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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치 지그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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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7대 공
라코치 지그몬드
Rákóczi Zsigmond
파일:라코치 지그몬드.jpg
이름 라코치 지그몬드
(Rákóczi Zsigmond)
출생 1554년
동헝가리 왕국 펠소바다시(현재 헝가리 보르소드아바우즈젬플렌 펠소바다시)
사망 1608년 12월 5일 (향년 63~64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펠소바다시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07년 2월 11일 ~ 1608년 3월 5일
아버지 라코치 야노시
어머니 네메시 사라
배우자 카타이 보르바라, 알라기 베케니 주디트, 게렌디 언너, 텔레그디 보르바라
자녀 라코치 에르제베트, 라코치 죄르지 1세, 라코치 지그몬드, 라코치 팔
종교 루터교회 칼뱅교회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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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7대 .

2. 생애

1554년경 동헝가리 왕국 펠소바다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라코치 야노시는 젬플렌 카운티의 알리슈판(Alispán, 각 카운티의 지도자인 이슈판의 보좌 역할을 맡은 고위 관원)이었고, 어머니는 헝가리 귀족 네메시 미클로시의 딸 네메시 사라였다. 그는 사요센트페테르와 사로스파타크의 개신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성경과 로마 역사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이후 사로스파타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인 페레니 가보르의 칼잡이(sword-bearer: 의례 때 주군 앞에서 검을 들어주는 관원)가 되었으며, 1565년 상 헝가리 방면 황제군 최고 사령관인 라자루스 폰 슈벤디의 군대에서 복무해 토카이 공방전에 참여했다. 1567년 페레니 가보르가 사망한 뒤 에게르 요새에서 복무했다. 17세기에 작성된 라코치 가문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575년 베케시 가스파르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 공 작위를 놓고 바토리 이슈트반과 케렐뢰센트팔 전투를 치를 때 베케시 편에서 참전했다고 한다.

1575년경 미망인 졸도스 줄리아의 양자가 되었고, 그녀로부터 체네이테, 이로타, 사카치를 물려받았다. 이후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센드로 요새 수비대장에 선임되었고, 인근 요새에 주둔한 오스만 제국군과의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특히 1577년 11월 11일 커셔의 부대장인 프레포스트베리 발린트와 시크소를 약탈한 뒤 귀환 중이던 오스만군을 습격해 격파했다. 한편, 그는 서신에서 자기와 병사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별다른 급료를 받지 못한다고 불평했고, 합스부르크 왕실은 지급되지 않은 금액을 보상하기 위해 여러 영지를 저당 잡혔다. 특히 1580년 세레츠가 그에게 저당 잡히면서 4,000 플로린을 확보했으며, 세레츠가 토카이 와인 재배지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와인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와인 거래를 통해 1580년대 후반에 부자가 되었다. 이후 세렌츠에 새로운 성을 세우고 이곳을 자기 영지의 중심지로 삼았다.

158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루돌프 2세로부터 괴모르 주의 농가가 내야 하는 특별 세금 2 플로린을 징수하는 일을 맡았고, 1584년 보르쇼드 주에서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1585년 센드로의 대장이 되었다. 한편, 그는 본래 루터교회 신자였지만, 1580년대 무렵에 칼뱅교회로 개종했다. 1587년, 헝가리 대귀족 마고히 가스파르는 사망하기 전에 1586년에 사망한 아들 마고히 언드라시의 아들들이자 자기 손자들의 후원자로 삼았다. 이 손자들은 베레그, 세페시, 토르나 주에 있는 대규모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이 영지를 관리해 주면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1587년 5월 마고히 언드라시의 미망인인 알라기 베케니 주디트와 결혼했다. 1588년 헝가리 의회의 지시에 따라 상 헝가리의 왕실 수입 행정을 검토하기 위해 설립된 위원회의 대표가 되었다. 위원회는 그 지역의 모든 중요한 중심지를 방문했지만, 그들의 보고서는 루돌프 2세의 궁정에서 무시되었다.

1588년 라코치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의 형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에른스트에 의해 에게르 요새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에게르 요새에 속했던 마을들은 오스만 제국군에게 점령되었거나 지그몬드의 전임자인 운그나트 크르스토에게 저당 잡혔다. 지그몬드는 에게르 주교구의 수입과 왕립 재정 보조금을 통해 요새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기병 500여 명과 보병 450명으로 구성된 수비대 사령관이었고, 1590년 말에는 기병 440명과 보병 830명의 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헤베슈와 보르소드 백작령의 이슈판이 되었다. 1588년 8월 28일 루돌프 2세에 의해 남작으로 선임되었다. 1588년 10월 2일 오스만 제국군 사령관 솔노크 베이의 침략을 시크소에서 물리쳤다. 뒤이어 커셔, 센드뢰, 토카이의 지원군을 확보한 뒤 10월 8일 시크소를 재침한 세 베이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의 승리는 헝가리 왕국 전체와 , 프라하에서 축하 되었다.

1589년 2월과 1590년 7월 사이, 라코치 지그몬드는 칼뱅교회 목사 카롤리 가스파르가 집필한 헝가리어 성경을 발간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와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 교육 비용을 지원했으며, 두 대학생들이 졸업한 뒤 자기 영지에서 칼뱅파 목사로 활동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가톨릭 성직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으며, 루신 농노들을 위해 정교회 사제를 고용하기도 하는 등 종교적 관용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에게르 요새 운영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 미비로 인해 점점 힘들어지자, 1590년 3월 12일 에케르 요새 대장직을 사임한 뒤 뭉카치 요새로 이동했다. 1591년 7월 아내가 사망한 뒤에도 의붓자식들의 보호권을 유지했다. 마고히 가문 친족인 카타이 막돌나는 지그몬드의 후견권을 빼앗기 위해 그가 의붓자식들의 재산을 횡령했다고 고발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배했다.

1593년 초, 헝가리 의회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방어하기 위해 특별 세금을 거두기로 했다. 그는 의회로부터 상 헝가리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 대재상 코차 시난 파샤가 트란스다뉴비아를 침공했을 때, 코차 시난 파샤가 상헝가리를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그몬드는 상헝가리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인 팔키 미클라시를 루돌프 2세에게 파견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격을 곧바로 시작하도록 촉구하게 했다. 또한 그는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이 반(反) 오스만 연합인 신성 동맹에 가담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해 10월 황제군이 오스만 제국 영토로 진입했을 때 즉시 가담했고, 11월 14일 로마니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뒤 요충지인 푈렉 요새를 포위했을 때 참여했다. 지그몬드는 수비대와 협상한 끝에,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안전한 후방으로 이동하게 해주는 대가로 요새를 점거했다. 그는 푈렉 요새를 큰 출혈 없이 공략하는 데 기여한 공을 세우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1594년 초 하트반에서 분견대를 이끈 포르가치 시몬에게 합류했다. 지그몬드와 시몬은 5월 1일 투라에서 부더의 파샤를 격파했지만, 하트반 요새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1595년경 헝가리 왕립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한편, 지그몬드는 1592년 7월 15일 이전에 게렌디 언너와 결혼했다. 1595년 게렌디 언너가 사망한 뒤, 1596년 5월 텔레그디 보르바라와 결혼했다. 이후 보르바라가 이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차피 즈자의 후견인으로서, 에세니(현재 우크라이나 에세니)와 파르노(현재 슬로바키아 파르코바니에 있는 차피 즈자의 영지를 인수했다.

1596년 여름, 루돌프 2세의 형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그는 여기에 가담해 바츠와 하트반 공략에 기여했으며, 막시밀리안 3세에게 원정 비용으로 쓰일 3,000 탈러를 빌려줬다. 그러나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케레츠테스 전투에는 전투 직전에 통풍에 걸리는 바람에 불참했고, 케레츠테스 전투는 황제군의 참패로 끝냈다. 1597년 5월 27일, 루돌프 2세는 지그몬드에게 그의 군사적 봉사와 재정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문장을 가지는 걸 허락했다. 그가 정한 문장에는 라코치 가문의 이전 문장에서 등장하는 까마귀 독수리로 대체했고, 라코치 가문의 전통적인 바퀴 모양에 3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 그려졌다.

1598년 초,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알을 통치할 위원들을 임명하자, 그는 위원들을 돕기 위해 트란실바니아에 지원군을 보냈다. 이후 상 헝가리의 사령관이 되었지만, 총사령관 조르조 바스타의 용병들이 급여를 받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자기 영지를 심각하게 약탈한 것에 불만을 품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따졌다. 그러나 바스타는 그가 먼저 군대 급여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비난했고, 그다음에는 루돌프 2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1599년 여름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족이 상 헝가리의 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했을 때 감히 대적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의 인기가 떨어졌다. 이렇듯 조르조 바스타의 용병대의 약탈과 오스만 제국의 연이은 습격에 시달리면서, 그의 영지는 크게 파괴되었다. 1598년과 1601년 사이에 문카치 일대에서는 주택의 거의 40%가 파괴되었고, 젬플렌 카운티에 있는 마을 20%가 사람이 살지 않은 곳으로 전락했다.

1601년 8월, 루테니아 왕자 야누시 오스트로그스키는 소로스 카운티(현재 슬로바키아의 즈보로프에 있는 마코비차 영지를 80,000 플로린에 지그몬드에게 매각했다. 지그몬드는 오스트로그스키에게 정교회와 천주교 농노들을 칼뱅파로 개종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마코비차는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중요한 교통로를 책임졌고, 그는 폴란드에 와인을 공급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챙겼다. 1602년, 지그몬드의 후견을 받던 마고히 페렌츠가 성인이 되었다. 이에 마고히 친족들은 지그몬드에게 그동안 후견을 책임지면서 횡령한 자금이 많다며, 지그몬드에게 설명을 요구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 오스트로그스키는 그르르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그가 마코비차 영지를 받는 대가로 해야 할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한편, 항상 자금이 모자랐던 헝가리 왕실은 그의 영지를 대거 압류하려 했다. 어느 날, 왕실 관리들은 그가 헝가리의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전쟁 포로 석방을 요청하는 서신을 오스만 제국의 베이에게 3통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루돌프 2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는 그를 소환하려 했지만, 왕실 의원들은 지그몬드를 지지했다. 1602년 2월, 루돌프 2세는 종교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상 헝가리의 루터교회 칼뱅교회 귀족과 시민들은 9월 8일 갈셰치(현재 슬로바키아 세초브체)에 모여 법령 철회를 요구했다. 지그몬드는 회의에 참석했지만, 곧 마코비차로 돌아갔다.

1604년 10월,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파르티움에서 루돌프 2세를 상대로 봉기했다. 보치커이를 추종한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대장인 라프타이 발라츠와 네메티 말라츠는 11월 초 지그몬드에게 자기들과 합류하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지그몬드는 마코비차에 남았지만, 보치커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반란에 직접 가담하는 건 거절했지만 장남 라코치 죄르지를 커셔에 있던 보치커이 이슈트반에게 보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내전을 이용해 상 헝가리를 지배하려 들 것을 우려해, 보치커이에게 합스부르크 가문과 평화 협상을 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지그몬드는 몇 달 동안 커셔에 있는 보치커이 궁정에 머물렀지만, 통풍 발작으로 고통받았다. 1605년 9월 14일 의회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관리하는 총독으로 선임되어 줄러페헤르바르로 옮겼다. 1606년 3월 7일 세케이인 안식일 수호파들이 우드바르헬리셰크에서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했으며, 귀족들이 세케이 평민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 법률을 의회에서 채택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1606년 12월 29일,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러게트 발린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후 라코치 지그몬드는 바토리 가보르, 베틀렌 가보르, 나리 팔, 코르니스 볼디자르, 실바시 볼디자르 등과 경쟁한 끝에, 1607년 2월 11일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투표 결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자기가 나이가 많고 통풍을 앓고 있기에 자격이 없다며 사양 의사를 밝혔지만, 의원들의 청원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 군주 선서를 했다. 그의 선출은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자유롭게 군주를 선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례였다.

바토리 가보르는 일단 그의 선출을 받아들였지만, 1595년 몰수되었던 영지를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드러게트 발린트는 그의 선출에 반발해 후스트와 코바르를 점거했다. 이에 라코치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에게 서신을 보내 드러게트에게 두 요새에서 철수하라고 명령에 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 대재상인 쿠유주 무라트 파샤는 1607년 1월 18일에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유언에서 후계자로 삼은 드러게트 발린트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지만, 서한을 가져온 무스타파는 라코치 지그몬드의 선출을 알게 되자 그의 이름으로 변경한 뒤 2월 22일에 트란실바니아 의회에 제출했다. 라코치 지그몬드는 쿠유즈 무라트 파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국경 요새인 리파와 예노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철수할 테니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쿠유주 무라트 파샤는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전임 공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7년 4월 19일, 상 헝가리 귀족들은 로즈고니에 모여 라코치 지그몬드에게 드러게트 발린트에게 양위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지그몬드는 드러게트 발린트가 황제군을 등에 업고 침공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남부에 있는 포가라스 요새로 이동했다. 하지만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 왕국의 고유한 영토로 여겼기에, 자코치 지그몬드와 드러게트 발린트 모두 배제하려 했다. 그 대신, 그는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이며 퇴위 후 보헤미아의 리보초비체에서 조용히 지내던 바토리 지그몬드를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바토리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의 제안을 물리치고 리보초비체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후 라코치 지그몬드는 드러게트 발린트와 협의한 끝에, 발린트가 트란실바니아 공위 주장을 그만두는 대가로 후스트와 코바르를 자기 영지로 가지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607년 6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바토리 가보르에게 영지를 반환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개신교에 지나치게 적대적인 예수회를 공국에서 추방하도록 했다. 이에 트란실바니아 공국 내 가톨릭 영주들이 격분하자, 바토리 가보르는 그들에게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면 가톨릭 세력의 이익을 증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한 후 봉급을 받지 못했던 하이두크는 1607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뒤 드러게트 발린트를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드러게트 발린트는 하이두크와 손잡기를 거부했고, 지그몬드는 바토리 가보르와 협상한 끝에 하이두크와 협상해 주는 대가로 그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넘기기로 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1608년 2월 6일 하이두크와 평화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가톨릭과 유니테리언 귀족을 트란실바니아 공의 고문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1608년 3월 5일, 라코치 지그몬드는 콜로즈바르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그해 3월 7일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옹립되었고, 지그몬드는 아내와 함께 콜로즈바르를 떠나 상 헝가리로 이동했다. 그는 상 헝가리의 최고 사령관을 맡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소집된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레스부르크로 가려 했지만 중병에 걸렸고, 1608년 12월 5일 펠소바다시에서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