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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요 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의 전 전수장학생이자 위대태껸보존회의 회장.2. 상세
어릴 적부터 집안의 영향으로 한학, 한의학, 병법을 공부했고, 국민학교 때부터 송덕기와 한 동네에서 살았다고 한다. 송덕기는 택견뿐만이 아니라 노인정 의사, 사정의 의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의학에 조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준서는 송덕기로부터 택견뿐만이 아니라 옛 의학도 함께 전수를 받았다고.택견에 관심하게 된 이유는 지역적 요소[1]와 무술 자체에 원래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알음알음 택견을 배우다 1983년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송덕기는 이준서를 윗대태껸[2]의 유일한[3] 전수장학생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1987년 5월 석촌호수 놀이마당에서 열린 문화재 발표회 및 국가장학 전수생과 이수생 시연에서 낙방하여 국가장학 이수생이 되진 못했는데[4] 이 사건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무형문화재 관련 법령상 국가장학 이수생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은 인간문화재로부터 5년간 공식적[5] 전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시연이 있던 당시 국가장학 이수생 자격을 가진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당시 택견 국가 전수생들 중 가장 오래 택견을 사사했던 것이 박만엽으로, 신한승에게 4년 6개월간 가르침을 받았던 상태였다. 한마디로 실력 이전에 기간이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장학 이수생으로 발탁된 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정경화였다.
그 까닭은 바로 정경화가 제시한, 5년 전 신한승과 함께 시연을 한 사진들이 주최 측에서 수련의 근거로 인정이 되었기 때문인데, 차후 송덕기가 돌아가자 충주택견 측에서 무형문화재로써의 택견의 지위를 독차지하기 위해 위의 사건을 문제 삼으며 웃대 택견의 계보가 끊어졌다는 주장[6]
사실 당시에는 부각되지 못하였으나 이는 상당한 문제거리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충주 측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행정적으로 이준서는 국가전수생을 공식적으로 수료했기 때문이다.[7] 즉, 시험만 치르면 바로 국가장학 이수생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얻었을 텐데, 충주 측 농간 때문에 시험을 치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셈. 이는 박만엽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후 약 30년 정도 택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몇 해 전부터 전수를 위해 위대태껸보존회의 회장으로 택견계에 돌아왔고, 현재 고용우와 함께 윗대태껸을 계승하는 후진들을 양성 중이다.
태껸 무고춤 12마당( 태껸춤)의 전승자다.
3. 여담
- 이용복이 저술한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를 보면 미국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화를 했더니 아무 소리하지 않고 끊어졌고, 다시 전화했을 때는 그 전화번호가 없어졌다고 한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미국에서 산 적이 없으며, 따라서 미국에서 전화를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8]
[1]
비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도 사직골에서 송덕기는 택견꾼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2]
역사적으로 태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경복궁 방향에서 행해진 웃대(上村)와 남산 방향에서 행해진 아랫대(下村)로 나뉘는데, 송덕기는 이중 웃대 택견꾼이었다고 한다.
[3]
1대1 전수가 필요한 개인 종목 무형문화재는 당시에는 인간문화재가 각기 국가전수생 2명을 둘 수가 있었다.
[4]
당시 송덕기는 병환으로 누워 있어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고,
신한승은 대장암 말기로 참석은 하였으나 시연을 하지는 못 했다.
[5]
즉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남는 것.
[6]
이준서가 탈락한 것은 수련을 게을리해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거기에 더해 전수장학생도 다 끝마치지 못했지 않느냐는 것.
[7]
송덕기는 사망하기 전에 이준서가 국가전수생 과정을 모두 끝마쳤음을 선언했고, 이를 문화재청에 알리는 공문을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8]
아무래도 미국에 거주하던
고용우 선생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