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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징웨이 공작은 트라우트만 공작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1938년, 서서히 장기화되어가던 중일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일본 군부가 국민당 부총재인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일본 제국이 "지방군벌 수준으로 추락했다"고 주장하던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붕괴시키려던 책술을 말한다. 공작 자체는 성공했고 왕징웨이가 배신하면서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일본의 주장과 달리 장제스 정권의 기반이 오히려 튼튼해졌던지라 일본이 바랐던 국민정부의 붕괴나 중일전쟁의 종결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자오밍 공작[1]이라고도 한다.2. 배경
중일전쟁 중인 1938년 1월 16일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일본 제국의 공식적인 교섭창은 완전히 닫히고 말았다. 트라우트만 공작에도 서술된 것처럼 예문연구회를 비롯한 비공식적 창구 등은 남아있었으나 공식적 창구의 폐쇄로 전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워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문제의 성명을 발표한 고노에 후미마로 본인도 훗날 "나 자신도 실패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한다."라고 할 정도의 패착이었다.일본군은 상하이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예상 외의 피해를 입긴 했으나 타이얼좡 전투 정도를 빼면 줄곧 승전하면서 중국 내륙 깊숙히 진격하고 있었다. 특히 왕징웨이 공작이 일어나기 직전인 5월에도 화북과 화중의 점령지를 연결하기 위한 쉬저우 전역에서도 중국군을 격파하여 5월 19일 쉬저우를 점령하는 등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중국을 몇 달 안에 굴복시킨다는 기존의 예상과는 대조적으로 전쟁은 멈출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계속 격렬해졌고 중국 정부와 중국 군민의 항전 의욕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본은 중지나파견군을 신설하고 군비를 걷잡을 수 없이 확대하는 등 판은 아시아 최대의 경제대국인 일본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2.1. 우가키 공작의 실패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노에 수상은 중일전쟁의 종결을 위해 육군 내부의 화평파에게 기대를 걸고 1938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개각을 단행,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과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을 경질하고 6월 3일 신임 외무대신에 화평을 지지하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신임 육군대신에 중국통으로 알려진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임명했다. 육군 내부에선 우가키의 화평 노선을 불만스러워하였으나 고노에는 이를 무시했다. 고노에 수상은 5월 초순 "장 정권을 철저히 응징하고 파괴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결코 휴전하지 않는다. 비록 수년이 걸리더라도 제국의 결정 방침은 변경하지 않는다."면서도 수면 아래에서는 장제스와의 화평을 얻고자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는 취임에 앞서 4가지 조건을 제출하여 고노에의 완전한 동의를 얻었는데 우가키의 4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내각의 결속을 강화한다.
-
대화 외교를 단일화한다.
-
조속히 평화 방침을 결정한다.
-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에 너무 구애 받지 않는다.
내가 먼저 연락 끊었지만 그렇다고 날 무시하진 말아줘
우가키는 6월 17일 첫 기자회견에서 "대국이 크게 달라진다면 일본으로서도 태도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면서 화해의 태도를 엿보였다. 일본의 태도 변화에 중국 측도 무력의 힘을 빌려 굴복시키려는 화의에는 굴복하지 않는다면서도 국방 최고회의 비서장 장췬의 개인 자격으로 우가키의 외상 취임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장췬과 우가키는 과거 우가키가 육상 시절에 교토에서 만나 아시아의 장래와 중일 양국 제휴의 중요성을 토론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장췬은 전보를 통해 중일 우호친선의 숙원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전달했다. 이에 우가키는 장군에게 회답을 보내 쿵샹시가 일본에 와서 서로 대화할 수 없겠냐고 제안했다. 이에 6월 26일과 28일에 거쳐 홍콩에서 쿵샹시의 비서 교보삼과 일본의 홍콩주재 총영사 나카무라가 회담했고 7월 18일에 회담이 다시 벌어졌다. 회의 결과 쿵샹시가 나가사키로 와서 일본과 직접 담판한다는 합의가 나왔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이러한 화평공작에 반발했다. 화평공작 자체에 난리치는 강경파도 있었으나 육군성 군무과장 가게사 사다아키 등이 주도하던 왕징웨이 공작과 이 우가키 공작이 충돌함에 따라 반발하고 나선 왕징웨이 지지파들도 반대파였다. 고노에 수상은 왕징웨이가 정치 행동의 진폭이 너무 심하다면서 왕징웨이 공작보단 우가키 공작 쪽에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왕징웨이 공작을 지지하던 육군상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이 반발했다. 이타가키는 왕징웨이 공작을 암시하며 8월 30일 다음과 같이 담화했다.
"대중정책은 여전히 1월 16일 발표된 고노에 성명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그러나 장제스가 만일 신정권에 참가한다면 재검토의 여지가 없지도 않다. 중국 신 중앙정부의 수립에 있어
몽강 자치위원회, 북경 임시정부 및 남경 유신정부가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정부의 준비위원회를 조직, 곧 정부가 탄생되게 될 것이다."
우가키가 쿵샹시의 방일에 앞서 그간의 접촉 경과에 대해 내각에 보고하며 교섭의 전권을 요청하자 육군 내부의 우가키 반대 세력들이 결집하여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대지원 설치 문제였다. 대지원은 중국에 관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문제를 통일적으로 처리하는 중앙기관으로 일본정부가 새로이 설치하려 했는데 이를 추진한 것은 대중외교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던 육군이었다. 우가키는 외무성의 권한을 침해하는 이러한 조직의 설치를 반대, 대지원의 권한을 일본군 점령지역에 한한다는 수정안으로 저항했으나 고노에가 군부에 동조하자 열받은 우가키는 결국 9월 29일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10월 1일 각의는 대지원 설치를 정식으로 결정, 12월 26일 흥아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식으로 발족했다. 때맞춰 국민정부도 일본 육군 강경파들이 압력을 통해 추가해놓은 일본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면서 쿵샹시의 방일을 취소하였다. 고노에는 이 때문에 이게 다 육군 강경파 때문이다!를 외치게 되었으나 이런 개판이 된 상황을 제어하지도 않았다.(...)
2.2. 가오쭝우와 일본의 접촉
앞서 설명한 우가키 공작과는 별개로 참모본부 제8과 과장 가게사 사다아키와 지나반장 이마이 다케오 등은 육군 내부의 화평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가게사는 원래 대중국 강경론자였고 장제스가 배일, 항일 정책을 한다고 매우 증오했다. 주재무관 시절에는 난징에 있는 중산릉에 상관 이소가이 렌스케와 찾았다가 예를 갖추길 거부하여 중국인들을 분노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시와라 간지가 중일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본 가게사는 생각을 바꿔 중국인의 항일정신을 중국인의 애국심으로 인정하게 되고 삼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중산릉에서 자신이 저지른 무례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 가게사는 자신의 사상전향 이유를 이누카이 쓰요시의 아들인 체신성 참여관 이누카이 타케루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자신도) 철저한 대중국 강경론자였지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무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도쿄로 와서 이시와라 소장의 철저한, 중국에 대한 비전론의 곤봉을 사정없이 얻어맞고서야 비로소 수행승처럼 미몽에서 깨어났던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이시와라라는 사람은 대단한 천재여서 뒤를 따르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 사실 나는 육군 안에서 통제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일파는 중국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시 말해 사변 확대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파에 속한 내가 화평운동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참모본부 안에서도 나를 향한 비난이 더욱 거세질 수밖에요. (...)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대중국 정책이 훨씬 더 옳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국인의 애국심을 존중하는 것이 새로운 첫 걸음입니다. 중국을 보세요.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해야 할 것은 전력을 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록 일본이 쉽게 중국을 굴복시키고 있진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피해 역시 심각하여 일찍부터 중일간의 화평을 추구하던 세력은 중국에도 당연히 있었다. 중국의 화평세력이 접촉한 것이 바로 가게사 사다아키를 비롯한 육군 내부의 화평파였다. 1938년 2월 가오쭝우가 외교부 아주사 일본과장 둥다오닝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최고지도부의 중국에 대한 시각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둥다오닝은 동맹통신사 상하이지국장 마쓰모토 시게하루의 소개로 가게사 사다아키와 만날 수 있었다. 마쓰모토 시게하루는 둥다오닝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였는데 고노에 성명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던 인물로 고노에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기던 차에 둥다오닝이 직접 일본에 찾아오자 그를 자신이 알고 지내던 화평파인 가게사에게 소개했다. 가게사는 도쿄에서 둥다오닝을 만나 그를 정중하게 맞으며 중일 관계의 타개책을 강구하기로 합의했다. 가게사는 둥다오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일전쟁의 책임 소재를 새삼스럽게 묻는 것은 죽은 아이 나이 세기나 마찬가지다. 일본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고, 중국도 반성했으면 한다. 그리고 종래의 악감정을 털어버리고 빨리 사변을 해결하지 않으면 불행은 영원히 중일 쌍방을 농락할 것이다."
가게사는 둥다오닝을 타다 하야오에게 소개했고 이어 이마이 다케오에게도 소개했다. 가게사는 허잉친과 장췬에게 보내는 편지를 둥다오닝에게 부탁했다. 가게사는 허잉친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기도 했다. 가게사는 편지에 "조건을 흥정하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중일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일본과 중국 모두 맨몽뚱이로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썼다. 둥다오닝은 타다 하야오, 이시와라 간지, 이마이 다케오 등과 모두 면담한 후 귀국하여 가오쭝우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4월 초 가오쭝우는 직접 한커우에서 편지를 저우포하이와 왕징웨이에게 전달한 후 장제스에게도 둥다오닝의 방일에 대해 보고했으나 트라우트만 공작에서도 썼듯이 장제스는 둥다오닝의 방일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가오쭝우는 장제스의 반응에도 4월에 만철 난징사무소 소장 니시 요시아키와 비밀리에 교섭하였고 5월 말에 우한으로 돌아와 저우포하이, 왕징웨이,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이후 이탈리아가 추진한 화평 공작이 있었고 왕징웨이는 측근인 교통부 차장 펑쉐페이를 파견해 이탈리아 참사관과 접촉하였으나 일본이 장제스 하야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고집하였던지라 이 공작 역시 실패했다.
1938년 7월 2일, 가오쭝우는 일본이 여전히 장제스 하야라는 조건을 고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비밀리에 도쿄를 방문하였다. 이번 방문은 장제스에게 알리지 않은 비밀 방문이었는데 니시와 저우포하이가 그를 부추겼다고 한다. 가게사와 만난 가오쭝우는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직접 만나거나 편지를 통해 일본과의 조기 화평이 중국의 이익에 합치한다고 설득하는 중이라고 했다. 또한 왕징웨이가 가게사의 편지를 읽고 동의했으나 장제스는 무시했다고 했다. 가오쭝우는 가게사에게 왕징웨이를 높은 자리에 앉힐 필요가 있다면서 "고노에 성명을 통해 일본이 장제스 정권을 부인한 이상 새롭게 다른 인물을 교섭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격자는 왕징웨이 말고는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가오쭝우는 일본이 다시 강화조건을 제시해야 하며 이를 토대로 교섭하자고 했다. 가게사는 가오쭝우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를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에게 소개했다. 가오쭝우는 이들과 두루 면담하면서 중국을 일본과 대등한 국가로 대우할 것이며 중국에서 철병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 또한 협상 대상으로 왕징웨이 말곤 없지 않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7월 5일 고노에와 만난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 위원장은 일본이 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있으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화가 난 것 때문에 대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장 위원장이 화의에 응하지 않는다면 왕징웨이가 반드시 응한다. 왕의 의지는 명백하다. 일본이 성의를 보이면 왕을 수령으로 하는 중국 내부의 화평세력을 모아 정전, 조정에 응한다. 왕은 이제까지 몇십차례나 장 위원장에게 화평을 진언했다. 시기가 무르익으면 곧 계획에 옮기겠다. 일본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나 이래서는 왕징웨이도 손 쓸 방법이 없다. 국민정부 내에서는 왕징웨이가 내통을 취할테니 일본은 먼저 강화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고노에는 왕징웨이의 이름에 별로 동조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가 왕징웨이의 정치적 진폭이란 것을 신뢰하지 않아서였고 그 때문에 고노에는 우가키 공작에 더 신뢰를 두었으나 역시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가키 공작은 망해버렸다.(...)
가오쭝우가 7월 9일 일본에서 돌아오자 장제스는 그의 방일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격노하여 '황당하고 잘못된 행동'이라며 그를 책망했다. 배경한 교수는 가오쭝의 방일 의도(대일 협상에서 장제스를 배제하고 왕징웨이를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 장제스가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장제스는 7월 14일 일기에서 "일본 측이 가오쭝우를 속여 장난을 치고 있는 점을 보아 기대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7월 22일 가오쭝우의 방일 사실을 알고 그의 보고를 받고 나서는 "그 잘못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라고 썼다. 7월 25일에는 왕징웨이, 장췬과 함께 가오쭝우의 보고서를 검토했는데 왕징웨이의 태도가 부자연스럽다면서 그에게 실제로 부끄러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한편 가오쭝우는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왕징웨이에게 직접 보내는 편지를 받아왔는데 거기엔 왕징웨이가 직접 나서서 전국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7월 12일 일본의 오상 회의에서는 '중국의 일류 인물을 기용하여 튼튼한 신정권을 건립하며, 장제스에 반대하는 실력파들을 이용하여 반장, 반공, 반전 정부를 건립하도록 한다.'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3. 전개
3.1. 메이쓰핑의 방일과 우한 함락
가오쭝우의 방일로 왕징웨이와 일본이 협상해야 한다는 데에 어느 정도 합의를 보게 된 화평파들은 본격적으로 일본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오쭝우의 경우에는 장제스의 질책을 받고 그의 의심을 사게 되자 입법위원이자 저조구락부 멤버인 메이쓰핑이 대신 나섰다. 장제스의 가오쭝우 질책이 있은 후 저우포하이가 가오쭝우에게 연락해서 한동안 충칭에 오지 말도록 연락하는 한편 홍콩에서 대일 정보 확보 임무를 맡을 새 임무로 메이쓰핑을 추천했는데 이로 인하여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홍콩에서 메이쓰핑과 마쓰모토 시게하루가 5차례에 걸쳐 협상하였다. 일본측은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신정부 수립, 일본과의 화평협상 추진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에 메이쓰핑은 왕징웨이가 중심이 되어 대일 화평을 주도한다는 방침에 동의했다. 그리고 만약 왕징웨이가 일본과 본격적으로 협상에 나선다면 룽윈, 장파쿠이같은 반장 군벌들이 이에 가세할 것이라고 하였다. 왕징웨이도 1938년 10월 11일 독일 통신사 기자와 담화를 나누면서 항전과 동시에 제3국을 통한 평화협상의 문을 닫은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에게 중국의 국가적 생존과 독립을 저해하지 말 것을 주문했고 10월 21일 로이터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일본이 중국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일본과의 평화 가능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원론적인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도가 아니라 메이쓰핑과 마쓰모토의 합의를 바탕으로 왕징웨이가 실질적인 행동을 암시한 인터뷰로 볼 수도 있다. 왕징웨이의 이러한 발언은 공산당과 천청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항전파들의 비판을 받았다.10월 22일 충칭으로 간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에게 일본이 제시한 조건들을 전달했다.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에게 "일본은 왕징웨이가 충칭을 이탈하여 별도의 정부를 조직해 평화조건의 담팜을 지울 것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하였고 왕징웨이의 집에서 천궁보, 메이쓰핑, 저우포하이[2], 타오시성, 천비쥔[3] 등이 모여 비밀회의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25일과 27일에 걸쳐 우한이 함락되었고 일본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으며 화평파를 매국노 취급하는 강경파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반면 중국의 화평파는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다면서 중국의 희망에 더 이상의 기대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화평파 인사들의 회의는 메이쓰핑이 다시 홍콩으로 떠나던 11월 2일까지 12일 동안 계속되었다.
3.2. 중광당회담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3일 2차 고노에 성명이 있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동아신질서의 건설이야말로 일본의 성전 목적>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항일 용공 정권을 섬멸하겠으며 장제스 정권은 중국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다. 이 성명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성명의 수정으로, 일만중 3국의 수상이 모여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걸쳐 상호연계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과 만약 국민정부가 정책을 전환하고 인적 구성을 바꾸어 동아신질서 건설에 참여한다면 굳이 이를 거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왕징웨이는 이를 두고 이것을 기초로 일본과 강화담판을 시작해야 한다고 동조하였다. 11월 7일 메이쓰핑이 충칭에서 홍콩으로 이동하여 가오쭝우와 만난 다음에 9일에 상하이로 건너갔다. 가오쭝우도 11일 홍콩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일본과의 교섭을 위해서였다.그리고 11월 12일 상하이 동체육회로(둥티위후이루)에 있는 중국주둔군 특무부대장 도이하라 겐지의 공관 중광당에서 가오쭝우, 메이쓰핑, 통역 저우룽샹과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가 참석했다. 가오쭝우와 메이쓰핑은 일본과 독일의 방공협정과 똑같은 수준의 중일방공협정 체결, 중국의 만주국 승인, 중국 내지의 일본인 거주, 영업권 허가와 일본의 치외법권 및 조계 폐지 고려, 화북 5개성에 대한 중일 합작 경제개발, 일본군의 일정기간 내몽골 주둔과 기한 만료 후 철수, 내몽골 이외의 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즉각 철수와 철수 완료 시기의 확정을 제시했다. 이것이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화평파의 조건이었다. 회의는 11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둘의 합의를 기록한 중일 협의기록과 양해사항이 도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1. 방공협정 체결 및 방공을 위한 내몽골, 베이징, 톈진의 일본군 주둔 승인(주둔 기한은 방공협정 유효기간까지), 2. 중국 측의 만주국 승인, 3, 일본인의 중국 내지 거주, 영업의 자유 인정과 일본 측의 치외법권 폐지 및 조계 환수 고려, 4. 화북 지역의 자원 이용과 경제제휴에서 일본의 우선권 인정, 5. 전쟁으로 인한 중국 내 일본교민의 피해 보상, 단 일본의 전비 배상은 하지 않음, 6. 평화 회복 이후 다른 지역 일본군의 즉각 철수. 단 주둔 지역은 중일 상호 회의를 열어 정하며 치안 회복에 따라 2년 후 완전 철수 등이 결정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합의된 시국 해결 방침을 발표하면 왕징웨이와 중국의 화평파 인사들이 장제스와 단절을 선언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 제휴와 반공정책을 공동으로 발표하여 신정부를 도모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최종 협의기록에 수록되진 않았으나 기존에 수립된 상하이 유신정부와 베이징 임시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의 신정부에 통합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왕징웨이가 신정부를 수립하면 이에 호응할 것으로 예상되는 쓰촨, 윈난 군벌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군이 군사작전으로 구이저우 성 귀양까지 진출하여 장제스의 중앙군의 후방을 끊어줄 것도 요청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귀양까진 어렵고 중앙군의 후방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탈출 계획도 상세하게 작성되었다. 11월 22일 메이쓰핑과 가오쭝우가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가며, 메이쓰핑은 25일 하노이를 거쳐 26일 쿤밍에 들러 왕징웨이의 탈출을 준비한 다음에 29일 충칭으로 가서 왕징웨이에게 화평 조건을 알리는 한편 12월 3일 전후에 이토 요시오 만철 촉탁과 상하이에 남은 저우룽샹이 양측의 최종 동의 여부를 확인, 왕징웨이가 12월 5일 전까지 충칭을 탈출하여 쿤밍으로 가고 그 사실을 확인한 고노에 내각이 화평 조건을 내외에 밝히면 왕징웨이가 성명에 호응하여 장제스와 단절을 선언하고 하노이로 향해 그곳에서 반장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3.3. 일화신관계조정방침
11월 26일 메이쓰핑이 충칭으로 돌아가 왕징웨이에게 중광당회담의 결과를 보고했다. 27일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천비쥔과 합의사항에 대해 얘기하며 29일 청두의 천궁보를 불러 논의했다. 결국 탈출이 결정되었고 저우포하이가 쿤밍으로 가서 준비하여 12월 11일에 왕징웨이가 쿤밍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왕징웨이의 최종 입장 입장은 저우룽샹에게 전달되어 이토를 통해 일본에 보고되었다. 왕징웨이는 중광당회담의 결과를 기본적으로 승인하되 일본이 성명을 통해 경제적 독점을 하지 않을 것과 내정 불간섭을 할 것을 명시해야 하므로 추가 협상의 여지를 남겨둘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왕징웨이 자신은 12월 6일 충칭을 떠나 10일에 쿤밍에 도착할 것이니 일본이 12일 전후에 3차 고노에 성명을 발표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면 자신은 쿤밍이나 하노이, 홍콩에서 하야를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한편 일본 쪽에서는 이마이가 이타가키 육군대신에게 중광당회담의 결과를 보고했다. 일본 육군 강경파는 우한 함락으로 기가 살아 날뛰던 입장인지라 이러한 합의에 대해 좋아하진 않았으나 상호회의에서 주병, 철병 시기 및 규모를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육군성과 참모본부도 중광당회담의 결과를 수용하게 되었다. 가게사가 상하이에서 이누카이와 함께 귀국하여 고노에를 찾아 왕징웨이 탈출 계획 등을 보고하자 고노에는 "나로서는 이 안에 찬성합니다. 오상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하지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1938년 1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중일 협의 기록이 일화신관계조정방침, 혹은 중일관계조정방침이란 것으로 국책으로 승격되면서 일본의 입장이 정해졌다. 이 일화신관계조정방침은 동아신질서 수립을 이상으로 삼으며 일만중 3국의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합작을 목표로 몽골과 티베트를 방공을 위한 자치구역으로 삼고 상하이, 칭다오, 샤먼을 특별행정구로 만든다며 중앙정부에 일본 고문을 파견해 3국 우호가 실현되는 단계에 일본이 조계환수와 치외법권 철폐를 고려할 것이고 화북, 몽골, 티베트에 '필요한' 일본군이 주둔하며 그 외 지역의 일본군은 조속히 철수하며 치안확립이 될때까지 화북, 난징, 상하이, 항저우 3각지대에는 계속 주둔할 것이었고 그 비용은 중국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왕징웨이가 주장했던 것보다 여러모로 대폭 후퇴된 것이었는데 우선 협의기록에서 2년으로 명시된 주둔기간이 명문화되지 않았고 고문의 파견 등으로 내정간섭을 암시했으며 일본의 경제적 장악과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주둔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 국책결과가 중국인들의 분노를 일으킬 것이 틀림없었기에 이 조정방침은 명확히 발표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섭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쓰모토 시게하루가 어디에도 철병이란 단어가 없다면서 '이래서는 왕징웨이가 나와도 안된다'고 불평했고 가게사는 '앞길이 막막하다'라고 한탄했고 이누카이는 '거짓말이 만사의 시작이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결국 가게사는 패전 이후에 '결국 무미건조한 관료적 작문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을 온건하게 처리하려 했던 고노에도 의욕을 잃었고 후생대신 기도 고이치에게 물러나고 싶다고 말하였고 1939년 1월 이타가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야하였다.
3.4. 왕징웨이의 탈출
12월 2일 가오쭝우가 왕징웨이가 중일 협의기록을 승인했다고 일본 측에 전달했고 12월 10일에 왕징웨이가 탈출할 것이라고 전달했다.[4] 12월 7일엔 저우룽샹이 왕징웨이가 쿤밍에서 홍콩으로 갈 수도 있으니 일본 총영사관의 보호를 요청했고 경과에 대해 잘 아는 다지리 외무성 조사부장을 홍콩 총영사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이를 수용, 아리타 외상이 다지리를 소환해 육군 비행기를 주어 광저우로 그를 보냈고 다시 포함으로 갈아타 10일 오후에 홍콩에 부임시켰다. 왕징웨이가 결국 탈출길에 오른 것은 12월 18일이었다. 그는 12월 18일 청두에 군사학교에 강의를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어 비행기를 타고 쿤밍으로 이동한 왕징웨이는 19일 하노이로 떠났다. 원래 계획인 6일에 떠나지 못하고 12일이나 늦은 이유는 그동안 구이린 행영에 있던 장제스가 갑자기 충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그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난데없는 왕징웨이의 탈출 연기에 일본은 대단히 당황했는데 이미 그때 고노에가 히로히토에게 탈출 계획을 보고하며 오사카에서 왕징웨이 탈출에 대한 호응성명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온 지급전보에 계획변경을 안 일본에선 자신들이 왕징웨이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12월 9일 장제스는 충칭에서 우한 함락 이후 첫 수뇌회담을 소집했다. 그날 쿵샹시, 왕징웨이, 왕충후이가 참석하여 항전계획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는데 왕징웨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다가 '전국의 어려움은 어떻게 전쟁을 결속하느냐에 있고 우리의 어려움은 어떻게 전쟁을 지지하느냐에 있다'고만 했다. 12월 16일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단독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30분간 얘기했지만 결국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군사회의를 위해 시안으로 이동하던 18일 오후에야 겨우 충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편지는 남아 있지 않으나 저우포하이는 그 편지가 국제정세를 논하며 항전의 장래가 어두우니 자신의 고충을 이해하달라는 요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왕징웨이는 편지 말미에 '이제 형은 쉬운 길을 가고 나는 어려운 길을 간다'라고 적었다. 왕징웨이는 아내 천비쥔과 비서 증중명과 동행하여 일단 청두에 도착했다가 다시 쿤밍에 다다랐다. 왕징웨이는 윈난 주석 룽윈이 그에 호응하여 그가 도착하는 동시에 왕징웨이 옹립을 전국에 통전하고 4전구 사령관 장파쿠이의 호응을 얻을 계획이었으나 룽윈은 칭병하여 왕징웨이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충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왕징웨이는 당황하여 19일 기차에 올라 하노이로 떠났다.
20일 하노이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홍콩에 대기 중인 이마이를 통해 고노에에게 암호전보를 보냈다. 22일까지 고노에가 왕징웨이에 호응하는 담화를 발표해달라는 것이 전보의 내용이었다. 한편 악천후로 인해 12월 18일 시안행이 미뤄졌던 장제스는 12월 20일에야 시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다음날인 12월 21일 룽윈이 12월 19일에 보낸 전보를 받고서 왕징웨이의 탈출을 알게 되었다. 룽윈은 왕징웨이가 18일 쿤밍에 왔다가 19일 오후 하노이로 떠났으며 떠나면서 일본과 화평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소식에 경악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1938년 12월 22일, 장제스의 일기.
1938년 12월 22일, 장제스의 일기.
전보를 받은 직후 장제스는 하노이에 있던 외교부장 왕충후이에게 전보를 보내 왕징웨이를 설득하여 그의 평화협상 시도를 중지시키고 그를 유럽에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군사위원회 참사실 주임 왕스제와 고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주영 중국대사 궈타이치와 주미 중국대사 후스에를 통해 왕징웨이에게 화평교섭을 공개적으로 진행하지 말 것이며 중앙과 관계를 단절하지 말 것을 설득하라고 지시했으나 소용없었고 12월 22일 3차 고노에 성명이 발표됨으로 일본이 왕징웨이의 탈출에 호응했다.
일본 정부는 시종일관 항일 국민정부의 철저한 무력소탕을 기하는 동시에 중국에 있어서 동우지사와 연계하여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향해 매진하려는 것이다. 지금 중국 각지에서 갱생의 세력이 거세게 일어나 건설의 기운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갱생 신중국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근본방침을 만방에 알리고자 한다.
이 3차 고노에 성명에는 만주국 승인, 중일 방공협정, 일본인의 중국 내지 거부, 영업권의 자유 인정 등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3차 고노에 성명을 접한 왕징웨이는 12월 25일부터 저우포하이, 타오시성과 함께 검토하며 대응방면을 논했다. 왕징웨이는 12월 28일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과 국방 최고회의에 장제스가 트라우트만 공작 당시에 일본 측 조건을 평화 담판의 기초로 삼는 것에 동의했다는 주장을 하는 전보를 보냈으며 성명 발표 1주일만인 12월 29일 염전으로 불리는 통전을 발표, 장제스와 국민당 중앙집해위원 및 감찰위원들에게 고노에 성명의 기본 주장인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제휴에 그들이 동조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이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려는 것이 의도라는 것이 드러났다면서 일본이 경제독점과 한정된 주둔을 약속했다면서 국가의 생존과 독립이 항전의 목표라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 측에 내몽골 지역에서만의 주둔과 다른 지역의 일본군의 즉각적인 철수도 요구했다.
12월 24일 오후 시안에서 충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12월 26일 국민당 중앙당부 총리 기념식에서 3차 고노에 성명에 대해 반박하며 일본이 말하는 신질서란 중국을 영원히 일본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왕징웨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고 12월 27일 그에게 전보를 보내 돌아오라고 했으나 왕징웨이는 듣지 않았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탈출을 처음에는 부정하면서 그가 4개월 간의 병가를 받아 하노이로 요양을 간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왕징웨이가 돌아오지도, 유럽 외유를 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해졌으며 왕징웨이의 염전에 대한 비판이 폭발하자 결국 태도를 바꾸었다. 1939년 1월 1일 국민당 임시 중앙 상무위원회가 소집되어 염전에 대해 토의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개심을 다시 한번 촉구해보는 안을 제안했으나 린썬 등 다른 위원들이 분노가 폭발하여 결국 임시 중앙 상무위원회는 왕징웨이의 영구 제명과 모든 직책의 면직하기로 결정하고 당을 능멸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엄연히 존재하는 대의에 따라 단호하게 이를 불허할 것이며 영원히 당적을 제거하고 일체의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기강을 숙정한다.
중국 공산당 역시 왕징웨이를 한간이며 민족의 부패분자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반면 일본에선 왕징웨이를 열렬히 찬양하면서 그에 대한 온갖 기사와 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왕징웨이의 일본 유학 시절 은사와 동창들을 인터뷰하며 그를 정의감에 불타는 인물로 묘사했다. 일본에선 이제 곧 일본에 순종하는 정권이 중국에 수립될 것이란 기대가 넘쳐났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 와중인 1939년 1월 4일 무기력해진 고노에 내각은 총사퇴하고 추밀원 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남작의 신정권 히라누마 내각이 들어섰다. 1월 17일 홍콩의 남화일보 발행인 임백생이 왕징웨이를 옹호하다가 테러를 당했고 이에 당황한 왕징웨이는 독일, 영국, 프랑스에 각각 비자를 신청했는데 장제스는 그 기회에 2월 중순 측근 구정딩(공정정)을 하노이로 보내 왕징웨이에게 유럽으로 외유하라고 마지막으로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왕징웨이는 2월 21일 가오쭝우를 히라누마 총리와 면담하게 하고 일본정부가 3월 8일 5상회의를 통해 왕징웨이와 결탁할 것을 다시 확인하자 일본과 협력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장제스 역시 강경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3월 21일 하노이 코롬가의 왕징웨이 숙소에 군통 소속 특수요원들이 몰려들어 총격을 가했고 왕징웨이의 비서 쩡중밍을 척살했다. 원래 목표는 왕징웨이었으나 왕징웨이와 쩡중밍의 침실이 바뀐 것을 몰라 잘못 죽인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징웨이에게 남은 선택은 친일 정권의 수립 외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다음날인 3월 22일 오상회의를 열어 왕징웨이를 탈출시킬 것을 결정하였고 가게사를 파견하여 왕징웨이를 상하이로 옮겼고 흥아원이 6개월 치의 공작비로 1800만 원을 지급했다. 왕징웨이는 5월 8일 상하이로 입항, 프랑스 조계지의 우원로 은가에 숨었고 왕징웨이는 그곳에서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3.5. 왕징웨이의 방일
어떠한 호응도 없고 오히려 국내외의 맹렬한 비난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왕징웨이가 일본을 무조건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하노이에서 왕징웨이는 염전 발표 이후 가오쭝우에게 일본을 믿을 수 있는지 수차례 문의하였고 상하이로 이동하는 중에도 가게사에게 일본의 협상 내용 실천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리고 중광당회담의 합의 사항이 일본의 국책에 누락된 것도 왕징웨이의 의문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징웨이 등 중국의 화평파는 회담을 성급하게 추진했고 너무 조심 없이 일본을 믿었다. 가오쭝우의 경우에는 이누카이 타케루에게 "왕 선생은 일본의 국책을 너무 미화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쓸데없이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대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더욱이 왕징웨이는 과단성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말이다. 그 원인에 대해선 부인 천비쥔의 영향력이나 왕징웨이의 충동적 성격 등이 꼽히고 있다. 쇼와 육군의 저자인 호사카 마사야스는 왕징웨이가 정권 수립을 위한 실체적 기반이 없었으므로 일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도조 히데키와 만난 왕징웨이 |
왕징웨이 정권의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있은 것은 1939년 2월 초부터였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일본의 타협 방안, 기존 친일 괴뢰 정권이나 친일 정치가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정부 구성 방안[5], 왕징웨이 자신이 중심이 되는 전국적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제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는 왕징웨이를 이용하여 충칭 국민정부와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서 중일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지 왕징웨이를 데리고 와서 아예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는데 왕징웨이의 상하이 행 이후로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권 수립이 왕징웨이 본인에 의해 제기되기 시작했다. 왕징웨이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독립성을 쟁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 왕징웨이는 충칭의 국민정부가 다시 난징으로 환도한 것처럼 신정부를 수립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5월 31일 측근들을 데리고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유력 정치가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6월 10일 그는 히라누마 수상에게 자신이 지도하는 국민당 외에는 시국을 수습할 정치세력이 없다고 했으며 가장 적합한 시국 해결책은 국민당을 중심으로 각 당파가 연합해 국민정부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6월 14일 추밀원 의장으로 물러난 고노에 후미마로와 만나서는 중국의 자유독립적 정부가 구성되어야만 진정한 합작이 가능하다고 설득하려 했고 6월 15일 이타가키 육상에게는 일체의 고문제도를 두지 않아 일본의 내정간섭 의혹을 불식하고 일본과의 교섭은 대사를 통해 하며 중아군 최고기관으로는 고문위원회를 설립하나 고문으론 일본인이 아닌 독일인, 이탈리아인을 초빙하고 일본이 점령한 중국의 공적, 사적 재산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외에 아리타 외상 등도 만나 얘기했다.
하지만 상황은 왕징웨이의 기대와 다르게 돌아갔다. 6월 5일 육군성 참모본부는 왕징웨이를 구심점으로 하는 국민당 중심의 신정권의 수립에 반대했고 6월 6일의 5상회의에서는 국민당 중심이 아닌 몽강위원회, 중화민국 임시정부, 우페이푸와 '일본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받아들인 후의' 충칭 정부가 동등하게 통합하는 형태의 신정부를 결정했다. 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신 중앙정부는 충칭정부에서 이탈한 인물로 구성하며 신 중앙정부는 일화신관계조정방침의 원칙에 동의해야 하고 장래의 정치형태를 분치공작으로 하며 화북을 국방, 경제상의 일중 강도 결합지대로 삼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왕징웨이는 6월 18일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은 씹었다.(...) 히라누마 수상이 왕징웨이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한 회답은 그간 왕징웨이 공작에 참여했던 이누카이를 비롯한 일본인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6] 히라누마의 회답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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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는 현재 배일항일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을 수정하기 바란다.
- 청천백일만지홍기는 현재 충칭의 항일정부가 사용하고 있어서 일본군 일선 부대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기 때문에 국기의 도안을 수정해주기 바란다.
결국 기껏 왕징웨이가 얻은 것은 기존 청천백일만지홍기 위에 노란 화평반공건국이란 천을 붙이고 삼민주의의 수정을 보류한다는 것 뿐이었다. 한편 왕징웨이에 대해 국민정부는 6월 8일 체포령을 선포했다.
왕징웨이 정권의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위에 왕징웨이 정권의 표어인 화평, 반공, 건국(和平反共建國)을 넣었다. |
3.6.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체결
일본에서 돌아와 톈진으로 들어온 왕징웨이는 우페이푸와 면담을 요청하고 그의 협력을 구하면서 그에게 군권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우페이푸는 왕징웨이와의 면담을 취소해버렸다. 이어 왕징웨이가 우페이푸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설득하려 하자 우페이푸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일본이 직접 나서 우페이푸 설득을 시도했으나 우페이푸는 일본의 선제 철군을 요구하면 출마하겠다고 하였고 얼마 안 있어 우페이푸는 치과 진료 중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우페이푸의 협력을 구하는데 실패한 왕징웨이는 6월 27일 베이징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괴 왕커민과 만나 새로운 중앙정부 수립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으나 왕커민은 사실 왕징웨이에게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6월 28일 상하이로 돌아와서 일본군 화남 파견군 참모부장 사토와 함께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으나 6월 29일 왕징웨이와 만난 난징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수괴 량훙즈는 왕커민보다도 왕징웨이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합병을 노골적으로 반대,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 통합 문제는 논의되지조차 못했다. 왕징웨이는 장파쿠이를 비롯하여 광둥의 반장 군벌들을 다시 한번 회유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모두 왕징웨이를 무시했다. 7월 5일 왕징웨이는 량훙즈와 2차 회담을 가졌고 량훙즈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을 기반으로 신중앙정권 설립을 요구함으로 왕징웨이를 배제하려 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중국의 정통한 영수라 주장하며 8월 28일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회의를 소집하고 233명의 대표를 모아 스스로를 주석으로 삼고 반공의 국책화와 중일관계 정상화를 천명했으나 1939년 9월 난징에서 열린 왕징웨이-량훙즈-왕커민 3자회담에서 국민당 전국대표대회가 아닌 중앙정치회의 구성과 소집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며 중앙정치회의는 국민당, 임시정부, 유신정부가 각각 3분의 1의 지분을 차지한다는 조건이 합의됨으로 왕징웨이가 원하던 자신이 주도하는 정부가 아닌 기존 괴뢰정권들과의 대등한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9월 12일 일본은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를 난징에 설치하여 왕징웨이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10월 24일 왕징웨이에게 중앙정치회의 지도요강을 내놓아 이를 강요했다. 여기엔 모든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참석시키며 군사 고문단엔 독일, 이탈리아를 배제할 것을 명시하여 왕징웨이의 모든 희망을 짓밟는 내용이 가득했다. 일본의 너무 가혹한 요구에 일본측의 가게사 사다아키도 괴뢰국을 만들려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게다가 분치합작주의를 주장하던 일본은 화북을 국방상, 경제상 특수지역으로 규정, 일본이 독자적 권한을 가지겠다고 했고 방공 주둔권, 치안 주둔권, 주둔 지역 내의 철도,항공, 통신, 주요 항만, 수로의 군사상 요구권 및 감독권, 일본군 군사고문단의 중국군 지도권을 요구했으며 거기에 중국 전역의 항공지배권, 국방상 필요한 자원 개발 이용에 관한 기업권, 몽강의 경제지도권과 참여권, 화북의 철도장악권, 화북의 무선통신 일화 공동경영권, 화북의 국방상 필요 매장자원 개발이용권, 화북 국방상 필요사업 합동사업 참여권, 화북 정무위원회 경제행정 지도권, 만주국 승인도 요구했다. 중국의 노예화라 해도 할말이 없는 매우 가혹한 요구였고 왕징웨이는 가게사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이런 안은 화평운동에 치명적인 문제를 초래할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이 안에 일방적으로 양보한다면 당신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교섭은 없었던 것으로 했으면 한다. 나로서는 화평의 신념에 변함없지만 정부 수립이라는 방법은 포기하는게 어떨까 싶다."
가게사는 도쿄로 가서 왕징웨이의 항의를 전달하면서 조건 완화를 호소했으나 다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참모본부는 장제스가 화평에 나선다면 조건을 완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왕징웨이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왕징웨이와 교섭을 맡던 매기관이 너무 안이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육군대신 하타 슌로쿠와 육군차관 아나미 고레치카,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는 이러한 입장을 확실히 표명하며 교섭을 정리하라고 했고 가게사도 포기하고 상하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월 30일 왕징웨이는 화중과 화남을 지킨다는 구실로 일화신관계조정요강에 서명하였고, 이에 량훙즈조차도 왕징웨이가 일본의 화북지배를 인정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왕징웨이는 울며 변명했다.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저우포하이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불만이 많았던 가오쭝우 등은 왕징웨이에게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1940년 1월 4일 장제스의 지시를 받은 다이리와 두웨성의 공작에 포섭되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을 소지한 상태로 홍콩을 통해 탈출하였다.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은 1월 20일 장제스에게도 보고되었고 1월 21일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 여론은 과거 21개조 요구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중국을 속국화하려 한다고 분노했고, 왕징웨이는 1월 22일 보도된 내용은 최초 시안이라 조인된 내용과 다르다고 변명했으나 일본의 영자 신문 재팬 타임즈는 이 내용이 내각의 비준을 받은 것이라며 확인사살을 해버렸다.(...)
1940년 1월 23일 칭다오 회담에서 왕징웨이는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정부 대표와의 회담을 통해 베이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를 폐지하고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에 흡수하는 것을 확정하는 한편, 화북정무위원회 설치를 통해 일본의 화북 지배를 기정사실화했다.
4. 결말
"왕징웨이는 모반자가 아니냐. 모반자와 결탁해서야 어떻게 참된 평화가 가능하겠느냐. 대세 순응하여 절조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에게 중국 민중이 다가갈리가 있겠느냐.
왕징웨이의 탈출에 대해 쑨원의 맹우였던 야마다 준자부로의 반응.
왕징웨이의 탈출에 대해 쑨원의 맹우였던 야마다 준자부로의 반응.
3월 22일 왕징웨이는 난징에서 중앙 정치회의를 소집, 자신의 괴뢰정부를 국민정부라 명명하며 3월 26일 환도식을 벌이며 왕징웨이가 주석대리 겸 행정원장으로 취임하기로 결정했다. 3월 23일 왕징웨이는 자신이 정통정부임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정부의 조직에 대해서 우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회의를 계속해왔다. 우리는 지금 충칭의
린썬 주석이 가능한 한 빨리 난징으로 돌아와 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그때까지는 중앙 정치회의의 의결에 따라 정부를 운영할 방침이다."
하지만 린썬 주석은 국민들에게 왕징웨이를 엄중 배척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왕징웨이에게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왕징웨이는 3월 30일 환도식을 열고 정부를 발족했다.[7] 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괴뢰정부에 참여한 77인에게 체포령을 내리는 한편 세계 각국에 일본이 발족한 난징 국민정부는 무효라고 알려왔다. 이에 미국 등이 호응하여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난징 정부 승인을 거부하고 충칭 정부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마쓰오카 공작을 비롯하여 장제스와의 직접적인 담판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해 평화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결국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왕징웨이의 괴뢰정부도 일제와 함께 파멸했다.
왕징웨이는 1944년 11월 10일 골수암으로 일본에서 사망했다. 전쟁 이후 그의 무덤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
가게사 사다아키는 왕징웨이 정권의 최고 군사고문이 되었다가 패전 이후 1946년 3월 라바울에서 병든 몸으로 귀국하여 국립제일병원에서 요양했다. 장제스는 가게사를 한간들을 부추긴 장본인으로 지목해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가게사는 1948년 9월 10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5. 참고문헌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중일전쟁기 周佛海를 통해본 친일협력, 김정현, 아시아문화연구 11집,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조우 포하이(周佛海)의 일기를 중심으로 본 항일전쟁시기 대일합작(對日合作) 문제에 대한 한 검토, 황동연, 코키토 62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고려대학교 역사학연구소.
6. 관련문서
[1]
왕자오밍(汪兆銘/왕조명)은 왕징웨이의 본명
[2]
저우포하이는 우한에 있다가 10월 22일 광저우 함락으로 인해 충칭으로 철수했다.
[3]
왕징웨이의 아내.
[4]
왕징웨이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광저우 함락과 창사 초토화를 계기로 탈출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38년 10월 하순에서 11월 중순 정도이다.
[5]
이때 왕징웨이는 정부 수뇌로
우페이푸를 추천하기도 했다.
[6]
이누카이는 자신의 저서 양쯔강은 지금도 흐른다에서 놀라서 뒤로 넘어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7]
원래 계획보다 4일 늦어진 이유는 일본이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회유하기 위해 이마이 사령관을 중심으로
동 공작이라 불리는 공작을 통해 충칭과 직접적인 교섭을 시도하였기 때문이지만 장제스가 씹으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