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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0:36:59

부두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부두전
夫斗栓[1]으로 등재되어 있다.][2]
파일:부두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제주 부씨[3]
출생 1920년 2월 7일[4]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북촌리 559번지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사망 1977년 11월 24일[5] (향년 57세)
제주도 북제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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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0년 2월 7일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559번지에서 아버지 부기남(夫基楠, 1898. 8. 23 ~ 1964. 10. 11)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태규(金太圭, 1897. 10. 2 ~ ?)[6]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니혼대학 오사카전문학교(日本大學大阪專門學校) 법학과에 입학한 뒤 줄곧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민족차별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했다. 그 뒤 그해 5월 일본 오사카시에서 강금종(姜金鐘)· 고봉조(高奉朝)· 한만숙(韓滿淑)·김봉성(金奉性)[7]·김병목(金丙穆) 등과 함께 흥아동지회(興亞同志會)라는 독서회를 조직했고, 같은 달 26일[8]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개칭했다. 이후 세계 동향 연구부 책임자에 선임되었고, 조직 강화를 위해 지식인들을 동지로 포섭해 마르크스주의 쑨원 삼민주의를 연구했다. 이후 니혼대학 오사카전문학교 재학생들을 회원으로 포섭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가 1941년 2월 26일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에는 표선국민학교와 북촌국민학교 등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에는 어촌 관광 개발 사업가 등으로 있다가 1977년 11월 24일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6년 10월 9일 배우자 청주 한씨 한옥순(韓玉順, 1920. 3. 8 ~ 1987. 5. 25)[9]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2006년 8월 25일에는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북촌리사무소 앞에 부두전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부림전(夫林栓)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는데,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부두전'으로 등재되어 있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이명에 '夫斗栓'이 기재되어 있다. 부림전은 독립운동당시 사용된 가명으로 실 이름은 부두전으로 광복후, 대전현충원에도 원래 이름인 부두전으로 등재되었다.

3. 여담


[1] 제주부씨족보 권3 256쪽에는 夫 [2] 부림전(夫林栓)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는데, 정작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부두전'으로 등재되어 있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이명에 '夫斗栓'이 기재되어 있다. 사실 부림전(夫林栓, 족보명 부임전(夫林銓), 1923. 6. 14 ~ ?)은 부두전의 첫째 남동생인데, 왜 부림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3] 협공계(恊公系) 21세 전(銓) 항렬. [4] 제주부씨족보 권3 256쪽에는 7월 1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5] 제주부씨족보 권3 256쪽에는 10월 6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2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6] 김맹진(金孟鎭)의 딸이다. [7] 이명 김봉각(金奉珏). [8] 독립유공자 공훈록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5월 27일로 되어 있다. [9] 한재숙(韓在淑)의 딸이다. [10] 석사 학위 논문 : 컴퓨터 시스템의 全般的인 保安에 관한 硏究(컴퓨터 시스템의 전반적인 보안에 관한 연구, 1986). [11] 박사 학위 논문 : 무기 체계 시험평가 효율화 방안에 관한 연구(200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