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9개월 후,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기. |
Entführung des Flugzeugs „Landshut“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colcolor=#000000,#dcdcdc> 발생일 | 1977년 10월 13~18일 |
유형 | 하이재킹 |
발생 위치 |
지중해 상공(납치) 모가디슈 국제공항(진압) |
기종 | 보잉 737-230C |
운영사 | 루프트한자 |
기체 등록번호 | D-ABCE[1] |
출발지 | 팔마 데 마요르카 국제공항 |
도착지 | 프랑크푸르트 공항 |
탑승인원 | 승객: 90명[A] |
승무원: 5명 | |
사망자 | 범인: 3명 |
승무원: 1명 | |
생존자 | 승객: 87명[A] |
승무원: 4명 |
[clearfix]
1. 개요
사건의 전개도
스페인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서독 프랑크푸르트로 가던 루프트한자의 여객기가 극좌 테러단체 ' 바더 마인호프'에 의해 납치된 사건. 통칭 '란츠후트 호 사건'(Die Entführung des Landshut)이라고 불린다.
2. 사고 진행
2.1. 납치와 모가디슈까지의 여정
1977년 10월 13일 오전 11시 팔마 데 마요르카를 이륙한 루프트한자 181편은 지중해 상공을 비행 중 서독의 극좌 테러 단체 ' 바더 마인호프'와 팔레스타인의 '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이 연합한 납치범 4명에 의해 납치당했다.납치범은 키프로스의 라르나카로 갈 것을 명령했으나 연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181편은 이탈리아 로마의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 착륙했는데 그곳에서 납치범들은 서독에 수감된 10명의 RAF 대원 석방, 튀르키예에 수감된 2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석방, 1,5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급유를 마친 181편은 로마를 떠나 라르나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PLO의 대표가 인질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81편은 라르나카를 이륙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하기 시작했으나 베이루트 국제공항은 폐쇄된 상태였고 181편은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향했지만 이곳에서도 착륙을 거부당했다. 181편은 요르단 암만, 이라크 바그다드,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티에 착륙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고 연료가 바닥날 즈음 겨우 바레인 마나마에 착륙했다. 급유를 받은 181편은 이번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무단으로 착륙해 다시 급유를 받고 오만 살랄라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착륙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연료가 부족해진 181편은 폐쇄된 남예멘의 아덴 국제공항 옆의 황무지에 불시착했다. 이곳에서 위르겐 슈만 기장은 기체 밖에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급유를 마친 181편은 부기장의 조종하에 소말리아 모가디슈를 향하기 시작했다.
2.2. 마법의 불꽃 작전
모가디슈에 착륙한 181편은 이전의 비행들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어 추가적인 비행이 불가능했는데 이곳에서 납치범과 서독 정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테러범들은 사살한 슈만 기장의 시신을 기체 밖으로 던지면서 17일 16시까지 최후통첩이라며 요구사항의 시한을 못박았고 서독 정부는 시간을 끌면서 테러범들로부터 18일 오전 2시 30분까지 시한을 미루는 데 성공했다.10월 18일 2시 7분 지상 지휘부가 테러범과 연락을 취하는 가운데 소말리아군이 범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100m 전방에서 화재를 냈는데 테러범들은 화재를 보고 조종실로 몰려들었다. 이 틈을 타 베게너의 인솔 하에 GSG 9 대원들은 여객기로 접근했다. 조종석 뒤쪽 출입구와 비행기의 맨 뒤쪽 출입구에 붙여 놓은 플라스틱 폭탄을 터뜨렸고 GSG 9 대원들은 뜯겨나간 승강구를 통해[4] 돌입했다. 작전 개시 5분 만에 GSG 9 대원들은 범인 모두를 제압하고 승객들을 기체 밖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승객 3명 경상, 범인 3명 사살이었고 범인 1명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3. 사고 이후
진압 작전 이후 서독-소말리아 관계는 크개 개선되었다. 루프트한자는 소말리 항공의 비행기에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소말리 항공을 취항시켰고 서독 정부는 소말리아에 200만 달러를 대출해 주었다.마법의 불꽃 작전이 성공하고 인질들이 구출된 그날 밤 슈탐하임 교도소 1급 보안구역에 수감되어 있던 바더 마인호프의 지도자 안드레아스 바더, 얀카를 라스페가 권총으로 사망하고 구드룬 엔슬린은 1976년에 사망한 울리케 마인호프처럼 목을 맨 채 발견되었으며 이름가르트 묄러는 칼에 4군데를 찔린 채 중환자실로 이송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독 정부는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들을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당시 바더 마인호프는 독일 경제인연합회장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한 상태였는데 이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슐라이어를 살해해 내다버리는 보복 테러가 일어났다. 독일의 가을 항목 참조.
납치되었던 D-ABCE는 여러 항공사를 거치면서 화물기가 되었다가 현재는 전시를 위해 도르니에 박물관에서 복원을 진행 중이다.
4. 기타
이 사건 이후 MP5가 군경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진압 작전에 동참했던 SAS는 GSG 9이 사용하던 MP5를 도입해 1980년의 님로드 작전에서 큰 활약을 남겼다.
[1]
기체명 Landshut
[A]
납치범 포함
[A]
[4]
원래는 섬광탄 투척 후 돌입할 계획이었으나 다른 비행기에서 훈련 중 섬광탄을 사용했더니 섬광탄이 터진 비행기 바닥이 시꺼멓게 그을리고 불똥이 튀는 걸 보고 실제 작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비행기 바닥은 승객들의 편안함을 위해 모직물이나 천을 까는데 혹여 여기에 불이라도 붙거나 불이 붙지 않더라도 그을려 연기가 나면 구출작전에 매우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