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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9대 공 어퍼피 미하이 2세 II. Apafi Mihál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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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어퍼피 미하이 (Apafi Mihá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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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76년 10월 13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 줄러페헤르바르(현재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 | ||
사망 | 1713년 2월 1일 (향년 36세) | |
합스부르크 제국 빈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 |
1681년 6월 10일 ~ 1701년 | ||
배우자 | 베틀렌 커털린 (1694년 결혼) | |
아버지 | 어퍼피 미하이 1세 | |
어머니 | 보르네미자 언너 |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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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9대 공.2. 생애
1676년 10월 13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 줄러페헤르바르에서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와 트란실바니아 총리 보르네미자 팔의 딸인 보르네미자 언너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에게는 형제자매가 13명이나 있었으나, 모두 유년기에 사망했고 오직 그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1681년 6월 10일, 20세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트란실바니아 공동 공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조기에 공으로 선출된 이유는 트란실바니아 공을 세습하기 위해서였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로부터 아들의 세습을 인정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을 오스만 궁정에 지불해야 했다.1688년 8월 보르네미자 언너가 사망한 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퍼피 미하이 1세는 1690년 초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냥에 나섰다가 감기에 걸렸고, 그해 4월 15일 포가라스에서 사망했다. 당시 어퍼피 미하이 2세는 14세의 어린 아이였고, 오스만 제국에 의탁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던 퇴쾨이 임레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승인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가 파견한 황제군이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장악하고 있던 터라 실제로 통치하지 못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레오폴트 1세가 집권한 빈에 사절을 보내 1687년 발라즈스팔비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퍼피 미하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던 걸 근거로 삼아 어퍼피 미하이 2세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690년 8월 21일, 퇴쾨이 임레는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족의 도움으로 제르니스트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다. 그 해 9월 22일, 퇴쾨이 임레는 케레스테니시게트(현재 루마니아 스제반 카운티 크리스티안)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바덴 자작 루트비히 빌헬름이 이끄는 황제군이 퇴쾨이 임레를 트란실바니아에서 축출했다. 그 후 레오폴트 1세는 어퍼피 미하이 2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후견인으로 세웠다.
1690년 10월 16일, 레오폴디눔 헌장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인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완전히 귀속되며, 연간 50,000 탈러를 황제에게 납부해야 하며, 트란실바니아 공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는다. 또한 어퍼피 미하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총독을 선출할 권리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루터교회, 칼뱅교회, 유니테리언 신도들은 신앙을 유지할 권리를 인정받으며, 귀족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이 부여한 특권을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로부터 공인받으며,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자치권은 여전히 유효하며, 행정, 입법, 사법행정은 기존 형태를 유지했다. 다만 의원과 이사회 구성원 중 최소 3명과 최고 재판관 중 최소 한 명은 가톨릭 신자여야 했다.
1691년, 포가라스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반피 죄르지를 총독으로 선임했고, 총리로 베틀렌 미클로시, 재무관 아포르 이슈트반, 사령관 베틀렌 게르게이, 그리고 고문 12명이 선임되었다. 이 시스템은 훗날 구베르니움(gubernium: 총독제)으로 명명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임시 제도일 뿐이어서, 어퍼피 미하이 2세가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폐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1694년 6월 30일, 어퍼피 미하이 2세는 보돈(현재 루마니아 마로스 카운티 메조보돈)에서 베틀렌 게르게이의 딸인 베틀렌 커털린과 결혼했다. 이는 총리 베틀렌 미클로시 등의 강력한 권고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퍼피 미하이 2세를 가톨릭 신자이자 외국인인 여인과 결혼시키는 걸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허가 없이 이뤄졌기에, 레오폴트 1세가 그를 트란실바니아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1696년,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인 팔츠 계승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오스만 제국을 밀어내고 발칸 반도를 석권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퇴쾨이 임레가 여전히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노렸고,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트란실바니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오폴트 1세는 이런 상황에서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유지했다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이탈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에 레오폴트 1세는 자기의 허락 없이 결혼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어퍼피 미하이 2세를 빈으로 소환했고, 구베르니움 제도는 존속되었다.
어퍼피 미하이 2세는 빈 궁정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지만, 빈 궁정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결국 그는 1701년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갈 희망을 잃고 트란실바니아 통치권을 합스부르크 황실에 반납하고, 그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공작 칭호와 연간 급료 10,000 탈러를 수여받았다. 그 후 빈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713년 2월 1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알마케렉(현재 루마니아 시비우 카운티 말란크라브)에 옮겨져 그곳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42년 11월 23일 아버지가 안장되었던 클루지 개혁교회 지하묘소로 이장되었다. 그는 아내 베틀렌 커털린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