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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언드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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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4대 공
바토리 언드라시
Báthory András
파일:바토리 언드라시.png
이름 바토리 언드라시
(Báthory András)
출생 1563년
동헝가리 왕국 실라지솜요(현재 루마니아 심레우실바니에이)
사망 1599년 10월 31일 (향년 36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칙센트도모코스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599년 3월 29일 ~ 10월 31일
아버지 바토리 언드라시
어머니 마즐라트 마르기트
형제 바토리 발타자르, 바토리 이슈트반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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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4대 .

2. 생애

1563년경 동헝가리 왕국 실라지솜요에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왕의 군사령관인 바토리 언드라시와 슈뇨그세그 출신의 헝가리 귀족 가문 여식인 마즐라트 마르기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조부는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인 바토리 이슈트반이며, 외조부는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를 역임한 미즐라트 이슈트반이었다. 그는 삼촌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트란실바니아 제2대 공인 스테판 바토리 크라쿠프 궁정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공부했고, 1578년에서 1581년 사이에 풀투스크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성직자의 길을 걸어간 그는 1581년 9월 16일 바르미아 교구의 보좌 주교로 선임되었다. 바르미아 대주교이자 외교관, 역사가인 마르친 크로머는 그를 후계자로 삼기를 거부했지만, 스테판 바토리와 폴란드 총리 얀 자모이스키가 마르친 크로머를 설득해 언드라시를 보좌 주교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바르미아 교구가 속한 프로이센 공국 삼부회는 언드라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의 취임을 막았다. 1583년 봄, 언드라시는 교황 대사 알베르토 볼로네티의 주도로 미에호프 수도원의 수석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테판 바토리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고 언드라시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기 위해 언드라시를 로마로 보냈다. 11월 30일에 로마에 입성한 그는 5일 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교황의 공증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스테판 바토리가 반 오스만 동맹에 가담하는 걸 거절하자, 교황청은 언드라시를 추기경으로 세우는 걸 거절했다. 이에 언드라시가 스테판 바토리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떠날 것이라고 선언하자, 교황청은 신실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관계가 이 일로 악화될 것을 우려해, 1584년 7월 23일에 언드라시는 산타드리아노 알 포로의 부제이자 추기경으로 선임했다. 사흘 후, 언드라시는 로마를 떠났고 1584년 10월 20일에 폴란드로 돌아와 미에호프에 정착했다. 그는 수도원의 제단을 재건하고 새로운 의식(왕과 왕국을 위한 40시간 기도 포함)을 도입했다. 1585년 7월 초 바르미아 주교구인 리즈 바르크 바르민스키 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그단스크와 말보르크를 포함한 인근의 주요 도시를 방문했다.

1586년 3월 22일, 언드라시는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자 하는 스테판 바토리의 의사에 따라 폴란드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7월 24일에 로마에 도착한 그는 교황에게 스테판 바토리의 계획을 알린 뒤 모스크바 대공국에 대항하는 스테판 바토리에게 재정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던 1586년 12월 13일,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언드라시는 서둘러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는 스테판 바토리에게서 트란실바니아의 갈러우, 나게네이드 및 외르메니예스(현재 루마니아의 길라우, 아이우드, 아르메니슈)를 물려받았다.

언드라시는 형제 바토리 발타자르, 사촌이자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후보에 포함되었다. 폴란드 총리이자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는 처음엔 교황청의 지지를 받는 언드라시를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지만, 여러 귀족들이 스테판 바토리와 헝가리 출신 친족 및 측근들이 폴란드 귀족들을 억압했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자, 다른 후보인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왕자를 추대하기로 했다. 이때 언드라시는 얀 자모이스키의 설득에 따라 바토리 지그몬드와 함께 시기스문드 왕자를 지지했다. 반대 세력이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를 추대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언드라시는 바토리 지그몬드의 고문들을 설득하여 트란실바니아군을 파견해 시기스문드를 돕게 했다. 이후 언드라시는 크라쿠프에서 시기스문드 왕자를 영접하는 대열에 합류했고, 1587년 12월 27일에 열린 지그문트 3세 바사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세임은 언드라시와 바토리 발타자르 형제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1588년 12월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예수회를 추방하자, 교황 식스토 5세는 바토리 지그몬드를 파문했다. 언드라시는 로마에 서신을 보내 지그몬드를 옹호하면서, 예수회의 공격적인 선교 정책이 주로 개신교가 있는 공국에서 예수회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데 기여했다고 강조했다. 1589년 3월 초 마르친 크로머가 사망한 후, 언드라시는 바르미아의 대주교가 되었고, 이와 동시에 폴란드 세나트 의원이 되었다. 식스토 5세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요청에 따라 언드라시를 크라쿠프 대주교인 피오트르 미슈코프스키의 보좌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1591년 4월 5일 미슈코프스키가 사망한 후, 교황 대사 아니발레 디 카푸아는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언드라시가 성직을 받은 사제가 아니었던 걸 지적해가며 설득한 끝에 언드라시 대신 예지 라지비우를 크라쿠프 대주교에 선임하도록 했다. 대다수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출신인 라지비우가 폴란드의 중심지인 크라쿠프의 대주교가 된 것을 불법이라고 여겼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왕의 결정을 인정했다.

그 후 언드라시는 그는 자기 영지에 있는 네 마을에 가톨릭 사제들을 정착시켰으며, 트란실바니아에 예수회 대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슈물레우치우크에 교구를 둔 트란실바니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를 주교로 삼으라고 제안했다. 교황청은 그에게 트란실바니아에 교구장을 세우는 것을 허가하여 그를 공국 내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만들었다. 1591년 8월, 여전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얻을 야심을 품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는 언드라시에게 사절을 보내 지그문트 3세 바사에 다항하여 트란실바니아가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언드라시는 트란실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막시밀리안 3세를 지원할 수 없지만, 바토리 지그몬드가 폴란드에서 싸우기 위해 트란실바니아군을 소집하는 걸 막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바토리 지그몬드가 예수회가 트란실바니아로 복귀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바토리 언드라시와 바토리 발타자르와 접견해 예수회를 합법화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언드라시와 발타자르 형제가 바토리 지그몬드를 폐ㅎ위하고 발타자르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592년 여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특사인 아틸리오 아말테오가 트란싧라니아 공국에 찾아와서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및 언드라시 형제 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교황청은 크라쿠프 주교구에 대해서도 언드라시와 라지비우 간의 화해를 주선했다. 그 결과 언드라시는 1593년 5월에 크라쿠프 주교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체르빈스크나트비스 영지와 수도원을 확보했다.

1593년, 교황 대사 알레산드로 쿠물레오가 트란실바니아로 와서 교황청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세운 신성 동맹에 바토리 지그몬드도 가담하라고 촉구했다. 지그몬드는 신성 동맹에 가담하려 했지만, 언드라시와 발타자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신성동맹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트란실바니아는 신성 동맹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지그몬드의 고문 대다수는 두 사람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지그몬드의 고해사제인 예수회 수도자 알폰소 카릴로는 지그몬드를 설득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와 협상하도록 했다. 여기에 카릴로는 언드라시가 루돌프 2세와의 협상에 참여하는 걸 막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언드라시는 얼마 안 되어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

루돌프 2세의 황제군이 1593년 가을에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일련의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신성 동맹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는 건 자살 행위라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발타자르는 이를 기회로 삼아 주요 관리들을 포섭해 지그몬드를 폐위한 뒤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보치커이 이슈트반 등이 이 음모를 적발했고, 8월 28일 발타자르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 12명을 음모 혐의로 체포한 뒤 감옥에서 교살했다. 그 후 지그몬드는 발타자르의 형제인 언드라시의 트란실바니아 내 영지를 몰수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지그몬드의 결정을 승인했고, 언드라시와 동생 바토리 이슈트반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언드라시는 이에 분노해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지그몬드를 부도덕한 폭군이라고 규탄했고, 교황청,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움을 얻어 지그몬드를 형제 바토리 이슈트반으로 교체하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다만 지그몬드는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언드라시의 어머니와 바토리 이슈트반의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폴란드로 이주하는 걸 허용했다. 그 후 폴란드에 그대로 남아 있던 언드라시는 1596년 오스만 제국이 연이은 전투에서 신성 동맹을 잇따라 격파한 것에 동요한 트란실바니아 귀족들로부터 지그몬드를 축출하고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언드라시는 교황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지그몬드와 싸우는 것에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지그몬드와 화해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비르미아로 돌아왔고, 1597년 1월 4일에 부제 서품을 받았으며, 형제 이슈트반과 함께 다시는 트란실바니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그몬드에게 일전에 몰수된 트란실바니아 내 영지를 보상해달라고 청원하는 사절을 보냈다.

1598년 11월, 퇴위를 결심한 바토리 지그몬드는 예수회 수도자를 크라쿠프로 파견해 언드라시에게 트란실바니아 공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알렸다. 1599년 2월 중순, 콜로즈바르(현재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에서 지그몬드와 만난 그는 이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이 화해하기 위해 회동을 가졌다고 여겼지만, 지그몬드는 3월 21일 메드제스(현제 루마니아 메디아슈)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정식으로 선포하고 언드라시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통보했다. 언드라시는 자신과 형제 이슈트반이 1594년에 자기들을 반역자로 규정한 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의회는 3월 28일에 언드라시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부임한 언드라시는 보도니 이슈트반을 콜로즈 주의 이슈판으로 삼았고, 시브릭 가스파르를 기병대 사령관으로 삼았다. 1594년 언드라시의 형제 바토리 발타자르를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코르니스 가스파르는 여전히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 남았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에 대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종주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1599년 7월 3일, 언드라시가 파견한 사절들은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협의했다. 그는 자기 동생인 바토리 이슈트반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하려 했고,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자기 동생 시미온 모빌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앉히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일단 친족끼리 결혼시켜서 동맹을 맺기로 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를 공동으로 공격해 폐위시키기로 합의했다. 미하이 2세는 1598년 6월 26일 바토리 언드라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전하려 했지만, 언드라시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여기에 더해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자신이 왈라키아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위험 인물인 미하이 2세보다는 언드라시 쪽이 상대하기 편할 거라 여기고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1598년 8월, 트란실바니아 전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촌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다. 언드라시는 마리아와 결혼하면 루돌프 2세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통치하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언드라시의 요청을 기각했다. 미하이 2세는 루돌프 2세의 마음을 읽고, 1599년 7월 프라하에 있던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가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루돌프 2세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같은 해 말 루마니아인과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헝가리인 세케이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해 부자우 고개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다.

1599년 10월 28일, 미하이 2세는 셀림바르 전투에서 바토리 언드라시가 이끄는 16,000명 가량의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로 도망쳐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합세해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도중에 산지에서 세케이인들에게 생포된 뒤 10월 31일에 참수된 후 수급이 미하이 2세에게 전달되었다. 미하이 2세는 이 수급을 교황 대사 게르마니코 말라스피나에게 보냈다. 그의 유해는 11월 24일에 줄러페헤르바르에 있는 성 미카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세케이인들에게 교회의 저주를 선포하고 100년 동안 금식하는 걸 의무화했다. 1816년, 타마스 푸스카스 신부는 언드라시가 살해된 장소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