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의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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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의 트라야누스 신전 유적
아스클레피온 (병원)의 열주와 로마 시대 극장 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페르가몬과 다층적 문화경관 |
영어 | Pergamon[1] | |
프랑스어 | Pergame[2] | |
국가·위치 | 튀르키예 이즈미르 도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4년 | |
등재기준 | (i)[3], (ii)[4], (iii)[5], (iv)[6], (vi)[7] | |
지정번호 | 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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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일대의 항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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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 튀르키예 이즈미르 도의 베르가마(Bergama) 군에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 페르가몬 또는 페르가뭄(그리스어:Πέργαμος)이라 불렸으며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페르가모스.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아시아쪽 에게 해에서 26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헬레니즘 때 카이우스 강 북쪽에 자리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의외로 기독교하고도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한 게 요한묵시록에 적힌 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 중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 개신교 성경에서 표기한 '버가모'가 바로 페르가몬이다.현재는 튀르키예어로 '베르가마'라 불리며, 인구 7만의 작은 관광도시이다. 유적지는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가장 많은 볼거리가 있는 시가지 북쪽의 아크로폴리스 일대와 시가지 서쪽의 페르가몬 아스클레피온 (별개의 도시로 분류되기도 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리고 붉은 바실리카 (크즐 아블루) 등 시내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다. 전부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도 부족할 정도로 넓고 유적이 즐비하다. 튀르키예의 많고 많은 유적지들 중 에페소스와 함께 양적, 질적 수준이 모두 높은 곳으로 고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2. 역사
아크로폴리스의 트라야누스 신전 유적
2.1. 왕국 성립 이전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역사상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크세노폰의 저작물이라고 한다. 사트라프들의 반란을 돕기 위해 파견된 그리스 군대가 점령하였으나 다시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기록만 나오고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페르가몬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디아도코이 때이다.2.2. 페르가몬 왕국
페르가몬 왕국 시대에 지어진 그리스식 극장
디아도코이 당시 환관 출신이자, 처음에는 안티고노스 1세의 부하였던 필레타이로스가 안티고노스를 배신하여 리시마코스 밑으로 들어갔다. 안티고노스가 패사한 뒤, 필레타이로스는 리시마코스의 신임을 사 방어가 용이한 이 도시에서 그의 보물을 지키도록 명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정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리시마코스도 배신하였으며,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1세에게 패하고 죽자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도 곧 비명횡사하고 혼란스러워지자 그때부터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이다.[8] 필레타이로스는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재위하며 페르가몬을 요새화하였으나, 고자라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그의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즉 조카) 에우메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9] 에우메네스 1세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를 격파하여 페르가몬의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역시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여 다음 왕위는 5촌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물려받는다. 아탈로스 1세는 새로운 위협인 켈트족의 침략을 물리쳐서 구원자(소테르,σωτήρ)라는 칭호와 함께 정식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왕국으로서의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 때부터 시작한다.
아탈로스 1세는 켈트족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셀레우코스 왕조 및 마케도니아에 맞서 전쟁을 치렀고 결과적으로 큰 재미는 보지 못했지만 국체를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아탈로스 1세는 40년 넘게 오랫동안 왕위를 지켰는데, 그 동안 지중해 서쪽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전체 기간이 아탈로스 1세의 치세 기간에 포함된다. 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고, 때마침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5세가 팽창욕을 보이며 주변의 어그로를 끌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아탈로스 1세는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선택이었고 이후 페르가몬은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에 털리는 동안 로마의 동맹국으로 이득을 얻으며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아탈로스 1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에우메네스 2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페르가몬은 인구가 20만을 넘는 도시로 성장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은 페르가몬 도서관을 지은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한때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수는 20만을 넘었다고 하며 이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서관의 최후는 불분명한데, 일설에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싹 비워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카더라(...). 아무튼 남아있는 장서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에우메네스 2세의 뒤를 이은 왕은 그의 동생인 아탈로스 2세였다. 그의 별칭은 필라델포스, 즉 우애왕이었는데 이는 그가 에우메네스 2세 대신 나라를 지킨 적도 있고 에우메네스 2세가 죽자 형사취수로 그의 왕비와 결혼한 것도 있다. 그는 80세가 넘도록 장수한 편인데 여전히 로마와의 동맹을 잘 유지하였고 아예 로마에 자주 방문했을 정도였다. 그는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 역시 로마 제정시대까지 잘 남아서 신약 성경에 페르가몬과 함께 살짝 등장한다.
아탈로스 2세가 죽자 에우메네스 2세의 아들이 아탈로스 3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왕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취미생활에 몰두하였다. 후계자도 없었던 그는 죽으면서 분쟁을 우려한 끝에 아예 로마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모두가 그의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기에 아리스토니코스가 에우메네스 2세의 사생아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로 로마에 진압당하고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와 폰토스와 카파도키아 등에 의해 분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3. 로마 제국기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병원 (아스클레피온). 각종 공연과 심리 치료가 이루어졌다.
2세기에 이시스 등 이집트 신들을 모시는 신전 단지로 세워진 붉은 바실리카 (크즐 아볼루)
이후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도시로서 성장했지만 에페소스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10] 하지만 이후 이 도시를 방문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다시 부흥하며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다시 대규모 도서관이 복구되었으며 각종 신전들과 김나지움, 극장 및 전차 경주장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들어서기에 이른다. 히포크라테스 이후로 손꼽히는 의학자인 갈레누스(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역시 페르가몬 출신으로 아스클레피온에서 의학을 배웠다.
특히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중심으로 생긴 호화로운 휴양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의술 역시 페르가몬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어 로마 제국에서 손꼽히는 의료시설이 있는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한때 20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기도 했으며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소아시아에 있는 7개의 교구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도 잠시, 서기 262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완전히 쇠망하기에 이른다. 이어진 동로마 제국기에 페르가몬은 규모는 작지만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2.4. 중세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 내성
비잔틴 시기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 외성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벌이러 가는 도중에 620년대 사산 제국에게, 717~8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벌이러 가는 도중에 710년대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11]을 당했을 정도로 동방 세력에게 지중해 제해권이 깨지고 해군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침탈당할 때 그 침공로상에서 일시 점령당했었다. 이후 만지케르트 전투의 여파로 1074년 셀주크 제국이 점령하여 베르가마라 개칭되었다. 다만 1차 십자군과 함께 1097년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였다가 1302년 아나톨리아 베이국 중 하나인 카라시 베이국이 점령하였다. 베르가마는 발르케시르(카라시)와 함께 그 중심지 중 하나였으나 1360년 오스만 베이국에게 정복되었다. 16세기 말엽 오스만 술탄 무라트 3세는 옛 유적의 설화석고 항아리 2점을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오스만 제국과 친선을 맺었던 독일 제국이 페르가몬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 아예 건물을 통째로 뜯어가는 등 다수의 유물을 베를린으로 이송하여 페르가몬 박물관을 세웠다. 그리스-로마 유적 외에 시내에는 14-16세기에 세워진 모스크가 여럿 남아있고, 그중 울루 자미 (대사원)은 오스만 정복 후인 1399년에 세워졌다.
3.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통째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페르가몬 제단
페르가몬 박물관 문서 참조.
4. 기타
시내의 옛 로마 다리 위에 지어진 주택들
역시나 당시에 대도서관으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가 위치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하게 되는 게 이것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양피지의 발명지가 페르가몬이라는 설이 있다. 양피지를 영어로 parchm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페르가몬인 이유도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부터 이 도시의 특산물이 양피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발명 기원설이 으레 그렇듯[12] 이전부터 양피지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게 페르가몬의 양피지 업자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적인 대세이다. 양피지는 원료로 새끼 양의 가죽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탓에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었고, 이 때문에 이걸 체계적으로 제조하려면 규모 있는 도시여야만 했다. 마침 페르가몬은 도시 규모도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 잇는 제2의 대규모 도서관을 보유했었으니 엄청난 양의 양피지를 주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높은 비용으로 소규모로만 사용되던 양피지를 대량생산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절감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양피지가 특산물이 되었다가 발명 기원설로 와전되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 이 유적이 위치한 베르가마 군은 질좋은 카펫 생산지로 유명하다. 킬림(kilim)이라는 보풀이 없는 평직 카펫을 짜는데 특유의 노란색은 담배잎을 이용해 염색한 것이라 한다.
5. 갤러리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 유구
아크로폴리스의 김나지움 (체육관) 유구
아크로폴리스의 제단 유구
아스클레피온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아스클레피온의 유적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아스클레피온의 로마 시대 극장
아크로폴리스의 트라야누스 신전
아크로폴리스 그리스 극장
[1]
and its Multi-Layered Cultural Landscape
[2]
et son paysage culturel à multiples strates
[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8]
필레타이로스의 아버지 이름이 아탈로스였다.
[9]
이름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와의 연관성이 의심된 바 있으나 증거는 없다. 아무래도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가 궁정일지라는 기록을 남겼고 페르가몬 왕국이 도서관 장서로 유명하다 보니 의심할 만도 하다.
[10]
결국 그 에페수스도 고대말 중세초에 쇠퇴하여 소아시아 서해안의 중심도시 지위는 스미르나(이즈미르)로 넘어가서 이 일대가 모두 튀르크 계열 세력에게로 지배권이 넘어가고도 현재까지 소아시아 서해안의 중심도시 지위를 누리고 있다.
[11]
게이트 길리버,에이드리언 골즈워디,마이클 휘트비 저 '로마 전쟁' 책의 맨 뒷부분에 의하면 페르가몬 성 내 주민들은 패닉이 와서 임산부를 잡아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기도를 하고서
나누어 먹었을 정도라고 한다.
[12]
중국의
종이 발명설도 비슷하다. 채륜은 어디까지나 당대에 있었던 수많은 종이 개발 과정을 한데 모아 체계화해서 일련의 프로세스로 정립한 것이지, 무에서 종이를 발명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