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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21:29:02

레알 마드리드 CF/베인하커르 체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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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1994
초대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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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카르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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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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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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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퀴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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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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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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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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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랴니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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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슈코브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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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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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알 마드리드 CF 감독(41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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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
베인하커르 체제
파일:DJOVH4GXcAE3zyx.jpg
제34대 감독
레오 베인하커르
<colbgcolor=#FFF><colcolor=#000>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레오 베인하커르 / 제34대 감독
회장 파일:스페인 국기.svg 라몬 멘도사 / 제13대 회장 (1985~1995)
주장 파일:스페인 국기.svg 산티야나 / 제28대 주장 (1986~1988)
파일:스페인 국기.svg 아구스틴 로드리게스 / 제29대 주장 (1988~1989)
계약 기간 1986년 7월 1일 ~ 1989년 6월 30일
(3년 / 1096일)
계약 종료 (유럽 대항전 성과 부족으로 사임)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공격 축구 및 유연한 전술
┗ 빠른 패스 플레이와 높은 점유율
┗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움직임 허용
┗ 창의적인 플레이 장려
┗ 조직적 압박을 통해 상대 실수 유도
역대 전적 169경기 107승 40무 22패 (승률 63.31%)
357득점 158실점
우승 경력 1986-87 라리가 ~ 1988-89 라리가 (우승)
1988-89 코파 델 레이 (우승)
198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5회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86-87 시즌3.2. 1987-88 시즌3.3. 1988-89 시즌
4. 득점 순위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5.2. 승패 기록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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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알 마드리드 CF의 제34대 감독 레오 베인하커르 1기 체제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감독 선임 과정

1986년 6월 30일, 전임 루이스 몰로니 감독이 1985-86 시즌을 더블로 잘 마무리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레알은 신임 감독으로 前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레오 베인하커르를 선임했다. 베인하커르 감독은 비록 네덜란드 감독을 맡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본선 진출에 실패해 경질당하기는 했으나 AFC 아약스에서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했었고, 레알 사라고사 감독을 통해 라리가 경험도 있는 잔뼈 굵은 감독이었다. 베인하커르를 선임한 라몬 멘도사 회장은 1966년 이후 우승하지 못한 유러피언 컵을 다시 우승하기를 원했고 베인하커르에게 레알의 전성기를 맡겼다.

3. 연혁

3.1. 1986-87 시즌


이 시즌 레알은 이적시장에서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는데, 다만 골키퍼 보강이 있었다. 지난 십여 년간 레알의 골문을 지켰던 가르시아 레몬 미겔 앙헬 곤살레스가 팀을 떠나자 세비야 FC로부터 프란시스코 부요를 영입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 레알 사라고사로 임대를 떠났던 미겔 파르데사를 임대 복귀시켰다.

디펜딩 챔피언 레알은 2라운드 UD 라스팔마스전과 3라운드 스포르팅 히혼전 2연무를 기록하며 불안하게 출발하나 했으나 레알 사라고사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1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CA 오사수나전 패배, 홈 엘 클라시코 무승부, 라싱 산탄데르전 무승부로 2위로 내려앉았고 이후 1986년의 전반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며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 뒤쳐지게 되었다. 전반기 레알은 무승부가 너무 많았는데, 뒷심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틀레틱 클루브전에서는 우고 산체스의 멀티골로 앞서갔음에도 후반에만 4골을 내주며 홈에서 패배를 기록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1라운드 BSC 영 보이즈를 만났는데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2차전 홈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 상대는 세리에 A 챔피언 유벤투스 FC를 만났는데, 홈에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득점으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2차전 원정에서는 안토니오 카브리니에 실점하며 끌려갔고 연장 끝에 결국 0-1로 패배했다.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홈에서 승리를 거뒀기에 합산 스코어 1-1이 되었고, 결국 승부차기를 치르게 되었다. 승부차기에서는 영입생 프란시스코 부요의 활약이 지대했는데, 유벤투스의 1번 키커 세르조 브리오와 3번 키커 리오넬로 만프레도니아의 슛을 막아냈다. 그리고 4번 키커 루차노 파베로가 실축하면서 레알은 우고 산체스가 실축했음에도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1987년, 레알은 전반기보다 더 좋은 흐름으로 리그를 이어나갔다. 22라운드부터 24라운드까지 3연승을 기록했다. 비록 엘 클라시코에서 게리 리네커에 해트트릭을 내주며 패배하고 RCD 마요르카전에서도 패배했지만 28라운드부터 다시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30라운드, 레알이 세비야 FC를 잡아내고 바르셀로나가 패배하면서 드디어 레알이 4달 만에 1위를 탈환하게 되었다.

한편 승부차기에서 힘겹게 유벤투스를 꺾고 올라간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만났다. 1987년 3월 4일, 원정에서 레알은 전반전에만 3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어졌다. 후반전 우고 산체스가 2골을 넣으며 스코어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84분 PK를 내주며 실점해 결국 2-4로 패배했다. 이 경기에서 유일한 위안거리는 원정에서 2골을 넣어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우위를 노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3월 18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은 기적을 노렸다. 그리고 그 기적은 5분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선제골로 실현되는 듯 했고, 61분 미첼 곤살레스가 추가골을 넣으며 합산 스코어 동점을 만들어냈다. 목표를 이룬 레알은 이제 실점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는데, 즈베즈다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낸 레알이 그대로 2-0 승리를 거두면서 원정 다득점 우위로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4강 상대는 지난번 1975-76 시즌 레알을 탈락시켰던 FC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뮌헨은 1980년 친선 경기에서 레알을 무려 9-1로 꺾으며 레알 팬들에 악명이 쌓였고, 이후 레알 팬들은 뮌헨을 'La Bestia Negra', '검은 야수'라고 부르며 적대심을 가졌다. 이런 뮌헨을 만난 레알이었지만 이때 레알은 주전 호르헤 발다노가 간염 진단으로 인해 결장하는 악재가 터졌다. 그리고 1차전 원정, 훨씬 더 큰 악재가 줄줄이 터졌다. 이 경기의 주심인 로버트 발렌타인은 레알에게 계속 불리한 판정들을 내렸고, 레알은 PK를 두 번이나 헌납했다. 레알은 수비에서 완전히 무너지며 전반 40분 전에만 3골을 먹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후아니토 로타어 마테우스의 머리를 밟고 퇴장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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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우스의 머리를 밟는 후아니토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마테우스가 첸도에게 거친 태클을 가하고 세게 가격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후아니토가 마테우스의 머리를 밟아버린 것이다. 주심은 곧바로 39분에 후아니토를 퇴장시켰고 후아니토는 5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아 졸지에 팀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행동을 이후 프란시스코 부요는 '미친 짓'이라고 얘기했고 비신사적인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첸도에서 태클한 마테우스 역시 퇴장당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후아니토는 AS의 중재하에 마테우스에게 사과했고, 마테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편, 한바탕 소동이 일은 후 44분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만회골을 넣었으나 후반전 다시 PK를 내주며 1-4가 되었고 72분 미노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 레알은 1차전을 완벽한 최악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1987년 4월 22일, 레알은 홈에서 바이에른과 2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2차전도 혼란스러웠는데, 관중들이 장마리 파프에게 물건을 던지며 경기가 15분간 지연되었다. 그리고 겨우 진행된 경기에서 레알은 최소 3골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레알에게 호재가 따랐다. 28분, 산티야나가 이른 시간 선제골을 넣었고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우고 산체스를 주먹으로 가격해 퇴장당했다.[1] 수적 우위를 점한 레알은 계속 바이에른의 수비를 뚫기 위해 노력했으나 상대 키퍼인 장마리 파프를 뚫지 못했고, 결국 1-0에 그치면서 합계 2-4로 4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한편 리그에서는 28라운드부터 엘 비에호 클라시코 원정 승리, 데르비 마드릴레뇨 대승을 비롯해 6연승을 거둬 최종 34라운드 1위로 마감했는데, 이때 라리가는 현재 K리그와 유사하게 18개 팀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눠 최종 리그를 진행했다. 1위부터 6위까지는 챔피언십 그룹으로, 7위부터 12위까지는 중간 그룹으로, 13위부터 18위까지는 강등 그룹으로 나눠 순위를 나눴다. 그리고 레알은 챔피언십 그룹으로 가서 남은 10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챔피언십 그룹에서 레알은 FC 바르셀로나에 1무 1패를 기록했으나 남은 경기에서 순조롭게 승리했고 플레이오프 10경기 7승 2무 1패, 합산 44경기 27승 12무 5패로 라리가 2연패에 성공했다. 2위 바르셀로나와는 3점 차에 불과했기에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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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의 22번째 라리가 트로피
한편,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에서 카디스 CF를 6-1로 꺾었고 8강에서는 CA 오사수나를 상대로 홈과 원정 모두 승리하며 합계 6-2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지역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만났는데, 리그에서 레알이 대승을 기록했었고 1승 1무로 우위를 점했기에 레알의 결승행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1차전 레알이 3골을 먼저 넣으며 3-0으로 앞서갔는데, 후반에 2골을 내주며 3-2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그리고 2차전, 레알은 패배만 면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후반에 2골을 헌납했고 만회골을 넣지 못하며 패배, 합산 3-4로 탈락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1차전 후반이 아쉬웠는데, 다시 한 번 레알의 뒷심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레알은 1986-87 시즌 리그 우승만을 챙기며 다소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3.2. 1987-88 시즌


독수리 오 형제와 우고 산체스 등 주전 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레알은 이 시즌 많은 영입을 하지는 않았고 작은 선수단 보강을 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부터 파코 요렌테를, 발렌시아 CF로부터 프란시스코 페레스를 영입했다. 그리고 지난 1982-83 시즌 레알의 우승을 막았던 수비수 미겔 텐디요 레알 무르시아 CF로부터 영입했다. 그리고 여러 유스 선수들을 카스티야로부터 승격시켰고, 지난 시즌 출전 징계를 받은 후아니토 말라가 CF를 떠났다. 그리고 독수리 오 형제의 일원인 미겔 파르데사 레알 사라고사로 떠났으며 호세 안토니오 살게로가 세비야 FC로 이적했다.

선수단 보강을 어느 정도 진행한 레알은 스페인 내에서 압도적이었다. 2라운드 스포르팅 히혼전과 3라운드 레알 사라고사전에 무려 7골씩을 때려박았고, 첫 4경기에서 무려 21골을 넣으며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이어 UD 라스팔마스 원정 승리, 발렌시아 CF전 4-0 대승을 포함해 리그 8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SSC 나폴리와 만나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선수인 마라도나와 당대 최고의 팀 중 하나였던 레알의 맞대결이었기에 이 대결은 많은 축구 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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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마라도나와 상대하는 첸도
1차전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러졌는데, 지난 FC 바이에른 뮌헨전에서 장마리 파프에게 물건을 투척한 것을 이유로 징계를 받아 무관중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역대 최고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킨 마라도나를 레알의 수비수가 막을 수 있을 지 우려가 있었는데, 이 우려는 첸도가 마라도나를 완벽하게 제어하면서 종식되었다. 첸도는 이 날 마라도나를 완벽하게 지워버렸는데, 마놀로 산치스 등 팀 동료들도 놀랄 정도였고, 마라도나가 경기를 자신들과 같이 경기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라도나를 제어하는데 성공한 레알은 18분에 미첼 곤살레스가 PK로 선제골을 넣고 76분 페르난도 데 나폴리가 자책골을 넣으며 2-0 완승을 거뒀다. 2차전 원정에서는 조반니 프란치니에 이른 시간 선제골을 헌납했으나 44분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동점골을 넣었다. 나폴리는 1차전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2골을 더 넣어야 했으나, 레알의 골문을 더 이상 열지 못하면서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레알은 합산 3-1로 강력한 상대 나폴리를 꺾고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지난 시즌 뮌헨을 꺾고 사상 첫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 FC 포르투였는데, 1차전 홈에서 선제골을 내준 이후 역전승을 거두고 2차전 원정에서 미첼의 멀티골로 다시 역전승을 거두며 합산 4-2로 8강에 진출했다.

한편, 리그에서는 9라운드 무승부를 거두고 10라운드 홈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 0-4 대패를 기록하며 주춤했으나 다시 4연승을 기록했다. 비록 15라운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원정에서 패배했으나, 전반기 15경기 12승 1무 2패로 2위 레알 소시에다드와 4점 차이로 1위를 유지하며 1987년을 마무리했다. 1988년 새해 첫 날, 레알은 홈 엘 클라시코에서 우고 산체스의 멀티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기분 좋게 리그 후반기를 시작했다. 이어 리그 우승 경쟁팀 레알 소시에다드를 1-0으로 꺾었고, 이어 레알 바야돌리드, 카디스 CF를 꺾으며 2위와의 격차를 벌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패배나 무승부가 있기는 했지만 레알의 리그 레이스는 타 팀들을 압도했고, 아틀레틱 클루브전 5-0 대승,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 3-1 승리를 거두며 29라운드에 승점 차를 6점으로 벌렸다.

리그에서는 승승장구했으나 코파 델 레이에서는 리그만큼 화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5라운드에서 세스타오 SC를 3-0으로, 16강에서 카디스 CF를 만나 합계 5-3으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해 8강에 올랐다. 8강에서는 CE 사바델과 맞붙었는데, 1차전 원정에서 2-3으로 패배하며 4강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2차전 홈에서 레알은 정규 시간 내에 겨우 1골을 넣으며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는데, 연장에서 1골을 추가하면서 합산 4-3으로 역전에 성공해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리그 우승 경쟁을 하고 있던 레알 소시에다드를 만났다. 1988년 2월 10일, 에스타디오 아노에타에서 열린 4강 1차전에서 레알은 호세 마리 바케로에게 실점하며 0-1로 패했다. 그리고 1988년 2월 18일, 베르나베우에서 2차전이 치러졌다. 이미 레알은 전반기 리그 맞대결에서 1-0 승리를 거둔 기억이 있었고 리그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충분히 경기를 뒤집을만한 저력이 있었다. 하지만 2차전, 레알은 완전히 무너졌다. 전반전은 0-0으로 마무리했으나, 후반전 알베르토 고리스에게 선제골을 내주더니 바케로에게 멀티골을 헌납했고, 치키 베히리스타인에게도 실점하며 홈에서 0-4 대패를 기록했다. 홈에서 엄청난 망신살이를 사게 된 레알은 합산 0-5로 4강에서 코파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지난 시즌 혈투 끝에 레알을 탈락시킨 준우승팀 FC 바이에른 뮌헨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1차전 원정에서 레알은 지난 시즌처럼 47분까지 3골을 헌납하며 0-3으로 끌려갔다. 80분이 넘어가서도 뮌헨의 수비를 뚫지 못하며 대패하나 했으나, 다행히 85분과 90분에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우고 산체스가 연이어 만회골을 터뜨리면서 2-3으로 패배해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전, 레알은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거해 1-0으로만 승리해도 4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26분, 밀란 얀코비치가 선제골을 넣고 41분에 미첼 곤살레스가 추가골을 넣으며 레알은 전반전에 2-0을 만들었다. 후반전에는 레알의 수비가 뮌헨의 공격을 막는데 성공하면서 그대로 승리를 거뒀고 합산 4-3으로 4강에 진출해 복수에 성공했다.

4강에서는 감독 첫 시즌을 맡고 있는 거스 히딩크 PSV 에인트호번을 만났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4강 1차전, 한스 판브뢰켈런 우고 산체스를 넘어뜨리면서 레알의 PK가 선언되고 이 PK를 산체스가 마무리하면서 레알이 이른 시간 앞서나갔다. 하지만 레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20분 프란시스코 부요의 실수로 인해 에드워드 린스켄스에게 실점했다. 린스켄스의 골은 레알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고, PSV는 원정 다득점 원칙의 우위를 점한 채 라인을 내려 수비로 일관했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미첼 곤살레스, 라파엘 고르디요 등 레알의 공격진들을 PSV의 일대일 마킹에 고전했다. 그리고 그 수비들을 뚫어도 판브뢰켈런이 있었고, 경기 막판 우고 산체스의 헤더를 슈퍼세이브로 막아냈다. 결국 추가 득점에 실패한 레알이 홈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레알은 원정에서 무조건 공격을 시도해야했고, PSV는 막기만 해도 결승행이었기에 1차전처럼 수비적인 운영을 펼쳤다. PSV의 전원 수비에도 레알은 여러차례 공격 기회를 창출해냈는데, 좋은 기회들은 모두 판브뢰켈런에게 막혔고, 레알은 끝내 PSV의 골망을 가르지 못했다. 결국 90분이 되자 주심은 레알 선수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추가 시간 없이 그대로 경기를 종료시켰고, PSV가 원정 다득점에서 우위를 점하며 결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4강 경기는 베인하커르 감독의 실책으로 평가받는데, 산티야나를 벤치에 앉혀 중요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부요는 결정적인 순간에 미스를 범하며 지난 시즌 유벤투스전과 달리 탈락의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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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3연패를 기록한 1987-88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코파와 유러피언 컵을 모두 탈락한 레알에게 남은 것은 라리가 단 하나였다. 하지만 리그는 이미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고, 31라운드부터 34라운드까지 4경기 연속 클린시트와 3승 1무를 기록했다. 그리고 1988년 4월 23일,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를 홈에서 6-0으로 잡아내면서 통산 23번째 라리가 우승을 기록했으며 이는 1979-80 시즌 이후 8년 만의 라리가 3연패였다.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진출 or 강등
1 레알 마드리드 (C) 38 28 6 4 95 26 +69 62 유러피언 컵 1라운드 진출
2 레알 소시에다드 38 22 7 9 61 33 +28 51 UEFA 컵 1라운드 진출
이 시즌 레알은 리그에서 매우 압도적이었는데, 리그 최다 득점 팀이자 최소 실점 팀이었으며 2위 소시에다드보다 34골을 더 넣었고, 득실차는 무려 41점이나 차이났다. 이 시즌 레알은 승점을 3점으로 환산 시 90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 기준 73점인 소시에다드보다 17점 많은 승점이다. 또한 1라운드부터 38라운드까지 한 순간도 리그 1위를 놓치지 않은 스페인 최강의 팀이었다.

다만 이런 압도적인 리그 성적에도 코파 델 레이 4강에서 대패로 탈락하고, PSV의 수비를 끝내 뚫어내지 못해 라리가 우승만을 거둔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시즌이라고 할 수 있었다.

3.3. 1988-89 시즌


새로운 시즌에 레알은 거물급 영입을 했는데, 라이벌 FC 바르셀로나로부터 베른트 슈스터를 영입했다. 슈스터는 1980년부터 약 8년간 바르셀로나의 주축으로 활약했으나, 요한 크루이프 감독 부임 이후 자신의 축구 철학을 위해 주전들을 대거 방출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레알로 이적한 이유는, 바르셀로나에서 큰 부상을 당했을 때 클럽이 제대로 조치를 해주지 않아 불만을 가지고 있어 이를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슈스터에 이어 세바스티안 로사다, 에스테반을 영입했고 프란시스코 헨토의 조카 훌리오 요렌테를 임대 복귀시켰다. 그리고 밀란 얀코비치 등 비주전 선수들을 정리했다.

레알은 리그 초반을 좋지 않게 시작했다. CA 오사수나, 스포르팅 히혼,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 3연속으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11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를 전환시켰는데,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전 2-0 승리를 시작으로 레알 오비에도, 레알 사라고사, 레알 바야돌리드 CF를 차례로 꺾었고 8라운드 홈 엘 클라시코에서 호세 마리 바케로에 선제골을 내줬음에도 후반에 3골을 넣으며 역전승을 기록했다. 이어 3경기에서도 연이어 승리하면서 리그 8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초반부터 레알은 바르셀로나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치렀는데, 중간 2경기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2위로 내려앉았다가 데르비 마드릴레뇨 승리를 시작으로 반등해 1988년 전반기를 16전 11승 5무, 2점차 1위로 기분좋게 마무리했다. 한편 유러피언 컵에서는 1라운드 노르웨이의 모스 FK를 만나 합계 4-0으로 승리했고, 2라운드 구르니크 자브제를 만나 합계 4-2로 승리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89년 1월 8일 엘체 CF전 4-2 승리를 시작으로 리그 1위를 질주했고, 중간중간 무승부가 있기는 했으나 2월 말부터 3월까지 4연승을 거두며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를 4점으로 벌렸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5라운드에서 엘체를 만나 합산 3-2로 겨우 승리했고 16강에서 스포르팅 히혼을 만나 1차전 원정에서 5-5 난타전을 벌인 후 2차전 홈에서 5-2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지난 시즌 레알을 탈락시킨 팀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PSV 에인트호번을 다시 만났는데, 1차전 원정에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귀중한 득점으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2차전 원정에서는 72분 우고 산체스가 PK로 선제골을 넣으며 합산 스코어 우위를 점했는데, 1차전에서 골을 넣은 호마리우가 2차전에서도 득점하며 다시 무승부가 되었고 정규 시간이 종료되면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렀다. 그리고 105분 마르틴 바스케스가 득점하며 레알이 2-1로 승리, 합산 스코어 3-2로 레알이 PSV에 복수에 성공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AC 밀란을 만났는데, 밀란은 당시 1989년 리그 무패를 이어오고 있었고 레알 역시 밀란과의 맞대결 전 리그 27경기 무패를 기록했다. 밀란은 레알보다는 토너먼트에서 고전했는데,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재경기까지 치른 후 승부차기 끝에 겨우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는 SV 베르더 브레멘 마르코 반 바스텐의 PK로 겨우 꺾었다. 레알은 주전 선수들이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반면, 밀란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의 적응기, 반 바스텐의 적응 문제 등이 있었다. 그리고 1차전, 레알은 우고 산체스가 발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어 앞서갔으나 74분 반 바스텐이 헤더로 동점골을 넣으며 홈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밀란과의 1차전이 끝난 후인 4월 15일, RC 셀타 데 비고전에서 0-2로 패배하며 28경기 리그 무패 행진이 끝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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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를 완벽히 무너뜨린 AC 밀란의 선수들
그리고 2차전 레알은 완전히 밀란에 무너지고 말았다. 1차전 홈에서 무승부를 거둔 레알은 어떻게든 득점을 만들어야 했고, 밀란은 빠른 역습으로 레알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18분 카를로 안첼로티 프란시스코 부요를 뚫어내고 선제골을 넣었고, 25분 마우로 타소티가 올린 크로스를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헤더로 연결하면서 순식간에 스코어가 2-0이 되었다. 이어 45분에는 루드 굴리트 로베르토 도나도니가 올린 크로스를 받아 헤더 득점을 기록해 전반에만 3-0으로 스코어가 벌어졌다. 후반에도 레알의 참사는 끝나지 않았고, 49분에는 마르코 반 바스텐에 실점했고 59분에 도나도니에 실점했다. 레알에게는 굴리트가 후반 부상으로 교체 아웃된 것이 다행일 정도였고, 레알이 자랑하던 우고 산체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콤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대패했다. 레알에게는 불운한 것이, 이 경기가 밀란 제네레이션 1기가 부상 없이 완벽히 구성된 기간이었고 이후 결승에서 밀란과 맞붙은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도 0-4로 대패하면서 밀란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이 두 경기 덕분에 밀란은 축구 역사에 남을 최강의 팀 중 하나가 되었고, 레알은 3년 연속 4강에서 탈락하면서 1980년대 후반 화려했던 전성기에 빅 이어라는 마지막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유러피언 컵에서 탈락한 이후 레알은 남은 두 대회를 잘 마무리해야했다. 밀란전 패배 이후 레알은 리그에서 계속 무패를 이어갔고, 원정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으나 홈에서는 CD 로그로녜스, 세비야 FC, RCD 에스파뇰을 모두 무실점으로 잡아내면서 36라운드에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를 4점으로 벌렸다. 그리고 이때 레알이 리그 엘 클라시코에서 1승 1무를 기록했기에, 남은 2경기에서 레알이 전패하고 바르셀로나가 전승해도 승점 동률에 상대 전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렇게 레알은 1989년 6월 11일, 통산 24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고 1963-64 시즌 이후 25년 만에 리그 4연패를 달성했다.

남은 대회는 이제 코파 델 레이 하나였다. 8강에서 RC 셀타 데 비고를 합산 4-2로 꺾어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맞붙게 되었다. 1차전 원정에서 후반전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베른트 슈스터가 득점하며 2-0 승리를 거뒀고, 2차전 홈에서도 부트라게뇨의 골로 1-0으로 승리하며 합산 3-0으로 6년 만에 코파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레알 바야돌리드 CF를 만났는데, 바야돌리드는 해당 시즌 리그 6위를 차지한 팀이었고 레알이 홈과 원정 모두 1점 차로 꾸역승을 거뒀기에 마냥 방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레알은 5분 만에 터진 라파엘 고르디요의 선제골을 지켜내면서 바야돌리드에 승리를 거뒀고, 7년 만에 코파 우승을 차지했으며 통산 16번째 우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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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차지한 코파 델 레이 트로피
그리고 시즌 초, 1987-88 코파 델 레이 챔피언인 FC 바르셀로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경기를 치렀는데, 홈에서 미첼 곤살레스 우고 산체스의 골로 2-0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2차전 원정에서는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선제골을 넣으며 합산 3-0으로 앞서나갔는데, 호세 마리 바케로에게 2골을 내주며 1-2로 패배했다. 하지만 홈에서의 2점차 승리 덕분에 합산 스코어 우위로 레알이 첫 수페르코파 우승 트로피를 얻게 되었다.

이 시즌 레알은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우승하면서 스페인의 모든 대회를 제패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유러피언 컵에서는 대패하며 4강에서 탈락했고 이때의 선수들은 대부분 빅 이어를 끝내 들어올리지 못했다. 당시 선수들이 제일 아쉬워했던 경기는 단연 PSV 에인트호번과의 경기였는데, 디에고 마라도나 SSC 나폴리, 디펜딩 챔피언 FC 포르투, 직전 시즌 굴욕을 선사했던 FC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올라왔기에 매우 강력한 우승 후보였음에도 탈락했기 때문이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경기 이후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마놀로 산치스에게 다시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아쉬움을 남겼고, 많은 베테랑들이 패배에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은 라몬 멘도사 감독이 원했던 유러피언 컵 트로피를 끝내 차지하지 못하자 스페인을 제패하고 최고의 시즌들을 보냈음에도 사임하게 되었다.

4. 득점 순위

순위 이름 레알 소속 기간 경기 수 득점 경기당
득점
국적
1 우고 산체스 1985 ~ 1992 154 115 0.75 파일:멕시코 국기.svg
2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1984 ~ 1995 137 56 0.41 파일:스페인 국기.svg
3 미첼 곤살레스 1982 ~ 1996 159 40 0.25 파일:스페인 국기.svg
4 라파엘 고르디요 1985 ~ 1992 147 21 0.14 파일:스페인 국기.svg
5 마르틴 바스케스 1983 ~ 1990 140 19 0.14 파일:스페인 국기.svg

5. 시즌별 성적

5.1. 대회 성적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코파 데 라리가
1986-87 파일:laLiga_trophy.png
22
유러피언컵
4강
4강 × ×
1987-88 파일:laLiga_trophy.png
23
유러피언컵
4강
4강 × ×
1988-89 파일:laLiga_trophy.png
24
유러피언컵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6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
×

5.2. 승패 기록

시즌 경기 수 득점 실점
1986-87 58 35 13 10 111 54
1987-88 54 35 11 8 119 44
1988-89 57 37 16 4 127 60
합계 169 107 40 22 357 158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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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명장들[2]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힌다. 미겔 무뇨스 이후부터 비센테 델 보스케의 등장 이전까지의 최고의 감독이었고, 1980년대 후반 레알의 최전성기를 이끌며 라리가 3회 우승,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회 우승을 차지했다. 베인하커르의 지휘 아래 레알은 리그 34경기 무패, 1패 우승 등 엄청난 기록들을 써내려갔으며 타 팀 대비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이견의 여지 없는 스페인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베인하커르는 전임 감독들이 마련해놓은 '독수리 오 형제' 등 카스티야 출신 선수들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 당대 라리가 최고의 선수 우고 산체스를 매우 파괴적으로 만들어냈으며 산체스와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최고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베인하커르 1기를 포함한 1980년대 후반 전성기의 의의는 1980년대 초반 재정난과 구단 내 정치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완전히 끝내고 팀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사실이 아니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지원으로 전성기를 맞았다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오명을 벗고 자신들의 전성기가 프랑코 덕분이 아닌 레알 스스로의 전력과 힘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게 되었다.

다만 이 베인하커르 체제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역시나 유러피언 컵 우승이 없다는 점이다. 유러피언 컵은 그 자체로 베인하커르 감독의 선임 이유였고, 유임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베인하커르 감독은 스페인 내에서의 호성적을 유럽 무대에까지 끌고 가는 데 실패했고, 번번히 4강 문턱에서 좌절을 맛봐야했다. 선수들의 퇴장과 PK 변수가 발생한 1986-87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전이나, 완전히 전술적으로 패배한 1988-89 시즌 AC 밀란전과는 달리 1987-88 시즌 PSV 에인트호번과의 경기는 레알이 이겼어야 했고, 그만큼 기회도 많이 만들어냈으며 감독이 실책을 범해 탈락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유러피언 컵 우승에 집착했던 라몬 멘도사 회장은 베인하커르의 3년 연속 실패를 참지 못했고, 베인하커르는 팀을 떠나게 되었다. 성적만으로 보면 3시즌 트로피 5개를 따낸 감독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이 시즌 베인하커르의 사임은 1966년 이후 수십년간 유럽 정상에 오르지 못한 레알이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록 유럽 대항전 트로피는 들어올리지 못했으나, 베인하커르는 1980년대 레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1] 이때 아우겐탈러는 라커룸으로 가는 도중 양쪽 관자놀이에 두 검지를 대고 베르나베우의 관중들을 도발했고, 이는 양 팀의 라이벌리가 격해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2]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네딘 지단, 미겔 무뇨스, 밀랸 밀랴니치, 레오 베인하커르, 루이스 몰로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