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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5:14:50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에서 넘어옴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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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Wiener Philharmoniker
다른 이름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Vienna Philharmonic ( 영어)
VPO ( 약칭)
창단 1842년 ([age(1842-01-01)]주년)
정식 데뷔 1882년 3월 28일 [1]
거점 지역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장르 클래식(고전 음악)
콘서트 홀 빈 무지크페라인
현직 악장 라이너 호넥[2]
폴크하르트 슈토이데[3]
알베나 다나일로바[4]
야멘 사디(예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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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지휘자
3.1. 역대 상임/정기 지휘자3.2. 명예 지휘자/단원3.3. 빈 국립가극장 감독
4. 특징
4.1. 악기4.2. 배치
5. 빈 신년음악회와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5.1. 빈 신년음악회5.2.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6. 음반/영상물7. 논란8. 흑역사9. 동양인 지휘자10. 빈 필하모닉 축구클럽 (Philharmonischer Fußballklub Wien)11. 전현직 단원 중 유명 인물12. 역대 내한공연13. 관련 문서

1. 개요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서 볼 때 "좋은 지휘자" 하면 어떤 지휘자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하고 퀴힐[6]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의 음악을 방해하지 않는 지휘자를 뜻합니다'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 나카노 다케시, '빈 필하모니 음과 향의 비밀', p. 13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을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 클래식을 모르는 일반 대중도 신년음악회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줄여서 '빈 필하모닉', 더 줄여서 '빈 필', '비엔나 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권에서도 구어나 넷상에서 Vienna Phil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2. 역사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들도 오페라 극장에 속해 있거나 황족, 귀족 등 높으신 분들 전용의 악단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시기인 18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빈에 상설 콘서트 오케스트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콘서트가 열릴 때 마다 오케스트라가 임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런 임시적인 콘서트 오케스트라에는 프로음악가는 물론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다. 일례로 1824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시에는 케른트너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에 별도 오디션을 통해 충원된 인원을 연합하여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는데, 여기에도 다수의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악단으로 평가 받은 것이 빈 궁정 오페라극장 소속 관현악단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이 오케스트라를 콘서트에도 이용해보자는 발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3년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주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842년 지휘자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연주회용으로 굴려보자는 취지하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가지고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첫 연주회는 그해 3월에 궁정 무도회장이었던 레두텐잘에서 열었는데, 비록 궁정극장 악단을 모체로 했다고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최초이자 그 당시 유럽에서도 거의 없던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니콜라이는 창단 직후 1848년까지 상임 지휘를 맡았는데, 사임 후 한 동안 객원 지휘로 돌리다가 1854년에 칼 에케르트가 두 번째 상임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에케르트도 1857년에 물러났고, 그 뒤로 침체기에 빠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단 안팎에서 계속 비판이 오갔고, 결국 단원들 스스로가 악단 운영과 지휘자 초빙 등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자주 운영 체제를 도입해 재출발을 꾀했다. 이 때부터 빈 필에 초빙되는 모든 지휘자는 직위에 관계 없이 단원들의 찬반 투표로 뽑히고 있다. 이 제도로 처음 뽑힌 상임 지휘자는 1860년 취임한 오토 데소프였고, 같은 해 공연장을 레두텐잘에서 케른트너토어 극장으로 옮겼다. 1869년에는 악단의 주요 후원 단체였던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여러 크기의 공연장을 포함한 새 건물을 지었는데, 바로 빈 무지크페라인 건물로, 빈 필도 상주공연장을 대강당으로 옮겼다.

1875년에 데소프가 사임한 후 후임으로 선출된 한스 리히터는 1898년까지 20여년간 빈 필의 상임 지휘자로 재임하면서 악단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리히터는 바그너의 제자였지만 스스로의 음악적인 식견에 근거해 바그너파, 브람스파 음악을 고루 연주했다. 리히터는 브람스 브루크너 등 당대 작곡가들의 여러 중요한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했다. 리히터는 1882년에 한번 사임했고 빌헬름 얀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지만, 얀이 부임 직후 악성 눈병으로 실명하는 바람에 일년만에 리히터가 다시 복귀해 1898년까지 재차 상임으로 재직했다.

리히터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지휘자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으로, 이들은 모두 친 바그너 계열이었다. 당시 빈 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친 브람스 계열의 거두인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바그너파의 취임을 결사 반대하고, 브람스와 깊은 친분이 있었던 구스타프 말러를 밀어줬다. 브람스파의 지원 덕분에 말러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빈 국립 오페라극장(가극장)과 빈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말러는 취임 후 자신의 교향곡들 뿐 아니라 기존 작품도 대대적인 편곡을 가해 연주하는 등 꽤 파격적인 스타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악단 조련 실력은 전임자들 못지 않았고, 1900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 연주회에 초빙되어 창단 이후 최초의 국외 공연 기록을 남겼다.

말러가 1901년에 대내외의 비난 등으로 인해 사임한 뒤에는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가 후임이 되었지만, 헬메스베르거도 1903년까지 단기 재임에 그쳤다. 이후 상임 지휘자 제도를 아예 없앴지만, 1908년에 궁정오페라 음악 감독이었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초빙하면서 사실상 상임 지휘자나 마찬가지인 '정기 지휘자(Abonnementdirigent)' 라는 새 직책을 만들었다. 이 직책은 1933년에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빈 외에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곧 상주 관현악단으로 고정 참가하게 되었다.

바인가르트너의 후임으로 1927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영입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에서 3년간 재임했으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절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했다.

때마침 세계경제대공황을 겪고 있어 여러 지휘자들이 미국으로 떠나기도 해서 빈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후임 인선에 다소 난항을 겪었다. 다소 논란 끝에 클레멘스 크라우스를 후임으로 선출(1930년)했는데, 크라우스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외손자라는 후광과 잘 생긴 외모와 위풍당당한 풍채로 빈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의 지휘 역량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었다. 마침내 빈 필은 그를 경질하려 했으나, 크라우스는 이를 거부했고, 1933년 빈 필은 크라우스의 반발 속에서 아예 정기 지휘자직(Abonnementdirigent)을 폐지했다. 이 조치는 당시에는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마땅한 후임도 없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이 악단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과 그로 인한 사회 정세의 불안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고, 특히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키자 존재 자체가 위협 받기 시작했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선전가들은 이 악단의 즉각 해체를 주장했고, 유대인 단원들은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중진들이 악단의 존속을 여러 차례 간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호칭과 함께 단원들의 병역 면제와 안정된 수입의 보장 등이 약속되었다. 하지만 여타 제국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빈 필도 나치나 독일군을 위한 자선 공연이나 선전 집회 등에 참가해 의무적으로 공연을 해야 하는 대가를 치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활동을 계속 했지만, 빈도 베를린 등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의 중요한 폭격 목표가 되어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 상황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베를린 필과 달리 상주 공연장인 무직페어라인 홀이 개박살나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고[7],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벙커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종전 후에는 다른 추축국 소속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군정 당국에 의해 인원 정리가 행해졌고, 나치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나 반 나치 지휘자들도 속속 복귀해 무대에 섰다. 동시에 그 동안 빈 필을 지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 등의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출연했고, 데카나 EMI 등의 음반사와도 녹음 작업을 재개했다.

해외 공연도 전쟁 전보다 더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미국 일본에서는 아예 '빈 필하모닉 주간' 이라고 정해 놓고 정기적인 순회 공연을 개최하고 있고 한국에도 베를린 필보다 더 자주 와서 연주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이 악단이 셀링 포인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 2006년에는 오스트리아 조폐국에서 악단 명칭이 들어간 24캐럿 금도금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항공에서도 자사의 A340 여객기에 이 주화와 악단 이름을 도색한 기체 한 대를 빈~ 도쿄 노선에서 비정기 운항하고 있다.

3. 역대 지휘자

3.1. 역대 상임/정기 지휘자

3.2. 명예 지휘자/단원

명예 지휘자
명예 단원

3.3. 빈 국립가극장 감독

행정전문가를 제외한 지휘자 출신 감독만 서술. (1986년부터 행정감독과 음악감독이 분리됨)

4. 특징

오스트리아 최초로, 그리고 서양 음악사를 통틀어서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 출발한 최초의 악단들 중 하나라서 역사적인 가치도 매우 중요한 악단이다. 다만 단원 전원이 빈 궁정오페라(왕정 붕괴 후에는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 본직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었는데, 초기에 빈 필 공연의 상설화가 더뎠던 점은 이러한 겸직에서 오는 과중한 연주 업무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러한 2중 단원 체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공연 업무는 과거보다 더 과중해졌지만 대신 단원 풀도 훨씬 늘어나 교대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빈 필이 자리잡은 이후에도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는 철밥통이라는 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듯하며, 이후에는 아예 그냥 전통으로 굳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빈 필 자체는 국립오페라와는 별도로 설립된 조직인 만큼 국립오페라 관현악단과 빈 필의 행정 업무는 아예 별개로 취급되며, 특히 빈 필 운영에 대한 사항에 대해 국립오페라 측에서 함부로 뭐라고 했다가는 즉시 역관광을 당할 정도로 엄격한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빈 필 단원이기에 앞서서 빈 국립오페라 단원이기 때문에 빈 필의 관현악 공연보다 빈 국립오페라 공연 스케줄이 우선이다. 빈 필 공연의 낮공연이 많은 것도 저녁에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원래 빈 필의 출발부터가 오페라 공연 시간 이외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용도였고, 지금도 빈 국립오페라 스케줄이 우선이며 그 외 시간에 빈 필이 활동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다만 빈 국립오페라/ 빈 필 단원풀이 매우 커졌고, 교대로 일정을 소화하기 때문에 빈 국립오페라가 공연하는 바로 그 시간에 또다른 빈 필이 해외에서 공연을 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빈 국립오페라의 공연이 거의 매일 있기 때문에 빈 필의 해외공연은 대부분 이런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8]. 이런 구조 덕분에 빈 필은 베를린 필보다 훨씬 많이 해외순회 공연을 가질 수 있으며 실제로 내한공연만 해도 빈 필 내한공연이 베를린 필 내한공연보다 훨씬 많다.

빈 필의 관현악 연주회는 상대적으로 드물고 한낮(12시 전후, 주로 11시경)에 개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거에는 빈 필의 정기연주회는 일년에 단 10차례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희소가치가 있었다. 빈 필과 녹음하기는 쉬워도 정기연주회를 지휘하기는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게오르그 솔티, 카를로스 클라이버, 정명훈처럼 소속 음반사의 버프로 빈 필과 음반 녹음이 먼저 이루어진 후 나중에야 빈 필 정기음악회 지휘자로 정식 데뷔하는 경우도 있었다. 빈 필 정기음악회는 낮 공연은 프랑스어로 마티네(Matinée), 저녁 공연도 역시 프랑스어로 수아레(Soirée)라고 공연 목록에 표기하고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로는 낮 공연의 비중이 높아지자 마티네 표기를 그냥 정기연주회(Abonnementkonzert)로 바꾸고 저녁 공연만 수아레로 표기하고 있다. 낮에 정기연주회를 가진 뒤 저녁에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반주를 뛰는 1일 2회 공연도 드물지 않다. 공연이 없더라도 음반 업계가 한창 호황이던 60~80년대에는 오전과 오후 낮시간에 음반 녹음을 하고 저녁에 오페라 연주를 뛰는 경우가 많았다. 오페라 공연이 거의 매일 저녁에 있기 때문에 정말 리허설 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인데, 실제로 빈 국립오페라는 거의 리허설없이 공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빈 필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물론 모든 단원이 이 많은 일정을 함께 다 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 인원이 매우 많기 때문에 교대해서 일한다.

자존심이 징하게 센 만큼, 신규 단원 입단도 전세계 관현악단들 중 가장 까다롭기로 악명높다.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이라도 빈 필 단원을 겸직하려면 오디션은 물론이고, 붙어도 오랜 시간 동안 선배 단원들에게 도제식으로 연주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음악성이 좋다고 해도 악단과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내쳐지는데, 이렇게 쫓겨난 단원들이 다른 악단에 들어가니 수석으로 대번에 합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정도다.

빈 출신을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빈 출신을 뽑는다는 말은 지역적인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희석된 상황이다. 오늘날 빈 필에서 말하는 '빈 출신'이라는 말은 빈 스타일의 음악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빈 음대를 나오거나 빈 출신의 음악인으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빈 필은 다른 오케스트라와 구별되는 음악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특히 빈 출신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할 때 이런 점이 더욱 부각된다. 이러한 빈 스타일의 음악을 정확히 구사할 줄 알아야 단원 자격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관악기의 경우 빈 필만 사용하는 독특한 악기들이 있기 때문에 이점은 어느 정도 필수적인 사항이라 할 수 있다. 현악기의 경우에도 빈 필 만의 특유한 스타일이 있다. 빈 필의 음반을 들어보면 잔향이 적게 녹음된 경우에 수십명이 연주함에도 불구하고 현악기의 비브라토가 들릴 정도인데, 악보에 지정되지 않은 그런 비브라토 스타일까지 통일되게 유지하는 것이 빈 필의 특징이다. 때문에 수십명이 연주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일에서 어긋난다면 단번에 튀는 것이 빈 필 현의 특징이다. 70년대 빈 필의 사실상 상임지휘자 역할을 했던 칼 뵘은 신입단원이 새로 들어올 때 마다 그 단원을 주시하고 있다가 음정이나 비브라토 등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지휘봉으로 보면대를 두들기며 연주를 중단시킨 뒤 "누가 틀리고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빈 필 단원들은 빈 음악계에서 온갖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여 있는 경우가 많다. 부자 세습 단원도 많다. 단원 전체가 사제, 선후배 지간으로 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빈 필에서 나오는 한 가지 특징 중 하나는 파트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들어올 때 한번 수석, 부수석으로 자리가 고정되면 은퇴할 때까지 이를 바꾸는게 어려운 다른 나라 오케스트라와 달리 빈 필은 이것이 유연한 편이다. 특히 서로 사제, 선후배 지간인 관악 파트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능력있는 수석 주자가 자신이 기량이 조금 떨어진다 싶을 때 조기 퇴진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체력적인 스태미너가 요구되는 금관 파트에서 이런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이 경우 오케스트라에서 아예 은퇴하는게 아니라 평단원으로 내려와서 젊은 단원들을 계속 지도하면서 이끄는 경우가 많다. 또 한 번 수석으로 올라갔다 해도 결국 부적절하다고 판단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수석에서 평단원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빈 필이다.

파트 구별이 유연한 빈 필의 특징과 관련된 것인데, 수석들이 동시에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빈 필의 특징이다. 빈 국립 오페라를 겸하는 빈 필의 특성상 관악기의 경우 수석이 세명이나 되는데, 큰 규모의 곡을 연주할 경우 두 명 이상의 수석들이 1st, 2nd, 어시스턴트 등으로 자리를 나누어 나란히 한 연주회에 서는 경우가 비교적 흔한 것이 빈 필의 특징이다. 베를린 필만 하더라도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로, 4관 편성을 연주한다면 엑스트라 단원을 고용해서 인원을 맞추는 것이 보통이며, 두명의 수석이 1st, 2nd로 자리를 나누어 동시에 한 연주에 출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음반 녹음에서는 파트의 유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빈 필의 수석이 되기 위해서는 국립오페라 단원으로 입단한 후 예비단원을 거쳐 정단원이 되기까지 몇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누구나 인정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단원이 입단했을 경우, 아직 예비단원 신분이지만 녹음 세션에서 수석을 맡기도 한다.

또한 두명의 관악기 주자가 한파트를 같이 연주하는 더블링을 하거나 어시스턴트 수석 주자를 두는 경우가 많다. 금관악기, 특히 호른 파트에서 빈 필은 거의 항상 수석 어시스턴트를 두고 연주한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보기 힘든 세컨드 어시스턴트를 두는 경우도 있다. 물론 비독일어권 오케스트라, 특히 영미권 오케스트라에서는 인원의 압박을 받지 않는 규모 있는 오케스트라에서는 호른 어시스턴트를 두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들은 아예 어시스턴트로 지정된 고정 정단원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의외로 독일 오케스트라들은 어시스턴트를 잘 쓰지 않는데 이것은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빈, 드레스덴, 뮌헨 국립 오케스트라를 제외하면 어시스턴트 단원을 고용하기는 커녕 악보에 명시된 편성을 채우기도 어려웠던 20~50명 수준의 영세한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득이한 사정이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지면서 어시스턴트를 잘 쓰지 않는 것이 독일 오케스트라의 특징이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경우 오래전부터 4관 편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어시스턴트를 쓰거나 더블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라얀 시절까지만 해도 투티에서 강렬한 사운드를 원했던 카라얀의 영향으로 어시스턴트는 물론 관악기 전파트 더블링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금관의 절제된 사운드를 항상 강조했던 아바도 시절을 거치면서 어시스턴트가 사라졌고 지금은 어시스턴트를 쓰지 않는 것을 거의 자존심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9] 아바도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1990년대에 때마침 시대연주 열풍이 일었고, 이에 더해 유럽에 불경기가 불어닥치면서 오케스트라들이 재정난을 겪게 되고 편성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여기에다가 어시스턴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베를린 필의 영상물이 널리 퍼지면서 이제는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20세기 중반에는 악단의 경제적 사정으로 어시스턴트를 쓰지 못했다면 현재는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빈 필은 더 나은 앙상블을 위해서 어시스턴트 단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아가 단원들 간에 파트를 재분배하거나 솔로를 나눠서 연주하는 경우도 많다. 긴호흡이 필요한 경우 끊기지 않고 완벽하게 들리게 연주하기 위해서, 또는 더욱 웅장하게 연주하기 위해서 옆자리 단원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솔로 패시지에서 청중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카메라가 원샷으로 클로즈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어시스턴트 단원의 도움을 받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호흡의 끈김없이 완벽하게 들리게 연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빈 필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의 유명한 호른 솔로도 최상의 사운드를 유지하기 위해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으며,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1악장의 짧은 솔로도 숨을 쉬느라 프레이즈가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시스턴트가 일부를 연주한다.

1970년 번스타인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9번 영상을 보면 3악장의 유명한 4번 호른 솔로를 음역에 따라 무려 다섯명의 호른 단원이 번갈아 나눠부는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오케스트라가 잘 안보이는 빈 국립 오페라 피트에서 연주할 때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한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 막판에 나오는 호른의 긴 솔로의 경우 옆에 있는 2번 호른 단원이 거의 1/3을 연주한다. 이 솔로가 너무 길기 때문에 다른 오페라단에서 연주한 것을 들어보면 호른 주자가 체력을 아끼느라 현악기에 묻혀가지만 빈 필이 국립가극장 피트에서 연주할 때는 이렇게 두 명 이상의 주자가 해당 솔로를 나눠서 연주하기 때문에 나중에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커졌을 때도 호른이 주도권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사운드를 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주에서 빈 필이 권위를 자랑하고 있고 단원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이같은 숨어있는 노력과 희생, 상호협력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한 파트를 여러 사람이 쪼개서 연주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설령 자존심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패시지를 세세하게 나눠 다른 사람과 분담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상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음악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 파트를 오가다가 중간에 박자를 놓치기 십상이다. 이처럼 빈 필은 악단 전체 입장에서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다면 단원 개인의 희생이나 양보를 당연하게 여기는,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토와 팀웍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원들 모두가 사제, 선후배의 학연, 지연으로 끈끈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원 모두가 두 개 관현악단을 겸직하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당연히 베를린 필 만큼 단원들의 실내악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여러 편성으로 조직된 실내악단들이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바릴리 4중주단이나 빈 콘체르트하우스 4중주단, 빈 8중주단, 빈 모차르트 앙상블 등은 음반도 여럿 남겨 지금도 회자될 정도. 베를린 필과 빈 필의 관악 주자들로 구성된 목관 5중주단인 '앙상블 빈-베를린' 도 독특한 하이브리드 실내악단으로 유명하다.

빈 국립가극장의 과중한 스케줄로 인해 리허설도 1회 혹은 부분적으로 대충하고 무대에 오르는 일이 많으며, 지휘자보다는 악장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특유의 습관 탓에 공연이나 녹음에서 지휘자와 단원 중 단원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베토벤 연주가 그러한 경향이 심하다. 1930년대 중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전곡을 녹음한 이후로 빈필의 베토벤 연주는 빈에서 처음 연주된 그 느낌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빈 필 특성상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연주 상 큰 차이가 없다는 평이 다수이다. 빈필은 교향곡 1, 2번만 리허설을 1회 하고 나머지는 거의 리허설 없이 악장의 연주를 따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음반 녹음에서도 따로 리허설을 잡아 녹음한 것이[10] 아니면 다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이먼 래틀의 빈 필 베토벤 사이클( EMI)과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베토벤 사이클(SONY)도 이러한 문제점을 피해가지 못했고 최근에 나온 안드리스 넬손스의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사이클(DG)도 이러한 문제점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 지휘자들도 초일류급이지만 빈필과의 녹음보다 각자 음악감독으로 있는 악단과의 연주가 더 낫다는 평을 받는다.

빈 국립가극장까지 겸직하기 때문에 오페라를 포함하여 상당히 방대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지만 현대음악은 적게 다루는 편이다. 빈 청중들이 보수적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어느 도시든 간에 현대음악을 과도하게 연주하는 경우 다수의 청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심지어 반발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 사실 소수의 현대음악가 및 그 애호가, 작곡 지망생들을 제외하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상당수는 현대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혐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현대음악에서도 비유럽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 횟수는 더욱 적은데, 그나마 지휘자로 워낙 많이 등장했던 번스타인과 앙드레 프레빈, 1990년대에 몇 차례 연주된 필립 글래스의 작품 정도가 예외에 속한다. 아바도가 1980년대 후반에 리게티 노노, 불레즈, 등의 곡을 지휘했지만, 이것 역시 단발성에 그쳤으며 게다가 단원들의 반발도 심했다고 한다.[12]

4.1. 악기

운영 체제 외에 쓰는 악기도 다른 악단들과 차별화되는데, 특히 관악기의 경우 아예 빈 음악에 특화된 19세기 구식 모델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시대연주 단체들이 쓰는 완전 오래된 메커니즘의 악기들은 아니고, 빈 필이 사실상 상설화된 19세기 후반 악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목관악기의 경우 금속제 키(key)가 달려있으며, 금관악기의 경우 밸브가 달려 있기는 하나, 악기의 진화가 19세기에서 멈추었기 때문에 운지법 등이 다른 경우가 많다. 특히 오보에, 바순, 클라리넷, 호른은 빈 필에서만 쓰는 악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 편의를 위한 개량 절차가 모조리 쌈싸먹힌 악기들이라 연주에 엄청난 애로사항이 꽃핀다. 특히 오보에 호른은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들과 형태나 소리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오보에의 경우에는 19세기 후반의 빈 오보에(Wiener Oboe)를 쓰고 있는데, 외관도 현대 오보에와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한 소리를 갖고 있다. 당연히 운지법도 다르다. 비브라토가 별로 없는 강렬하고 메마른 소리가 특징으로, 국악기 피리와 비슷한 음색이다. 현대적 오보에와는 명확히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기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지휘자들도 모두 이 독특한 소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데, 빈 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칼 뵘 조차도 경쟁 악단이었던 베를린 필의 전설적인 오보에 수석 주자였던 로타 코흐 스타일의 오보에 사운드를 선호했다. 다만 80년대 후반 이후에 입단한 단원들은 기존의 날카로운 음색과는 다른 상당히 순화된 사운드를 내고 있고, 악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브라토도 많이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보에와 마찬가지로 쌍서(더블리드) 목관악기인 바순 역시 빈 오보에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비브라토가 적은 편이며, 소리가 밝지만 건조하며 거칠고 날카로운 편이다. 빈 오보에와 빈 바순은 특유의 비브라토가 없는 사운드 덕분에 빈 필 사운드가 매우 안정적이며 오르간적인 울림을 가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클라리넷은 외관은 일반 클라리넷과 별 차이는 없지만 키 시스템이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뵘 식이 아닌 이웃 독일에서 유래한 욀러 식을 택하고 있어서 다른 클라리넷과 운지법이 다르다. 운지법 뿐만 아니라 소리도 튀지 않고 둥근 편이라 오보에처럼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클라리넷은 물론 독일식 클라리넷과도 분명히 다른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 매우 튀는 강렬한 사운드의 빈 오보에의 달리 빈 필의 클라리넷은 깊으면서도 밝은 포용적인 사운드가 특징이다. 욀러 식 클라리넷을 도입하기 이전인 1950년대까지는 그보다 더 오래된 알베르 식[13] 클라리넷이 보편적으로 쓰였는데, 알베르 식 클라리넷의 대가였던 수석 클라리네티스트 레오폴트 블라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녹음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에서 당시 빈 필의 흐느끼듯 하면서 칙칙한 클라리넷 사운드를 확인할 수 있다. 호불호가 강한 빈 오보에에 비해, 빈 필의 클라리넷 사운드는 가장 이상적인 클라리넷 사운드로 평가되기도 한다.

호른의 경우에는 F조 싱글 호른의 일종인 빈 호른(Wiener Horn)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보에와 마찬가지로 외관상으로 일반적인 더블 호른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밸브/피스톤 없이 연주하던 초기 호른인 내추럴 호른에 있던 크룩 모양이 남아있는데, 악기를 연주하면서 호흡과 함께 악기 내부에 입김 형태로 들어간 물을 뺄 때 크룩을 빼고 악기를 돌리는 식으로 빼도록 되어 있다.

다른 오케스트라들의 상용 악기인 Bb/F조 더블 호른에 비해 빈 호른은 특히 고음역 연주가 상당한 까다로운데, F조 관이 저음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고음에서는 손가락으로 밸브를 조작하는 운지법보다 입술의 움직임 만으로 음을 조절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금관악기나 마찬가지겠지만, 밸브나 피스톤, 슬라이드(트롬본 한정)의 도움 없이 마우스피스에 갖다댄 입술 만으로 다양한 음정을 내는 것은 숙달된 프로 주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과제다. 빈 필 호른 섹션이 연주 중에 삑사리를 많이 내는 것은 결코 단원들의 기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옆동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호른 수석인 헥터 맥도널드도 빈 호른을 사용하면서 종종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가 원래 베를린 필 정단원 출신[14]이라는 점을 봐도 빈 호른이 정상급 프로 연주자가 연주하기에도 만만한 악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연주할 때는 다른 호른에 비해 무겁고 거친 소리가 나오며, 로터리 밸브를 사용하는 현대 호른과 달리 피스톤 밸브를 사용하기 때문에 음 사이에 텅잉 간격을 크게 두는 것도 특징이다.

이 빈 호른은 빈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빈 호른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점차 사라져 버리면서 1970~90년대에는 일본 악기 제조 업체 야마하에 특별 위탁 제작해 납품받기도 했다. 이후 빈 필에서 연주하는 호른이 특색있는 음색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호른 주자들도 빈 호른으로 악기를 바꾸었고, 또 이곳저곳에서 이 독특한 호른에 관심을 보이면서 90년대 후반부터 안드레아스 융비르트, 알렉산더, 하크슈톤 등 여러 업체에서 빈 호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토종 관악기 제작 업체인 안드레아스 융비르트의 빈 호른은 빈 필의 호른 수석 볼프강 톰뵈크(Jr)와의 협력으로 제작되어 실제 빈 필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융비르트 제작의 빈 호른은 19세기 빈 호른 제작자였던 레오폴트 울만이 선보인 여러 빈 호른의 바리에이션 중에서 비교적 초기 빈 호른을 복제했기 때문에 야마하나 여타 빈 호른과 모양이 약간 다르다. 이 융비르트제 호른은 이 악기의 개발에 깊이 관여한 빈 필 수석 호르니스트 볼프강 톰뵈크가 앞장서서 보급했는데, 다만 2010년대 들어서는 융비르트제 호른이 아닌 기존의 야마하의 빈 호른을 쓰는 주자들이 더 많은 것을 볼 때 반짝 보급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고음역이 많은 곡의 경우 고음 연주에 젬병인 빈 호른 대신 고음역 연주가 용이한 고음용 데스칸트 호른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의 작품은 까다로운 고음이 많기 때문에 빈 필에서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베토벤 교향곡의 경우 보통 2번, 6번, 7번, 8번에서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음용 호른을 쓰더라도 전곡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음이 많이 나오는 패시지나 악장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고음용 호른의 사용 여부는 연주자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같은 곡이라도 고음용 호른을 사용하는 주자도 있고 빈 호른을 사용하는 주자도 있다. 또 고음용 호른은 빈 호른처럼 지정된 악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원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브랜드의 악기를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타악기도 옛날 모델 위주로 갖추고 있는데, 특히 팀파니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등 북 종류는 플라스틱이 아닌 동물 가죽을 북면으로 쓰고 있다. 팀파니의 경우 페달로 쉽게 조율하는 요즘 모델 대신 북통 가장자리에 붙은 핸들들을 돌려 조율하는 모델이 기본인데, 페달 팀파니를 꼭 써야 하는 현대음악을 제외하면 항상 이 구식 모델을 고집한다. 악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심벌즈의 경우 오늘날 일반적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작은 사이즈의 것을 고수하고 있다. 빈 왈츠에서는 물론 차이코프스키나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대규모 후기 낭만주의 곡에서도 일반적으로 작은 심벌즈를 고수한다. 작은 심벌즈를 사용하기 때문인지 일반적인 주법과는 달리 양손을 다른 방향에서 아래 위로 엊갈리면서 타격하여 타격음을 크게 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예외적으로 바그너 작품에 한해서는 타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큰 심벌즈를 사용한다.

트럼펫과 트롬본의 경우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작은 내경의 관을 고수하고 있다. 트럼펫 관 내경 등을 고려해서 빈 필이 고수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에도 계속 개량되고 있는 로터리 트럼펫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것까지 눈치채지는 못할 줄 알고 현대식 트럼펫을 쓴 듯 트럼본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현대 악기와 차이는 없고,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작은 내경의 관을 쓴다. 트럼본 역시 보조관의 변화와 같은 현대 트럼본의 소소한 진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쨋든 트럼펫이나 트롬본은 작은 내경의 관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교적 밝고 가벼운 톤칼라와 작은 음량을 가지고 있다. 악기 자체가 음량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곡에서 웅장한 사운드를 내기 위해서 일반적인 악기보다 호흡 등에서 훨씬 까다롭고 정교한 연주법이 필요하다.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대신 빈 왈츠나 여린 솔로 등에서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사운드를 뽑아내기도 한다.

현악기는 다른 악단들과 비교하면 악기 자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정기 지휘자로 있을 때 빈 필이 빚어내는 현악기 소리가 너무 좋아서 베를린 필과 악기를 바꾸어 연주하는 시도를 했는데, 베를린 필이 빈 필 악기를 잡고 연주해도 그런 소리는 안나왔다고 한다. 결국 악기의 차별성이 아닌 빈 필만의 독특한 연주법 계승이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악기에서부터 '전통 중시' 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4.2. 배치

같은 맥락에서 악단의 악기와 연주자 배치도 보수적인데, 지휘자를 중심으로 왼쪽에 바이올린 파트들을 놓고 오른쪽에 비올라 파트를 놓는 19세기 정통 유럽식의 배치법을 고수하고 있다. 크게는 전통 독일식 배치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 빈 필 만의 고유한 특색이 있는 배치를 띄고 있다. 주요 공연장인 빈 무지크페라인 대강당을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해당 공연장에 맞는 음향을 연구한 끝에 이런 배치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콘트라베이스와 금관악기의 배치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보통 금관악기는 목관악기 뒷줄에 왼쪽에 고음인 트럼펫을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가면서 저음인 트롬본-튜바 순으로 배치하지만, 빈 필은 거꾸로 튜바-트롬본-트럼펫 순으로 배치한다. 호른의 경우에는 트럼펫 오른쪽에 앉는 것이 빈 필의 전통적인 배치다. 호른의 경우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무대 우측에 위치하건 좌측에 위치하건 오른쪽에 수석이 앉는데 이는 호른의 벨 사운드가 연주자의 오른쪽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 필은 호른이 무대 우측에 위치하면서 수석이 가운데 쪽에 앉는 방식이다. 빈 필 이외에는 거의 사례를 찾기 힘든 드문 배치이다.[15]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트롬본이 빠지는 고전주의 시대 작품에서 트럼펫의 왼쪽에 배치는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또 4관 편성 이상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말러 교향곡을 연주할 때는 기존 배치와 관계없이 무대 사정을 감안찬 배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콘트라베이스는 금관 바로 뒤에 일렬 배치되는데, 통상 콘트라베이스가 맨 오른쪽이나 왼쪽 귀퉁이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계단식으로 무대가 높아지면서 양쪽 면적이 좁은 무지크페라인 대강당의 무대 특성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빈 필이 해외 순회공연을 갈 경우 이렇게 콘트라베이스가 가장 뒤에 배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런 의견을 뒷받침한다 볼 수 있다. 콘트라베이스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일렬로 펼쳐져 있는 경우 앙상블 측면에서는 마이너스가 되지만 사운드 측면에서는 플러스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콘트라베이스 이외에도 첼로도 앞라인에 두 풀트씩 네 명이 일렬로 앉아 연주하도록 배치하고 있고, 호른도 무지크페라인 대강당에서는 그냥 한 줄에 2~3대 배치하지만, 콘체르트하우스같은 더 넓은 무대 공간을 가진 공연장에서 공연할 경우 가급적 일렬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 악단과 오랫동안 작업하며 친분을 쌓은 명지휘자들의 경우 본인이 선호하는 배치 방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의 경우에는 초기에 빈 필을 객원지휘할 때는 악단의 전통 배치법을 따랐지만 빈 필에서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고 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에게 익숙한 미국식 배치법-통칭 스토코프스키 배치법-을 주로 사용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곡의 성격에 따라서 현악기 배치를 달리했는데, 이는 베를린 필, 빈 필 모두에서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이후 빈 필을 이끌게 된 주요 지휘자인 리카르도 무티, 주빈 메타, 세이지 오자와, 로린 마젤 등은 빈 필의 배치를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노장 지휘자가 된 2020년대 현재 바렌보임, 무티 등의 무대에서 지휘자의 취향에 맞게 종종 배치를 달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 빈 신년음악회와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5.1. 빈 신년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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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

2004년부터는 베를린 필의 여름 야외 음악회인 발트뷰네 콘서트를 벤치마킹했는지, 쇤브룬 궁전의 야외 무대에서 5월 혹은 6월에 특별 무료 야외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2004~06년 까지는 '유럽을 위한 음악회(Konzert für Europa)' 라는 제목의 자선 음악회 형식으로 개최되었다가, 2007년 한 해 쉰 다음 2008년부터는 '쇤브룬 여름밤 음악회(Sommernachtskonzert Schönbrunn)' 라는 제목으로 개최하고 있다.

그 동안 거의 본격 클래식만 줄창 연주한 보수적인 악단이 탱고 스타워즈등 대중적인 곡들도 과감히 선곡해 공연하고 있어 반응이 꽤 좋은 모양. 신년음악회에서 앙코르로 요한 2세의 왈츠가 연주되고 발트뷰네 콘서트에서 파울 링케의 '베를린의 공기' 가 연주되는 것처럼, 이 음악회에서도 요한 2세의 왈츠 '빈 기질' 이 고정 앙코르로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서 베르사유 궁전 다음으로 크고 아름다운 쇤브룬 궁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최근에는 원조격인 베를린 필의 발트뷰네 콘서트보다 더 잘나가는 느낌이 있으며 음반도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6. 음반/영상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미친듯이 많이 낸 베를린 필 만큼은 아니지만, 이 쪽도 물량 면에서 전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들 쏟아내고 있다. 특히 상임 제도가 없는 악단 특성상 지휘자들의 면면이 대단히 화려하다.

물량 면으로 이 악단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한 인물들을 가늠할 수 있는데, 비록 중기에 트러블이 생긴 적이 있지만 카라얀도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많은 음반과 영상물을 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 시기가 베를린 필과 오히려 갈등을 겪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으로 맞물려 있는데, 마지막 공연과 녹음도 이 악단과 같이 했다.

카라얀 이외에는 동향인 선배였던 칼 뵘과 미국 출신 레너드 번스타인, 이탈리아 출신 클라우디오 아바도, 역시 미국인이었던 로린 마젤 등이 빈 필과 음반을 많이 남긴 지휘자로 손꼽힌다. 카라얀과 뵘, 아바도, 마젤의 경우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겸무했기 때문에, 악단 구조상 빈 필과도 많이 어울리게 되어 녹음 기회도 많아졌다.

올드비 지휘자들도 숫자는 적지만 그래도 여러 종류의 명반들을 내놓은 바 있다. 바인가르트너나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한스 크나퍼츠부슈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 참고로 보수적인 단체답게 첫 음반도 1928년에야 나왔다. 당시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이었던 프란츠 샬크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6번과 8번, 레오노레 서곡 3번 세 곡이었는데, 그나마 전기 녹음 기술이 도입되고 만들어진 탓에 베를린 필의 초기 녹음보다는 음질히 한결 나은 편이다.[16]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약15년간 데카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데카와 전속 계약은 악단에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평가하곤 한다. 데카는 DG, EMI에 비해 오페라에 비중을 크게 두었다. 반면 DG는 비용이 많이 드는 오페라 녹음을 가급적 자제하고 관현악곡 위주로 카탈로그를 구성해 나가는 전략을 취했다. 베를린 필과도 전속계약을 맺었고, 독일권의 우수한 지휘자들을 영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DG가 보유한 지휘자들로는 카라얀, 뵘, 쿠벨릭, 요훔 등이 있었다. 데카가 보유하고 있는 지휘자들의 네임밸류는 DG, EMI에 비해서는 후달린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빈 필은 최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한스 슈미트-이셰르슈테트와 녹음했다[17].

2002년에는 전업 지휘자도 아니고, 본업이 증권 투자자이자 언론인인 길버트 카플란이 자신의 유일한 지휘 곡목인 말러의 교향곡 2번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해 충공깽을 선사했다.[18] 사실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어렵던 시절 미국의 한 부유한 실업가가 빈 필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회고에 의하면 그 지휘자(?)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4박자로 지휘했으나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고 한다.

매년 신년음악회 역시 꼬박꼬박 CD/DVD/블루레이로 출반되고 있다.

7. 논란

원체 실력과 유명세를 겸비한 악단이라 쉽게 깔 수는 없는 본좌급 단체지만, 단원 선정과 관한 두 가지의 암묵적인 원칙을 20세기 중반 지나서까지 고수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세력의 비판이 있어왔다. 지금은 풀렸지만, 한 때 비 유럽 혈통여성 단원은 뽑지 않은 것.[19] 실제로 스기야마 야스히토(杉山康人)라는 일본 튜바 연주자가 빈 필에 입단하려고 했다가 '실력 부족' 이라고 떨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유가 말도 안되는 것이었는데, 빡친 스기야마가 미국 유수의 관현악단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 오디션을 보고는 즉시 튜바 수석으로 임명됐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 필 단원 명부를 보면, 오랫동안 상근 단원의 국적과 성별이 거의 오스트리아 남성으로 유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나치 당원 혹은 골수 친나치 성향의 단원들이 강제 퇴단당하고 전쟁의 여파로 실력있는 오스트리아 남성 연주가들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슬금슬금 외국인 단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인 단원들도 기본적으로는 빈에서 음악을 공부하여 빈 스타일의 연주법을 익힌 사람들이어야 했다. 현재 빈 필에는 외국인 단원들도 제법 있지만 대부분 빈 음대에서 공부하고 또한 전현직 빈 필 단원에게 배우는 등 빈 필 고유의 연주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미국 출신의 트롬본 주자 윌리엄 맥엘헤니가 이렇게 들어간 비오스트리아계 단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미국 뿐 아니라 이웃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등 중동부 유럽 단원들이나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 출신 단원들까지도 볼 수 있다. 백인 이외의 인종과 혼혈인 연주가들의 입단도 조금씩 허용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빌프리트 카즈키 헤덴보르크가 2004년에 제1바이올린 정단원으로 입단한 것이 최초 사례였다. 그의 동생인 첼리스트 베른하르트 나오키 헤덴보르크도 2011년에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으로 입단해 약 3년 간의 견습 과정을 거쳐 2014년에 첼로 정단원으로 입단했다.

하지만 단원들의 국적이나 인종 문제보다 더 심하게 비판받은 것이 여성 연주자의 입단 거부였는데,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음악 단체들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 연주자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하프의 경우 안나 렐케스라는 여성 연주자를 1970년대에 영입한 적이 있었지만, '비정규 단원' 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이었고 텔레비전 공연 중계 때는 카메라가 손만 비추는 등 여러 모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렐케스의 정단원 자격은 1997년에야 인정되었고, 몇 년 뒤 은퇴했다. 렐케스의 후임으로는 1998년에 스페인계 프랑스 남성 하피스트인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가 입단해 화제가 되었는데, 2004년에 입단한 독일 출신의 여성 하피스트인 샤를로테 발체라이트와 공동으로 하프 단원으로 있다가 2010년 독주와 교육 활동을 위해 퇴단했다.

하프 외에 다른 파트의 여성 정단원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2007년 5월에 입단한 비올라 연주자 우어줄라 플라이힝어(2017년 현재 우어줄라 루페로 개명)였고, 이어 2008년 10월에 제1 바이올린 연주자 이사벨 바요(프랑스), 2010년 10월에 비올라 연주자 다니엘라 이바노바(불가리아)가, 2010년 12월에 하프 연주자 아넬렌 레나에르츠(벨기에)가 입단했다. 2011년 9월에는 창단 이래 최초의 여성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불가리아 출신의 알베나 다나일로바가 뽑혀 화제가 되었다. 악장이 제1바이올린 파트의 수장일 뿐 아니라 관현악단의 예술적 측면에 관한 대표자 역할도 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나일로바의 악장 임명으로 빈 필 단원 자격에서 성별에 관한 장벽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다나일로바의 악장 임명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출신의 올레샤 쿠릴랴크도 제1바이올린 주자로 정단원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2012년 5월에는 첼리스트 우어줄라 벡스가, 2015년 8월에는 제2바이올린 연주자 파트리치아 콜(2017년 현재 파트리치아 후트-콜로 개명)과 플루티스트 카린 보넬리가, 2016년 4월에는 제1바이올린 연주자 알리나 핀하스가, 2017년에는 제2바이올린 연주자 아델라 프라시네아누가, 2018년과 2019년에는 제1바이올린의 예카테리나 프롤로바와 페트라 코바치치, 바순의 소피 다르티갈롱그[20]가, 2021년에는 제1바이올린의 카타리나 엥겔브레히트와 제2바이올린의 율리아 겡게가 견습 기간을 마치고 정단원으로 입단했다. 이후 2022년에는 제2바이올린의 리야 프라스와 클라리넷의 안드레아 괴트쉬, 2023년에는 제1바이올린의 라라 쿠스트리히, 2024년에는 제2바이올린의 마르티나 미들과 더블베이스의 발레리 샤츠가 정단원으로 승격되었다. 2024년 10월 현재 빈 필의 여성 단원들은 제1바이올린 여덟 명(다나일로바, 바요, 쿠릴랴크, 핀하스, 프롤로바, 코바치치, 엥겔브레히트, 쿠스트리히)과 제2바이올린 다섯 명(후트-콜, 프라시네아누, 겡게, 프라스, 미들), 비올라 두 명(루페, 이바노바), 첼로 한 명(벡스), 더블베이스 한 명(샤츠), 하프 두 명(발체라이트, 레나에르츠), 플루트 한 명(보넬리), 클라리넷 한 명(괴트쉬), 바순 한 명(다르티갈롱그)으로 총 22명이다. 이외에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단원들 중 빈 필 정단원 연수를 받고 있는 이들 중에도 해나 조[21] (제2바이올린), 베르나데트 케러(첼로)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들이 정단원으로 승급되면 여성 단원들의 비중은 앞으로 더 늘어날 예정이다.

여성 지휘자의 초빙도 다른 악단들보다 훨씬 늦었는데, 2005년 11월에 무대에 선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시모네 영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라이벌인 베를린 필이 1887년에 영국 출신인 메리 웜의 지휘로 처음 공연했던 것과 비교하면 120년 가까이 늦은 셈인데, 몇몇 노장 혹은 보수적인 단원들은 익명으로 '여성 단원이나 지휘자가 많아질 수록 빈 필의 유구한 전통은 훼손될 것' 이라고 언론에 말하고 있다.

8. 흑역사

'제국 관현악단' 이었던 만큼, 빈 필도 베를린 필이나 여타 나치 치하 활동 악단과 마찬가지로 흑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 항목에도 썼지만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 단원들이 해고당했고, 이들 중 망명에 성공하지 못한 여섯 명이 게토 혹은 강제수용소에서, 두 명이 해직 후유증과 핍박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쫓겨난 유대인 단원들 대신 자리를 메꾼 연주자들 대부분이 골수 나치빠였다는 점 역시 이 악단 최악의 치부로 기록된다.

제3제국 당시 베를린 필에선 단원 107명 중 나치 당원은 겨우 여덟 명에 불과했지만, 빈 필에서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기 전에도 이미 25명이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율은 1942년까지 꾸준히 늘어나 당시 전체 단원 123명 중 절반 약간 못미치는 60명이 나치 당원들이었다. 이 나치 병합 시기 동안 빈 필의 단장은 콘트라베이스 단원이었던 빌헬름 예르거가 맡았는데, 나치 당원에 친위대원이라는 가히 환상적인 스펙을 갖춘 극렬빠였다.

베를린 필과 마찬가지로 빈 필도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나치 관제 단체라든가 독일군 위문 공연 등을 수행했는데, 이 역시 단원들의 병역 면제 등 혜택을 존속시키기 위한 계약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악마의 계약이었던 셈이다. 결국 패전 후 단장 예르거를 비롯해 극렬 나치로 분류된 단원들은 베를린 필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합군 군정 당국에 의해 해고되었고, 이 공백을 메꾸는 데 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게다가 모체인 국립오페라의 경우, 빈 필과 다르게 극장이 폭격으로 산산조각나고 단원들의 사상자 비율도 훨씬 높아서 거기서 끌어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니 제로섬이나 마찬가지였을 듯 하다.

그나마 뒤늦게야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한 베를린 필과 달리, 이 쪽에서는 계속 함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대해 악단이 아예 침묵한 것은 아니었고, 2000년 5월 7일에 오스트리아에 있던 나치의 강제수용소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던 마우타우젠의 채석장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 음악회에 출연해 베토벤 교향곡 9번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공연한 것이 간접적 속죄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져 화제가 된 바 있다.

결국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 2013년 1월에 악단 측에서 역사학자, 음악학자인 베르나데테 마이어호퍼, 프리츠 트륌피, 올리버 라트콜브에게 1930~40년대의 악단 활동사를 재조사하도록 위탁했다. 약 두 달 간의 재조사 결과가 3월 초에 발표되었는데, 주된 정보는 빈 필의 나치 당원 비율과 유대인 단원들의 해직, 사망 사례, 나치와 결탁해 치른 공연 정보 등이었다. 이런 정보들은 대부분 이미 2차대전 종전 후 음악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연구, 공표했기에 딱히 새로운 점은 없었지만, 이것을 악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주목 받았다. #

9. 동양인 지휘자

동양 출신으로 빈 필의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된 된 첫 번째 인물은 인도 출신 주빈 메타였다. 메타는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오랜 긴간 동안 빈 필의 주요 지휘자 중 한명으로 활동하면서 빈 필 정기음악회, 해외순회 공연, 신년음악회, 쇤부른 궁전 여름 음악회 등 빈 필의 수많은 주요 공연을 지휘했다. 이러한 공로로 2001년 빈 필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일본 출신인 오자와 세이지는 메타와 더불이 빈 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동양인 지휘자로 꼽힌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서거하고 아바도가 베를린 필로 가면서 빈 필 지휘자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1990년 이후 무티, 메타, 마젤과 더불어 90년대 빈 필을 이끌던 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 정기연주회는 물론이고 여러 해외순회 공연도 이끌었다. 오자와가 1990년대 빈 필과 녹음한 음반들은 음반사가 필립스여서 마케팅을 별로 하지 않는 바람에 많은 판매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빈 필의 숨겨진 명연들이 많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동양인 최초로 빈 국립 오페라극장(가극장) 음악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22] 또한 2002년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2000년대 후반에 식도암 판정을 받아 빈 필을 지휘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그간의 공로로 2010년 빈 필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밖에 이와키 히로유키와 코이즈미 카즈히로도 지휘한 경력이 있다.

한국 출신 지휘자로 빈 필을 지휘한 인물은 정명훈이 유일하다. 안익태가 훨씬 먼저 지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안익태가 지휘한 것은 빈 필이 아닌 빈 교향악단(Wiener Symphoniker)이었다. 90년대 당시 일본(2위)과 한국(7위)은 세계 클래식 음반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DG는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세이지 오자와를 영입했었으나 80년대말 오자와가 필립스로 이적하자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된 정명훈을 새로 영입했다. 정명훈은 바스티유 오페라와 함께 정기적으로 DG에서 음반을 녹음했으나 1993년 갑자스레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경질되었다. 갑자기 녹음할 오케스트라를 잃고 붕 떠버린 정명훈을 위해 DG는 1994년 빈 필과의 녹음 세션을 성사시켰고 덕분에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4개와 세레나데 두 곡,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 등 4장의 음반을 녹음했다.[23] 빈 필이 녹음보다도 더 권위 있다고 여기는 빈 필 정기음악회 지휘자[24]로서는, 1995년 4월 16일 로린 마젤의 대타로 처음 빈 필 정기음악회 무대에 서게 되었다. 곡목은 드보르작 교향곡 7번과 무소르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빈 필 지휘자로는 거의 초빙되지 못하고 있다가 2016년 실로 오랜만에 빈 필의 내한공연을 지휘했다.[25] 하지만 정명훈은 한국에서만 지휘봉을 잡았다. 다른 나라 공연에선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았다.

10. 빈 필하모닉 축구클럽 (Philharmonischer Fußballklub Wien)

사내 축구동아리인 빈 필하모닉 축구 클럽(Philharmonischer Fußballklub Wien)이 있다. 공식홈페이지

호른 수석인 로날트 야네치크(Ronald Janezic)가 회장 겸 매니저 겸 감독을 맡고 있으며 트럼펫 수석인 마르틴 뮐펠너(Martin Mühlfellner)가 부회장 겸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금관악기 단원은 거의 전원이 축구 클럽에 소속되어 있으며 거의 강제가입 수준이다.

회장 겸 매니저 겸 감독인 야네치크는 역대 팀 득점 471골 중 28%인 132골을 기록하여 팀 역대 득점 1위에 올라 있고, 전성기 시절에는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의 주포였다. 최근에는 젊은 클라리넷 수석 다니엘 오텐자머(Daniel Ottensamer)가 놀라운 속도로 치고 올라와 현재 누적 100골로 팀 역대 득점 2위에 올라있다.

남성 단원이 많아서인지 타 오케스트라와 대전시 승률이 높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대전이 많고 그 다음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등 오스트리아 지역 오케스트라와 경기가 많다. 때때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등 독일 오케스트라와도 간간히 경기가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과 경기가 상당히 잦다.

11. 전현직 단원 중 유명 인물

재직 기간은 빈 국립 오페라단이 아닌 빈 필하모닉 단원 입단년도를 기준으로 함.

악장
현악
목관
금관

12. 역대 내한공연

아래 내용은 빈 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의 Concert Archeive에서 장소를 Korea로 입력하여 추출된 정보를 인용한 것이다. 단, 상암 월드컵 경기장은 별도로 Sangam을 입력해야 찾을 수 있다.

13. 관련 문서


[1] 출처 [2] 1984년 빈 필하모닉에 입단하였고, 1992년 게르하르트 헤첼의 후임 악장으로 선임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3] 1998년 빈 필하모닉에 입단하여, 2000년부터 악장으로 활동 중이다. [4] 2008년 역사상 첫 빈 국립 오페라단 여성 악장으로, 2011년 역사상 첫 빈 필하모닉 여성 악장으로 선임되어 활동 중이다. 베르너 힝크의 후임 악장이다. [5] 1997년생 이스라엘 출신으로, 라이너 퀴힐의 후임 악장이다. 만 25세가 되던 해인 2022년 빈 국립 오페라단 악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일정 기간을 거친 후 빈 필하모닉 악장으로도 임명될 예정이다. 빈 필하모닉 역사상 아시아 출신이 악장이 된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6] 라이너 퀴힐(Rainer Küchl). 빈 필하모닉의 전 악장 [7] 대신 폭격으로 오르간이 파손되었다. [8]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소속의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역시 비슷한 구조로 매일 열리는 오페라 공연과 정기적으로 열리는 관현악단 스케줄 때문에 단원 풀이 많다. 다만 연주 전문 오케스트라를 가진 오페라 극장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서 라 스칼라 극장이나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는 그 정도로 단원이 많은 수준은 아니다. [9] 다만 사이먼 래틀 시대에 이르러 목관에 어시스턴트를 두거나 부분 더블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금관의 경우 래틀이 노터치를 해서인지 여전히 어시스턴트를 두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10] 카를 뵘, 한스 슈미트-이세르슈테트의 교향곡 제6번, 혹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교향곡 제9번 등 [11] 대표적으로 현대음악 네임드 작곡가 출신인 피에르 불레즈를 영입했던 70년대 뉴욕 필이 그랬다. [12] 빈 필 자체의 보수적인 분위기 외에도 쓰는 악기 자체가 대부분 구식이라, 현대적인 주법을 응용하기 무척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현대음악가들의 경우 차라리 독일의 앙상블 모데른처럼 애초부터 현대음악 전문 단체로 출발한 클랑포룸 빈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13] 벨기에의 목관악기 제작자 외젠 알베르가 1850년에 개발한 키 시스템으로, 키보다 손가락으로 막는 지공이 많아서 음정을 정확히 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뵘/욀러 식 시스템이 보편화된 뒤 사실상 사라졌다. 영어권에서는 심플 시스템이라고 불리며, 지공이 많다는 단점을 유연한 슬러/글리산도 주법이 용이하다는 역발상으로 이용한 동유럽이나 중동 민속음악, 유대인 전통 음악인 클레츠머, 초기 재즈에서는 아직도 이 시스템의 클라리넷이 쓰인다. 우디 앨런이 취미삼아 부는 클라리넷도 알베르 식. [14] 사업을 하기 위해 베를린 필을 관두었으나 약10년 후 다시 악기를 잡고 빈 심포니 수석이 되었다. [15] 한 세대 전 베를린 필에서도 가끔 이런 배치로 앉기도 했다. 그러나 드문 경우였다. [16]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의 첫 녹음은 아직 구식 어쿠스틱 녹음을 쓰던 1924년에 이루어졌다. 이것까지 소급해도 베를린 필보다는 늦게 녹음에 뛰어든 셈이다. [17] 다만 유명세는 좀 떨어지기는 해도 슈미트-이세르슈테트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 '"만장자가 돈으로 연주했다"라는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카플란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말러리안이자 유명한 말러 수집가이기도 하다. 20대때 말러 2번 교향곡을 들은 이후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로 말러 교향곡을 들으러 갈 정도로 말러에 대한 애착이 뛰어나며, 도이체 그라모폰에 말러 2번 교향곡을 취입하기 전에는 말러 2번 교향곡을 이해하기 위해 2번 교향곡이 연주회가 있는 곳이라면 영국서부터 호주까지 갈 정도로 열정이 엄청났다. 줄리어드 대학생 시절부터 게오르그 솔티에게 개인 과외까지 받는 등 카플란이 말러를 연주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은 엄청났으며,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돈으로 구입한 전세계 악단을 지휘하는 물질주의자' 와는 거리가 먼 클래식에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냥 돈으로 악단을 매수했다면 어떻게 그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말러 2번 교향곡이 18만장이 팔린 배스트 샐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과거 말러의 악단이었던 빈필이 말러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개정안을 가장 먼저 녹음&연주해야 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고 한다. 카플란은 부활의 여러 스코어를 비교하여 문제점을 500여개나 바로잡아서 개정안 출판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말러 2번 교향곡을 어느 지휘자보다도 잘 이해한 아마추어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19] 모두 풀리긴 했으나 다른 악단에 비해 실행이 늦고, 상대적으로 여전히 장벽이 높다. [20] 프랑스 출신 바수니스트로, 베를린 필 부속 관현악 아카데미에서 악단 수석 바수니스트인 다니엘레 다미아노에게 교육받고 2012년 베를린 필에 콘트라바수니스트로 입단해 활동하다가 2015년에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수석 바수니스트로 이직 [21] 한국계 미국인으로, 한국명은 조수진이다. 2019년 빈 필하모닉 아카데미 창립 당시 첫 번째 단원으로 2021년까지 역임하였으며, 2022년부터 빈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에 입단. 한국계로서는 최초 입단한 연주자이다. [22] 빈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직은 시기에 따라 역할과 권한에 차이가 크고, 지휘자가 임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문 경영인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1956년 칼 뵘의 뒤를 이어 카라얀이 빈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에 취임했을 때, 서베를린 시민들이 결국 카라얀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베를린 필 자리를 이용해 먹었다고 분개했을 정도니 당시 빈 국립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의 위상은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카라얀이 빈국립오페라 경영진 및 오스트리아 문화부와 갈등을 빚고 사임한 이후 한동안 경영인이 음악감독을 맡았지만 1980년 마젤이 취임한 이후 아바도, 오자와, 벨져-뫼스트 등이 이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 [23] 드보르작의 교향곡 3번과 7번이 커플링된 음반, 같은 작곡가의 교향곡 6번과 8번이 커플링된 음반, 같은 작곡가의 관악을 위한 세레나데와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가 커플링된 음반,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음반 등 4장이다. 이 중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음반은 선배 지휘자들의 아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한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후에도 정명훈은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종종 연주 레퍼토리로 활용해왔다. 유튜브에서도 다른 지휘자의 경우에는 녹음이나 실황을 통틀어 1종을 찾기 어려운 곡인데, 유독 정명훈의 지휘만으로도 여러 개의 스타바트 마테르 연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24] 일례로 게오르그 솔티는 젊은 시절 소속사인 데카 덕분에 1950년대 후반 빈 필과 여러 음반을 녹음했지만 더 커리어가 쌓일 때까지 빈 필 정기연주회에는 한동안 초빙되지 못했다. 당시 솔티는 빈 필 단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베테랑 단원의 상당수가 솔티의 녹음 세션에서 빠지기도 했다. [25] 서울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26] 20세기 후반 당시에서의 빈 필 단원들 중에서 몇 안되었던 미남형 얼굴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카라얀, 번스타인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가장 이상적인 악장으로 꼽았던 악장이다. 1992년 7월 말 잘츠부르크에서 등반을 하던 도중 추락사고로 뇌출혈을 입어 세상을 떠났다. [27] 빈 출신으로 빈 필의 악장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했지만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28] 빈 필 악장을 관두고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소프라노 이름가르트 제프리트의 남편. [29] 1974년부터 34년간 악장으로 재직한 후 65세를 맞이한 2008년 정년퇴임하였다. [30]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후임이며, 45년간 빈 필하모닉의 악장직을 지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처음에 Jose Maria Blumenschein이 그의 후임으로 국립오페라 단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임하였고, 뒤이어 2019년에 다시 선임된 Fedor Rudin도 떠나면서 오랜 기간동안 후임이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022년 10월 Yamen Saadi가 입단하게 되었고 수습기간(Probejahr)을 거처 빈 필하모닉 단원 명단에 마침내 오르게 되었다. 2024년 6월 현재 3년을 채우지 않았으므로 빈 필하모닉의 정식 단원직은 대기 중이다. [31] 1992년부터 현재까지 악장직을 수행 중이며, 퀴힐이 은퇴한 후 수석악장이다. 2008년부터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현재까지 재직 중인 만프레드 호넥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32] 2000년부터 현재까지 악장직 수행 [33] 빈 필하모닉 역사상 첫 여성 악장이며, 빈 필하모닉에 처음 올 때부터 악장으로 입단하였다. [34] 제2바이올린의 파트리치아 후드-콜의 부친으로 최초의 아버지-딸 조합 입단 [35] 크리스토프 콘츠의 형이다. [36] 이전에 베를린 필의 단원으로 있었다가 2년동안만 빈 필 단원으로 재직하고 다시 베를린 필로 돌아갔다. [37] 명수들이 넘쳐났던 빈필 목관 파트에서도 독보적인 네임 밸류를 가졌던 인물로 정상급 플룻 솔로이스트로도 유명하다. [38] 게륵과도 같았던 빈 오보에 연주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39] 정년퇴임을 맞이하지 못한 채 2017년 7월 심장마비로 작고하였다. [40] 부친이던 에른스트 오텐자머의 첫째 아들로, 그의 동생 안드레아스는 현재 베를린 필의 수석 클라리네티스트로 재직 중이다. [41] 빈 필하모닉의 첫 내한이며, 클라우디오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이기도 하다. [42] 빈 필하모닉 내한공연 역사상 유일한 하루 짜리 공연이다. 원래 주빈 메타 지휘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소키에프로 교체되었다. 이 내한공연이 소키에프의 빈 필하모닉 지휘 데뷔 무대이다. [43] 빈 필하모닉 역사상 첫 대구 공연이며, 대한민국 내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의 첫 공연이기도 하다. [44] 당초 부산 공연은 계획에 없었으나, 중국 내에서의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공연이 취소되고 덩달아 이집트 공연도 취소되면서, 한국 공연을 하루 더 연장하여 부산에서 추가공연을 진행하였다. 빈 필하모닉 역사상 첫 부산 공연. [45] 빈 필하모닉 역사상 첫 대전 공연. [46]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열린 이 공연에서, 뵐저-뫼스트와 빈 필하모닉은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양일 모두 공연 시작 전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BWV 1068 중 2악장(일명 G선상의 아리아)을 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