈 공작을 비롯한 쿠데타를 시도했던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정국, 왕에 대한 입장은 전혀 별개로 하이랜드 클랜 이권 분쟁을 통해 언약파 정부의 요직을 주로 차지한 캠밸 가 계열의 귀족들과 뿌리 깊은 원한 관계였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 없는 변명은 아니다. [22] 크롬웰 본인은 당시 양국 관계에서 일반적인 태도였던 의심으로 스코틀랜드를 대했으나, 일단 사상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신교 급진파이고, 전쟁 막판 전까지는 동맹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이후 딱히 정치 보복을 가하진 않았다. 당대 기술력을 생각하면 20~40만명이라는 경이로울 만큼의 희생자가 나온 피비린내나는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던 아일랜드와 심각하게 대조적인 모습. [23] 세계사 산책에서는 불황이 원인이 된거 아닌가 하는식의 서술이 있다. [24] 17세기 중후반은 세계 여기저기서 소빙하기의 기상변화로 인한 농업생산성 하락에 시달린 때이다. 저하된 생산력은 사회체제의 불안정성 증가라는 압력으로 나타나 사회적 변화를 강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5] 그래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축구 경기를 한다면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