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샙티미우스 자브다스 (Septimius Zabdas) |
출생 | 미상 |
사망 | 272년 |
직위 | 팔미라 제국 사령관 |
반란 대상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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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반란자, 팔미라 제국 사령관. 제노비아 여왕 휘하의 장군으로서 팔미라 제국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이집트 일대에 영역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의 로마 재통합 전쟁에서 패한 뒤 체포된 후 공개 처형되었다.2. 생애
270년 봄 제노비아에 의해 팔미라군 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아라비아 속주로 진격하여 보스트라 전투에서 아라비아 총독이자 레기온 제3군단 키레나이카를 지휘한 트라수스를 사살하고 아라비아 속주의 주도 보스트라를 공략한 뒤 제우스-아문 신전을 약탈하여 병사들에게 제물을 나눠줬다. 이후 요르단 계곡을 따라 이동하여 페트라에 무혈 입성하였으며, 유대 속주도 손쉽게 장악했다. 270년 10월 이집트 동쪽 국경으로 진격한 그는 로마 수비대 장교 티마게니우스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여들임으로써 총 5만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한 뒤,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고 5,000명의 수비대를 남겨뒀다.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테나기노 프로부스[1]는 해적을 쳐부수러 바다로 나가 있었는데, 뒤늦게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돌아와 로마군을 재편성하고, 11월에 알렉산드리아를 되찾고 나일 삼각주에서 팔미라군을 내쫓았다. 하지만 자브다스는 재차 반격을 가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고, 프로부스를 남부 이집트로 쫓아냈다. 그 후 테나기노 프로부스는 바빌론 요새에서 항전했지만, 자브다스가 후방을 매복 공격해 요새를 기습 공략하자 자살했다. 271년 봄 팔미라로 돌아간 그는 제노비아의 명에 따라 시리아로 진격하여 빠른 시일에 공략하고 8월에 귀환했다. 뒤이어 소아시아로 쳐들어가서 갈라디아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영토를 대거 확보했다. 다만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에 있는 칼케돈 만은 끝까지 로마 제국에 충성하였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반격을 개시할 때 전진 기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그는 직접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앙카라에 무혈 입성하였고, 프로부스가 이끄는 별동대는 바다를 통해 이집트로 나아가 티마게니우스가 이끄는 팔미라군과 대적했다. 제노비아는 자브라스에게 티아나를 구원하라고 하였으나, 그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아우렐리아누스가 티아나를 공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티아나 주민들을 관대하게 대해 민심을 수습하였고,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팔미라 여왕의 병사로 근무했던 자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마군은 에메사의 성문 앞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자브다스는 안티오키아 근방에서 팔미라 궁기병과 중장 기병대를 이끌고 행군중인 로마군을 습격할 적기가 오길 기다렸다. 이를 눈치챈 아우렐리아누스는 보병대에겐 계속 행진하게 하면서, 몸소 경기병대를 이끌고 그들을 상대하러 갔다. 양측은 곧 맞붙었는데, 경기병대로 하여금 원거리 공격을 가하다가 중장기병대가 접근하기 전에 후퇴했다가 다시 치고 빠지길 반복하는 전술을 적절히 구사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완승을 거두었다. 자브다스는 안티오키아로 후퇴한 뒤 제노비아에게 패전을 보고했다. 두 사람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당시 시리아인들이 아우렐리아누스의 연이은 승리와 관대한 행보에 동요하고 있었기에, 패전 소식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자브다스는 반란을 피할 묘책을 기획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와 비슷하게 생긴 자를 잡아다가 수레에 싣고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금 완승을 거뒀으며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라고 선전했고, 시민들은 전쟁이 종식되었다며 크게 기뻐했다. 그날 밤, 그는 제노비아와 함께 도시를 극비리에 떠나 에메사로 퇴각했다. 날이 밝을 무렵 아우렐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팔미라로 도주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시 기병대를 파견해 피난 행렬을 가로막게 한 뒤, 절대로 해치지 않을 테니 도시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했다. 시민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갔고,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프네 마을 인근 언덕에 배치되어 있던 팔미라 궁기병대를 가볍게 격파하고 라리사 등 여러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272년 6월, 에메사로 진격한 로마군은 제노비아와 자브다스가 대대적으로 동원한 적군과 마주쳤다. 이어진 회전에서, 자브다스는 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고, 로마 경기병대가 후퇴하려는 시점에 중장기병대를 갑작스럽게 출격시켜서 미처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 기병대는 크게 고전해, 자칫하면 괴멸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번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그는 후방의 예비대를 급파하여 아군 기병대를 몰아치고 있는 팔미라 기병대의 후방을 치게 했고, 자신은 중앙의 보병대를 독려하여 팔미라 보병대에 맹공을 퍼붓게 하였다. 그 결과 팔미라 보병대는 괴멸되었고, 기병대 역시 갑작스럽 후방 급습에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났다. 이리하여 완승을 거둔 아우렐리아누스는 에메사에 입성한 뒤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을 모신 신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자브다스는 제노비아와 함께 팔미라로 퇴각하면서, 도시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사막 지대에 매복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를 모조리 격퇴하고 팔미라 성벽 앞에 당도했다. 그는 무더운 여름에 공성전을 벌이면 장병들이 고통받을 것을 우려해 제노비아에게 "보석, 은, 금, 비단, 말과, 낙타를 공물로 바친다면 그대의 가족이 원로원의 경의를 받으며 훌륭한 궁전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부했다. 그녀는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팔미라에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결국 더 이상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자브다스는 272년 말 성문을 열고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이후 열린 군사재판에서, 살려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아우렐리아누스의 명령으로 즉결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