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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48:41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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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Bolesław III Krzywou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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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볼레스와프 3세.jpg
출생 1086년 8월 20일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138년 10월 28일
폴란드 대공국 소하체프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102년 ~ 11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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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어머니: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배우자 키예프의 즈비슬라바
베르크의 살로메아
자녀 7남 7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보편교회)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즈비그뉴와의 분쟁2.3. 포모제 정복2.4. 헝가리 내전 개입과 메르제부르크 협약2.5. 사망과 폴란드의 분열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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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포모제를 정복했다. 그러나 그가 자식들에게 영지를 공정하게 나눠줄 목적으로 제정한 계승법은 폴란드가 200여 년간 분열 상태에 놓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1086년 8월 20일 폴란드 대공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제로 즈비그뉴, 아그네스 외 2명의 누이가 있었다. 어머니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는 그를 낳은 지 4개월 만인 1086년 12월 24일에 사망했다. 1089년, 궁정백의 자격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에시에흐(Sieciech)는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의사에 따라 즈비그뉴를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으로 보냈다.

1090년, 시에시에흐는 그단스크 포모제를 향한 원정을 성공해 그곳을 폴란드에 종속시켰다. 이때 그는 그곳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비대를 지키고 나머지 도시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포모제인의 반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포모제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1090년 말 반란을 일으켜 수비대를 몰아내고 폴란드 국경 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1091년, 시에시에흐가 포모제인을 향한 보복 원정에 착수했지만 우다 강변에서 패배했다. 이로 인해 포모제는 폴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093년, 실롱스크 귀족 마그누스가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되는 귀족들을 연이어 숙청하는 시에시에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그누스는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즈비그뉴를 수도원에서 빼돌린 뒤 브로츠와프로 모셨다. 시에시에흐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 지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브로츠와프로 진격했다. 그런데 헝가리군은 도중에 폴란드 귀족들의 로비에 넘어가 시에시에흐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3세를 납치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두 사람이 풀려나게 하게 위해 사생아로 간주되었던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시에시에흐는 복수를 벼르다가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국이 칼만과 알모스 왕자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즈비그뉴를 공격했다. 그 결과 1096년 고프워 전투에서 즈비그뉴의 군대가 시에시에흐에게 패배했고, 시에시에흐는 즈비그뉴를 사로잡고 실롱스크를 탈환했다. 그러나 민심이 갈수록 불온해지자, 1097년 또는 1099년에 즈비그뉴를 석방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내란이 일어날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즈비그뉴와 볼레스와프 3세를 포모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두 공자는 군대를 크라쿠프로 돌린 뒤 아버지에게 지금 즉시 분할 상속해줄 것을 강요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강요에 못 이겨 영지를 그들에게 상속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소폴란드, 실롱스크, 대폴란드 서쪽 부분, 루부츠 일대를 상속받았고, 즈비그뉴는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쪽 부분, 쿠아비아, 웽치차, 시에라츠, 마조프셰 등지를 상속받았다. 시에시에흐는 이렇게 분할되면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 거라 보고, 두 왕자가 맡은 구역의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움으로써 실질적인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여기에 두 형제를 아버지에 반역을 일으킨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는 시에시에흐의 계획을 눈치채고 스카비미르를 비롯한 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한 뒤 시에시에흐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단행했다. 1099년, 필리차강 인근의 차르노비에츠에서 시에시에흐의 군대와 두 공자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두 공자가 승리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해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1100년, 두 공자의 군대는 시에시에흐가 숨어 있던 시에시에호프를 포위했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1세가 돌연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시에시에흐를 도우러 달려왔다. 이에 두 공자는 아버지를 완전히 실각시키기로 합의하고 프워츠크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시에흐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결국 두 공자에게 완전히 굴복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독일로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 했고, 이후 대공위를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받는 대가로 모든 권력을 아들들에게 넘겨야 했다.

2.2. 즈비그뉴와의 분쟁

1102년 6월 4일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한 후,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와 함께 폴란드를 양분하고 각기 대공을 칭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래에 폴란드 공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길 희망한 귀족과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포모제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점도 갈등이 고조되는 요인이었다. 즈비그뉴는 이웃한 세력인 포모제와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른를 공략해 폴란드 공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가 독자적으로 기사들을 이끌고 포모제로 쳐들어가서 비아워가르트를 공략하자, 포모제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즈비그뉴의 영역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동의 없이 포모제를 침략한 이복 형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110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슬라바와 결혼했다. 그는 즈비그뉴에게 청첩장을 보냈지만, 즈비그뉴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즈비그뉴는 결혼 동맹을 맺은 두 세력이 자신을 조만간 협공하리라 의심하고,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2세와 손잡고 볼레스와프 3세의 영역을 동시에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맞서 부하 젤리스와프에게 모라바를 습격하게 했다. 젤리스와프는 모라바의 많은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지만, 귀환하던 중 보르지보이 2세의 습격을 받고 패배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 본인이 직접 모라바로 재차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외교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즈비그뉴와의 동맹을 끊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포모제를 무너뜨리기로 마음먹고, 1104~1105년 포모제 원정을 단행해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105년, 두 이복 형제는 티에니크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해 그동안의 갈등을 종식하고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논하여 타협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1106년, 헝가리 왕자 알모스가 헝가리 국왕이자 자신의 형인 칼만에 맞서기 위해 볼레스와프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이에 응해 헝가리로 쳐들어가 어버우이바르(Abaújvár)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칼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폴란드군과 대치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군이 생각보다 강력한 걸 확인하고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는 서로 만나서 담화를 나눈 끝에 영원한 우정을 맺고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의했고, 알모스는 어쩔 수 없이 칼만에게 복종했다. 이 무렵 보르지보이 2세 스바토플루크 2세 사이의 분쟁이 벌어지자, 그는 스뱌토풀크에게 전쟁 물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가 축출되자 폴란드 궁정에 받아들였다.

1106년 즈비그뉴가 포모제를 향한 원정을 돕기를 거부한 데다 볼레스와프 3세가 사냥하던 중 암살자의 습격으로 죽을 뻔한 사건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와 헝가리 왕국의 국왕 칼만의 지원을 받고 즈비그뉴를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루스-헝가리 연합군은 큰 문제 없이 칼리시, 그니에즈노, 스피시미에즈, 웽치차를 공략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즈비그뉴는 크라쿠프 주교 발드빈의 중재를 통해 웽치차에서 볼레스와프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즈비그뉴는 공식적으로 볼레스와프 3세를 폴란드 공국 전체의 대공으로 인정하고, 대폴란드, 쿠야비아, 시에라츠를 포기하며, 웽치차, 마조프셰 등지에서만 영지를 가질 수 있었다.

1107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 칼만과 연합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보르지보이 2세를 축출하고 그 해 5월 14일에 스바토플루크를 보헤미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2세로 앉혔다. 그러나 즈비그뉴는 푸와비 인근의 요새 중 하나이며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농성하는 쿠로프를 파괴하라는 볼레스와프 3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는 그가 명령 불복종에 포모제 원정군에 식량을 제때 제공하지 않겠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그를 반역자로 고발했고, 1107/1108년 겨울 루테니아와 헝가리 출신 전사들을 고용해 마조비아를 침공했다. 즈비그뉴는 이렇다할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폴란드에서 추방당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프라하로 피신했다.

1108년, 볼레스와프 3세가 지난해 보헤미아 원정을 통해 공략했던 시비엥토페우크 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폴란드 대공에게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기에 그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던 스바토플루크는 정작 그의 간섭을 받기를 거부했고 즈비그뉴를 보호했다. 이에 분노한 볼레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 측이 하인리히 5세의 헝가리 침공에 동참하느라 병력을 헝가리에 보낸 틈을 타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도중에 포모제인이 북쪽 국경을 넘어 여러 마을을 파괴하자,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포모제인을 격파했다.

1109년, 즈비그뉴는 하인리히 5세에게 형제에게 빼앗긴 영지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폴란드 공국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던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명분삼아 볼레스와프 3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즈비그뉴에게 전 영토의 절반을 제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정기적으로 연간 은화 300 그지브나(grzywna)를 공물로 보내거나 군사 원정을 위한 기사 300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볼레스와프 3세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가 이를 딱 잘라 거부하자, 하인리히 5세는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다.

에어푸르트에 집결한 제국군은 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로트링겐의 기사가 포함된 약 10,000명의 전사였다. 여기에 보브르 강 어귀에서 보헤미아군이 합세했다. 원정군은 1109년 8월 22일 비톰 오드잔스키에 이르러 공성전을 벌였지만 큰 손실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않자 그대로 지나쳐서 8월 24일 구워구프에 도착해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9월까지 이어진 포위 공격에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하인리히 5세는 방어 수준이 구워구프보다 열악한 브로츠와프를 향해 진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병력이 일천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최대한 피했다. 그 대신 적의 보급로를 연이어 습격했고, 적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사르고 농지를 뒤엎고 우물에 독을 타는 등 청야작전을 구사했다. 여기에 폴란드 농민들은 숲과 늪지대에서 침략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러한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구워구프에 도착한 뒤 공성전을 감행했지만 막대한 희생만 치렀다. 13세기의 연대기인 <대 폴란드 연대기>는 하인리히 5세가 브로츠와프를 공격했지만 산 자 대신 시체만 얻었다고 묘사했다.

하인리히 5세는 볼레스와프 3세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크라쿠프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제국군의 보급 물자가 바닥났고 병사들도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꺾이고 사상자가 많다는 점을 꿰뚫어 본 볼레스와프 3세가 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공물을 보낸다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제안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이후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어가자, 하인리히 5세는 결국 남은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하인리히 5세를 도와 자국을 침공했던 보헤미아로 쳐들어가서 보르지보이 2세의 형제이며 역시 자신에게 의탁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난 뒤 1111년 보헤미아 측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보헤미아 측은 소베슬라프 1세가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게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가 폴란드로 돌아와서 시에라츠를 영지로 삼고 평온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즈비그뉴가 국내로 돌아온 뒤 왕실 강림절 의식에서 즈비그뉴 앞에 검이 옮겨지고 무리의 추앙을 받는 모습을 본 볼레스와프 3세는 형제가 언젠가 영지를 되찾기 위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 거라 여겼다. 결국 즈비그뉴는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일로 인해 그니에즈노 대주교 마르친으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저주를 받았고, 수많은 인사의 지탄을 받았다. 이에 볼레스와프는 40일 동안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귀족 및 성직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111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겠다는 명분으로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해, 불온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했다. 헝가리 국왕 칼만의 영접을 받고 돌아온 뒤 가난한 주민들과 성직자들에게 수많은 선물과 귀중품을 주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3세는 참회를 마친 뒤 즈비그뉴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저주가 풀렸다고 한다. 루비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즈비그뉴는 1113년 7월 8일 티니에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다.

2.3. 포모제 정복

볼레스와프 3세는 한때 폴란드의 영역이었지만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독립해버린 포모제를 정복해야만 폴란드 북쪽 국경의 안보를 보장받을수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포모제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오브라 강 입구에서 바르타강까지, 그리고 노테치 강을 따라 비스와 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에 여러 요새를 세웠다. 산토크, 비엘렌, 나크워나드, 차른쿠프, 우이시치에, 위쇼그로드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1114년에는 니사크워츠카강 유역에서 보헤미아에서 할거하던 브와디스와프 1세, 흑기사 오토 2세, 소베슬라프 1세와 협상한 끝에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즈비슬라바가 사망하자, 보헤미아의 베르크 가문 출신이며 브와디스와프 1세와 흑기사 오토 2세의 누이인 베르크의 살로메아와 결혼함으로써, 보헤미아간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1115년, 볼레스와프 3세는 고대 프로이센을 향한 원정을 개시해 그곳의 여러 부족을 굴복시켰다. 이리하여 모든 전선이 평화로워지자, 그는 포모제 정복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115년 ~ 1119년, 볼레스와프 3세는 매년 포모제로 진격해 여러 전투에서 포모제인을 물리쳤다. 그 결과 그단스크 포모제와 스웁스크 일대가 폴란드의 영역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새로 정복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주교구를 새로 설립하고 관리들을 파견했다. 당시 폴란드 공국의 북쪽 국경은 그우다 강과 우니에스타 강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포모제 정복에 사활을 걸던 1117년, 궁정백으로서 그를 대신해 내치를 담당하던 스카비미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볼레스와프 3세가 승계 규졔를 정한 것에 "왕위 계승자의 선택은 그가 임의로 정하는 게 아니라 귀족들이 정해야 한다"며 반발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스키비미르의 반란은 실롱스크의 대귀족이며 스카비미르를 대신해 궁정백에 오른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에 의해 1118년 진압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사로잡힌 스키비미르를 실명형에 처했다.

1120년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가 폴란드 동쪽 영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1121년,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1117년 모노마흐에게 축출된 뒤 폴란드에 망명했던 보히니아 공작 야로슬라프를 앞세워 체르므노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루스 공자들이 폴란드로의 약탈 원정대를 계속 이끌자, 1122년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에 의해 보히니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던 볼로다르 로스치슬라비치를 납치한 것으로 보복했다. 1125년, 볼로슬라프 3세는 야로슬라프를 복위시키려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의 원정에 지원군을 보냈다. 이슈트반 2세는 키예프로 진군해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도중에 야로슬라프가 사망한 데다 루스 주민들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치자 결국 철수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3세는 서부 포모제까지 공략하기로 했다. 1121년 ~ 1122년, 볼레스와프 3세는 포모제 지도자 바르치스와프 1세와 시비엥토페우크를 니에크와츠 전투에서 격파하고 슈체친을 포위했다. 슈체친은 오데르 강과 늪지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데다 그 자체도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췄기에 공략하기 어려웠다. 요새의 성벽 아래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얼음으로 뒤덮인 늪지대를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그 길로 기습 부대를 파견했고, 이들은 큰 희생을 치른 끝에 방심하고 있던 수비대를 빠르게 제압하고 요새를 공략했다.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볼레스와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22년, 볼레스와프 3세는 서부 포모제 지도자 바르치스와프 1세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고, 매년 은화 500달란트를 바치며 군사 지원을 제공하게 했다. 1123년, 볼레스와프 3세의 전사들은 포모제에서 가장 큰 섬인 뤼겐 섬을 약탈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포모제 전역을 직할 통치하거나 가신으로 삼는 데 성공한 볼레스와프 3세는 포모제의 기독교화 정책을 추진했다. 선교사들을 포모제로 초빙해 슬라브 신앙을 고수하는 현지인들을 개종시키도록 했으며, 500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포모제 각지의 주교들을 지키게 했다. 또한 슬라브 종교의 성지를 철거하고 성당을 그 자리에 세웠다. 1124년, 서부 포모제에 루부츠 주교구가 설립되었고, 그단스크 포모제에는 크루슈비차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두 주교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되었다.

1127년 폴란드가 부과한 높은 공물과 개종 강요에 반감을 품은 이교도들이 이교도 사제들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폴란드 북부 국경지대를 습격하자, 볼레스와프는 1128년 여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포모제의 기독교화 정책을 진두지휘하던 밤베르크의 오토가 "칼로 강요하지 말고 말로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원정을 중단했다. 이후 현지 주민들은 공물을 줄이고 자신들이 자치를 누리는 조건하에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에도 포모제에서 종종 이교도들의 폭동이 벌어졌지만, 볼레스와프 3세가 이에 굴하지 않고 기독교화 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이면서 포모제 주민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130년에는 덴마크 왕자 망누스와 동맹을 맺고 뤼겐 섬으로 원정대를 파견해 뤼겐의 영주 라나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130년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노르베르트가 포모제를 마그데부르크 대교구에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포즈난의 운게르 주교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참정권 주교'[1]임을 밝히는 문서를 위조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자신이 포모제를 이끌게 해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인노첸시오 2세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폴란드 주교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참석을 거부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1133년 교서 <로마나의 거룩한 전례(Sacrosancta Romana)>를 반포해 포모제에 대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주권을 확인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는 1136년 7월 피사 공의회 대 폴란드 주교들을 파견해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에 대적하던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도록 했고, 인노첸시오 2세는 이에 만족하여 그니에즈노 대교구가 포모제를 계속 관장하게 했다.

2.4. 헝가리 내전 개입과 메르제부르크 협약

1131년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가 사망한 뒤 집권한 벨러 2세가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면서 정계가 혼란해지자, 과거에 이슈트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해외로 망명했던 보리스는 왕위를 쟁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보리스는 폴란드로 가서 볼레스와프 3세의 지원을 받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벨러 2세는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리스는 칼만의 아들이 아니니 다들 사칭범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1132년 7월 22일, 사요 강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보리스와 볼레스와프 3세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벨러 2세는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보헤미아의 소조슬라프 1세,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와 손을 잡고 폴란드 공격을 획책했다. 여기에 소조슬라프1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볼레스와프 3세를 규탄했다. 벨러 2세, 소조슬라프 1세, 볼로디미르코의 연합군은 폴란드로의 공세를 개시해 소폴란드로 진입하여 비실리카를 공략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로부터 마그데부르크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자, 볼레스와프 3세는 사절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사절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폴란드 대공이 직접 오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1135년 8월 15일에 메르제부르크로 오라고 요구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로타르 3세와 합의를 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공들였던 포모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맹을 맺고 있던 스웨덴 왕 마그누스가 1134년 사망했고, 헝가리, 보헤미아와 적대하게 된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까지 돌아선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의 요구에 따라 메르제부르크로 간 뒤 협의 끝에 포모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 대신 포모제 영지의 지배자로서 황제를 주군으로 보시고, 은 6,000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기로 했다. 또한 헝가리 국왕 벨러 2세를 인정하기로 하고, 자신의 딸 유디트를 벨러 2세의 아들 게저와 약혼시키기로 했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매듭지은 볼레스와프 3세는 1137년 크워츠코에서 보헤미아 측과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이 협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아들 볼레스와프와 루테니아 왕자 브세볼로드 마시스와비치의 딸 비에르츠소스와바를 결혼시키고, 또다른 아들 미에슈코 3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의 딸 엘리자베타를 결혼시키는 등,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가급적 화목하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2.5. 사망과 폴란드의 분열

1138년 10월 28일, 볼레스와프 3세는 소하체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랫동안 궁정백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이 유언장의 수탁자이자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공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5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대공이 나머지 공작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공의 특권에는 포모제 가신들을 봉신으로서 통제하고, 다른 공작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권리, 국경 방어 권리, 외교 정책을 수행할 권리, 성직자 감독, 화폐 주조 등이 포함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조치를 통해 모두가 영지를 공정하게 분할 상속받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즈비그뉴와 내전을 벌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한 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시도하자 형제들이 대거 반기를 들고 외세가 개입하면서, 폴란드는 또다시 내전에 휘말렸고, 그의 승계법은 폴란드가 200여년간 분열 상태에 놓이게 하는 단초로 작용했다.

3. 가족



[1] 교회 관구 내의 교구를 이끄는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