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동북행영 주임 | ||
한문 | 熊式輝 | |
한국식 독음 | 웅식휘 | |
영문 | Xiong Shihui | |
자 | 천익(天翼) | |
출생 | 1893년 5월 19일 청나라 강서성 안의현 | |
사망 | 1974년 1월 21일 중화민국 타이중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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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일본 육군대학교 졸업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장제스를 옹호하는 정학계 파벌의 일원이었다.2. 생애
2.1. 국민혁명기까지
1893년 강서성 안의현에서 출생하였다. 강서육군소학을 졸업한 후 1911년 난징 육군 제4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그해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호응하여 봉기가 일어난 한커우로 도주, 학생군에 가담했다. 그해 11월, 강서도독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혁명이 성공하면서 슝스후이는 다시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고 1913년 육군제일예비학교를 거쳐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2기로 입교하였다. 1916년 5월, 바오딩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슝스후이는 방성도 휘하의 운남군 육군 4사단 38단에 배속되면서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강서군으로 전속하였다.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했다. 귀국 후 중국국민당 산하 운남군 간부학교 교육장을 맡았다. 1925년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당 산하의 모든 군벌군이 국민혁명군으로 개칭되자 운남군 간부학교도 국민혁명군 3군 군관학교로 바뀌었는데 슝스후이는 교육장에 유임되었다.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국민혁명군 독립 1사단 당대표를 맡아 참전했다. 이후 독립 1사단이 14사단으로 확충된 후에도 당대표를 맡았으며 10월 14군 1사단장을 겸임하였다. 1927년 2월, 국민정부가 쑨촨팡을 몰아내고 강서성을 장악하자 강서성 정무위원회 회계장에 임명되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를 지지, 그해 10월 13군 부군장 겸 37사단장을 맡게 되었으며 11월 강서성 정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경 송호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아편을 차로 위장하여 거래하다가 걸려서 망신을 당했다. 슝스후이와 사이가 좋지 않던 상하이 시장 장정판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후 슝스후이가 아편매매 금지법을 어겼다고 맹렬히 공격했으나 장런제의 개입으로 무마될 수 있었다. 오히려 장정판은 사태를 키운 죄로 상하이 시장에서 해임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자 장제스를 수행하여 참전했고 제남 사건 중 일본군과 협상을 맡았다. 슝스후이는 일본 육군대학교 출신에 일본어가 유창하여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일본군은 슝스후이에게 굴욕적인 항복만을 강요하였고 슝스후이는 울분을 터트리며 소득 없이 귀환해야 했다.
북벌 이후인 1928년 8월, 독립37사단과 독립7사단이 5사단으로 통합개편되면서 5사단장을 맡아 상하이에 주둔했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구주퉁, 유치, 웨이리황, 장즈중과 함께 쑨롄중 부대를 크게 쳐부수는 공을 세웠다.
2.2. 초공작전과 중일전쟁
1930년 5월, 강절환 초비총지휘 겸 육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초공작전에 투입되었다. 1931년 6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겸 난창 행영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전선에서 물러나고 12월 15일, 루디핑에 이어 강서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허잉친으로부터 강서성의 1개 사단을 차출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미 공산당 토벌에도 여력이 없을 뿐더러 고작 1개 사단을 가지고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리고 만약 강서성의 방위선이 돌파될 경유 그 파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1932년 11월, 난창 행영 판공청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34년 10월, 강서성 보안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난창행영 비서장 양영태와 함께 장제스의 친위파벌인 정학계를 구성하였다. 중국 공산당 서기를 지낸 샹중파를 체포하여 처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1933년 제5차 초공작전이 시행되자 장제스로부터 난창 행영 당정군조사설계위원회 정치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 복건사변의 발생으로 복건의 난을 진압하고 온 장제스로부터 성과를 요구받자 신생활운동의 시행을 제안하였다. 1934년 2월 15일, 장제스는 자신의 자택으로 슝스후이 등을 초청하여 예의염치를 앞세운 신생활 운동의 시행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황포계나 CC계와는 달리 슝스후이는 신생활 운동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3,4개월이 지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난창 신생활운동 촉진회 간사회 주임으로 선출되었고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며 그를 최고의 영수로 표현,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신생활운동에 관한 원칙은 모두 세 가지로 이 원칙을 따라가면 신생활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은 무엇인가? 시간상으로 말하면 첫째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둘째는 손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며, 셋째는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첫째, 둘째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시간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지금 이후에는 모두 행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 시간상으로 이와 같다면 공간상으로는 어떠한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첫째는 우리의 영수가 방법을 결정하며 둘째 각 간사가 주도하고 계획하며 셋째는 모두가 행하는 것이다. 현재 영수가 결정한 방법, 간사의 계획과 계책 역시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이하로는 각자가 행하는데 힘써야 한다."
1935년 11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6년, 강서성의 CC계를 제거하기 위해 천리푸와 권력다툼을 벌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장제스의 지시를 받고 제2차 상하이 사변의 전황을 시찰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슝스후이는 일본군을 이길 수 없으며 군대를 증파한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보고했으나 같이 시찰을 했던 신임 군정부장 천청은 슝스후이의 의견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상하이가 뚫리면 중국의 방위선은 겉잡을 수 없이 붕괴될 것이라면서 증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제스는 천청의 주장을 수용하여 대규모 군대를 상하이로 파병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후 후스, 천부레이, 타오시성, 왕징웨이, 천궁보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전이 오히려 중국을 죽이는 길이라 주장,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했으나 왕징웨이가 왕징웨이 공작에 넘어가 일본에 붙은 것과 달리 매국의 길은 거부하였으며 강서성에서 일본에 대한 항전을 수행하였다. 1938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1941년, 강서성의 병사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한여름에도 겨울군복을 입어야 할 정도라고 열악한 현실에 대해 보고했으며 1942년 2월, 강서성 정부주석직에서, 5월에 강서성 보안사령관에서 면직되어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주미군사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 개정을 요구하였다. 1943년 7월, 삼민주의 청년단이 조직되자 제1기 중앙단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중앙 설계국 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 대만조사위원회가 설립되자 자파의 천이(1883)를 주임위원으로 추천하였다. 1944년 중앙은행 감사를 지냈다. 1945년, 중앙집행위원에 유임되었다.
2.3. 국공내전과 말년
중일전쟁 말기에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지명으로 협진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종전 후인 1945년 8월 31일, 동북행영 주임 겸 동북 정치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슝스후이는 소련과 조약을 체결하면 동북 지역의 접수가 훨씬 원활할 것이며 화북, 화중, 화남보다도 빨리 수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10월 12일, 주소 중국대사 푸빙창을 통해 행해진 소련과의 비행장, 항구 사용 교섭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국민정부의 세력을 만주에서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앙 설계국 명의로 동북복흥위원회를 수립하여 만주국 시기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한반도 귀환정책을 펼쳤다. 1946년 12월, 국민정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947년 1월부터 벌어진 만주진공작전에서 중국군을 지휘하였고 만주를 시찰한 장징궈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해 8월 동북행영주임에서 면직되어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혁신계로부터 부패한 인물이라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48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에서 발표한 전범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49년 1월, 장제스가 총통에서 사직하자 절강성 계구에 기거하던 그를 문안하며 충성을 확인했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영국령 홍콩을 거쳐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도주했다. 한동안 웨이다오밍 등과 함께 해외에서 대만의 정치적 상황을 관망하였으며 태국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였다. 1954년에 귀국하였고 1974년 타이중 시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산업사.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도서출판선인.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