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송덕기(宋德基) |
출생 | 1893년 1월 19일 |
사망 | 1987년 7월 22일 (향년 94세)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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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 사진의 오른쪽.
구한말의 마지막 택견꾼. 호는 현암(玄庵). 1983년에 신한승과 함께 중요 무형 문화재 76호 택견의 초대 예능 보유자가 되었다. 10대 시절부터 택견을 수련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된 후에도 택견을 잊지 않고 간직해온 덕분에 광복 이후 새 제자들에게 택견이 전수되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2. 생애
조선시대인 1893년[1] 1월 19일 현재의 서울 사직 공원 옆 필운동에서 관리였던 송태희(宋泰熙)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13세부터 친형에게 3년간 택견을 배웠는데 제법하는 것을 본 아버지가 16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당대의 유명한 택견꾼 임호(林虎, 1871[3] ~ 1922(추정)[4])에게 보내 배우게 했다. 그리하여 임호로부터 또래 10여명과 함께 택견을 배우며 웃대 택견[5]을 전수받았으며, 10대 후반부터는 결련 택견 판에 나가 누상동, 애오개 등의 택견꾼들과 겨루었다. 특기는 솟구치는 발길질[6]로, 그래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80세 때도 두발당성 정도는 직접 시범 보일 정도이니 뭐 말 다 한 셈. 덕분에 도기현을 비롯한 젊은 제자들은 택견 연습을 할 때 무한 솟구쳐 차기를 연습하라고 지시받아 지옥을 경험했다고 한다(…). 임호로부터 택견을 집중적으로 배운 기간은 4년이고 그 이후로도 활쏘기 같은 다른 운동을 병행하면서 임호가 타계할 때까지 십수년간 배웠다.
17살에 결혼했고 24살인 1916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2년간 근무했으며[7], 여러 가지 새로운 체조나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하기도 하였으나, 투기로는 오로지 택견만을 계속 했다. 일제가 택견을 금지한 이후로는 집안이 만류하여 개인의 기예로만 간직하였으나 어쨌든 꾸준히 택견을 수련하였다.
광복 후 전통 무술에 관심을 보이던 이승만 정부가 그를 초대해, 1958년 이승만 생일 기념 행사로 열린 경찰무도대회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다. 이 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송덕기는 젊은 시절 함께 임호에게서 택견을 배웠던 동기 김성환을 찾아서 함께 연습을 한 후 갔는데 당시 김성환은 매일 술에 빠져 사느라 몸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자신이 매일 설렁탕 집에 데려가 설렁탕을 먹이며 기운을 차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건강이 망가진 김성환은 택견 시범을 마친 뒤 몇달 안가 사망했다고 한다.
택견에 관심이 있는 태권도 등 무술사범들이 조금씩 배우러 오기도 했는데, 이때 제일 처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이른바 태권도 5대관 중 하나인 YMCA권법부 출신으로 당시 경무대 무술 사범을 지내던 박철희였다. 박철희는 송덕기와 교류하며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을 만들려고도 했으나 당시 수박도 협회[8]의 방해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종국엔 미국으로 이민간다. 그 외 김병수, 임창수 등이 배우러 오기도 했으나, 딱히 단체를 이루거나 송덕기가 만족할 만큼 유지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래도 임창수 사범과는 1971년 경복궁에서 대련영상을 찍기도 했다.
오늘날 택견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할만한 인물들은 1969~1980년대 사이에 나왔는데, 1969년 같은 동네에 살던 고용우(훗날 윗대태껸협회)가 찾아와 그에게 택견을 가르쳤고, 1970년 들어 충주의 신한승(훗날 한국택견협회)에게 가르쳤으며, 1980년대 초 전수 장학생 이준서(윗대태껸협회)를 비롯해 도기현(훗날 결련택견협회) 등 대학생들이 찾아와 노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왕성하게 지도하였다.
2.1. 택견 이외의 체육 활동
- 불교청년회 축구단 : 송덕기는 1917년 불교청년회 축구단 창설때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1925년 축구단 해산 때까지 활동하였다. 불교청년회 축구단은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 2회, 준우승 3회를 한 팀이다.
3. 여담
-
택견뿐만 아니라 활쏘기, 축구 등 다양한 체육 활동을 접하고 노래도 한가닥 했다는 소문이 있는걸로 봐선, 오늘날로 치면 다재다능한
한량예체능인의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언을 보면 사람이 여유로웠다고... 또 결련택견하던 사람들 깡패였다고[9] 농담삼아 떠들기도 했지만, 일부 언론 매체의 보도와는 달리 택견과 택견꾼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 일제가 택견을 금하고[10][11] 다른 택견꾼들이 자신의 기예를 잊었으나, 송덕기만은 어떻게든 택견을 간직했음은 어찌 보면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택견이라는 것은 기록상으로만 알 수 있는 전설 속 무술로 남을뻔 했다.
[1]
통상적으로 알려진 출생년도이다. 묘비상에는 1882년, 주민등록상에는 1896년이라고 되어 있다.
출생신고의 기타 항목을 참조하면 잘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다른 경우가 매우 흔했다. 다만 1882년생은 신뢰하기 좀 어려운 것이 만약 진짜라면 106세까지 산 셈이 된다. 하튼 장수하긴 했다.
[2]
문화재 관리국의 조사 자료나 기타의 여러 자료에는 7남 7녀 중 막내라고 기록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3]
김명곤의 '저서 민중의 무술 택견'(1977)에는 임호와 송덕기의 나이 차가 15년, 도기현의 저서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2003)에는 둘의 나이 차가 20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덕기의 출생연도부터 들쭉날쭉(묘비상 1882년, 통상적으로 알려진 1893년, 주민등록상 1896년)하기에 황학정에서 송덕기가 활을 병행하던 때로 계산해본 추정.
[4]
1985년 8월 6일자 조선일보 조간 기사 《천의 비술 태껸 "마지막 맥 잇기"》에 의하면 임호는 송덕기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18년 뒤에 타계했다고 하고, 이용복의 저서에 의하면 그가 70여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여러 자료와 송덕기의 황학정에서 활쏘기 병행을 보고 계산한 추정이다.
[5]
구한 말 택견계는
청계천을 경계로
경복궁 일대의 웃대와
남산과
왕십리 일대의 아랫대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임호는 웃대 택견꾼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
인왕산 호랑이' 등의 별명으로 제법 유명해 해방 후에도 임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6]
두발당성이라고 하는데, 이 기술로 처마에 걸린 경종을 차기도 했다고.
[7]
운동신경이 좋아서 다른 병사들에게
철봉이나
뜀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는 순종이
창덕궁에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창덕궁에 근무하면서 순종의 얼굴도 몇번 봤다고 한다.
[8]
지금의 수박도 협회는 아니다.
[9]
더 정확하겐 무술인, 체육인, 관리, 주먹패 등 잡다한 사람들이 두루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
정확하게는 결련 택견. 마을과 마을간 경기가 진행되어 사람들이 모이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뜻이 맞으면,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 때문.
[11]
이와는 별개로 택견꾼들 개인에게 각각 순사를 붙여 밀착 감시를 했다고 한다. 송덕기가 회고하기를, 젊은 시절 황학정으로 택견을 수련하려 가는데 종종 순사가 몰래 쫓아왔고, 어느 날엔 기회를 보다 냅다 주먹으로 순사를 거꾸러뜨리고 도망갔던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12]
송덕기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