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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란 1세 | 제노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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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셉티미우스 바발라투스 (라틴어: Septimius Vaballathus, 팔미라어: whbʾlt, 아랍어: وهب اللات) |
출생 | 259년 |
사망 | 274년 이후 |
아버지 | 오다에나투스 |
어머니 | 제노비아 |
형제 | 하이란 1세(이복 형), 하이란 2세, 성명 미상의 누이 |
재위 기간 |
267년~272년(팔미라의
왕중왕) 272년(팔미라의 공동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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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에나투스와 제노비아의 아들. 267년부터 팔미라의 왕중왕이 되었다가 272년 어머니와 함께 팔미라 제국의 황제에 올랐으나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연패해 로마로 끌려갔다.2. 생애
팔미라의 총독이자 왕중왕으로서 사산 왕조의 연이은 침략을 격퇴하여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를 지켜낸 오다에나투스와 제노비아의 아들이었다. 이복 형으로 하이란 1세가 있었고, 친형제로 하이란 2세, 성명 미상의 누이 셋이 있었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제노비아가 왕위에 앉히고 섭정한 두 아들의 이름을 헤렌니아누스(Herennianus)와 티몰라우스(Timolaus)라고 했지만, 현대 학계는 두 사람을 가상의 인물 또는 각각 하이란 2세 및 바발라투스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267년, 팔미라를 공동으로 통치하던 아버지 오다에나투스와 이복형 하이란 1세가 오다에나투스의 조카 또는 사촌인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마에오니우스는 즉시 팔미라의 왕중왕에 올랐으나, 제노비아에 의해 처단되었다.
제노비아는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새로운 팔미라의 왕중왕으로 칭하고, 자신은 태후이자 후견인으로 칭했다. 당시 바발라투스는 8세의 소년이었기에, 모든 권력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다에나투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근위대장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에게 군대를 맡겨 팔미라를 공격하게 했지만 패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신빙성이 지극히 떨어지는 역사서로 악명이 높으며, 교차검증할 다른 기록도 없는 데다가, 당시 갈리에누스는 267년부터 시작된 고트족의 침략과 268년에 일어난 아우레올루스의 반란을 수습하느라 동방에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팔미라에 군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270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고트족을 토벌하던 중 역병에 걸려 붕어한 뒤 제위에 오른 아우렐리아누스는 처음에는 바발라투스의 통치를 인정했다. 팔미라에서 270년에 발행된 동전에는 아우렐리아누스와 바발라투스의 초상이 각각 앞면과 뒷면에 새겨져 있다. 이 동전에서, 아우렐리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방사관을 쓰고 있으며, 바발라투스는 월계관을 쓰고 있다.
그러나 270년 10월,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로 작정했고, 그녀의 지시를 받은 자브다스 장군은 7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해 이집트 총독 테나기노 프로부스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271년에는 시리아 전역을 석권한 뒤 소아시아로 진군해 갈라티아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영토를 대거 확보했다. 다만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에 있는 칼케돈만은 끝까지 로마 제국에 충성했고, 훗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반격을 개시할 때 전진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272년 제노비아는 바발라투스와 함께 팔미라 제국의 공동 황제에 등극했다. 그해 반격에 착수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직접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앙카라와 티아나를 공략했고, 프로부스가 이끄는 별동대는 바다를 통해 이집트로 나아가 티마게니우스가 이끄는 팔미라군과 대적한 끝에 이집트를 탈환했다. 그 후 아우렐리아누스는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 근방과 에메사에서 자브다스가 이끄는 팔미라군과 두 차례 맞붙어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 자브다스는 제노비아와 함께 팔미라로 퇴각하면서, 도시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사막 지대에 매복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를 모조리 격퇴하고 팔미라 성벽 앞에 당도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에서 농성하면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무더운 여름에 공성전을 벌이면 장병들이 고통받을 것을 우려해 제노비아에게
"보석, 은, 금, 비단, 말과, 낙타를 공물로 바친다면 그대의 가족이 원로원의 경의를 받으며 훌륭한 궁전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이를 거부했다.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 왕조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붕어하는 바람에 팔미라에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페르시아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로마군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는 페르시아가 보낸 기병대 중에 일찍이 페르시아에 강제로 복속되었던 아르메니아 왕국 출신이 많은 걸 보고, 그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고 한다.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바발라투스와 함께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결국 더 이상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자브다스는 272년 말 성문을 열고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특별히 약탈을 금지하는 대신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하도록 했다. 그 후 에메사에서 군사 재판을 실시해 자브다스와 그리스 출신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팔미라 제국의 핵심 관료들을 처형했지만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는 개선식에서 '전리품'으로 내세울 목적으로 살려줬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바발라투스는 로마로 끌려가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그가 어머니와 함께 개선식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현대 학계는 바발라투스가 살아있는 채로 로마로 끌려가 개선식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가 제노비아를 로마 근교 티볼리의 어느 저택에 살게 해줬고, 제노비아의 세 딸이 로마 귀족들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