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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3:19:28

레알 마드리드 CF/무뇨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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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초대~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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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1994
초대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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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카르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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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요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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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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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베라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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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퀴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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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헤르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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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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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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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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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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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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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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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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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알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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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스카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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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이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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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페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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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비야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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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카르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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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무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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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카르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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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플레이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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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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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뇨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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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몰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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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밀랴니치
( 밀랴니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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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몰로니
( 몰로니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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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보슈코브
( 보슈코브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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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니
( 몰로니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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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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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 스테파노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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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아마로
( 아마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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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몰로니
( 몰로니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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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베인하커르
( 베인하커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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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토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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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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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안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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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베인하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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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플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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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델 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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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알 마드리드 CF 감독(41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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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
무뇨스 체제
[[미겔 무뇨스|
파일:15529226876173.jpg
]]
제25대 감독
미겔 무뇨스
<colbgcolor=#fcaf17><colcolor=#fff> 감독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미겔 무뇨스 / 제25대 감독
회장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제11대 회장 (1943~1978)
주장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후아니토 알론소 / 제20대 주장 (1958~1960)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호세 마리아 사라가 / 제21대 주장 (1960~1962)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프란시스코 헨토 / 제22대 주장 (1962~1971)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이그나시오 소코 / 제23대 주장 (1971~1974)
계약 기간 1960년 4월 13일 ~ 1974년 1월 15일
(13년 9개월 / 5026일)
계약 종료 (성적 부진으로 경질)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상대 전술에 대응하는 유연한 축구
┗ 4-2-4 포메이션
┗ 공수 밸런스 중시
┗ 강한 압박과 방어적 조직
┗ 빠른 역습을 통한 기회 창출
┗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기반으로 접근
역대 전적 595경기 352승 125무 118패 (승률 59.16%)
1194득점 553실점
우승 경력 1959-60 유러피언 컵 (우승)
1960-61 ~ 1964-65 라리가 (우승)
1960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1961-62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1965-66 유러피언 컵 (우승)
1966-67 ~ 1968-69 라리가 (우승)
1969-70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1971-72 라리가 (우승)
14회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59-60 시즌3.2. 1960-61 시즌3.3. 1961-62 시즌3.4. 1962-63 시즌3.5. 1963-64 시즌3.6. 1964-65 시즌3.7. 1965-66 시즌3.8. 1966-67 시즌3.9. 1967-68 시즌3.10. 1968-69 시즌3.11. 1969-70 시즌3.12. 1970-71 시즌3.13. 1971-72 시즌3.14. 1972-73 시즌3.15. 1973-74 시즌
4. 득점 순위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5.2. 승패 기록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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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알 마드리드 CF의 제25대 감독 미겔 무뇨스 체제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감독 선임 과정

1958-59 시즌 레알을 이끌던 루이스 카르닐리아 감독이 병에 걸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시즌 도중 물러나자, 팀은 은퇴하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의 레전드 선수 출신인 미겔 무뇨스를 잠시 감독으로 선임했다. 무뇨스는 잠시 9경기를 지휘했다가 카르니글리아 감독이 다시 복귀하자 물러났고, 풀루스 울트라 감독을 맡으며 감독 경험을 길러나갔다.

그러다 1960년, 24대 감독 마누엘 플레이타스 유러피언 컵을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FC 바르셀로나에게 리그 1위를 내주자 레알은 플레이타스를 경질시켰다. 그리고 팀은 2군 감독 무뇨스를 1군 공식 감독으로 승격시켜 팀을 맡기게 되었다.

3. 연혁

3.1. 1959-60 시즌

무뇨스가 부임한 1960년 4월 13일 당시 라리가 29라운드가 끝난 상황이었고 레알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29라운드까지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지막 30라운드 UD 라스팔마스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바르셀로나와 46점 동률로 리그를 마무리했다.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진출 or 강등
1 바르셀로나 (C) 30 22 2 6 86 28 +58 46 유러피언 컵 진출
2 레알 마드리드 30 21 4 5 92 36 +56 46
이 상황에서 라리가 순위 결정 기준을 보면, 승점 → 맞대결 결과 → 득실차인데 이 시즌 리그 엘 클라시코에서는 양 팀이 모두 서로 1승을 거뒀다. 결국 득실차로 리그 순위를 결정하게 되었고, 레알보다 득실차가 2가 더 높은 바르셀로나가 매우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힌편, 유러피언 컵 4강에서는 FC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이는 유러피언 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펼쳐진 첫 엘 클라시코였다. 4월 15일 홈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멀티골과 페렌츠 푸스카스의 결승골로 3-1 승리를 거뒀고 5월 6일 2차전 원정에서는 1-3으로 패배한 리그와는 달리 푸스카스의 멀티골, 프란시스코 헨토의 결승골로 홈에서와 같이 3-1로 승리했다. 2경기 모두 레알이 승리하면서 합계 6-2로 5시즌 연속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바르셀로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 라슬로 쿠발라와의 갈등으로 이 두 경기에서 쿠발라를 출전시키지 않았는데, 두 경기에서 모두 패하고 결승 진출권을 레알에게 내주자 시즌이 끝나고 경질되었다.
파일:laquinta.jpg
레알 마드리드의 5번째 유러피언 컵
1960년 5월 18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맞붙었다. 레알은 선제골을 내줬으나 페렌츠 푸스카스가 4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3골을 넣어 7-3으로 승리했고, 전설의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 무뇨스 감독은 사상 처음으로 선수와 감독의 두 신분으로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라 퀸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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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컵 결승 이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에 진출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맞붙었고 20분 푸스카스가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이후 3골을 내리 헌납하며 1-3으로 패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코파 결승 이후 시즌이 종료되었고, 무뇨스 감독은 시즌 거의 막바지에 감독 경력이 미약한 상태로 레알이라는 거대한 팀을 맡았으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끄는 등 시즌을 잘 마무리시켰다.

3.2. 1960-61 시즌


미겔 무뇨스 감독은 지난 시즌을 잘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풀타임 시즌을 치르게 되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큰 영입과 방출이 없어 지난 시즌과 전력이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리그 개막 2달 전인 7월 3일, 1960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챔피언인 CA 페냐롤과 새로 창설된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만나게 되었고 몬테비데오로 원정을 떠났는데 아쉽게도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 4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 시작 3분 만에 2골을 기록하며 페냐롤을 강하게 몰아붙였고, 푸스카스의 멀티골과 디 스테파노, 헨토의 골이 연달아 터지며 5-1로 대승을 기록했다. 이번 승리로 레알은 인터컨티넨탈컵의 초대 우승 팀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1번째 인터컨티넨탈컵
그리고 리그 개막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에서 0-1로 패배하며 불안하게 리그를 시작했으나 이후 리그 26경기 무패, 23승 3무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로 리그 레이스를 질주했다. 11월 6일 홈에서 아틀레틱 클루브를 3-1로 이겼고, 12월 4일 캄프 누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가 각각 멀티골을 기록하며 5-3으로 승리했다. 12월 18일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원정에서는 5-0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전반기 리그의 좋은 흐름은 유러피언 컵에서 한 번 끊겼다.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 지난 시즌처럼 바르셀로나를 만났는데, 2전 전승을 거뒀던 지난 시즌과는 달리 고전했다. 1차전 홈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의 멀티골로 인해 2-2로 아쉬운 무승부를 했는데, 2차전 원정에서는 1-2로 패배하며 6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 도전에 실패하며 광탈하고 말았다. 유러피언 컵에서 예상치 못하게 조기에 탈락하자 팀은 리그-코파 도메스틱 더블을 노리게 되었다.

비록 유럽 대항전은 좋지 않게 마무리했으나 리그에서의 좋은 흐름은 후반기에도 이어졌고 1월 8일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는 3-1 승리를 거뒀다. 이후 17~18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 엘체 CF전에서 12골을 넣으며 2연승을 거뒀고, 발렌시아 CF, 세비야 FC, 그라나다 CF, 아틀레틱 클루브를 상대로 모두 클린시트를 기록해 리그를 완전히 제패했다. 11라운드부터 이어진 리그 연승 흐름은 25라운드에 우승을 확정지어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26라운드 레알 오비에도와 무승부를 거두며 15연승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홈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 3-2로 승리했다. 남은 리그 3경기에서는 1승 1무 1패로 마무리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2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는 무려 12점 차로[1] 팀 역사상 7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파일:430242_501930729952_21248036_n.jpg
3시즌 만에 차지한 라리가 트로피[2]
이제 레알에게 남은 대회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하나였다. 코파는 리그가 마무리 되고 5~6월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32강에서 만난 에르쿨레스 CF를 2경기 합계 11-0으로 완파해버렸고, 16강에서는 라싱 산탄데르를 만나 원정 무승부를 거뒀으나 홈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합계 4-1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로는 레알의 또다른 라이벌 아틀레틱 클루브였는데, 코파에서 매우 강한 빌바오였지만 레알의 강력한 스쿼드를 막아내지 못했고 레알이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합계 5-0으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를 만났는데, 홈에서 무려 7-1 대승을 거두며 결승행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6점 차라는 대승을 거뒀기에 2차전에서는 팀이 방심한 듯 보였고 원정에서 1-4로 대패했다. 그러나 합산 스코어 8-5로 우위를 점하며 2년 연속으로 코파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작년과 같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는데,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작년처럼 3골을 연달아 헌납했다. 그 후 82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추격골을 넣었으나 레알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2-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2년 연속 아틀레티코에서 코파 우승 트로피를 헌납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시즌이었다. 압도적인 승점 차와 레이스를 펼치며 지난 1957-58 시즌 이후 FC 바르셀로나에게 빼앗겼던 라리가의 왕좌는 탈환했으나 유러피언 컵에서 겨우 1라운드에 그치고 말았고, 코파에서는 다시 준우승을 하며 팀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코파 잔혹사가 이어지게 되었다.

3.3. 1961-62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유러피언컵 5연패의 공신 중 한 명인 엑토르 리알이 RCD 에스파뇰로 이적했고, 리알과 같이 활약했던 엔리케 마테오스가 세비야 FC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후 레알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호세 아라키스타인을 레알 소시에다드로부터 영입했다. 여름에 호세 아라키스타인과 안토니오 베탄코르트가 영입되어 뎁스가 넘치자, 지난 1958-59 시즌과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선발 출전했던 로헬리오 도밍게스가 겨울 이적시장에 CA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했다.

지난 시즌처럼 레알은 시작이 좋았다. 4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 원정에서 페렌츠 푸스카스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고, 다음 경기 FC 바르셀로나전에서는 푸스카스와 루이스 델 솔의 득점으로 2-0 완승을 거뒀다. 이어 6라운드 아틀레틱 클루브 원정과 7라운드 CD 테네리페 원정까지 승리하며 4경기 연속 클린시트 및 리그 8연승을 기록했다. 유러피언 컵에서도 1라운드에서 탈락한 지난 시즌과 달리 승승장구했다. 예선에서 버셔시 SC를 만나 합계 5-1로 승리했고 1라운드에서 볼트클루벤 1913에 합계 12-0 대승을 거두며 8강에 안착했다. 리그에서는 9라운드 레알 오비에도 원정을 패배하면서 좋았던 흐름이 한풀 꺾였지만, 이후 데르비 마드릴레뇨 승리를 포함해 5연승을 기록, 리그 14라운드까지 13승 1패로 다시 압도적인 리그 레이스를 펼쳤다.

하지만 12월에 접어들며 레알의 경기력은 매우 들쭉날쭉해졌다. 15라운드 발렌시아 CF 원정에서 패배한 이후 이후 16경기에서 고작 6번을 승리했고, 나머지 경기에서는 5무 5패를 기록하며 고작 승점 6점을 얻는데 그쳤다. 지난 시즌과 비교해보면 레알의 문제점은 득점력이었다. 1960-61 시즌에는 89득점을 기록했는데, 1961-62 시즌에는 58득점을 기록하며 무려 30골 가량이 줄어들었다. 이는 지난 시즌 리그에서 17골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한 루이스 델 솔을 포함해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득점이 모두 각각 10골 정도씩 하락해 발생한 결과였다. 그래도 전반기에 승점을 워낙에 잘 쌓아왔기에 레알은 2라운드부터 마지막 30라운드까지 꾸준히 1위를 유지했고, 2위 FC 바르셀로나와 승점 3점 차이로 2시즌 연속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한편 2월에 펼쳐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와 유러피언 컵에서는 모두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고 코파 32강에서는 산 세바스티안 FC를 만나 합계 8-1로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다.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세리에 A 챔피언 유벤투스 FC를 만났는데, 양 팀이 모두 서로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했다. 당시에는 승부차기가 없었기에 중립지인 파리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레알이 3-1로 승리하면서 4강에 진출했다.

1962년 3월 22일, 레알은 유러피언 컵 4강에서 스탕다르 리에주를 만났고 홈에서 펼쳐진 1차전을 4-0 대승으로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4월 12일, 2차전 원정에서도 2-0으로 승리하며 2시즌 만에 다시 결승에 진출했다. 한편 코파에서는 8강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홈에서 0-1로 패배하며 4강행에 적신호가 켜졌으나 원정에서 3-1로 승리하며 바르셀로나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파일:Beufica_tegen_Real_Madrid_5-3_spelers_van_Beufica,_Bestanddeelnr_913-8531.jpg
SL 벤피카의 주장 호세 아구아스와 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장 프란시스코 헨토
2시즌 만에 올라온 유러피언 컵 결승의 상대는 SL 벤피카였다. 2년 전 유러피언 컵 우승의 주역들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건재해있던 레알이었으나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노쇠한 상황이었기에 고전했고, 벤피카 역시 명장 벨라 구트만 감독의 지휘 아래 수준급의 선수들이 있었기에 경기는 매우 팽팽했다. 레알의 에이스 페렌츠 푸스카스가 전반전에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고 전반을 3-2로 마무리했으나 후반에 동점을 허용했고, 64분과 69분에 연이어 신예 에우제비우에 2골을 내주면서 3-5로 아쉽게 패배했다.

유러피언 컵 결승 이후 레알은 코파 우승에 집중했다. 4강에서는 레알 사라고사를 만났고,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합계 6-2로 3시즌 연속 코파 결승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승에서는 세비야 FC를 만났고, 세비야에게 선제골을 헌납했으나 푸스카스가 76분과 90분에 연이어 골을 터뜨리며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레알이 푸스카스의 결승골을 지켜내면서 드디어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레알의 15년 만의 코파 우승이었다.

1961-62 시즌 레알은 비록 리그 파괴력은 직전 시즌 대비 줄어들었지만 성과로는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즌 중 하나였다. 도메스틱 더블을 기록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했다. 다만 벤피카를 이기고 유러피언 컵까지 승리를 거뒀다면 세계 최초로 트레블 대업적을 세울 수 있었기에 벤피카전은 지난 1957-58 시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처럼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3.4. 1962-63 시즌


지난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보여주듯 레알은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가 진행되었고, 1962 FIFA 월드컵 칠레에서 스페인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자 스페인 축구 연맹이 외국인 선수 이적 금지 조치를 내리자 레알은 이에 따라 젊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세대 교체를 진행했다. CA 오사수나로부터 이그나시오 소코를,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로부터 아만시오 아마로를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이때 영입된 두 선수는 이후 'Yé-yé 마드리드'라고 불리는 레알의 스페니쉬 코어의 핵심이 되었다. 또한 루이스 델 솔, 카나리오, 그리고 주장을 맡았던 호세 마리아 사라가 등의 선수들이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델 솔의 경우 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유벤투스 FC로 판매되었다.

세대교체를 단행한 레알이지만 시즌 시작부터 좋지 못했다. 유러피언 컵 예선에서 RSC 안데를레흐트에게 합계 3-4로 패하며 탈락한 것이었고 이는 유럽을 제패했던 레알의 1차 전성기가 저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럽 대륙에서의 레알의 위세는 줄어들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여전히 최강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리그 첫 5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다시 한 번 엘 클라시코에서 승리를 거뒀다. 레알은 리그 5연승 이후 14라운드까지 9경기에서 4승 2무 3패를 기록하며 잠시 흔들렸으나 이후 리그에서 11연승을 거두며 다시 기세를 올렸다. 26라운드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 0-1로 패배하긴 했으나 남은 4경기에서 3승 1무를 거두며 9번째 리그 우승이자 리그 3연패에 성공했다.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32강에서 그라나다 CF, 16강에서 레반테 UD를 꺾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를 만났고, 양 팀에 각각 홈에서 승리하자 타이브레이커를 치르게 되었고 중립지 발렌시아에서 레알이 2-0으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지난 시즌처럼 레알 사라고사와 맞붙게 되었는데, 원정에서 0-4로 대패하며 결승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고 홈에서 레알은 3골을 넣는데 성공했으나 거기서 그치고 말았고 합계 3-4로 4강에서 탈락하며 시즌이 종료되었다.

3.5. 1963-64 시즌


무뇨스 감독은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팀을 재정비했다. 유스인 라몬 그로소를 1군으로 콜업했고, 페르난도 세레나를 기용하기 시작하면서 Yé-yé 마드리드 시대가 시작되었다. 직전 시즌과 이 시즌의 차이점은 시즌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수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1962-63 시즌에는 스쿼드 인원이 총 23명이었는데 이 시즌에는 30명으로 크게 늘었다. 외국인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던 1950~60년대 초반의 시대에서 스페니쉬 코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기에 많은 유스를 콜업해서 경기를 뛰게 하고, 잔존한 주축 선수들이 노쇠화해 풀시즌을 치르게 힘들어져 출전 시간이 분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라운드 아틀레틱 클루브전을 3-1 승리로 마무리해 시즌을 좋게 시작했으나 중간에 엘체 CF, RCD 에스파뇰, 레알 사라고사, 세비야 FC 등 상대적 약팀에게 발목을 잡히면서[3] 홈 엘클에서 4-0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4위에서 5위에 머무는데 그쳤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예선 라운드에서 레인저스 FC를 상대로 홈,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합계 7-0으로 16강에 진출했다. 11월에 치러진 유러피언 컵 16강에서는 FC 디나모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합계 8-4로 승리해 다시 2년 만에 8강에 진출했다.

후반기에는 전반기보다 성적과 흐름이 더 좋아졌다. 14라운드 레반테 UD전 3-0 대승을 시작으로 아틀레틱 클루브, 엘체 CF 등 상위권 팀들을 꺾으며 20라운드까지 7연승을 기록했다. 이런 좋은 분위기 속에 19라운드 코르도바 CF 원정에서 승리하면서 1위 자리를 탈환했고 잠시 23라운드에 패배하면서 2위로 내려왔으나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이후 30라운드까지 바르셀로나 원정 승리를 포함해 6승 1무를 거뒀고, 2위 바르셀로나와 4점 차이로 1위를 차지하며 리그 10번째 우승이자 리그 4연패를 기록했다.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1957-58 시즌 결승에서 만났던 AC 밀란을 만났다. 홈에서 펼쳐진 1차전, 레알을 상징하는 선수들인 아만시오 아마로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가 모두 득점하며 홈에서 4-1 대승을 거뒀다. 비록 원정에서 조제 알타피니와 지오바니 로데티에 실점하며 0-2로 패배했으나 합산 스코어에서 우위를 점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만났다. 1차전 원정에서는 디 스테파노와 펠로의 골이 나오며 1-2로 승리했고, 홈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는 소코, 펠로, 뮈예르, 푸스카스, 디 스테파노, 아만시오가 득점하며 6-0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이 2차전은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4강 단일 경기 최다 점수 차 경기로 남게 되었고, 레알은 2시즌 만에 다시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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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장 프란시스코 헨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주장 아르만도 피키
대망의 유러피언 컵 결승에는 에버튼 FC, AS 모나코 FC, FK 파르티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차례로 꺾고 올라온 '라 그란데 인테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였다. 당시 인테르는 명장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카테나치오를 바탕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강팀이었고 산드로 마촐라, 자친토 파케티, 아르만도 피키, 루이스 수아레스, 자이르 다 코스타, 마리오 코르소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즐비한 팀이었다.

한편 레알은 인테르에 못지 않은 선수단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축 선수들의 나이가 너무 많았고, 인테르만큼의 전술적 우위를 가져가지 못했다. 무뇨스 감독은 이 경기에서 치명적인 전술적 패착을 범했는데, 직전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자친토 파케티를 제어하기 위해 팀을 구성했으나 오히려 파케티는 공격적인 역할을 거의 가져가지 않았고, 인테르의 3골에 모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공간에 수아레스, 마촐라, 밀라니가 파고들면서 산드로 마촐라에게 2골을 내주며 1-3으로 패배했고 2년 전에 이어 다시 준우승을 기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경기를 끝으로 레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레알을 떠나게 되었다. 디 스테파노는 무뇨스와 몇 차례 충돌을 겪었고, 디 스테파노는 이 경기에서 무뇨스의 보수적인 전술과 자친토 파케티를 막으려는 집착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이 시즌 직전 작성된 선수단 보강 보고서에 디 스테파노가 방출해야 할 선수 목록에 올라가 있었고, 이로 인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과 크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논쟁은 매우 커서 디 스테파노의 베르나베우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결국 디 스테파노는 베르나베우 회장이 사망하기 전까지 마드리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디 스테파노가 11시즌 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팀을 떠나면서 1953년부터 이어져온 팀의 1차 전성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6. 1964-65 시즌


직전 시즌 팀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팀을 떠나는 충격이 있었지만 이후 또다른 전설이 되는 마누엘 산치스 피리를 영입하면서 팀의 전력을 보강했다.

이 시즌 레알은 강력한 수비진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라리가를 제패했다. 30경기에서 고작 18실점을 기록했고, 14경기에서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다만 시즌 초반에는 6~8라운드 무승을 기록하며 3위까지 내려앉았으나 9라운드와 10라운드에서 연이어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각각 4-1, 1-0으로 이기면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8라운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전 패배 이후 15라운드까지 남은 전반기 7경기에서 6승 1무를 거두며 1위를 유지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볼트클루벤 1909을 만났고 합계 9-2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FK 두클라 프라하를 만났고 2차전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뒀지만 1차전 홈에서 이미 아만시오 아마로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0 대승을 거둔 상황이었기에 무난하게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후반기, UD 라스팔마스 코르도바 CF에 발목을 잡히며 불안하게 시작했으나 19~21라운드에서 3연승을 거두며 다시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22라운드에 다시 사라고사에 패배하며 2위로 내려왔으나 이후 베티스를 상대로 6-1 대승을 거두고, 캄프 누 원정에서 2-1로 승리하면서 다시 1위로 올라왔다. 이후 우승 경쟁은 굉장히 치열했는데, 26라운드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2위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무뇨스 감독이 팀을 추스리고 이후 남은 리그 5경기를 모두 승리하면서 2위 아틀레티코와 4점 차이로 11번째 우승이자 사상 첫 라리가 5연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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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라리가 5연패를 달성한 1964-65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나머지 두 대회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지난 1961-62 시즌 자신들의 트레블을 막았던 SL 벤피카를 다시 만났는데, 원정에서 다시 에우제비우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1-5 대패를 거뒀다. 뒤집기에는 너무나 큰 격차였고 홈에서 승리했지만 1골 차에 그치면서 합계 3-6으로 8강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리그가 끝난 후인 1965년 4월 말부터 치러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의 여정도 험난했다. 32강에서 1군 팀도 아닌 리저브 팀 발렌시아 CF 메스타야를 만났는데, 1차전 원정에서 1-2로 패배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2군 팀에게 패배하는 치욕이 발생할 뻔 했지만 그래도 홈에서 6-0 대승을 거두며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6강에서는 당해 리그 준우승 팀 아틀레티코를 만났는데, 홈에서 1-0으로 승리했지만 원정에서 0-4 대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3.7. 1965-66 시즌


무뇨스 감독의 레알은 지난 몇 시즌 간 이어온 세대교체를 이번 시즌에도 진행했다. 그 중 핵심은 노쇠한 호세 산타마리아의 대체였는데, 마누엘 산치스가 주전으로 올라서고 페드로 데 펠리페를 영입하며 수비진 세대교체를 진행했다. 그리고 호세 루이스 벨로소, 안토니오 칼페, 라몬 테하다, 후안 아구에로, 페르난드 고이바에르츠, 하이메 블랑코 등을 영입하며 팀의 스쿼드를 강화했으며 펠로 등의 자원들을 방출시켰다.

이 시즌 레알은 지난 시즌들과 달리 전반기에 힘을 쓰지 못했다. 15경기 9승 2무 4패에 그쳤고, 발렌시아 CF 원정 0-3 대패를 비롯해 세비야 FC, 아틀레틱 클루브, FC 바르셀로나에 패배하며 4위까지 순위가 추락했다. 그 중 주목해야 할 점은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 승리하며 사라고사에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시즌간 꾸준히 승리해오던 엘 클라시코에서 패배했다는 점이다. 또한 전반기에 고작 23득점에 그쳐 공격력이 매우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동안 레알 득점의 대부분을 이끌었던 페렌츠 푸스카스가 나이가 들어 벤치로 밀리며 득점이 줄었고, 공격진의 주요 자원인 프란시스코 헨토 아만시오 아마로는 윙어라 20골 이상의 득점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국 득점을 책임져야 할 선수는 라몬 그로소였는데, 그로소 역시 시즌 15골, 리그 11골에 그치며 레알의 득점력은 이전 시즌들 대비 크게 줄어들었다.

후반기에 레알은 반등하기 시작했다. 16라운드부터 23라운드까지 8경기 무패를 기록했고 21라운드, 아틀레티코에 3-1로 승리하면서 시즌 첫 1위에 올라서게되었다. 이후 레알은 사라고사, 세비야, 빌바오, 라스팔마스를 잡으며 36라운드까지 1위를 유지했는데, 37라운드 캄프 누 원정에서 헨토의 선제골이 터졌음에도 후반에 연이어 2골을 헌납해 1-2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레알은 아틀레티코에 밀려 2위로 추락했고, 최종 라운드에 RCD 마요르카를 상대로 5-1 대승을 거뒀지만 단 1점 차이로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만약 레알이 엘 클라시코 혹은 다른 경기에서 한 번만 비겼더라면 승점 동률, 승자승 우위로 레알이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기에 매우 아쉬운 리그 레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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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즌 만에 차지한 6번째 유러피언 컵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라 섹스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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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유러피언 컵에서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킬마녹 FC, RSC 안데를레흐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FK 파르티잔을 연이어 꺾으며 6시즌 만에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다. 미겔 무뇨스 감독은 개인으로서 5번째, 감독으로는 2번째로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게 되었다. 이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은 레알과 무뇨스 감독뿐만 아니라 스페인에게도 큰 의미를 지녔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로 인해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끊긴 스페인이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와 이 시즌 유러피언 컵을 통해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스페인을 대표할 수 있었다. 이후 1968년, 마드리드 언론 협회 회장은 스페인이 외교적 폐쇄로부터 목 졸리고 억압받던 시기에 세 개의 대사관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레알 마드리드의 골이었다고 얘기했는데 이 발언으로 당시 레알의 6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이 스페인에게 주었던 느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코파에서는 32강에서 스포르팅 히혼을, 16강에서 재경기 끝에 CD 말라가를 꺾은 후 8강에서 베티스를 만났으나 원정에서 패하고 홈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합계 4-5로 탈락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레알의 전설 페렌츠 푸스카스가 8시즌 간의 여정을 마치고 팀을 떠나며 은퇴를 하게 되었고 '벽'이라고 일컫어지며 저승사자 군단의 수비 핵심을 맡았던 호세 산타마리아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1964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적 이후 저물어가던 저승사자 군단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3.8. 1966-67 시즌


페렌츠 푸스카스 호세 산타마리아를 떠나보낸 레알은 골키퍼 안드레스 훈케라, 수비수 페르난도 순수네기와 페르난도 로비라, 미드필더 차토 곤살레스, 후아니토를 영입했고 추가로 후안 아구에로, 이시드로, 에밀리오 모르욜론, 페드로 카사도, 피피 수아레스를 방출했다.

1966년 10월, 시즌 초반 레알은 유러피언 컵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196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챔피언과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상대는 지난 1960년과 같은 CA 페냐롤이었다. 지난번에는 5-1 대승을 거뒀지만, 이번에는 레알이 완전히 밀렸고 원정에서 알베르토 스펜서에게 멀티골을 내주면서 0-2로 패배했다. 그리고 2차전 홈에서도 페드로 로차와 스펜서에게 각각 실점하며 다시 패배했고, 합계 0-4로 준우승을 거두며 시즌 초반을 좋지 않게 시작했다.

직전 시즌 대비 리그에서의 수비력이 좋아지면서 레알은 전반기에 무패를 기록했다. 수비력이 좋아져서 패배는 면했지만 공격력은 여전히 경기당 2골을 넘지 못했고 초반 2연속 무승부를 기록하며 2~3위를 유지했다. 그러다 10라운드 엘 클라시코에서 간만에 승리하며 1위로 올라섰고, 그 이후 남은 경기에서 착실히 승점을 쌓으며 계속 리드 선두를 유지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16강에서 TSV 1860 뮌헨을 2경기 합계 3-2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967년 2월 15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의 유러피언 컵 8강 1차전 원정 경기에서 패배하며 4강행에 적신호가 켜졌고 2차전 홈에서까지 0-2로 패배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

리그에서는 20라운드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 다시 1-2로 패배하며 19경기 동안 이어오던 무패가 깨졌고, 25라운드 엘 클라시코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리그 1위 자리는 굳건했다. 그리고 28라운드 코르도바 CF전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12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어 빼앗긴 라리가의 왕좌를 다시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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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의 12번째 라리가 트로피
코파에서는 32강 힘나스티카 데 토레라베가를 합계 3-2로 꺾은 후 16강에 올랐고, 16강에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를 만났다. 리아소르 원정에서 2-3으로 패배했으나 홈에서 3-1로 승리하며 합계 5-4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발렌시아 CF와 맞붙었는데, 1차전 원정은 물론 2차전 홈에서도 패배하며 탈락했다. 결국 리그 우승 하나만을 건지며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3.9. 1967-68 시즌


이 시즌 레알은 이후 레알의 주전 키퍼로 성장하는 미겔 앙헬 곤살레스를 아틀레티코 오우렌세로부터 영입해 1군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2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 무려 9골을 때려박으며 9-1 대승을 거뒀으나 이후 2연무를 거두며 12라운드까지 2위를 유지했다. 그러다 13라운드, 폰테베드라 CF 원정에서 0-3 대패를 당하며 3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15라운드 말라가 CF전 대승을 시작으로 19라운드까지 5경기 전승을 거두면서 1위를 탈환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1라운드에 AFC 아약스를 만났는데, 이때 아약스에는 훗날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도 40경기 34골을 때려넣으며 네덜란드를 휩쓸던 요한 크루이프가 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레알은 1차전 원정에서 17분에 크루이프에 선제골을 헌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35분 피리가 동점골을 넣으며 경기의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추가 득점이 나오지 않으면서 레알은 어려운 네덜란드 원정에서 값진 무승부를 거두고 홈으로 돌아왔는데, 1965년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제정되었기에 레알의 16강 진출 확률은 더더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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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 레알의 2-1 승리를 이끈 프란시스코 헨토와 호세 루이스 벨로소
그리고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 프란시스코 헨토의 선제골이 터지며 앞서갔는데, 헹크 그루트에게 동점골을 내주며 경기는 연장으로 흘렀다. 그리고 연장 전반 9분, 레알의 호세 루이스 벨로소가 득점하며 레알이 2-1 승리를 거뒀고, 합산 3-2로 아슬아슬하게 크루이프의 아약스를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유러피언 컵 16강에서는 덴마크의 흐비도우레 IF를 만나 1차전에서 2-2 무승부를 거뒀으나 2차전 베르나베우에서 라몬 그로소의 멀티골과 프란시스코 헨토, 마누엘 벨라스케스의 골로 4-1 대승을 거두며 8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리그에서는 20~22라운드에 아틀레틱 클루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발렌시아 CF의 강행군에서 모두 무승을 거두며 흔들렸으나 이후 1968년 4월 20일, 29라운드 UD 라스팔마스전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13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최종 라운드 패배했지만 2위 FC 바르셀로나와 3점 차로 리그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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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한 1967-68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한편, 3월에 치러진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AC 스파르타 프라하를 만났고 홈에서 아만시오 아마로의 해트트릭으로 3-0 대승을 거뒀다. 비록 2차전 원정에서 2골을 내주며 위기를 맞았짐나 57분 프란시스코 헨토가 추격골을 터뜨렸고,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합계 4-2로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명장 맷 버스비 감독과 위대한 전설 조지 베스트, 바비 찰튼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였다. 양 팀은 11년 전인 1957년에 만났는데, 레알이 합계 5-3으로 승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고, 레알은 원정에서 베스트에게 골을 내주며 0-1로 패배했다. 스코어의 불리함을 가지고 온 2차전 홈에서 레알은 전반전을 매우 잘 치렀다. 비록 이그나시오 소코의 자책골이 나오긴 했으나 피리, 헨토, 아만시오가 골을 터뜨리며 3-1로 전반을 마무리했는데, 73분과 78분에 연이어 골을 헌납하며 홈에서 아쉽게 무승부를 거뒀고, 합계 3-4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4강에서 유럽 대항전을 마무리 지은 레알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32강에서 칼보 소텔로를 꺾은 후 16강에서 세비야 FC를 만나 합계 5-3으로 승리하며 8강에 올랐다. 8강 상대는 지난 수년간 레알의 발목을 잡았던 레알 사라고사였다. 그 명성을 보여주듯 레알은 사라고사 원정에서 2-3으로 패배했으나 홈에서 루이스와 아만시오가 득점하며 2-0으로 승리, 합계 4-3으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 상대는 RC 셀타 데 비고였는데, 8강처럼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홈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은 레알의 홈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러졌고 상대는 영원한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였다. 직전 리그에서 양 팀은 모두 각각의 홈에서 무승부를 거뒀기에 승부의 향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경기의 흐름은 생각보다 일찍 깨졌다. 전반 6분, 레알의 수비수 페르난도 순수네기가 카를레스 렉사흐의 크로스를 막으려다 자책골을 넣어버린 것이다. 경기는 순수네기의 자책골을 끝까지 지켜낸 바르셀로나가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경기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레알의 팬들은 이 경기의 주심인 안토니오 리고가 바르셀로나 팬이라고 이야기했고, 레알의 세레나가 바르셀로나의 가예고의 거친 태클을 받았음에도 리고 주심이 그냥 넘어가면서 더욱 더 논란이 커졌다. 그리고 이후에도 세레나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넘어졌음에도 PK가 선언되지 않자 레알 팬들은 크게 분노했고, 경기 종료 휘슬이 불리자 레알 팬들은 사방에서 유리병을 던지며 항의했다. 레알은 홈에서 가장 큰 라이벌에게 결승에서 패배했기에 최악의 순간이었고, 승리한 바르셀로나는 라이벌 레알의 홈에서 자신들이 증오하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에게 트로피를 수여받았기에 통쾌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3.10. 1968-69 시즌


이 시즌은 1960년대 중후반 레알을 상징하던 'Ye-yé 마드리드'가 사실상 막을 내리던 시즌이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던 몇몇 선수들이 이적했는데, 엘체 CF로 이적한 호세 아라키스타인, 페르난도 세라나와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로 이적한 파친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안토니오 이스나타, 하이메 블랑코, 페르난도 로비라 등이 이적했다. 이 선수들이 이적했지만 여전히 팀에는 전설 프란시스코 헨토가 있었고, 여전히 주전으로 뛰며 팀을 이끌었다.

많은 선수들이 떠났지만 이 시즌 리그에서 레알은 강력했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터뜨렸고, 아틀레틱 클루브, 발렌시아 CF, 레알 소시에다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를 모두 잡아내면서 9연승을 거둬 리그 독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무승부로 주춤하긴 했으나 절대 지지 않으며 계속 무패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유러피언 컵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예선에서 AEL 리마솔을 12-0으로 꺾은 후 16강에서 SK 라피트 빈을 만났는데, 원정 다득점으로 밀려 탈락해버린 것이다. 1차전 원정에서 패배한 것도 뼈아팠고, 홈에서 벨라스케스의 골 이후 다시 골을 헌납한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비록 유러피언 컵에서는 예기치 못하게 조기 탈락했으나 리그 흐름은 좋았다. 패배하지 않으며 계속 1위 자리를 지켜나갔다. 다만 문제점은 부족한 득점력이었다. 29라운드까지 후반기 14경기에서 무려 8번이나 비겼고, 특히 20라운드부터 26라운드까지 7경기 동안 6무를 기록했는데 이때 득점이 고작 5득점이었다. 그래도 2위와의 격차는 컸고 1969년 3월 3일 27라운드에서 레알 사라고사에 2-0으로 승리하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 시즌 또 아쉬운 점은 리그 무패 우승에 매우 근접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레알은 27라운드까지 16승 11무를 기록하며 무패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엘체 CF 원정에서 0-1로 패배하며 무패가 깨졌다. 남은 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기에 더더욱 아쉬웠다. 만약 이때 레알이 엘체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1931-32 시즌 이후 37년 만에 무패 우승을 기록했을 것이고, 라리가 마지막 무패 우승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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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의 14번째 라리가 트로피
그리고 리그가 종료된 1969년 5월,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코파 16강에서 맞붙었는데, 상대 선수가 45분에 퇴장당했고 프란시스코 헨토가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연이어 2골을 허용하며 1-2로 패배했다. 2차전 홈에서는 득점을 터뜨리지 못했고, 결국 1-2로 유러피언 컵처럼 코파도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레알에게는 아쉬운 시즌이었는데, 36경기에서 고작 25실점만을 내줬고 딱 3번 패했음에도 리그 무패 우승, 유러피언 컵, 코파를 모두 날리고 라리가 우승만을 건졌다. 한편, 레알은 이 시즌 레알은 인터컨티넨탈컵의 역대 우승팀들이 참가해 토너먼트를 치르는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에 1960년 우승팀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고 1964, 1965년 우승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참가를 철회했다.

3.11. 1969-70 시즌


무뇨스 감독이 부임한 이래 레알은 9시즌 동안 무려 8번의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스페인을 휩쓸었으나 이 시즌 레알은 수비 불안으로 완전히 추락했다. 지난 시즌 대비 무려 30실점이 늘어났고, 특히 골키퍼에는 명확한 주전이 존재하지 않아 호세 루이스 보르하, 안드레스 훈케라, 안토니오 베탄코르트, 미겔 앙헬 곤살레스까지 무려 4명이 시즌 중에 기용되었다. 또한 무려 9명의 센터백이 기용되어 수비 라인이 너무 자주 바뀌었고, 이로 인해 호흡이 맞지 않아 수비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득점이 늘기는 했으나 이를 커버하기에는 부족했다.

비록 전반기 초반에는 무패를 기록하며 8라운드까지 1위를 유지했으나 9라운드 세비야 FC에게 패배하며 3위로 추락했다. 그리고 15, 16라운드에 레알 사라고사 FC 바르셀로나에게 패배하며 격차가 벌어져갔다. 유러피언 컵에서도 올림피아코스 니코시아를 14-1로 꺾긴 했으나 16강에서 스탕다르 리에주에게 홈, 원정 2경기 모두 패배하며 2시즌 연속으로 16강에서 유럽 대항전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후반기 레알은 1~2월에 그래도 선방하며 3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틀레틱 클루브에게 무려 0-5로 패배하며 분위기가 꺾였으며 3월이 되자 팀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CE 사바델 FC전 0-3 대패를 시작으로 홈에서 세비야에 패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0-3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 4연무를 기록하며 팀의 순위는 6위까지 내려가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진출 or 강등
3 세비야 30 14 7 9 39 32 +7 35 인터-시티 페어스컵 진출
4 바르셀로나 30 13 9 8 40 31 +9 35
5 발렌시아 30 15 5 10 35 23 +12 35
6 레알 마드리드 30 13 9 8 50 42 +8 35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라운드 진출
당시 순위 경쟁이 치열했는데, 3위부터 6위까지 모두 승점이 35점으로 동일했다. 이때 라리가의 순위 결정 기준을 살펴보면 승점 → 맞대결 결과 → 득실차인데, 세비야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레알에 각각 3-1, 5-2, 4-2로 모두 맞대결 우위를 점해 3위에 올랐고 바르셀로나는 세비야에는 밀렸지만 발렌시아와 레알에 각각 1-0, 4-3으로 우위를 점해 4위를 차지했다. 레알과 발렌시아는 서로 홈에서 1점 차로 승리했는데, 다음 결정 기준인 득실차에서 발렌시아가 레알보다 더 높은 숫자를 기록하면서 5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레알은 모든 결정 기준에서 밀리며 6위를 기록했다.

최악의 상황으로 리그를 마무리한 레알은 무관을 면하기 위해 코파에 집중했다. 그래도 코파는 리그와는 달리 순항했는데, 32강에서 카스테욘 CF를 꺾은 후 UD 라스팔마스와 16강을 치렀다. 비록 원정에서 0-2로 패배했지만 홈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만회했고, 합계 4-3으로 아슬아슬하게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다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만났는데, 이번 시즌 리그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나 홈에서 2-0으로 승리하고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두 경기에서 모두 논란이 터졌는데, 먼저 1차전에 주심이 아만시오 아마로의 오프사이드 득점을 골로 인정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캄프 누에서 열린 2차전, 카를레스 렉사흐가 선제골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가 전반전을 1-0으로 잘 마무리했는데 59분 호아킴 리페가 벨라스케스에게 반칙을 범해 페널티를 헌납했고 이를 아만시오 아마로가 처리하며 동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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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에 대한 리페의 태클 과정을 한 장면으로 합쳐놓은 사진[4]
그러자 바르셀로나의 선수들과 팬은 이 결정에 매우 분노했는데, 벨라스케스가 페널티 박스 밖에서 넘어졌다고 바르셀로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주장 엘라디오 실베스트레가 구루세타 주심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하자 바르사 팬들의 분노는 더욱 격해져 관중 난입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이 페널티 박스 밖에서 넘어졌다고 시인했기에 구루세타 주심에 대한 비판이 더 커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구루세타 주심은 경기 종료 5분 전에 경기를 완전히 중지시키고 이에 경찰까지 개입해 사건을 중재하려 했다. 이 경기 후 레알은 합계 3-1로 4강에 가게 되었고, 바르셀로나에게는 9만 페세타의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경기장 폐쇄까지도 논의되었다. 퇴장당한 엘라디오 실베스트레는 2경기 추가 징계를 받았고, 구루세타 주심은 6개월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심판단의 회장 호세 플라자는 사임하게 되었다. 한편, 구루세타 주심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더욱 논란이 커지게 되었으며 이 사건은 구루세타 스캔들이라 불리며 엘 클라시코와 스페인 축구 역사에 남게 되었다.

어찌됐던 4강에 진출한 레알은 아틀레틱 클루브를 만나게 되었다. 홈에서 0-1로 패배해 결승행이 어려워졌지만 의외로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지난 1967-68 시즌 이후 2시즌 만에 다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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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차지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트로피
결승에서는 발렌시아 CF를 만났는데, 전반전에 서로 PK로 1골 씩을 주고 받으며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레알은 후반에 흐름을 잡았고, 60분과 65분에 2골을 연이어 넣으며 3-1로 승리했다. 이는 레알의 11번째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트로피였고, 8년 만에 차지한 코파였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코파 우승을 차지하며 무관을 면하게 되었으며 미겔 무뇨스 감독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코파 우승을 차지하며 다음 시즌인 1970-71 시즌에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16시즌 만에 유러피언 컵 외의 다른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지면서 15시즌간 이어오던 유러피언 컵 연속 진출 기록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지난 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에 초대를 받았는데, 당시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의 예선이 치러지고 있었기에 레알과 인테르는 모두 참가를 거부했다. 이후 슈퍼컵 대회는 유럽 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개최되지 않았고 결국 2번 개최에 그치고 말았다.

3.12. 1970-71 시즌


지난 시즌 리그에서 처참히 실패한 레알은 수비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직전 시즌 대비 리그에서 18골을 덜 먹히며 리그 최저 실점 4위로 나름 수비를 안정화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득점력이었다. 시즌 10골을 넘긴 선수는 피리가 유일했고, 지난 시즌 23골을 기록했던 아만시오 아마로는 30경기 6골에 그쳤다. 또한 플레이타스, 부에노, 페레스의 공격진도 각각 8골, 8골, 4골을 기록하며 팀의 부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 인해 팀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전반기 리그 15경기에 7승 5무 3패를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그 4위도 바르셀로나에 패배하고, 빌바오에게 패배했을 때에는 8위까지 고꾸라졌으나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 5-0 대승을 기록한 것으로 분위기를 전환해 겨우 달성한 것이었다. 한편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는 1라운드 상대인 히버니언 FC를 합계 5-0으로 대파하며 2라운드에 올랐다. 2라운드에서는 FC 바커 인스부르크를 만났고, 원정에서 패배했지만 홈에서 승리하며 합계 2-1로 8강에 진출했다.

후반기는 전반기보다는 나았는데 3패만을 기록했고 15경기 10승 2무 3패를 기록해 3~4위를 왔다갔다했다. 기존에는 3위였으나 26라운드 RC 셀타 데 비고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4위로 떨어졌고, 이후 5경기 4승 1무를 기록했음에도 3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1점 차로 밀리며 4위로 리그를 마무리했다. 컵위너스컵 8강에서는 카디프 시티 FC를 만나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홈에서 2-0으로 승리하며 합계 2-1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PSV 에인트호번을 만났고, 원정 무승부 후 홈에서 2-1로 승리하며 1965-66 시즌 이후 5시즌 만에 유럽 대항전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결승에서 첼시 FC와 만나게 되었는데, 5월 19일에 열린 경기에서 피터 오스굿에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다가 90분 이그나시오 소코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며 경기가 연장전으로 흘렀다. 그러나 양 팀은 연장전에서 득점에 실패했고, 당시에는 승부차기가 도입되지 않았기에 양 팀은 2일 뒤인 5월 21일에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치러진 2차전에서 레알은 존 뎀프시와 오스굿에 2골을 내주며 패배에 직면했다. 이후 75분, 세바스티안 플레이타스가 만회골을 넣었으나 거기까지였고, 결국 레알은 패배해 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 결승에서 패배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1952-53 시즌 이후 18년 만에 무관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무뇨스 감독은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팬들은 무뇨스의 전술이 구식이라고 비판했고 실제로 루틴도 월요일 휴식, 화요일 목욕과 마사지, 수요일 신체 훈련, 목요일에 유스 팀과의 경기, 금요일 농구와 집중 훈련, 토요일 산책, 일요일에 경기로 정해져 있었다. 무뇨스느 새로운 신체 훈련 방법이 개발되었음에도 사용하지 않았고,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도입한 체계적 상대 분석도 필요없다고 생각해 도입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쌓이면서 심지어 베르나베우에서 "¡fuera Muñoz!", 즉 "무뇨스 나가라"라고 팬들이 외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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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토가 레알에서 차지한 트로피들
또한 마드리드에 또다른 슬픈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전설들의 이탈이었다. 1953년부터 팀에 18년간 동안 헌신했던 레전드 프란시스코 헨토가 은퇴를 선언하며 팀을 떠났고, 레알의 전설적인 센터백 마누엘 산치스도 팀을 떠나 코르도바 CF로 이적했다.

3.13. 1971-72 시즌


전설 프란시스코 헨토 마누엘 산치스가 팀을 떠나고, 레알은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공격진 보강으로는 라싱 산탄데르에서 산티야나와 이코 아길라르를 영입했고 수비진 보강으로는 코르도바 CF에서 후안 베르두고를 영입했다. 추가적으로 골키퍼 안토니오 베탄코르트가 UD 라스팔마스로 떠나자 가르시아 레몬 레알 오비에도로부터 영입했다.

이 시즌부터 라리가 참가 팀이 16팀에서 18팀으로 늘어났고 4경기가 추가되었다. 이 여파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가 7월까지 밀리면서 시즌이 1달 가량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 초반은 지난 시즌과 달리 좋았다. 초반 3연승을 거두며 1위를 차지했고, 중간에 무승부 경기들이 생겨 주춤하긴 했으나 11라운드까지 무패를 기록했다. 다만 홈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 무승부를 거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12라운드 UD 라스팔마스전에서 패배하며 4경기 무승을 기록했는데, 이후 5경기에서 4승을 기록하며 다시 승점을 쌓았다. 한편, 이 시즌 레알은 처음으로 UEFA 컵에 진출했는데 1라운드에서 FC 바젤을 만났고 홈, 원정에서 모두 2-1로 승리하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PSV 에인트호번을 만났는데, 홈에서 3-1로 승리를 거뒀으나 원정에서 0-2로 패배했다. 합계 3-3로 동률이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거해 탈락하고 말았다.

후반기, 1월 말 3경기 연속 무승부를 거뒀으나 이후 21라운드부터 7경기에서 6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다만 중간에 아틀레틱 클루브 원정에서 패한 것이 흠이었다. 27라운드까지 리그 2패를 기록하며 선전했는데, 4월이 되자 팀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28라운드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패한 것을 시작으로 34라운드까지 4패를 하며 기세가 껶였고, 아틀레티코 원정에서는 1-4로 대패했다. 그리고 레알이 막판 무너지면서 발렌시아 CF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는데, 레알이 피리의 멀티골에 힘입어 4-1로 승리를 거두며 발렌시아와 2점 차로 15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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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즌 만에 힘들게 차지한 15번째 라리가 트로피
그리고 1972년 6월 치러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6강에서 레알은 산 안드레스를 만났다.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거뒀으나 홈에서 5-1 대승을 거두며 손쉽게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RCD 에스파뇰을 만났는데 리그에서 1승 1무를 거뒀고 에스파뇰은 리그 12위였기에 레알의 4강행이 점쳐졌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홈에서 레알이 3-0 완승을 거두고 원정에서도 레알이 에스파뇰의 자책골로 앞서가며 4강행에 더 가까워졌는데, 72분부터 80분까지 8분 만에 3골을 연달아내주며 큰 위기를 겪었다. 그래도 레알이 남은 시간 버텨내면서 합계 4-3으로 아슬아슬하게 4강에 진출했다. 코파 4강에서는 해당 시즌 라리가 준우승 팀이자 레알의 레전드 출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감독이 이끄는 발렌시아 CF였다. 1차전 메스타야 원정에서 0-1로 패배해 결승행에 빨간불이 켜졌고, 홈에서 득점하지 못하며 합계 0-1로 탈락하고 말았다.

3.14. 1972-73 시즌


이 시즌 레알은 큰 영입을 하지 않고 후보 자원들만을 영입했다. 그리고 라리가 디펜딩 챔피언이었지만 그 위력을 이 시즌에 보여주지 못했다. 4, 5라운드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에게 모두 패배하면서 9위까지 떨어졌다. 상대 전적의 불리함을 안게 된 레알은 이후 5경기 3승 2무를 거두며 4위까지 올라왔으나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에 패배하며 다시 주춤했고, 이후 아틀레틱 클루브에도 패배하며 전반기를 4위로 마무리했다. 한편, 3시즌 만에 복귀한 유러피언 컵에서는 32강에서 아이슬란드의 크나츠피르드뉘데일드 케플라비퀴르를 만났는데 1차전에서 산티야나가 멀티골을 넣으며 3-0 대승을 거뒀고 원정에서도 승리하며 합계 4-0으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FC 아르제슈 피테슈티를 만났다. 1차전 원정에서는 1-2로 패배했으나 홈에서 다시 산티야나가 멀티골을 넣으며 3-1로 승리, 합계 4-3으로 8강에 진출했다.

1월 첫 경기 말라가 CF전을 패배하며 후반기를 불안하게 시작했으나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나았다. 17라운드부터 29라운드까지 단 1패에 그쳤고 4위에서 3위로 한 단계 올라갔다. 그런데 4월 말에 접어들며 에스파뇰에게 패하고 소시에다드, 빌바오와 모두 무승부를 거두며 우승 레이스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결국 마지막 RC 셀타 데 비고 원정에서 0-3으로 대패하며 승점 43점, 4위로 리그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8강에서 FC 디나모 키이우를 만났다.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거뒀지만, 홈에서 산티야나, 아길라르, 아만시오 아마로가 연달아 골을 넣으며 3-0 대승을 거둬 4강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이는 1967-68 시즌 이후 5시즌 만의 유러피언 컵 4강 진출이었다. 4강에서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AFC 아약스를 만났다. 1967-68 시즌에도 양 팀이 만났었는데 당시에는 합계 3-2로 레알이 승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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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C 아약스의 공격수 요한 크루이프 레알 마드리드 CF의 수비수 고요 베니토
1973년 4월 11일,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양 팀의 1차전이 펼쳐졌다. 전반은 0-0으로 마무리되었는데, 67분 배리 헐쇼프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고 이후 77분 뤼트 크롤에 실점해 패색이 짙어졌다. 비록 피리가 87분 만회골을 넣으며 동점을 노렸으나 추가 득점은 노리지 못했고, 레알은 아쉽게 원정에서 1-2로 패배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 레알은 역전을 노렸으나 최전성기의 아약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50분 헤리 뮈르헨에게 실점하며 홈에서도 패배해 합계 1-3으로 4강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코파에서도 스포르팅 히혼에게 합산 1-2로 패배하며 16강에서 레이스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한편, 유러피언 컵 결승이 치러진 5월 30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찾아가 크루이프를 영입하기 위해 접촉했고 바르셀로나보다 높은 제안을 했으나 거절당했고 크루이프는 라이벌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또 베르나베우 회장은 시즌 중에 이스라엘에 방문해 모세 다얀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이를 통해 프랑코와의 관계를 끊었으며 새로운 경기장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지원을 거부하는 요인이 되었다.

3.15. 1973-74 시즌

1973년 여름,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은 11시즌 만에 외국인 선수 이적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이 결과 레알은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아르헨티나 공격수 오스카르 마스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귄터 네처를 영입했다. 그리고 카스티야에 있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를 1군으로 승격시켰고, CD 카스테욘에서 비센테 델 보스케를 영입했다. 또 레알은 새 경기장을 건설할 계획을 9월 8일에 발표했지만 전술한 모세 다얀 사건으로 인해 스페인 정부와 레알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결국 이 계획은 최종적으로 스페인 정부에 의해 거부됐다.

네임드 있는 선수들과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며 다시 라리가 탈환을 노린 레알이었으나 이 시즌 레알은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3라운드까지 3연무를 거뒀고, 4라운드 아틀레틱 클루브 원정에서 1-2로 패배하며 16위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레알 사라고사전 4-0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8라운드까지 승리는 딱 그 경기 하나였고, 중위권에서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12월에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중상위권을 왔다갔다했다. 그리고 UEFA 컵에서는 1라운드에 입스위치 타운 FC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도 레알은 반등하지 못했다. 레알 소시에다드 스포르팅 히혼에 무승부를 거뒀고, 1974년 1월 13일 18라운드 CD 카스테욘 원정에서 0-2로 패하자 팬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결국 무뇨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면서 15시즌 간의 대여정을 너무나도 아쉽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4. 득점 순위

순위 이름 레알 소속 기간 경기 수 득점 경기당
득점
국적
1 페렌츠 푸스카스 1958 ~ 1966 180 159 0.88 파일:헝가리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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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만시오 아마로 1962 ~ 1974 360 133 0.37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3 프란시스코 헨토 1953 ~ 1971 340 107 0.31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4 피리 1964 ~ 1980 305 95 0.31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5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53 ~ 1964 126 87 0.69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6 라몬 그로소 1964 ~ 1976 285 67 0.24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7 마누엘 벨라스케스 1962 ~ 1977 278 46 0.17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8 산티야나 1971 ~ 1988 103 39 0.38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9 펠릭스 루이스 1961 ~ 1969 122 36 0.30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10 루이스 델 솔 1960 ~ 1962 81 27 0.33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인터컨티넨탈컵
1959-60 2위
( = )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5
준우승 ×
1960-61 파일:laLiga_trophy.png
7
16강 준우승 파일:Intercontinental_Cup_trophy.png
1
1961-62 파일:laLiga_trophy.png
8
준우승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0
×
1962-63 파일:laLiga_trophy.png
9
예비라운드 4강 ×
1963-64 파일:laLiga_trophy.png
10
준우승 8강 ×
1964-65 파일:laLiga_trophy.png
11
유러피언컵
8강
16강 ×
1965-66 2위
( 1)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6
8강 ×
1966-67 파일:laLiga_trophy.png
12
유러피언컵
8강
8강 준우승
1967-68 파일:laLiga_trophy.png
13
유러피언컵
4강
준우승 ×
1968-69 파일:laLiga_trophy.png
14
유러피언컵
16강
16강 ×
1969-70 6위
( 5)
유러피언컵
16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1
×
1970-71 4위
( 2)
UEFA 컵위너스컵
준우승
32강 ×
1971-72 파일:laLiga_trophy.png
15
UEFA컵
2라운드
4강 ×
1972-73 4위
( 3)
유러피언컵
4강
16강 ×
1973-74[5] 7위[6] UEFA컵
1라운드
- ×

5.2. 승패 기록

시즌 경기 수 득점 실점
1959-60 13 10 1 2 49 14
1960-61 43 31 7 5 127 39
1961-62 49 35 5 9 116 41
1962-63 41 30 4 7 107 46
1963-64 46 33 4 9 104 38
1964-65 40 27 6 7 90 34
1965-66 46 27 10 9 88 49
1966-67 42 22 10 10 70 40
1967-68 47 25 13 9 88 47
1968-69 36 21 12 3 61 25
1969-70 43 20 11 12 83 55
1970-71 41 21 11 9 60 31
1971-72 44 24 11 9 68 38
1972-73 44 21 11 12 58 37
1973-74 20 5 9 6 25 19
합계 595 352 125 118 1194 553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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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명장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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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에서의 무뇨스의 커리어[8]

무뇨스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 CF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뽑히며 카를로 안첼로티, 지네딘 지단과 함께 TOP 3를 이루고 있다. 무려 14년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레알을 지휘했는데, 이는 레알 감독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무뇨스 부임 이전의 10명이 넘는 감독들을 갈아치우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그를 14년간 레알의 감독으로 부임시키고 지지한 이유가 바로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무려 라리가 5연패를 이끌었고, 이를 포함해 리그 우승 9번을 기록했으며 유러피언 컵 우승 2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2회,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1회를 기록해 레알 역사상 최다 우승 트로피 획득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부임 초기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시스코 헨토, 호세 산타마리아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로 즐비한 레알 선수단을 분열없이 성공적으로 이끌어 스페인과 유럽을 제패했고, 이들이 이탈하는 과도기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팀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여했다. 저승사자 군단들이 은퇴하거나 팀을 떠나자 부임 중후반기에 자국 선수들로 구성된 'Ye-yé 마드리드'를 결성했고, 아만시오 아마로, 피리, 라몬 그로소 등으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를 진행하며 1950년대 전성기에 이은 1960년대 전성기를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시기 무뇨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의 감독은 팀의 운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못하고 회장과 보드진, 이사회가 크게 개입해 감독은 경기 내적인 부분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뇨스 감독은 베르나베우의 지지를 받아 팀의 영입과 방출을 주도하며 팀을 구성해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평가받았다. 비록 이 과정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충돌하기는 했으나 세대 교체를 원활하게 진행하며 팀의 성적을 좋게 유지시켰다.

종합하면 선수로도 레알에서 뛰며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끌었고, 감독 경력이 부족함에도 1군 감독으로 부임해 팀의 유러피언 컵 5연패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2세대에 걸쳐 팀을 지휘했고, 레알이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클럽이 되는 기반을 확실하게 마련해 놓은 위대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1]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기에, 3점인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19점 차이다. [2] 사진 속 인물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세 비센테, 마르퀴토스, 호세 산타마리아, 페드로 카사도, 호세 마리아 비달, 파친, 미겔 무뇨스, 프란시스코 헨토,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루이스 델 솔, 카니리오이다. [3] 다만 레알 기준 상대적 약팀이고 에스파뇰을 제외한 3팀은 해당 시즌에 각각 5위, 4위, 9위를 기록하며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4] 두번째 장면을 보면 리페가 벨라스케스에게 태클을 했을때 페널티 박스 밖이고, 리페의 발이 떠나고 벨라스케스가 넘어지고 있는 시점이 페널티 라인 위였다. 즉, PK가 아닌 프리킥이 선언되어야 할 장면이었다. [5] 최종 성적이 아닌 무뇨스 경질 당시로 서술한다. [6] 최종 성적은 8위 [7] 왼쪽부터 미겔 무뇨스, 카를로 안첼로티, 지네딘 지단이다. [8] 안첼로티 감독은 이 사진이 제작된 이후 2023-24 라리가 UEFA 챔피언스 리그 및 2024 UEFA 슈퍼컵을 추가로 우승해 14회로 갱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