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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 카다피주의 | |||
사건 · 사고 |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 |||
관련 전쟁 | 리비아 공습 · 리비아-차드 전쟁 · 제1차 리비아 내전 · 오디세이 새벽 작전 | |||
관련 정치인 | 가말 압델 나세르 · 콘돌리자 라이스 | |||
평가 |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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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기와 집권
리비아의 아랍계 유목민 부족인 카다드파(القذاذفـة, Qadhadhfa) 부족 출신으로 카다피라는 이름도 부족명에서 따온 것이다. 사막의 중심에 위치한 천막에서 태어나 리비아 남부 지역인 페잔에서 베두인식 이슬람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인 카다피는 집에서 30km나 떨어진 시르트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지낼 곳이 없어서 모스크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늦게 입학하여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데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베두인이라 친구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베두인에 대한 멸시를 인지히고 있음에도 카다피는 자신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1963년에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동기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하였다. 196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카다피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남과 동기에 1년을 파견근무를 담당하였고 귀국한 다음 통신부대로 배치되었다. 사관생도 시절의 카다피는 혁명과 관련한 연구를 즐기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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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카다피.[1] |
1960년대의 리비아는 석유 개발이 시작되면서 사막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거나 해안가 근교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빈곤 국가에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역전한다. 하지만 성공을 통한 재산의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당연히 빈부격차가 심하였다. 부정부패도 심각한 수준인데 왕정이 미국과 친목을 다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이 불만이 많았는데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에 동료 장교들과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한다. 해외를 순방하느라 튀르키예에 체류하던 이드리스 1세는 카다피에 의해 퇴위당하자 아예 튀르키예로 망명하고 리바의의 주요 기관도 피해없이 간단히 제압된다.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리비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하고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리비아 아랍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평의회의의 의장에 취임한다.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의 카다피는 27세의 대위에 불과하였지만 쿠데타에 성공하고 가말 압델 나세르를 따라서 대령으로 특진한다. 이렇기 카다피는 평생을 '카다피 대령'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였다.
1974년에는 정치이론의 연구에 전념하고자 혁명평의회의 의장을 2인자에게 위임하고 이듬해에 정치이론을 집필한 녹색서를 출간한다. 1982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녹색서가 출판되었는데 사회학자인 김동춘이 '김성근'이라는 가명으로 번역하였다. 일반적인 정치사상서처럼 방대하지 않고 여러 사회문제와 정치구조에 대한 카다피의 생각을 간단하게 소개한 소책자이다. 1977년에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한 카다피는 총인민회의 서기장에 취임하지만 2년 후인 1979년에 모든 직책에서 사퇴한다. 공직적인 직책이 없고 혁명지도자라는 호칭만을 보유한 카다피지만 실질적인 국가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정은 카다피의 휘하에서 운영되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보여주식으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포하거나 부정 선거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임기를 정하고 지속적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다른 아프리카 독재국가와는 다른 독특한 독재체재를 구축한 것이다. 그래서 카다피를 리비아의 대통령이라고 칭하는 자료도 많은데 카디피의 공식적인 호칭은 '국가원수'이다.
2. 철저한 반미, 사회주의, 범아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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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오른쪽이 카다피. |
그는 집권 이후 철저한 반미를 외치며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고 1970년에는 '이탈리아 압제자들이 리비아 인민에게서 훔친 부를 되찾기 위해' 식민지 시절부터 거주하던 이탈리아인들의 재산을 몰수해 국고로 환속시킨 후 2만 명에 달했던 이들을 강제추방시켰다.[2] 외국의 석유 메이저 또한 모두 내쫓고 석유를 국유화해 그 이익을 국가가 차지하고 그 부를 사회복지시설에 돌리거나 교육 예산 등은 전용시키는 방식으로 재분배시켰으며 1973년에 다른 아랍국가들과 연합하여 석유값 인상을 주도하면서 리비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는데 이게 얼마나 대박이었냐면 한때 리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뛰어넘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국민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은것은 당연지사였다.[3] 자신의 정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완전무결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일대 혁명을 주도했는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 금지, 아랍사회주의에 따른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구상하였지만, 경쟁력 있는 야당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민주주의제도가 정착하지는 못하였다.
나세르에게 영향을 받아 범아랍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웠다.[4] 이 분야에서 카다피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와 함께 범아랍주의 4인방으로 꼽힌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자로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지역의 중동 전체를 아우르는 이슬람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주장을 했다. 그 결과로 1972년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을 구성에 합의, 그 해 7월 공식 출범했지만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을 추진하면서 1977년 7월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열불이 나서인지 한 때 혁명 동지였던 이집트 국경에 상당한 규모로 공습을 가했지만 이집트군의 역습으로 되려 리비아군이 압도적으로 패했다. 이후 이집트와의 관계는 한동안 금이 가고 만다.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당시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도 그리 반기지 않아서 합방은 무산되고 말았다.
제3세계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짐바브웨, 우간다, 말리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에 대한 철권 독재, 테러, 핵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유럽, 미국, 이스라엘에 대한 각종 초강경 테러를 지원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IRA를 지원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88년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여객기가 폭발해 27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팬암 103편 폭파 사건을 들 수 있다. 카다피가 테러의 용의자를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자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를 '테러리스트', '미친 개'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5] 경제제재를 시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이미 막대한 재원을 확보한 그를 막지는 못했다.
카다피의 이러한 행각에 빡친 레이건 대통령과 미국은 리비아의 테러 지원을 근절하기 위한 경고로 리비아를 공습했고, 이때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가 파괴되었으며 카다피의 관저도 쑥밭이 되었다. 그 결과 그의 양녀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리비아 공습 문서 참조. 단, 양녀 사망에 관해서는 단순히 선전용 조작이라는 말도 있다. #기사 참고. 또한 1980년 발생한 이타비아 항공 870편 추락 사건도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카다피의 전용기를 프랑스 공군이 격추하려다가 지나가던 이탈리아 여객기를 오인격추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그 영향으로 미국의 공격을 받거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랍계, 좌익계 테러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잠시 데꿀멍하기도 했다. 이때 데꿀멍한 것은 카다피 뿐만이 아니라 잡다한 테러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친 소련주의를 강화하면서 러시아제 무기를 많이 도입했다. 소련 해체후에도 철저한 친러성향을 보여 러시아와 굉장히 친했다. 물론 이때문에 미국에게 더욱 찍혀서 더 강한 경제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이 당시 우라늄이 가득한 지역을 두고 이웃 차드와 영토분쟁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되려 차드군에게 밀린 바 있다. 이른바 토요타 전쟁. 그래서 차드에 대해선 직접적인 무력 간섭을 삼가는 대신 흑인계 앙헬 족과 백인 및 아랍계 혼혈에 가까운 투아레그(Tuareg)족의 무장을 서로 지원하여 차드를 내전 상태로 만든 것에 다른 미국 및 유럽 나라들과 같이 기여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저유가와 계속된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로 인해서 1990년대에는 조용히 지내며 기존의 탄탄한 복지제도를 유지하는데 급급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하고도 관계를 많이 확장했는데, 특히나 대수로 공사를 통한 한국 기업들의 반사이익이 상당히 컸다. 집권 시기 카다피가 상대적으로 쌓아올린 것은 많았기 때문에 그나마 평타는 쳤지만 어쨌든 물가상승률이 상당했기 때문에 소득수준이 침체되어 당시 리비아의 경제상황이 썩 좋은것은 아니었고 2002년에는 일시적이나마 1인당 국민소득이 3700달러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에 마구 적의를 뿜고 있을 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은 자위권 행사"라고 미국을 옹호하는 등 데꿀멍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어 부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2003년 공개적으로 반미정책 중단과 함께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자진폐기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사실상 GG 선언. 그리고 2004년 팬암기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도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줬다. 2009년 기준으로 리비아의 1인당 GDP는 15,000에서 17,000불까지 상승했으며, 전기와 수도 공과금은 모두 무료였다.[6] 또한 2008년에는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7]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도 받아들였으며, 2009년에는 추방한 이탈리아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리비아로 초대하기도 했다. #
그리고 반서방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지중해권 국가와는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였다. 왜냐하면 유럽으로 넘어가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카다피가 두들겨 잡아줬기 때문이다.[8] 유럽 국가 입장에서는 세계적 비난도 있고 국내 여론도 고려해야 하므로 속절없이 받아줘야 했는데 카다피가 악당을 자처해서 잡히는 족족 때려잡아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경제적 지원과 교류를 하면서 윈윈정책을 취하는 입장이었다.[9] 이러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균형은 잡겠거니 싶었는데...
"잘 들어라, 나토 국민들아!
너희는 장벽에 폭격을 퍼붓고 있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으로 이주할 길을 막고,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들을 막고 있는 그 장벽에 말이다. 그 벽은 리비아다. 너희 바보들이 그 벽을 허물고 있다.
너희는 아프리카에서 밀려올 수많은 이민자들로 지옥의 불을 맛볼 것이다. 바로 너희가 알카에다를 지원한 것이다.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지금도 허풍이 아니다.
너희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 사살되기 5개월 전 카다피 -
3. 정권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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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카다피. |
나는 무력으로 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내가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한다.
- 1975년 5월 벵가지 Gharyounis(Garyounis) 대학에서 한 카다피의 연설
- 1975년 5월 벵가지 Gharyounis(Garyounis) 대학에서 한 카다피의 연설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튀니지 혁명이 일어나면서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불어닥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돌아가게 된다. 초기에는 작은 시위였고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불타오르기 시작해 2011 이집트 혁명 즈음엔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카다피를 타도하자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카다피는 2월 22일에 알-자마히리야 TV를 통해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10] 물러나거나 줄 수도 없다. 나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리비아 민주화 운동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갔다.[11]
2월 23일에 나온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의하면 측근에게 ' 리비아를 되찾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리비아를 소말리아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이건... 이어 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진짜로 제1차 리비아 내전이 발생했다. 리비아 전역에서 유혈충돌
TV 연설에서는 "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57년이나 왕위에 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나 " 알 카에다가 시위대에 마약을 주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마약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망언을 시전하면서 정신 상태마저 의심받고 있는 처지에 몰렸다. #[12]
3월 20일 시작된 다국적 연합군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총력으로 맞서겠다고 큰소리 쳐놓곤 부랴부랴 유엔과 버락 오바마에게 공격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
2011년 7월 2일 뉴스에서 "나토 공습 중단 안하면 유럽 공격"할 것이라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지지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육성 녹음을 방송했다고 한다. #
그러나 전세는 나토군의 지원을 받은 반군 측에게 유리해졌고, 한국 시각으로 2011년 8월 22일 수도 트리폴리가 반군에 의해 함락되고 아들들도 반군에게 붙잡혔다.
한편 현지 시각으로 8월 29일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인 무하마드와 한니발이 알제리로 도망쳤는데 여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닌 중간 경유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기도 했다.[13]
그리고 9월 7일 리비아 반군이 카다피 일당을 포위했다. #
4. 몰락과 사망
트리폴리가 함락된 2011년 8월 21일, 카다피는 측근과 경호원 10여명과 함께 트리폴리에서 남동쪽으로 80km 떨어진 산악지대 타루나와 카다피 지지세력이 포진한 바니 왈리드를 거쳐 고향인 시르테로 도피했다. 무타심이 시르테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마지막 도피처라는 이유로 도피할 것을 주장했다. 카다피의 사촌으로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카다피와 함께 있었다.이브라힘을 비롯한 일부 측근들은 카다피에게 해외 망명을 건의했지만,[14] 카다피는 "여기가 내 나라다. 나는 1977년에 국민들에게 권력을 넘겨줬다."고 말하며 반대했다. 실제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고 카다피가 도피 생활 중 반군의 공격으로 사살되기 전까지 당시 여러 국제언론과 중동 정세 전문가들 사이에선 카다피가 해외 다른 나라들로 망명을 하게 될 경우 망명이 예상되는 후보국가들로 알제리, 튀니지, 차드,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기니비사우, 에리트레아, 앙골라 등 리비아와 이웃한 아프리카 주변국들이거나 카다피 정권 시기 리비아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프리카, 중남미,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15]이 거론된 바 있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고립되었다. 카다피 일행은 빈집을 피난처로 삼았고 NATO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2, 3일 마다 위치를 옮겼다. 내전의 영향으로 컴퓨터가 사라져 인터넷을 쓸 수도 없고, 전기마저도 자주 끊어졌으며 물도 없었다.
카다피 지지자들은 카다피가 최전선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고 선전했으나, 카다피는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며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주로 코란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외부와는 위성전화로만 연락을 했다. 카다피는 시리아 방송에 결사 항전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위성전화는 NATO의 정보망에 파악되어 카다피의 위치는 추적되었다.[16]
NATO의 공습으로 카다피가 은신해있던 집에 포탄이 떨어졌으며, 경호원 3명이 부상당했다. 요리사가 다친 이후로 카다피 일행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민가에서 구한 파스타와 쌀 정도 뿐이었다. 이브라힘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카다피는 도피처로 사용하던 집에 왜 전기가 안나오느냐, 물이 왜 나오지 않느냐며 측근들에게 불평하는 등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민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카다피는 20일 은신처를 옮기려 했다. 자신이 태어난 생가 근처의 주택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초에는 40대 이상의 차량을 이용해서 오전 3시에 빠져나가려 했으나, 친위대의 집합이 늦어져 오전 8시가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카다피는 토요타 랜드 크루저에 이브라힘과 경호대장, 친척 한 명, 운전사와 함께 탔다. 카다피는 이동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카다피가 출발하고 30분이 지나자 NATO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카다피의 몰락을 풍자하는 포스터. |
10월 20일(현지 시간), 농성을 하고 있던 고향 시르테에서 도주하다가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아침에 나토에서는 대규모 차량이 운집하는 상황을 정찰중이던 영국군의 토네이도 전투기가 포착하고 미군에 알렸다. 카다피는 이때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도시 중심부를 탈출하고 있었다. 카다피를 태운 차는 호송차 100여대와 함께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토는 일단 카다피가 타고 있는지 확신하지는 못 했지만 여러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상황이 카다피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군은 시칠리아 기지에서 무인기를 출격시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해 차량 행렬을 공격했고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도 출동하여 차량 행렬을 폭격했다. 이 공습으로 100여대의 호송 차량 중 기관총을 실은 트럭 15대가 파괴됐고 카다피 친위대 50여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카다피의 측근 이브라힘은 이 공습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시민군에 생포되고 병원에서 깨어났다.
카다피와 친위대원들은 차량에 내려 도로 밑의 배수관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하수구에 숨어있던 카다피에게 시민군들이 추격했고 결국 생포되고 만다.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근데 다음 보도에서는 머리에 총상을 입어 죽었다고 나왔다. 미국 정부는 사실확인이 되지 않았다며 사망을 부정했으나 이후 사망한 것으로 최종확인했다. CNN 속보를 통해 시르테에 있던 리비아 시민군 병사가 휴대폰으로 찍은 카다피 시신 동영상까지 보도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뭐가 잘못됐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와 "쏘지 마시오." # 자신이 전범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알 아라비아 방송에 나온 카다피 체포 영상을 보면 발견 당시 두 다리가 절단에 가까운 심각한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체포 당시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고 의식이 있었기에 시민군들이 부축해서 차에 그를 실었지만 부상이 심한 탓에 후송 도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흥분한 과도정부군들이 체포한 카다피를 구타하는데 누군가가 머리를 향해 9mm 권총을 발사하였고 총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그리고 구타당하는 카다피의 항문에 이물질을 삽입하려는 병사가 목격되었다. 해당 병사는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죽어가는 카다피의 엉덩이에 이물질을 집요하게 삽입하려다가 시민군 장교에게 불호령을 듣고서야 포기하였다. 이 행위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국가에서 사람을 모욕하려고 하는 행동인데 엉덩이에 이물질을 넣어 죽는 순간까지도 여자같은 놈이라는 능욕이자 생전의 명예도 없애는 행위이다. 주로 마피아나 갱스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시체의 항문에 이물질을 꽂아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방식으로 쓰인다.
10월 22일, 카다피의 사망 원인은 복부에 입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공식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시민군들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다. 차우셰스쿠의 최후를 연상시킨다.[17]
카다피의 시체는 매장된다고 발표되었으나 매장 전에 미스라타에 위치힌 정육점의 냉동창고로 이동하여 일반인들에게 전시되었다. 사망한 독재자를 촬영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정육점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25일에 카다피의 시체가 매장되었다. 위치는 기밀로 처리된데다 사막 한가운데라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그렇게 본인이 주장하던 대로 리비아에 뼈를 묻었으니 아주 잘 된 일이라며 힐난하였다.
하지만 막상 신생 리비아 정부가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간의 내분에 빠지면서 내전이 재발되었고, 그 틈을 타서 다에쉬가 리비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일까지 벌어진 덕택에 부분적으로는 재평가를 받는 추세에 있다. 2017년 이후로 다에쉬가 격퇴되고 있는 중이지만 그 사이에 벌어진 뻘짓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어마어마했었고 내전으로 인한 인프라 파괴와 치안악화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정상급이었던 리비아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급속히 떨어진지라 신생 리비아 정부가 욕을 쳐먹고 있는 건 여전하다. 현재는 리비아에서 카다피의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와 칼리파 하프타르[18] 리비아 국민군 사령관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1]
노화가 진행된 60대의 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소유하였다. 20대때와 늙은 후의 외모의 차이가 큰 편.
[2]
이는 1970년 7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며, 10월 7일은 '복수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자리잡았다. 2004년 이탈리아와의 조약으로 취소되는 듯 싶었다가 2005년 이후 다시 부활했고, 이탈리아와 관계를 개선한 후에는 '우정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3]
이 부분이 미국과 틀어지고 현재 중동이 석유로 한 가닥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오일쇼크의 가장 큰 이유인것이다. 카다피가 중동권에서 먹어줬던 이유기도 하고. 사실 후세인도 1980년대 초까지는 이라크를 근대화시킨 인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능력은 있었다.
[4]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5]
당시 헐리우드에서도
백 투 더 퓨쳐에서 리비아가 핵무장을 노리는 테러국가로 나온 바 있다. 당대에도 대놓고 이 정도로 대중매체에서 악당 취급받는 국가는
리썰 웨폰에서 외교관들이 마약 밀매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 정도밖에 없었다.
[6]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2만 불을 조금 넘긴 수준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된다.
[7]
물론 말로만 사과했을 뿐이다.
이탈리아에서 이에 대하여 반발도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의 땅과 여러가지를 거저 먹고 남은 것들이라 예전처럼 돌려줄 일은 없어보인다.
[8]
왜냐면 아프리카에서 건너오는 난민이 리비아에게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9]
그리고 카다피가 망하자 난민 문제가 현실화되어 현재도 물밀듯이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에 유입되고 있어 유럽으로선 골치아픈 상황이다.
[10]
맞는 말이긴 하다. 1979년 이후로 공식적인 국가원수는 아니라... 하지만 여전히 실권은 혁명지도자인 카다피에게 있었다.
[11]
카다피는 심지어 이웃국가인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벤 알리 정권과
무바라크 정권이 시민혁명으로 축출되자 튀니지와 이집트는 벤 알리와 무바라크가 통치하는 게 더 나았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었다.
[12]
영국은 입헌군주제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않았고 왕실의 인기가 떨어지거나 특권 문제가 떠오르면 과감히 포기하거나 자세를 낮추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했을 당시 국왕은 총리가 의회 해산 없이 사임하게 되면 해당 당에서 총리를 지명할 수 있었는데 헤럴드 맥밀런 후임이었던 알렉 더글러스흄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불만이 터져나오자 해당 특권을 포기하였고 1992년 윈저 궁 대화재 때 어마어마한 복구 비용에 여론이 들끓자 왕실의 면세 특권을 포기하고 왕실의 재산과 관광 수입으로 메꾸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총리에게 웬만해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많은 충돌을 빚었던 마거릿 대처 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굉장히 혐오하며 멈추고 싶어했지만 그건 남아프리카의 문제라며 간섭하면 안된다는 대처의 주장을 수용했고
포클랜드 전쟁 역시 불만족스럽다라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결국 승인했다. 또한 매일 아침 '오늘은 우리 총리께서는 또 어떻게 내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는걸까'라며 비꼬았던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여왕이 어떠한 정치적 문제에서 총리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사례는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를 국빈이라고 초대해놨더니 도청 당할 것 같다고 버킹엄 궁전 밖에서 통화를 하지 않나 여왕 면전에서 악수하고 손을 소독하는 행위를 하는 등 온갖 무례를 저지르고 난 이후 저런 놈 다시는 초대하지 말라고 한 것이 유일하다.
[13]
기사 참조.
[14]
이라크의 전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경우엔 이란과 쿠웨이트 등 이웃나라들을 상대로 국지적 침략전쟁들을 도발하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를 비롯해 과거 후세인 정권 치하의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던 중동 이웃국가들인 이란과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등으로부터 아예 공공의 적, 불구대천의 원수 자체로 낙인 찍혀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정권이 붕괴될때도 망명을 받아주던 나라가 없어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이라크 국내를 떠돌다 미군과 신생 이라크 정부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하고 말았으나, 카다피는 테러를 지원하고 주변국인 이집트와 차드를 상대로 전쟁 도발을 벌이기도 하는 등 미국과 중동 아랍 국가들에게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히긴 했어도 여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펼치며 정치적 우군으로 만들던 전력이 있었기에 해외 망명을 시도했다면 생존할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이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2011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리비아 내전에 개입해 카다피 정권을 공격하자 서방 군대의 리비아 공격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5]
기니비사우와 앙골라, 에리트레아는 1970, 80년대 냉전 시기 포르투갈과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을 당시 카다피가 이들 나라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주기도 했으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 과거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있다 유고 내전으로 분리독립한 동유럽의 국가들 역시 냉전시기 카다피가 유고슬라비아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유고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들 국가들과 항공 직항편을 유지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편이었다.
[16]
이 때문에 하마스,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집단들은 절대 인터넷,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차량을 자주 바꿔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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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프리카의 차우셰스쿠"로 비유받기도 했다. 그런데 카다피나 차우셰스쿠나 축출 이후에도 나라 상황이 여러 문제로 인해 별로 나아진 게 없으면서 재평가 여론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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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한때 카다피에게 팽당해 망명까지 갔다가 리비아 국민군의 지도자격으로 복귀하여 카다피 사살에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