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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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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
서생포왜성
[ruby(西, ruby=ソ)][ruby(生, ruby=セ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Seosaengpo Japanese Fortress
파일:서생포왜성1.jpg
<colbgcolor=#BE0529> 이칭 서생왜채(西生倭寨)
서생진(西生陳)
봉화성(烽火城)
형태 연곽식 평산성
건설 1593년 (선조 26년, 추정)
가토 기요마사
폐성 1598년 (선조 31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91,453.1m²
지정연도 1997년 10월 30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데지로(出城) ・ 외성(外城) & 외곽부(外郭部)
3.1.1. 2단 전면 석축(二段前面石垣)3.1.2. 편장군 승첩동 마애비(片將軍勝捷洞磨崖碑)3.1.3. 남문지(南門址)3.1.4. 동문지(東門址)3.1.5.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3.1.6. 창표당(蒼表堂)3.1.7.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3.1.8. 동제당(洞祭堂)
3.2. 본성(本城) ・ 주곽부(主郭部)
3.2.1. 주곽부 주출입구(內大手口)3.2.2. 돌출형 부곽3.2.3.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3.2.4. 천수지(天守址)3.2.5.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 ・ 폐문(廢門)3.2.6. 장군수(將軍水)
3.3. 서생포진성
4. 과거 모습5. 가치6. 교통7. 여담8. 외부 링크9.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하였다.

2. 역사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였다. "신이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좌방어사 정희현(鄭希玄),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합병(合兵)하여 경상도 밀양 땅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근일 적세(賊勢)를 탐지해 보니 양산 · 울산 등지의 적이 부산 · 동래 · 서생포 · 제포 등지로 진(鎭)을 옮겨 널리 퍼져 둔취(屯聚)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18일 기사
상이 이르기를, "둔취한 난민이 어디 있소이까. 소서행장(小西行長) 부산포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서생포에 있으니 적이 주둔하고 있는 것은 대인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소이까. 왜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 모두 돌아갔다면 심 유격(沈遊擊)이 어찌하여 적진으로 들어갔겠소이까. 그리고 전후 주문(奏聞)한 것이 비일 비재하였으나 모두 중도에서 저지당하여 상달되지 못하였소."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4일 기사
이제 흉적이 잠깐 물러간 것은 소굴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성을 떠나면서부터 그 연도(沿道)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는 등 조금도 금즙(禁戢)함이 없었고 대군이 고개를 넘어 진격한 다음에야 서서히 물러가 경상좌우도의 요해지인 울산 · 서생포· 동래 · 부산 · 기장 · 언양 · 양산 · 김해 · 웅천 · 제포(薺浦) · 가덕 · 천성(天城) · 거제 · 영등포 · 율포 · 옥포 · 지세포와 수군절도사의 진영이 있는 군읍(郡邑)과 진포(鎭浦) 등처에 둔취하고 있는데 거의 수십 구역이나 됩니다. 흉적들이 여기에다 방옥(房屋)을 짓고 성호(城壕)를 수축하는가 하면 양곡을 운반하고 곡식을 가꾸면서 관병(官兵)에게 큰소리치며 공갈 협박을 가하고 있으니 그 흉모(兇謀)의 소재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9일 기사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에 5천, (...) 귀국(貴國)에서 만일 2 ∼ 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 ∼ 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서생포 · 임랑포에 있는 적병들이 번번이 수로(水路)로 울산과 태화(太和) 사이를 침범하여 우리 군사가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 뒤에 적들은 몰래 육로를 이용하여 경주로 나오곤 하니 술수가 대단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4월 14일 기사
지금 적병이 동으로는 서생포에 있으니 그들은 장차 관동(關東)으로 향할 것이고, 서쪽으로는 웅천과 김해에 있으니 그들은 장차 전라도로 향할 것입니다. 관동과 전라도 이 두 곳은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가진 지역이니, 장관(將官)이 된 자는 마땅히 백분 헤아리고 다방면으로 조치하여 먼저 철저한 준비로 쉽게 이길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1월 5일 기사
울산 군수 김태허(金太虛)가 신에게 치보하기를, "서생포의 적의 소굴은 전보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금년부터는 온 들판에 개간하고 있으며 양식을 운반하는 배들도 전보다 배나 많이 출입할 뿐 아니라, 성도 날마다 더 올려 쌓고 전에 배설(排設)한 해자(垓子)도 다시 파고 그 안쪽에는 소나무를 책목(柵木)처럼 심으면서 「여름에 보초를 설 때 더위를 피하려는 것이다. 」고 말하고 있고, 청정(淸正)은 늘 「조선 사람들은 거짓으로 강화를 칭하고 있으니, 평양에서 와 같은 변이 없지 않을 것이다. 방비를 더욱 엄하게 하라. 」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3월부터 적도들은 「오래지 않아 감박 사마(甘朴司馬)[1] 가 대군을 거느리고 나올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배를 숨길 곳을 넓게 파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근일의 적세가 이상하니 충돌해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3월 29일 기사
각 진영의 왜병 수목(數目)은, 두모포 청정 2만 4천, 서생포 주병 태수병(走兵太守兵) 8천, (...)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전해 들으니, 서생포의 군사는 이미 철수하여 두모포에 합하였는데 5 ∼ 6백 명이 머물러 있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 2일 기사
경상도 제진 위무사(慶尙道諸陣慰撫使) 황신(黃愼)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1월 12일, 청정 관하의 배 1백 50척과 휘하의 배 1백 30척이 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서생포로 향하고 있는데, 행장이 송충인(宋忠仁)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일은 매양 이렇다. 이런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월 22일 기사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경리가 초탐 군병(哨探軍兵)이 치보(馳報)한 청정의 방문(榜文)을 내보이고 말하기를 '왜노도 인민을 초유(招諭)하려는 뜻이 있는데, 본국이 사로잡힌 사람을 초유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또 이대간(李大諫)의 품첩(稟帖)을 내보이는데 '곡성 · 구례 등지의 인민이 어육(魚肉)과 주식(酒食)을 갖추고서 왜노가 오래 머무르기를 청하며 군량을 앞다투어 운반하는 등, 모두 바람에 휩쓸리듯 하니 극히 통한스럽다.' 하였으니, 보기에 미안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청정의 방문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각 주부(州府)·군현(郡縣)의 부로(父老)·좌수(座首)·별감(別監) 등에게 통문한다. 일본의 모 진장(陣將)이 살길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근년에 조선을 살벌(殺伐)한 것은 너희의 죄가 아니다. 조선 국왕이 무도하여 한갓 백성들에게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와도 불화하고 무례하여 다시 이처럼 살벌을 하였는데도 전혀 강화하여 올 뜻이 없으니, 내년 봄에는 다시 큰 군사를 일으켜서 남은 백성을 다 죽이기로 계획을 이미 정하였다.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각 고을의 좌수(座首)·별감(別監) 중 한 사람이 스스로 서생포진(西生浦陣)이나 울산진(蔚山陣)으로 오라. 그렇게 한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록(後錄)을 자세히 보고 각기 개록(開錄)하여 바치면 된다. 봄이 되면 즉시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니 출발하기 전에 조속히 들어와야 군색스럽고 급박한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군현은 인민을 살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곳에 초목(草木)이라도 꺾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편히 먹고 자며 농사지으라고 할 뿐이겠지만, 찾아오지 않은 군현은 그곳에 먼저 가서 살벌을 한 뒤에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올 적에 이것을 가지고 올 것을 각각 잘 알라.

후록은 다음과 같다.

1. 각 고을의 아무개가 좌수의 직임을 맡았고, 아무개가 별감의 직임을 맡았고 아무개가 경내(境內)의 색장(色掌)·유사(有司)의 직임을 맡았는지, 각기 성명을 개록할 것

1. 각 고을의 리(里), 면(面)의 수가 얼마이며, 전결(田結)의 수가 얼마인지를 각기 자세히 개록할 것."
조선왕조실록』, 1597년 11월 15일 기사
성중에는 양식이 적고 물이 고갈되어 오래지 않아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우리 병사들의 군량이 부족하지 않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성의 주위가 겨우 2 ∼ 3리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 1만 명의 왜적이 있는데 부산의 왜적은 아직 와서 구원하려는 형적이 없고 서생포의 왜적은 매일 수로를 따라 출몰하지만 우리 병사들에게 차단당하여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하루에 두세 차례나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3일 기사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였다. '정탐인이 말하기를, "서생포의 적이 이달 8일에 부산으로 옮겨 주둔했는데 군량과 짐을 날마다 배로 운반하고 있다. 관백이 이미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남쪽 오랑캐가 와서 싸우기 때문에 철군하여 돌아가려고 이 말을 내었다고 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27일 기사
파일:서생포왜성 노보리이시가키 2월.jpg
서생포왜성의 상징과도 같은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
임진왜란 왜군은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전략이 실패하자, 장기전에 대비해 일본 본토와 바로 이어지는 한반도 남동해안에 성을 많이 지었다. 서생포왜성도 그때 세운 성으로 회야강 하구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본래 이 지역을 관할하는 조선 수군의 서생포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2]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일본군이 함락하였다.

서생포왜성 관련된 내용이 최초로 등장하는 고문서는 1593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작성한 명령서(朱印狀)이다. 명령서에서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에게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을 수비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에서 울산 서생포에 내려가 축성을 시작한 듯하다. 구체적인 일시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15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을 세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593년 9월 히데요시는 명령서에서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가토 기요마사[3]가 서생포왜성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축성 과정에서 인근의 조선 백성들을 동원하였고[4], 서생포만호진성을 헐어 그 석재를 이용하였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명군 벽제관 전투 이후로 왜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조선은 왜군과 강화함을 완강히 반대하였으므로 명 측의 심유경(沈惟敬)은 조선을 배제한 채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비밀리에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승장(僧將) 유정(惟政)을 파견하여 서생포왜성에 주둔하는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도록 하였다.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왜성 천수(天守)에서 실시한 1차 회담에서 유정 고니시 측이 심유경에게 비밀리에 제시한 조건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무려 조선의 남부 4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회담으로 일본의 무리한 요구조건을 확인하자 명군을 설득하고 고니시와 가토의 갈등관계를 이용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같은해 7월 12-16일 2차 회담을 치른 후 유정은 조정에 토적보민사소(討敵保民事疎)를 올려 그간 살핀 왜군 진영의 현황을 보고하고, '적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전민(全民)을 동원하여 일전(一戰)을 벌일 것'과 '교린(交隣)하여 적이 돌아가게 한 후 힘을 길러 다시 격돌할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토 유정의 회담을 보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같은해 11월 고니시가 먼저 요청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함안 회담을 하였다. 여기서 고니시는 김응서에게 명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니 조선이 주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김응서가 거부했다. 조선 측에서 고니시와 별도로 협상하자 가토는 불만을 품었으므로 12월 23일 유정이 3차 회담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그 달, 고니시 심유경 간 비밀교섭으로 작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가 고니시 조안(小西如安) 등의 수작으로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 보고되었다. 명 조정은 이 문서를 사실로 믿고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부산포왜성·죽도왜성·가덕왜성 등 몇 곳만 남기고 많은 장수들이 순차적으로 일본으로 귀국하는데, 이때 가토는 거점을 서생포왜성에서 기장 죽성리왜성으로 옮겼으므로 서생포왜성은 한동안 폐성이 되기도 했다.

1596년 9월 2일 열린 오사카 회담은 별 탈 없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0월에 귀국하려던 명 사신 측에 히데요시가 서신을 보내 '조선 남부를 할양하라는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조선을 재침(再侵)하겠다.'는 뜻을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이로써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1597년 1월 가토는 다시 군사 약 1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 뒤, 기장군 양산시를 거쳐 서생포왜성에 재입성했다. 이후 가토는 서생포 일대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는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를 임명하여 3천 명의 재번을 명령했다.

3월 18일 유정 가토의 요청으로 3차 회담을 열어 가토를 설득하며 일본의 재침을 막으려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정은 즉시 비변사에 상소를 올려 상황의 위급함을 전했는데,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4월 13일자 기사에 내용이 있다.

7월 21일 아사노 요시나가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 가토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9월 아사노는 천수각 인근의 증축공사에 착수한 듯하다. 10월 말 가토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당시까지는 왜성 중 최동단에 있던) 서생포왜성에서 북동쪽으로 약 35 km 떨어진 최전선 울산에 성을 쌓으면 일본군 점령지의 수비가 한층 강화되리라 여겼다. 이런 의도로 건설한 곳이 바로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축성된 울산왜성이다.

12월 중순을 지나 성의 울산왜성의 외곽 부분이 거의 완공된 직후, 울산왜성이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서생포 왜성에서도 구원군을 보냈는데, 당시 회야강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 연합군에게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회야강은 당시 일승강, 대승강으로 불리기도 했다.[5]울산성 전투가 끝난 이듬해(1598)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가토 울산왜성의 수비에만 전념하고, 모리 카츠노부(毛利勝信)·이토 스케타카(伊東祐兵)·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毎)·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여러 장수가 서생포왜성에 들어와서 수비를 맡았다.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로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서생포왜성의 수비담당자가 되어 왜란이 끝날 때까지 지켰다.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자 종전(終戰)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10월 15일자로 고다이로(五大老)가 구로다 앞으로 보낸 명령서는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령서는 가토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에서 퇴각하고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하였다. 11월 24일 가토 구로다 등이 부산포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와 편갈송(片碣頌)이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함으로써 비로소 성이 함락되었다. 이듬해(1599) 마귀는 서생포왜성 안에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축하연을 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서생포진은 수군동첨절제사진(水軍同僉節制鎭)으로 승격되었으나, 본래의 만호진성은 이미 폐성이 되어서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왜성의 장점도 이용할 겸 현재의 장소로 이동했다. 이후 구한말까지 조선 수군의 대진(大鎭)으로 사용되었지만, 기능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왜성은 조선군 성채와 많이 달라서 조선군에 맞게 이곳저곳 개조도 했다. 울산서생진지도(1872년 작) #를 보면 내성은 비었고 외성에 관청이 있으며, 인근에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진하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진하리(鎭下里)라는 지명도 서생포진 아래 마을에서 유래하였고, 지금도 성 위에 올라가면 진하해수욕장과 동해 바다가 아주 잘 내려다보인다.

마귀 장군이 세운 창표당은 조선 후기에 왜란의 공신들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헐려 터만 남았다가 2018년 8월에 복원 완료하였다.

울산왜성·서생포왜성·죽성리왜성·자성대왜성 간에 봉화를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하여 봉화성(烽火城)이라는 이칭도 있다. 이는 현재에도 남은 지명ㆍ유적들 봉화산 / 하산 봉수대[6], 봉화산 / 나사 봉수대[7], 봉대산 / 기장 아이 봉수대[8] 봉대산 / 기장 남산 봉수대[9], 간비오산 봉수대[10], 황령산 봉수대[11], 구봉산 봉수대[12]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동남해안에는 익히 알다시피 봉수대 왜성이 매우 촘촘히 박혔다.

일제강점기 사적 제54호로 지정되었고 광복 후에도 유지되었지만, 우리 문화재도 아닌 일본이 남긴 왜성을 보존할 가치가 있겠느냐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1997년 사적에서 해지되어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등록되었다. 말하자면 강등.

3. 위치 및 구조

파일:서생포왜성 위치.png
서생포왜성의 위치
파일:스크린샷 2025-01-01 223858.png
서생포왜성 항공사진 (1967)
파일:5fb62fee2486f1605775342.jpg
서생포왜성 재현도 #
파일:서생포왜성 전도(국문, 수정본).png
서생포왜성 구조도 고화질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중략) 오래도록 주둔해 머물 계획인 것 같다.
『송운대사분충서난록』中
16세기 말 일본에서 발달했던 전형적인 연곽식 평산성이다. 회야강 하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山頂)에 주곽부(主郭部)를 쌓은 뒤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 ~ 3단의 부곽(副郭)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 산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외곽부(外郭)를 배치하였다. 성 바깥에서 주곽부와 외곽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각각 3개씩 있다. 외벽 바깥에는 2 ・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성곽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약 150,000㎡에 달하고 해자를 제외한 데지로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하여 한반도에 분포하는 왜성 중 가장 웅장하고 보존 상태가 좋다.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 터가 발견된다. 석축은 외곽부의 경우 내탁식(內托式)이고 주곽부는 협축식(夾築式)이다. 기울기는 지면에서부터 60°가량이다.

북으로는 울산왜성, 남으로는 임랑포왜성 기장왜성과 연계된다. 규모가 꽤 큰 성이라 아주 넓은 범위에 분포하는데, 대략적인 주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29, 273, 504, 505, 508-2, 560-2, 616-1, 631, 711, 714-1 ~ 718, 산51 일원

3.1. 데지로(出城) ・ 외성(外城) & 외곽부(外郭部)

서생포왜성은 본성 아래쪽으로 길게 노보리이시가키를 둘러 상당한 규모의 외곽부를 운용했다. 바다 방면으로 돌출된, 전면부의 작은 구릉에 위치했던 것이 데지로(出城)[13]이고, 노보리이시가키로 둘러싸인 것이 소토구루와(외곽부)이다. 여타 왜성과는 다르게 서생포왜성의 외곽부는 천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하다. 때문에 조선후기에 서생포첨사진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왜성의 외곽부를 그대로 두면서도 마치 읍성처럼 운용할 수 있었다.

3.1.1. 2단 전면 석축(二段前面石垣)

파일:서생포왜성 망해대.jpg
일제강점기에 찍은 망해대의 모습
파일:망해대의 현재 모습[1].jpg
망해대의 현재 상태
서생포왜성의 데지로에는 특이하게도 높이 약 10 m에 2단으로 된 석축이 있는데, 하중을 분산하기 위한 구조인 듯하다. 이렇게 지탱을 위해 기존의 석축 아래에 쌓는 보강석축을 고시마키 이시가키(腰巻石垣)라고 한다. 『1872년 지방지도』의 「서생진지도」를 보면 해당 부분이 망해대(望海坮)로 표기되어 있다. 지역에서는 "대물래", 혹은 "대문래"등으로 불렸다. 10여 년 전 해당 위치에 있던 교회가 이전하고 폐기물 업체가 들어오면서 망해대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해당 업체에서 외부인의 방문을 굉장히 꺼리는 듯하다.

왜성 남문 위치 민가에서 샛길로 빠지면 망해대의 위쪽으로 가볼 수 있어 회야강과 바다가 만나는 일대의 정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나 정비가 전혀 되지 않은 관계로 풀숲만 남아있을 뿐이다.

3.1.2. 편장군 승첩동 마애비(片將軍勝捷洞磨崖碑)

파일:편장군 승첩동 마애비.jpg
바위에 새겨진 각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1598년 서생포왜성에 입성한 의 편갈송(片碣頌)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글자를 새겼다. 편장군승첩동(片將軍勝捷洞)이라는 여섯 글자인데, 그 곁에 1892년 후손 편영기(片永基)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긴 십일대손 전운랑 영기 하마 임진 윤유월 일(十一代孫轉運郞永基下馬壬辰閏六月日)이라는 각자가 있다.

편갈송은 조선에 귀화한 의 장군으로, 절강 편씨의 시조이다.

3.1.3. 남문지(南門址)

파일:그림24.png
네이버 지도 로드뷰로 본 남문지의 모습.
남문은 외곽부의 주출입구(大手口)[14]이기도 하다.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인데 도로 때문에 석축이 끊겼다. 남쪽을 향하는데도 어째서인지 서문(西門)이라고도 불린다. 속설에는 이 문이 서생포왜성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살아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문이었다 하여 '생명의 문'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서생(西生)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부터도 서생포라는 이름이 확인되므로 민간어원이라고 볼 수 있다.

3.1.4. 동문지(東門址)

파일:그림25.png
네이버 지도 로드뷰로 본 동문지의 모습.
동문은 외곽부의 익수구(搦手口)[15]이기도 하다.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이며, 도로에 의해 석축이 끊겨 있다. 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동문이라 불린다.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석축을 알아보기 힘드니 주의.

서생포왜성이 축성될 당시 동문과 북측 체성은 회야강(回夜江)[16] 강변에 바짝 붙여 쌓았다고 추정하므로 동문 바로 바깥에 선소(船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가 보면 북측 체성이 지나가는 곳에 강변을 이루었던 듯한 암벽이 절리를 이루었다.

3.1.5.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x01ukT6Iv1uckof9o1_540.jpg
남측 노보리이시가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29, 273, 504, 505, 508-2, 560-2, 714-1 ~ 718
서생포왜성은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온전하고도 장대한 규모로 남아 있기로 유명하다. 나성(羅城)이라고도 하는 노보리이시가키는 을 평평하게 다지는 보통의 일본식 성과는 다르게 지형을 살려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식으로 쌓은 방벽의 일종이다.

에도 막부 수립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성들이 군사용 시설에서 다이묘의 거주용 시설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별 쓸모가 없던 노보리이시가키를 철거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막부 정권의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신 정부의 '폐성령' 선포 및 태평양 전쟁도 수많은 일본 성들의 훼철 · 파괴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군사용 시설로서 노보리이시가키는 매우 희귀한데, 이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서생포왜성이다. 보존 상태로나 규모로나 일본에 남은 노보리이시가키보다 훨씬 나은지라 일본 학자들과 일반 여행객들도 서생포왜성을 종종 방문한다. 이런 일본인 방문객의 숫자가 꽤 많은 듯 이들을 위한 일본어 가능 해설사도 현지에 상주한다.

3.1.6. 창표당(蒼表堂)

파일:창표당.jpg
2018년 복원된 창표당의 모습
1599년 11월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이 승전 기념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를 마친 후 기와 4칸으로 중창하여 임진왜란의 공신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당연히 당국의 눈엣가시였기에 철거되었고, 2018년 복원되었다. 서생포왜성의 주차장이 창표당 곁에 자리하였다.

3.1.7.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

파일:서생포왜성 굴립주 건물지.jpg
기둥의 하단까지만 재현된 굴립주 건물지
2011년 실시한 발굴조사 때 발견된 건물 터이다. 굴립주(掘立柱)는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그대로 땅에 박아 세운 것이다. 창표당 서쪽 경사면을 계단형으로 골라 작은 부곽군(副郭群)을 만들어 평지를 확보한 다음, 지름 70cm 내외에 깊이 70 ~ 110cm인 구덩이를 파 내부에 지름 약 20cm인 나무기둥을 세운 뒤 건물 2동을 3m 간격으로 나란히 배치했다.

남측의 건물지는 정면 10칸, 측면 2칸의 장방형 구조로 기둥 간격은 약 2 m이며 각 기둥 사이에 지름 10~20 cm 보조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도 기둥을 세워 3개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면적은 96㎡.

북측의 건물지는 역시 똑같이 정면 10칸에 측면 2칸 장방형 구조이다. 그러나 이곳은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두었으며, 건물 중앙 전면에는 차양칸으로 추정되는 2칸 규모의 돌출 공간을 추가로 두었다. 면적은 역시 96㎡.

두 건물 주의에는 건물과 약 30cm 정도 간격을 두고 깊이 80cm 남짓한 ㄷ자형 배수로를 조성했으며, 두 건물 사이에도 길이 약 4m로 수로를 두었다.

건물 내부 및 인근에서 기와조각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16세기 일본의 굴립주 건물에서 흔히 썼던 너와지붕을 올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돌로 눌러 놓았다고 추정한다. 건물 자체가 동향이어서 동해를 바라보는데, 선창이나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막사 건물이었다고 여긴다.

3.1.8. 동제당(洞祭堂)

파일:서생포왜성 동제당.jpg
보수공사가 끝나지 않은 동제당의 모습
마귀(麻貴) 제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동제당(洞祭堂)이라는 명칭은 마을제사(동제洞祭)를 지내는 건물이란 뜻이다. 요컨데 마귀 제독을 인근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 것이다.

3.2. 본성(本城) ・ 주곽부(主郭部)

3.2.1. 주곽부 주출입구(內大手口)

파일:seosaengpo.jpg
복원사업 이전에 촬영한 내성 대수구
내성 주출입구라고도 부른다. 평범한 평문(平入虎口)이다. 『1872년 지방지도』의 「서생진지도」를 보면 이곳을 주곽부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 형태를 보아 아마도 출입구 위에 평석(平石)을 얹어 문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창표당 좌측에서부터 오르막의 대수도(大手道)가 之자형으로 뻗어 이곳에 이른다.

3.2.2. 돌출형 부곽

파일:서생포왜성 돌출형 곡륜.jpg
파일:돌출형 곡륜 구조.jpg
돌출형 곡륜 전경과 구조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산51 (이하 동일)
서생포왜성에는 특이하게도 한쪽으로 돌출된 별도의 부곽이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출입구는 총 2개로, 주출입구에서 올라오는 비탈길로 통하는 출입구와 바로 성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다. 성 외부로 통하는 고구치는 주곽부의 익수구(搦手口)[17]의 역할을 한다.

3.2.3.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

파일:서생포왜성 요코야.jpg
니노마루 출입구 좌측에 돌출되어 있는 요코야의 모습

일본의 성에는 성(雉城)이라는 개념이 없다. 대신 요코야가카리(橫矢掛り)[18]라는 축성 기법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여러 형태가 있으나 직선으로 뻗은 외곽선에 ㄱ자 꺾임을 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코야의 모습이다.

서생포왜성에도 곳곳에 요코야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제2곽 출입구 좌측에 돌출되어 있는 요코야는 그 규모가 크고, 무엇보다 석축의 우각부(隅角部)에서 아직 깔끔하게 발전하지 않은 산기즈미(算木積み)[19]를 관찰할 수 있어 중세성곽에서 근세성곽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놓여 있었던 왜성의 과도기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영지에 쌓은 구마모토 성의 '니요의 석벽(二様の石垣)' #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3.2.4. 천수지(天守址)

파일:서생포왜성 천수.jpg
파일:서생포왜성 증축2.jpg
아직 보수공사가 끝나지 않은 천수 기단의 모습 천수 석축의 변천을 보여 주는 도표
천수(天守)가 있던 5 m 남짓한 기단이다. 앞뒤로 천수로 올라가게 만든 돌계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기단 위에는 지질조사 표지석이 꽂혀 있다. 이곳에서 유정 가토 기요마사와 세 차례 회담을 하였다.

이 인근은 거듭하여 증축 공사를 시행했는데, 처음에는 천수가 섬처럼 혼자 떨어졌지만 점점 주위의 석축과 이어졌고, 정유재란 때 천수로 오르는 돌계단과 ㄴ자 방벽 등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3.2.5.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 ・ 폐문(廢門)

파일:서생포왜성 우마다시쿠루와 구조.jpg
파일:서생포왜성 증축1.jpg
우마다시쿠루와의 구조를 설명한 안내판 연도별로 서생포왜성의 증축 과정을 보여 주는 도표
우마다시(馬出し)는 본래 출입구를 보호하기도 하고, 그 안쪽에 소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있게 하며, 특히 외부에서 성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발전한 방어벽이다[20]. 우리나라의 옹성(甕城)의 역할을 일부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동일본에서 주로 발달한 구조이며, 서일본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우마다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일반 부곽을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라고 한다. 서생포왜성의 경우 연곽식 성이라 천수가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서쪽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우마다시쿠루와를 한 겹 두른 것이다.

사실 우마다시는 본래 성과 딱 맞붙여서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생포왜성에서는 거듭 증축하여 처음에는 떨어져 있던 우마다시를 성 본체와 연결해 별도의 부곽으로 만들고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 2곳을 새로 조성하더니, 그마저도 이듬해 폐쇄했다.[21] 이는 일본군의 전황(戰況)이 그리 좋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1598년 울산성 전투를 전후로 하여 막았다고 추측한다. 두 고구치 중 북쪽으로 통하는 곳은 북문(北門)이라 하고 왜란 때 이곳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여 '죽음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는데, 상술했듯 근거가 없다.

3.2.6. 장군수(將軍水)

파일:서생포왜성 장군수.jpg
장군수(將軍水) 팻말의 모습
우마다시쿠루와 안쪽 구석에는 장군수(將軍水)라는 이름의 우물 터가 하나 있다. 서생포왜성 곳곳에서 이런 우물들이 발견되는데, 식수 보급이 쉽지 않았을 일본 중세성곽의 특성상 당시로서는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3.3. 서생포진성

파일:정부상징.svg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5호
<colbgcolor=#315288> 서생포만호진성
西生浦萬戶鎭城 | Seosaengpo Manhojinseong Fortress
파일:img123124.jpg
이칭 외증성(外增城)
형태 포곡식 산성
기능 수군진성
건설 1490년 (성종 21년, 추정)
폐성 1592년 (선조 25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 1개소
지정연도 2000년 11월 9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 산68
파일:20230120_105332.jpg
서생포만호진성 체성 잔존 상태
파일:스크린샷 2025-01-08 202931.png
항공사진에 촬영된 방형의 체성 (1967)
[clearfix]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생포진성
西生浦鎭城 | Seosaengpojinseong Fortress
파일:0-5.jpg
정식 명칭 서생포수군동첨절제사진성
(西生浦水軍同僉節制使鎭城)
형태 연곽식 평산성
기능 수군진성
면적 91,453.1m²
건설 1593년 (선조 26년)
폐성 1895년 (고종 32년)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파일:KYKH006_0000_0003(1).jpg
『1872년 지방지도』 「울산서생진지도」
[clearfix]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15세기에 이미 서생포에 수군만호진[22]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며, 병선 20척에 군인 767명을 두었다고 한다. 세조 때 정착된 진관 체제에 따르면, 울산의 염포 만호와 함께 서생포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었다. 이 당시 서생포진은 서생포왜성이 있는 지역 서북측으로 약 900m 지점, 용골산 자락과 회야강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 위치해 수운에 유리했다. 1490년 경상도 연해 지방 수군진에 성곽을 쌓으면서 서생포에도 약간 둥근 방형의 성곽을 둘렀으며 지대석을 배치하고 지대석의 상부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여서 쌓았다. 성벽 안쪽으로는 작은 쪼갠돌로 뒤를 채우고 흙으로 다져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성 바깥쪽에는 해자를 팠다.

서생포만호진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주도 아래 서생포왜성을 축성할 때 성돌을 빼내 쓰면서 허물어졌다. 현재 성 터 대부분은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허물어져 지대석과 성돌이 1 ~ 2단 정도만 남아 있다. 잔존하는 성벽의 둘레는 400여m, 너비는 4m 정도이며, 높이는 1 ~ 1.5m 정도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 서측으로 2차에 걸쳐 축조한 해자가 발견되었다. 1차로 판 해자의 너비는 3.5m이며, 2차 해자의 너비는 3.7m이다. 일본군이 서생포왜성을 남쪽의 구릉지에 새로 쌓은 이유는, 기존의 서생포만호진성의 위치가 회야강 하구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 먼 곳을 조망하기 어렵고 부지도 협소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전기의 서생포진성은 조선후기의 서생포진성과 구별하기 위해 '서생포만호진성'이라는 이름으로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임진왜란 후 서생포진은 1604년 종3품 수군동첨절제사의 진영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이미 허물어진 서생포만호진성을 새로 쌓기보다는 이미 넓은 외곽부를 둘러 조선 성곽으로의 변용이 용이했던 서생포왜성 안에 그대로 서생포첨사진을 설치함으로써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서생포진성은 부산진성과 더불어 왜성을 그대로 수군진성으로 활용한 유이한 성곽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사진이 남은 것이 없어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울산서생진지도」에는 기존 왜성의 일본식 출입구를 조선식으로 개조해 문루를 올리고, 동헌과 객사는 물론 외곽부의 중심 도로를 중심으로 장시가 형성되는 등 완전히 조선식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산진성과 동일하게 산 위의 주곽부 부분은 활용하지 않고 왜성의 형태 그대로 두었다. 서생포첨절제사진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혁파하면서 폐성되었고, 조선총독부의 주도 아래 이 성은 왜성으로서의 면모가 더 부각되어 서생포왜성으로서 사적에 등록되었으나 조선식으로 일부 개조하여 서생포첨사진성으로 활용한 기간이 약 300년이므로 수군진성으로서의 서생포성도 외면하기 힘들다.

4. 과거 모습

파일:pan029435.jpg
울산 서생포 왜성[23]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동문)
파일:pan005209.jpg
울산 서생포 왜성 성문[24]
파일:pan005204.jpg
울산 서생포 왜성 본환[25]
파일:pan005210.jpg
울산 서생포 왜성 출성 전경[26]
파일:pan029436.jpg
울산 서생포 왜성 동북면[27]
파일:pan029437.jpg
울산 서생포 왜성 상부 북벽[28]
파일:pan004152.jpg
울산 울주 서생포성 정면[29]
파일:pan004155.jpg
울산 울주 서생포성 우측 벽[30]
파일:pan004157.jpg
울산 울주 서생포성 이환 성문지
파일:pan004156.jpg
울산 울주 서생포성 우측 벽 위에서 본 상방[31]
파일:pan004158.jpg
울산 울주 서생포성 본환 정면 성문지 우측 벽

5. 가치

한반도의 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한반도의 다른 여러 왜성들[32]과 달리 비교적 원형이 남은 편이며[33] 대도시 울산, 부산에서 가까워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왜성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오히려 일본 본토에 있는 성들보다도 16세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양식 일본 성곽을 잘 보존해 가치가 높은데, 특히 '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있어서 일본 학계에서도 꽤 주목한다. 보급로 보호를 위해 산허리를 따라 지은 장벽인 노보리이시가키는 오늘날 일본에도 이요마츠야마성(伊予松山城), 히코네성(彦根城) 등 극히 일부 성곽에만 남은 희귀한 유적이다.

6. 교통


서생포왜성앞 정류장에서 약 500 m, 진하 정류장에서 약 800 m 거리에 있다. 경사가 좀 있기 때문에 체감거리는 그 이상.

진하해수욕장에서 도보로 좀 많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으며[34] 동해선 남창역이나 간절곶도 가깝다.

7. 여담

8. 외부 링크

9.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이 성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돌로 쌓은 왜성이다. 기장죽도성과 부산진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정상에 본성을 두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2∼3겹으로 높이 6m의 성벽을 계단식으로 다시 쌓아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안에는 중간지점에 선조 32년(1599)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던 창표당 터가 남아 있으며, 본성 맨 서쪽에는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외성 남쪽에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가 있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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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關白さま의 음차이다. [2] 울산기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 산68 일대. 삼거리에서 진하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표지판이 있다. [3] 가토 일본에서도 축성의 명수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구마모토 성. [4] 속설에 따르면 1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5] 현재까지도 회야강 수원지가 있는 웅상 지역에는 이 명칭을 딴 건물이 상당수 있다. [6]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산 66 [7] 울산 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36 [8]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산51-1. 고리원전 바로 뒤에 있다. 도로의 안내 표지판에 봉수대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고리 원전을 방어하는 군 부대가 있어 들어갈 수 없다. [9]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 [10] 부산 해운대구 우동 산146-76 [11]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 50-1 [12] 부산 서구 동대신동3가 산1-2 [13] 일종의 전진기지로 이해하면 된다. [14] 오오테구치. 성(城)으로 들어가는 정문 역할을 하는 출입구(虎口)를 말한다. 목조건물인 문(門)은 대수문(大手門, おおてもん)이라고 한다. [15] 가라메테구치. 성(城)에서 비상시에 빠져나올 수 있는 뒷문 역할을 하는 출입구(虎口)를 말한다. 즉 주출입구의 정반대 역할이다. 목조건물인 문(門)은 익수문(搦手門, からめてもん)이라고 한다. [16] 당시의 명칭은 이어강(鯉魚江)이었던 것 같다. [17] 파일:서생포왜성 약수구.jpg

전형적인 마스가타 고구치이다.
[18] 요코야(橫矢)는 성 외곽의 누선(壘線)을 다양한 모양으로 꺾어 여러 방향에서 적을 포위하는 방법 및 그러한 구조의 총칭이며, 일본어로는 '요코야를 걸다(掛かる)'라는 표현을 쓴다. 그 중 ㄱ자 모양의 꺾음 구조를 연달아 배치한 것을 뵤부오리(屏風折り, 병풍꺾기)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치성과 같이 네모나게 돌출시킨 것을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라고 한다. 마스가타는 '되박 모양'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고구치(虎口)에도 적용될 수 있고, 요코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19] 파일:산기즈미.jpg

일본의 성에서 의 하중을 지탱할 모서리를 처리하는 방법인데, 산가지를 쌓듯 돌을 차례차례 교차시키며 맞물리게 쌓는다고 하여 '산가지 쌓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20] 우마다시는 시토미도이(蔀土居)와 카자시도이(茀土居)로부터 발전한 형태라고 한다. [21] 파일:서생포왜성 북측 폐문.jpg

돌담을 쌓아 입구를 막아 버렸다.
[22] 세종 대에는 잠시 도만호(都萬戶)를 두기도 하였으나 곧 만호진으로 환원되었다. [23] 북서측에서 조망한 원경. [24] 내성 대수구. [25] 천수대 위에서 혼마루를 바라본 시점. [26] 왜성의 남측 노보리이시가키 원경. [27] 혼마루 북측 석축 위에서 천수대를 바라본 시점. [28] 거의 무너진 왜성의 북측 노보리이시가키. [29] 망해대와 데지로의 전면부. [30] 왜성의 남측 노보리이시가키와 야구라다이 근경. [31] 왜성의 남측 노보리이시가키 내탁 근경. [32] 왜성은 우리 문화재도 아니라는 인식이 커서, 보존하자는 인식 자체가 최근까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왜성은 군략적으로도 별 가치가 없었기에, 많이 헐어서 재활용했다. 일부 왜성은 그 테두리를 둘러 그대로 조선 수군진영으로 활용했는데, 서생포왜성이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다른 예시로는 부산진성, 안골포진성 등이 있다. [33] 당연히 천수각을 비롯한 목조 건물들은 없다. 전국시대에 숱한 전쟁과 전투를 겪은 일본에서 성 구조는 군사기밀이므로, 함락되거나 철수할 때 일부러 많이 파괴하였다. 목조 건물은 불태우고, 모나게 쌓은 석축은 모서리를 무너뜨려 못 쓰게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를 파각(破却)이라고 한다. 천수각은커녕 목조 건물이 제대로 남은 성은 일본 현지에도 얼마 없는 실정. 그 밖에는 순천왜성이 그럭저럭 잘 보존된 편이다. [34] 해변 최단거리 기준 1.1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