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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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의도왕(宜都王)
모용봉 | 慕容鳳 |
|
시호 | 없음 |
작위 | 의도왕(宜都王) |
성 | 모용(慕容) |
휘 | 봉(鳳) |
자 | 도상(道翔) |
생몰 | 불명 |
출신 |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
부친 | 모용환(慕容桓) |
형제자매 | 3남 중 장남 |
최종직책 | 기주자사(冀州刺史) |
[clearfix]
1. 개요
후연의 황족.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아들이자,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동생인 의도왕 모용환의 장남. 동생으로는 서연의 4대 황제 모용의와 북위의 조군간공(趙郡簡公) 모용영(慕容榮)이 있다.2. 생애
아버지 모용환은 궁실을 수리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당시 여덟 살이던 모용봉을 안고다니면서 궁전을 구경시켰다. 모용환이 모용봉에게 물었다."이곳이 좋으냐, 싫으냐?"
그러자 모용봉은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이곳은 본래 석가(石家) 제왕이 쓰던 옛 궁전입니다. 지금 왕께서 이를 수리하신들 무엇이 좋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백 가지의 맛을 즐기시지만, 밖에는 초가집의 백성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 어린 아이가 대왕의 취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에 모용환은 무척 감탄하며 모용봉을 칭찬하였다.건희 11년(370년) 11월, 모용환이 용성(龍城)을 진수하고 있을 때, 수도 업(鄴)이 함락되면서 전연이 멸망하였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郭慶)이 진군하여 용성에 당도하자, 모용환은 발해왕 모용량(慕容亮)을 죽여 그 무리를 흡수하고, 요동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요동태수 한조(韓稠)가 이미 진나라에 투항하여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모용환은 공성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이내 곽경이 보낸 부장 주억(朱嶷)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도망치다가 진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죽었다. 11살이던 모용봉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당시에는 울기만 하다가 나중에 어머니에게 말했다.
"옛날
장량(張良)이 선비를 길러 진왕(秦王)을 치고 군주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선왕의 일을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은밀히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뜻을 품고, 선비족과 정령족 중 기개와 능력있는 자들과 교류하며 그를 따르게 만들었다. 이를 본
권익이 모용봉에게 말했다."자네는 지금 재능과 명망으로 자립하려고 하나, 자네 아버지처럼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는 행동을 따라서는 안 된다."
이에 모용봉이 낯빛을 바꾸고 답했다."선왕께서는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신하의 절개입니다. 군후(君侯)의 말씀이 어찌 장래의 아름다움을 장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권익 또한 낯빛을 고치고 모용봉에게 사과한 뒤, 천왕
부견을 알현해 간했다."모용봉은 강개하고 재기가 있으나, 늑대 같은 야심을 품고 있어 끝내 남을 위해 일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일찍 제거하여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민족을 포용하려던 부견의 정책 방향에 어긋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 이후 진나라가 쇠락하자, 정령족 적빈(翟斌)이 하남(河南)에서 거병하여 낙양을 공격을 모의하였다. 이때 모용봉이 옛 연나라의 신하였던 왕등(王騰), 단연(段延) 등과 함께 적빈에게 귀부하니, 낙양의 평원공 부휘가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진나라의 장수 진군장군 모당을 파견해 정령족을 쳤다. 이에 모용봉이 나서며 적빈에게 말했다.
"이 모용봉은 이제 선왕의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부디 장군으로 삼아 저 저족(氐)의 노예놈을 참수하게 해주십시오."
적빈이 이를 승낙하고 모용봉에게 정령족 병사를 주어 모당을 요격케 하였다. 모용봉은 진격하여 모당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모당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부휘는 황급히 능운대(陵雲臺)에서 모용봉과 맞섰으나 또 패하여 물러갔다.건원 20년(384년) 정월, 모용수가 황하를 건너 내려오자, 모용봉, 왕등, 단연이 모두 적빈에게 모용수를 맹주로 추대할 것을 권하니, 적빈이 이에 따랐다.
연원 원년(384년) 정월, 모용수가 연왕(燕王)을 자칭해 마침내 후연을 건국하고, 모용봉을 건책장군으로 삼았다. 모용봉은 전투에 나설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용맹히 싸웠으며, 전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257번이나 승리를 거두어, 시기는 불명이나 관군장군으로 승진하고, 전연 시절 아버지의 작위였던 의도왕(宜都王)에 봉해졌다. 성무제 모용수는 그에게 항상 이렇게 경고하였다.
"이제 대업이 막 이루어졌으니, 너는 먼저 스스로를 아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날카로운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거기대장군•범양왕
모용덕의 부장으로 배속시켰다.건흥 9년(394년) 8월, 서연을 멸망시킨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봉을 옹주(雍州) 자사로 삼아 장자(長子)를 진수케 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5월, 성무제 모용수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혜민제 모용보는 사촌동생인 모용봉을 기주(冀州) 자사로 옮겨 신도(信都)를 지키게 하였는데, 모용봉의 은혜와 위엄이 널리 퍼져 백성들이 그를 잘 따랐다.
영강 원년(396년) 11월, 북위의 위왕 탁발규가 관군장군 왕건(王建)과 좌장군 이율(李栗)을 보내 신도를 공략케 하였다. 모용봉은 성을 굳게 지켜 왕건과 이율은 60여 일간 공성하여도 떨어뜨릴 수 없었고, 많은 위나라 병사들만 목숨을 잃었다.
영강 2년(397년) 정월 22일[1], 위왕 탁발규가 친히 신도에 이르러 공성을 지휘하였다. 탁발규가 온지 이틀만에 모용봉은 공세를 버티지 못하여 성벽을 넘어서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으로 달아났고, 대장을 잃은 신도성은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
397년 정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