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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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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가 안톤 폰 베르너(Anton Alexander von Werner, 1843~1915)의 베를린 회의의 기록화. 이 그림은 헨리 키신저의 1994년 저서 <외교>(Diplomacy. 한국에서는 2023년 번역 출간)의 표지에도 실렸다.
앞줄 우측에서 악수를 하는 사람 가운데 왼쪽 인물이 비스마르크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

1. 개요2. 배경3. 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였는가?4. 결과5. 여파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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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ngress of Berlin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결 후 산 스테파노 조약의 체결로 형성된 강대국 간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같은 해 베를린에서 열린 열강 간 조정회의이다. 베를린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2.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로 발칸반도는 유럽 열강 사이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 제국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발칸반도에 거주 중인 슬라브족을 규합해 남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영국 프랑스는 이것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대립으로 생긴 가장 대표적인 사태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진행된 크림 전쟁.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은 패하여 개혁을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보스니아 지역의 반란에 호응해 불가리아인들 역시 반란을 일으키자 오스만 제국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한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족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1877년에서 1878년까지 2년간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압승으로 끝났고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맺어진 산 스테파노 조약의 결과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가 독립국으로 인정된 것은 물론이고 불가리아 역시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과 사실상 러시아가 독단적으로 맺은 산 스테파노 조약은 기존 유럽의 강대국들에게는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는 러시아가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할까봐 두려웠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자신들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침해받는다고 여겼기에 매우 불편해했다. 특히 대불가리아 건설에 대한 조항은 유럽의 그 어느 국가도 동의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독일 제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3. 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개최하였는가?

독일 제국은 발칸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었다. 당연한 게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처럼 오스만과 악연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문을 해주는 우호 관계였다. 부동항이 필요하지도 않고, 비스마르크 시절엔 식민지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오스만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니 오스만 투르크나 발칸 반도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외교적 중재를 자처한 까닭은, 유럽에서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독일 제국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의 외교정책을 요약하자면 '프랑스 왕따시키기'였다. 이 중에서도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3제 동맹이 핵심이었다. 문제는, 유럽 내에서 분쟁이 생기면서 전쟁과 같은 혼란이 생기면 프랑스에게 우방국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최악의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막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또한 독일은 발칸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중재자로 활동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 '영토욕심이 없는 독일'과 같은 이미지를 각국에 심어줄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 개최 연설에서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 시기 독일이 고립주의를 채택하기에는 너무나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적국이 될 수 있는 국가들과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놓고자 베를린 회의를 개최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1]

4. 결과

파일:산스테파노_베를린.jpg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른 각국의 영토 변화(왼쪽)와 베를린 회의를 통해 확정된 각국의 영토 변화(오른쪽)

5. 여파

비스마르크는 이 베를린 회의를 통해 발칸반도를 둘러싼 서유럽 열강과 러시아 간의 갈등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봉합책에 불과했으며, 이 때 해결되지 않고 억눌러진 발칸반도의 민족 분포 및 국경 문제는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겪은 끝에야 간신히 일단락되었으며, 결국 70년 뒤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경계선 바깥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각 구성국 인원들이 모두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하고 나서야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크로아티아 일대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에서 크로아티아가 승리함에 따라 거의 세르비아로 추방되었고[9],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무슬림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양쪽에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한 끝에 데이턴 협정으로 각 민족별로 구획을 정하고 게토처럼 거기서만 거주하게 되었다.

저 시점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발칸반도의 모든 민족을 각각 독립시키는 것 또한 전혀 현실적이지 못했다. 설령 (이미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강대국들이 대승적으로 양보해서 발칸반도 민족들을 각각 독립시켜주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족이 같은 지역에서 서로 뒤섞여 살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국경선을 정하든지 다수민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국경 내에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원래 10개가 넘는 민족이 포함된 다민족 국가였고, 헝가리처럼 독자적인 의회가 있어 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지역도 있었다. 통치에 어려움이 많긴 했지만 그럭저럭 그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대안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때 차지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두고두고 골치를 앓다가 결국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비스마르크가 언급한 이 "바보짓"을 기폭제로, 전 유럽은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유럽 열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졌고, 여전히 자신의 영토를 지킬 힘이 없는 상태로 붕괴가 약간 늦춰지기만 했지 결국 붕괴가 조만간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회의는 결국 오스만 입장에서도, 또는 발칸반도 민족들의 입장에서도 외교적 미봉책에 불과하게 되었다.

소소하지만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알바니아 민족영토 보전을 주장하던 프리즈렌 동맹은 베를린 회의에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무장봉기로 선회, 할양된 영토를 확립하러 오던 주변국군과 알바니아 자치에 반대하던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였고 이 봉기는 실패하지만 알바니아 민족 개념의 확립과 추후 봉기들에 영감을 주게 된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 만큼의 외교적 수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10]

러시아 제국은 300년에 걸쳐 지리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펼친 끝에, 드디어 대승을 거두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는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또다시 서유럽 국가들의 방해로 남방 진출을 봉쇄당했으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회의에 참가한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Горчако́в, 1798 ~ 1883)는 베를린 회의를 자신의 외교관 경력 최악의 날이었다고 회상했고, 황제원 3부의 수장이자 역시 베를린 회의에 참가했었던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슈발로프 백작(Гра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Шува́лов, 1827 ~ 1889)이 이 문제로 실각당할 정도로 러시아 전역이 서유럽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11] 그리고 3제 동맹은 박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역시 낭패를 본 것이 아닐까 싶지만, 노련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순간 분노에 차서 3제 동맹을 탈퇴하더라도 다른 유럽 국가 중 그들의 우방이 되어줄 국가가 없기에 러시아가 다시 3제 동맹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까지 감안하고 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실제로 3제 동맹은 1881년에 복구된다. 즉, 비스마르크는 3제 동맹과 유럽 내 강대국 간 균형 유지라는 양대목표를 동시에 성취한 셈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독일이 처할 대외정치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우선 비스마르크의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태도는 전 유럽을 만족시킬 만한 게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의 처신에 매우 분노했는데, 러시아 황실은 독일(프로이센) 황실과 오랜 친분을 맺고 있었으며[12]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친프로이센 정책과 중립적인 태도로 도움을 준 일 때문에 프로이센의 후신인 독일이 러시아에게 이득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 대해 러시아 전역이 분노했지만 특히 독일을 향한 분노는 심각해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독일제국의 카이저인 빌헬름 1세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내고[13] 독일-러시아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할 정도였으며, 이는 독일과 러시아 양측 모두 서로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삼제동맹 복구는 순전히 비스마르크 개인의 외교 역량에 따른 결과이지 모순된 독일의 대외정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내부 문제로 복구된 삼제동맹 속에도 모순은 있었다. 당시 유럽이 그랬듯 독일에서도 민족주의가 기승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그저 '대독일주의'의 일부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러시아와의 동맹 또한 러시아가 독일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때문에 독일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우방이 없어 꾸역꾸역 삼제동맹에 복귀한 것에 불과했던게 다시 재구축된 삼제동맹의 실태였다. 그런 상황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다시 독일은 러시아와의 신뢰구축에 적극 나섰어야 했지만, 지배층인 융커들의 입김에 영향을 받은 독일 정부는[14]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러시아 곡물에 관세를 매기는 등 사실상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를 지속했다. 러시아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 유럽 국가로부터 왕따 취급을 받아 견제받고 있었으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비스마르크 재임기에는 독일이 처한 모순된 외교안보 상황을 그의 절묘한 외교술로 억누를 수 있었으나, 결국 빌헬름 2세의 제위와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에는 이 모순이 폭발하고 만다.[15]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만을 들어주고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연장을 거부하며 러시아를 배척하자, 이에 러시아는 독일 통일 후 꾸준히 독일 상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접촉하여 1894년 동맹을 맺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며 프랑스를 고립시키자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대전략은 이렇게 붕괴되었으며, 그렇게 독일은 양 국가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16]

독일 입장에서 프랑스는 독일 통일 이후 쭉 적국이었다 치고, 권력층인 융커들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영국하고는 친하게 지냈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대변되는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제국주의, 팽창주의 성향은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있는 영국의 심기까지 제대로 건드렸다. 원래 영국은 프랑스와는 몇백년 동안 서로 대립하는 사이었고, 러시아와도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대립하는 사이었으나 독일의 국력이 성장하고 독일이 팽창주의를 부르짖음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1904년 프랑스와 협상을 맺었고 러일전쟁으로 그레이트 게임이 영국의 승리로 일단락된 1907년에는 러시아와 협상을 맺어 삼국 협상이 형성된다. 이에 대항해 독일은 이탈리아 왕국을 끌어들여 파탄난 삼제동맹 대신 새로 삼국동맹을 맺었으나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서로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 관계였고[17] 결국 독일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라고는 내부 사정상 독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파멸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또한 동아시아에도 이 회의의 내용 및 결과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우선 당시 신강 지역에서 일어난 야쿱 벡의 봉기를 청나라가 진압하면서 그 틈에 해당 지역에 있는 일리란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와 청나라가 갈등을 빚었지만 당시 베를린 회의의 여파로 청나라를 더 몰아붙일 수 없어 할 수 없이 배상금만 받고 일리 지역의 상당수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나라는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이 명목상으로 나마 발칸반도 지역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중화 특유의 조공 체제 역시 서구식 외교 체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 해당 내용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필 왜 조선이냐 하면 베트남은 프랑스 때문에 청나라가 손을 쓰기 힘들었고, 류큐는 러시아 견제 때문에 일본에 사실상 양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막상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이 청의 알선으로 조선과 조약을 맺을 땐 이런 바람이 상당히 먹혀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등으로 청나라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반대로 조선에선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를 독립시켜 준 러시아에게 호감을 가져 인아거청이라고 당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과 이로 인해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를 배제하려는 계획[18]을 세웠지만 이를 눈치챈 영국이 거문도 사건을 일으키고 뒤이어 원새개가 2차 한러 밀약이 있다고 폭로한 끝에 사실상 러시아와의 협력이 무사되나 싶더니 청일전쟁과 뒤이은 삼국협상으로 다시 형세가 바뀌고, 이후 이런 저런 흐름 끝에 러일전쟁으로 조선은 발칸반도와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여담으로는 당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 회담을 끝마치고서 다우닝가 앞에서 솔즈베리 경과 내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명예로운 평화를 바랍니다. 라는 연설을 했는데 후에 두번째로 독일에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가 가져온 명예로운 평화는 뮌헨 협정이었다. 정작 둘 다 세계대전으로 끝나버렸으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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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신저는 냉전 미국 정부에서의 행적으로 흔히 기억되지만 19세기 유럽사에 정통한 역사학자기도 하였다. 애초에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외교학 교수 출신이다. [2] 이후 1908년 완전 독립한다. 그러나 현대 불가리아에서는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자치를 시작한 시기를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3] Sandžak.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위치한 좁은 회랑 지역으로 지명은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이름인 예니 파자르 산자크(Yeni Pazar sancağı)에서 유래했다. [4] 이후 보스니아는 1908년에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빌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합병되며 산자크는 1912~1913년의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절반으로 분할한다. [5] 오스만 제국령의 발칸반도의 동쪽 지역 영토를 의미한다. [6] 이후 동루멜리아는 1885년 불가리아에게 합병되고, 마케도니아는 1912 ~ 1913년의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의 결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갈라먹는다. [7]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안건은 다 수용했던 오스만은 이 안건 만큼은 죽어도 반대를 외쳤다. 그 결과 그리스와 오스만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강대국들은 그리스에게 영유권 주장을 일부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 1881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 그리스는 테살리아의 대부분과 에피로스 남부의 아르타[19] 지방을 손에 넣었다. [8] 이후 1914년에 영국에 합병된다. [9] 이전에는 세르비아 점령지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되었다. [10] 한편 비스마르크의 유럽 구상이 그와 같은 천재가 아니면 유지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11] 당시 슈발로프는 '표트르 4세'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그런 권력자마저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권력을 잃을 정도였으니 당시 러시아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셈. [12] 러시아 황실인 로마노프 가문은 독일계 혈통을 지닌 가문이었으며, 귀족들도 독일 출신이 많았다. 또한, 독일인이 가 되기도 했다. [13] 더군다나 알렉산드르 2세 빌헬름 1세의 조카였다. 조카가 삼촌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낼 정도로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분노는 실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14] 비스마르크 본인부터가 융커였고, 이들은 독일제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15] 애당초 빌헬름 2세가 지나친 욕심으로 크게 말아먹은 것이지 비스마르크의 전략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여전히 중용하고 그 이후에도 그러한 기조를 유지했다면 이후의 유럽 정세는 독일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막고 독일이 분단되지 않고 사이비 입헌제가 아닌 진짜 입헌군주국으로 현재까지 남았을 수도 있었다. [16] 러불동맹 매우 어색한 형태이긴 했다. 당시 유럽에서 스위스와 더불어 유이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에서 강력한 전제군주국인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국가가 단지 전략적인 이유로 동맹을 맺은 것인데다가, 게다가 대독일 포위의 핵심 열쇠를 쥐고있던 영국은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17] 이탈리아 입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상전 노릇을 하면서 통일을 가로막은 원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인 트렌티노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지배권을 두고 사이가 최악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선전포고하고 삼국동맹을 탈퇴한다. [18] 러시아에 대한 호의는 단순히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발칸반도 여러 나라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에 파견된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 중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태도가 가장 호의적이었던 탓도 컸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의 원세개는 조선에 파견된 다른 외교관과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미국 등의 고문들에게 오만한 자세 때문에 욕을 먹었고, 영국에서 파견된 총영사(당시 공사관보다 한 급수 낮은 외교공관으로 사실상 청나라가 주장하는 조선의 속국화를 영국이 인정한 꼴이라 조선에서 더 마음에 안들었다고) E.C 베이버는 한밤 중 한양 시내에 총을 쏜다는 등의 각종 기행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미국은 그나마 조선과 사이가 좋았지만 당시 먼로 독트린의 영향으로 대외 활동에 소극적이었던데다 필립 제이슨등 갑신정변 주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여저서 서먹했고,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화와 이로 인한 청나라와의 갈등으로 조선이 접근하기 꺼림직했다고. 또한 당시 떠오르는 신생 세력인 독일 제국은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고 유럽의 현상 체제를 유지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 조선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같은 강국을 이겨낸 직후 자신감 만빵인 상태에서 약소국인 조선이 근대화를 위해 접근하려니 조선에게 갑질을 좀 해대서 조선에선 당시 군사 제도 개혁을 프랑스나 미국을 모델로 세울 수밖에 없었을만큼 협력을 구하기 힘들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