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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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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 21세기 한계와 비판

1. 개요2. 미국의 영향력 확대
2.1. 미국-스페인 전쟁
3. 브라질, 대지주의 시대와 뒤이은 군사독재4. 멕시코, 멕시코 혁명
4.1. 좌파 미술의 발전
5. 콜롬비아, 파나마의 독립과 커피 경제6. 아르헨티나, 백인 이민으로 인한 변화7. 기타 국가
7.1. 니카라과

1. 개요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을 다룬다.

2. 미국의 영향력 확대

19세기 초반 미멕전쟁으로 멕시코를 간단히 찍어누르고 19세기 후반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카리브 해까지 안마당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미국은 중미 지역 지배력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아직 20세기 초반 당시는 영국 자본이 남미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에 영향력이 강하던 시점이어서, 미국이 섣불리 남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눈치를 봐야하는 시점이었다. 물론 2차대전 이후에 미국이 영국을 대체하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이런 판도가 깨지지만 카우디요들이 영국 자본을 거부하던 중미에서는 일찍이 영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2.1.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팽창은 19세기를 마감하기 직전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상대는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식민지를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던 스페인.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쿠바에서는 1895년 반란이 일어났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 당시 미국이 쿠바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과, 당시 스페인이 미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본토 여론은 반란에 대하여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이 때문에 미국 측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쿠바를 미국에 순순히 매각했다가는 내각의 총사퇴나 쿠데타 등을 피할 수 없어보였다. 스페인 총리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Antonio Cánovas del Castillo)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 페세타까지' 다 쏟아부어서라도 쿠바를 수호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과 스페인은 1898년 1월 25일 메인호 침몰 사건을 계기로 4월 21일 미국-스페인 전쟁에 돌입했다. 스페인 정부가 이미 두려워하고 예상했던 대로 쿠바를 두고 벌어진 전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1898년 12월 파리 조약의 결과 스페인은 항복하고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쿠바 푸에르토리코를, 태평양에서는 필리핀을 획득했다. 이걸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을 뺐다.[1]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은 형식적으로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처럼 포장은 했으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미국의 기업들은 쿠바의 온갖 자산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사탕수수농장 190만 에이커를 에이커(1,224평)당 단돈 20센트에 사들였고, 1901년 기준 베들레헴철강(Bethlehm Steel Corporation)을 비롯한 미국 회사들은 쿠바 광물자원의 80% 이상을 소유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의 기업이 그 나라의 주권과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에 있었다.

3. 브라질, 대지주의 시대와 뒤이은 군사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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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브라질은 제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 시대를 가리켜 브라질 제1공화국(1889~1930) 또는 구 공화국(República Velha)이라고 칭한다. 1공화국은 명목상 연방제의 대의민주주의 체제였으나, 정치 전반을 특징지은 것은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대지주들이 각각 창당한 상파울루 공화당(PRP)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PRM)을 중심으로 하는 후견주의적 과두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브라질의 경제가 커피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경제이며 토지소유 구조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극심한 편중을 보였기 때문이다. 커피 재배지가 몰린 두 주의 대지주들은 커피를 매개로 세계 시장과 긴밀히 통합되어 있었으며, 활발한 커피 수출로 재산을 불려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올라섰다.[2] 초기 5년간(1889~1894)은 제정을 몰아낸 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으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이들 대지주 세력들에 의해 머지않아 잠식되었다. 캄푸스 살리스 대통령 재임기(1898~1902)에 PRP와 PRM 양당이 서로 교대로 집권하기로 합의하여 양당의 과두정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가 정치공간을 독점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며 그보다는 두 주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브라질의 국토가 광대하고 각 주를 통치하는 연방정부의 행정력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는 각각의 주에서 반독립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국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1공화국 체제는 1930년까지 유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두정 내부에 분열이 생겼고 또한 기존 과두정에 반발하는 신흥 산업 엘리트들과 중산층이 점점 형성되었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였던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1공화국 체제를 종식했다. 바르가스는 광대한 국토와 허약한 행정력으로 인해 지역주의가 강했던 브라질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고 또한 적극적으로 산업화를 도모했다. 그의 집권은 1945년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대를 가리켜 바르가스 시대라고 부른다. 바르가스 시대인 1937년에 브라질은 국명을 "브라질 합중 공화국"에서 "브라질 합중국"으로 변경했다.[3] 대외적으로 바르가스는 직전 체제의 친미노선을 계승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진영에 가담했다. 국내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여론이 힘을 얻자 바르가스는 1945년 선거 실시를 약속하고 자신도 브라질 노동당을 창당했지만 1945년 10월 군사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이후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1946년에 새로운 브라질 헌법이 통과됨에 따라 브라질 제4공화국이 선포된다.[4]

4. 멕시코, 멕시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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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어 장기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멕시코의 현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하지만, 이 과정에서 멕시코 국민들의 전반적인 반발을 샀다. 기존의 멕시코 농촌은 마을 주민들이 토지를 공동소유하고 공동경작하던 방식이라 생산성이 매우 낮기는 했다. 문제는 당시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기존의 공동경작되던 토지들을 미국의 농업 회사들이나, 아니면 정부와 인맥이 닿아있던 대지주들에게 헐값으로 파는 방식으로 재편했다는 점이었다. 한 편 미국 기업들은 멕시코의 광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멕시코인 노동자들이 미국인 근로자들에 비해 급여가 작은 것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파업을 하자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다.

일련의 토지 집산화 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스페인 지배 시절 사실상 반독립 상태에 있던 멕시코 북부 원주민들이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부는 멕시코 북부 치와와 주, 소노라 주, 시날로아 주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일부러 들볶아서 반란을 조장한 후에, 원주민들이 봉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5] 이후 원주민들로부터 강탈한 땅을 친지들이나 미국계 부동산 회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원주민들이 쫓겨난 땅은 중국인 쿨리들을 데려와 개발하였다. 멕시코 북쪽 끝 치와와에 거주하던 야키족은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절반이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로 강제 추방당했다.
멕시코 혁명은 사실상 두 가지 성격의 혁명이었다. 첫번째는 북부의 판초 비야와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같은 민중 게릴라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혁명으로서 그 목적은 지방자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였다. 두번째 혁명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지식인들, 농장주, 그리고 상인들이 이끌었던 것으로 그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축으로 근대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멕시코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농민운동의 지휘자든 중산층의 지도자든 그들은 포르피리오 디아스라는 한 개인의 장기 집권에 의해서 자신들의 희망이 얼마나 오랫동안 좌절되었는지 절감하고 있었다. 디아스는 1877년에서 1911년까지 대통령으로서 멕시코를 통치했다. 베니토 후아레스 밑에서 프랑스의 간섭에 맞서 싸웠던 이 용감한 게릴라 전사는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라는 깃발 아래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포르피리오적 개념에서 볼 때 그가 내건 “질서와 진보”라는 구호 속에는 민주주의나 사회정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엘리트층만을 우대하고 비민주적 수단을 정당화하면서 경제를 급성장시키는 것만을 의미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30년 장기독재에 반대하던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던 바로 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 과정에서 첫 빠따로 희생되었던 것은 중국계 멕시코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혁명 와중에 상당수의 미국인, 영국인들이 멕시코를 탈출하였으며 미국 기업 상당수가 멕시코에서 철수하였다.

파일:attachment/에밀리아노 사파타/Example.jpg
멕시코의 도농갈등으로 인해 혁명은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혁명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은 제도혁명당이 극좌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당내 우파 지도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dedazo)"하였는데 이로써 당내의 좌우파 지도자가 번갈아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되는 "대통령 진자(presidential pendulum)"의 전통이 수립되었다. # 제도혁명당은 토지개혁, 석유 국유화와 같은 각종 복잡한 사회개혁들을 충실히 수행했으나 이것이 경제성장으로 나타나진 않았다. 토지개혁으로 기존 대농장 소유제(latifundismo)를 해체하고 그 소유지를 소작농 공동체에게 제공한 에히도(ejido)가 정착되었지만, 에히도는 토지에 대해 용익물권(usufruct)만 인정될 뿐 소유권(ownership)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그 성격은 대한민국과 일본과 같은 자영농 육성책보단 오히려 소련의 집단농장과 같은 집산화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부의 대규모 관개시스템 건설과 같은 막대한 물적지원에도 불구하고 에히도의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즉 혁명 후 토지개혁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성과였지 경제적 성과라고 보긴 힘들었다.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46년 당선된 미겔 알레만 발데스 대통령의 적극적인 정부주도-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이 추진된 후에야 이루어졌다. 또한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은 자연스레 제도혁명당 자체의 권력 독점과 부패로 이어졌다.

4.1. 좌파 미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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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과 잉카, 마야의 벽화 문화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이후 기독교 교리를 원주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효과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한 이후인 20세기 초반에도 메스티소와 물라토들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았다. 1920년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은 국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화가들을 포섭하여 1923년부로 "멕시코 혁명을 지지하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 동맹"을 만들었다. 과거 가톨릭 선교사들이 벽화를 통해 원주민들을 선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좌파 지식인들 역시 벽화를 통해 민중들에게 좌파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파일:orozco-mural.jpg
가장 위대하고 합리적이며 가장 순수하고 강한 그림의 형태는 벽화다. 벽화는 개인 소유가 될 수 없고 소수 특권층을 위해 감추어질 수 없으므로, 가장 평등한 형태의 그림이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대표적인 멕시코의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당시 멕시코 교육부 장관에서 멕시코의 역사를 통째로 그림으로 표현할 것을 요청받게 된다. 이에 리베라는 1930~1936년 멕시코 국립궁전 2층 계단 벽에 멕시코의 역사를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민족주의의 시대로 그의 작품들의 주제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을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그의 벽화가 기존 문맹 메스티소들을 일군의 멕시코 국민으로 교육시키는데 효율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한편으로는 과격한 민족주의 운동가였으나 한 편으로는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레프 트로츠키가 멕시코로 망명을 결정한 이유에는 중에는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부부의 존재도 있었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리베라는 1933년 미국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서 그에게 정치성을 배제한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하자 일부러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십자가의 남자>라는 작품을 그리면서 작품 내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프 트로츠키를 대놓고 그려넣었다. 록펠러 센터 측은 레닌의 얼굴을 익명의 인물로 대체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리베라는 이를 무시하고 록펠러재단 측은 해당 벽화의 제작을 중단시켰다.

파일:록펠러 센터 벽화.jpg
록펠러 재단의 요청을 무시하고 임의로 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 리베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한테 이 작업을 맡긴 사람은 (정치성을 배제한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할 때부터) 이미 내 성향을 알고 있었다. (...) 개인적인 의견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레닌이다. 나는 그 벽화에서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으며, 노동자들의 진정한 지도자인 레닌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좌파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홍보하는 리베라와 오로스코의 벽화는 후술되는 쿠바 혁명 이후 체 게바라를 아이콘으로 삼아 좌파 혁명을 홍보하는 용도로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모방되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반골 기질은 록펠러 재단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 그리고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1925년 멕시코 공산당을 탈당했다가 1954년에 복당한 바 있는 그는 소련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를 모방하기를 거부하였다.

5. 콜롬비아, 파나마의 독립과 커피 경제

1880년 이후 야당이 된 자유당은 보수당의 1863년 헌법의 개정과 중앙집권 강화 시도에 반발하였다. 여기에 마누엘 안토니오 산클레멘테 대통령(1898~1900)의 지병으로 인한 지도력 공백까지 겹치면서 양당의 대립은 3년간의 천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보수당 정부가 승리한 이 전쟁으로 10~18만의 사망자가 발생, 국토 전역은 초토화되었다. 천일전쟁이 끝난 이듬해 1903년에는 파나마가 분리독립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미 함대 간의 상호 연계와 전력 재배치가 용이하도록 둘 사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할 최적지를 찾던 미국은 당시 콜롬비아령이었던 파나마를 건설지로 선택했다.

미국은 콜롬비아와 협상하여 1903년 1월 22일에 헤이-에란 조약(Hay–Herrán Treaty)을 맺고 현찰로 1,000만 달러를 주고 추가로 매년 25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 본 조약은 미 의회서는 통과되었으나 콜롬비아 상원에서는 미국이 내건 조건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에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파나마의 독립을 획책하였고, 지원을 받은 파나마 반군이 11월 3일 독립을 선언하자 6일에 독립을 승인하고 콜롬비아 연해에 함대를 파견해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미국은 바로 이듬해부터 파나마 운하를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했다. 이미 천일전쟁으로 초토화된 콜롬비아는 변변한 대응 한번 못하고 1909년 파나마로부터 5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했다.[8]

천일전쟁이 끝난 후 커피 농업이 성장한 덕분에 내전에서 겪은 피해는 회복되었다.[9] 커피의 수출 비중은 1870년대 초 8%에서 1920년대 중반 75%로 증가했다. 커피로 벌어들인 외화는 철도, 통신망, 공장 건설에 그대로 투입되었다. 반면에 전통적인 수출품인 광물과 바나나 등의 비중은 줄었다. 커피 산업의 성장은 기존 아시엔다와 달리 소농 경작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사회적으로 소농의 입지가 강화되는 효과도 가져왔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노동운동도 시간이 지날수록 활발해졌다. 1928년 12월에는 콜롬비아 북부에 있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 바나나 농장의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학살되는 이른바 바나나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10]

1929년 경제 성장은 대공황으로 크게 정체되었다. 국제 커피 가격은 절반 이하로 추락했고 외국인 투자도 급락했다. 1933년부터 커피 가격이 재상승하고 제조업이 성장하면서 경제가 회복되었지만 2차대전으로 유럽 시장이 폐쇄되어 침체를 겪었다. 1930년 정권을 잡은 자유당은 교육과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8시간 노동제 도입과 노조 조직 허용 등 사회 개혁에 노력했다.

6. 아르헨티나, 백인 이민으로 인한 변화

대항해시대 당시 스페인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후 오늘날의 멕시코와 쿠바, 과테말라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누에바에스파냐의 관할 구역은 남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서 북쪽으로는 오늘날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스페인인 정착민들은 고산지대 중에서도 온난한 지역[11]을 선호하였는데, 해당 지역에는 이미 아즈텍이나 잉카 시대 건설된 사회 간접 자본이 있어서 개발이 쉬웠던데다가,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일대[12]는 말라리아 때문에 스페인인 입식자들도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떼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 대항해시대 당시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서 동쪽 해안 지대에 해당하는 아라곤 왕국 주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한 사람들 상당수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하급 귀족들이 많았다. 카스티야-레온과 바스크 일대는 대부분 산지였기 때문에 해당 지방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고산 지대를 선호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13] 스페인 식민 지배 시절 라틴아메리카 남부 코노 수르 일대는 변방 지대 취급을 받았다.

브라질 남부에서 우루과이 전 국토 및 아르헨티나 대부분 지역에 해당하는 팜파스 초원지대는 근대 관개시설이 대대적으로 보수되기 이전에는 가우초들에 의해 방목이 이루어지던, 비교적 인구 밀도와 생산성이 낮은 지역이었으나 19세기 초반 남미 각국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팜파스의 농장들이 영국 자본의 투자를 받아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인 노동 이민자들이 유입되고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비싸게 팔 수 있는 설탕, 커피, 담배, 카카오 같은 특산물이 중요했고, 아직 증기선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밀이나 쇠고기는 수송단가 문제로 유럽에서 수입하기에는 시장성에 맞지 않았다. 식민종주국들 입장에서는 멕시코나 콜롬비아 같은 저위도 지방에서 생산되지만 유럽에서는 잘 생산되지 않는 생산품이 필요했고, 그 결과 이 지역들은 비옥한 토양에도 불구하고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었었다. 19세기가 되면서 냉동 기술이나 통조림, 우유를 분유로 가공하는 공법 등이 발달하고 영국 등 서구 열강이 이 지역의 농업 인프라에 이런저런 투자를 하면서 팜파스의 농업도 본격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냉장기술이 개발을 계기로 1876년부터 신선한 쇠고기의 저장과 운반이 가능해졌다. 신생 독립국이 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팜파스 일대의 개발을 위해 이 지역에 유럽계 농민 입식자들을 대대적으로 유치하였다.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지는 유럽 대륙이 빈민으로 가득 차 넘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빈민들이 배에 실려 외국으로 많이 보내질수록 그것은 좋은 일이었고 또 뒤에 남은 자들에게도 (노동시장의 공급과잉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좋은 일이었다. 자선협회 그리고 노동조합조차도 빈곤과 실업에 대처하는 유일한 실제적 수단으로서 구호대상 빈민이나 조합원들에게 이주 보조금을 조달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기간 중 내내 영국이나 독일처럼 영국이나 독일처럼 가장 급속한 공업화의 도상에 있던 나라들이 또한 대규모의 인력수출국이었다는 사실은 자선단체나 노동조합의 그 같은 행동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자본의 시대(1848~1875) 제11장 인간의 이동 / 에릭 홉스봄

유럽인 농민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의 원인에는 상술한 것처럼 영국의 흑인 노예 무역을 금지한 것도 있지만, 의학의 발달로 이민자들의 사망률이 감소한 것도 들 수 있다. 특히 말라리아 약이 개발, 보급되면서 신대륙에 정착하는 유럽계 이민자들의 조기 사망률이 감소하였고, 이는 산업혁명 시기 유럽 노동계층에게 강요되던 저임금 중노동 문제와 맞물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비롯한 신대륙 전역으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아르헨티나와 맞닿은 파타고니아 서부 일대 영토를 장악한 칠레 역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브라질을 모방하여 유럽인 식민을 받으면서 남아메리카의 사회 문화 전반은 적도 일대의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상당부분 다른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7. 기타 국가

7.1. 니카라과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과호, 니카라과호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연결된다. 즉 니카라과는 마나과호와 니카라과호를 통해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자연히 니카라과는 영국 미국의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긴장이 고조되던 1850년 영국과 미국은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체결해 어느 일방이 중미의 운하 통행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력을 갖거나 중미에 영토를 추가 획득하지 않기로 타협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클레이턴-불워 조약도 1901년 헤이-폰스포트 조약(Hay–Pauncefote Treaty)으로 무효화되어 벨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중미 지역에 대한 영국 영향력의 사망 선고서에 지장을 찍었다.

니카라과의 역사는 1838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탈퇴 독립할 때부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군벌의 동족상잔으로 얼룩졌다. 양측의 대립은 필리버스터 윌리엄 워커의 개입까지 초래하여 이른바 필리버스터 전쟁으로 번졌다. 필리버스터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1857년부터 1893년까지 보수당이 집권하였다. 보수당 정권은 커피 산업을 육성하고 내전으로 초토화된 인프라를 재건하고 근대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1878년에는 니카라과 태평양 철도를 착공하여 1885년 완공했다. 1869년의 짧은 내전과 호아킨 사발라 솔리스(Joaquín Zavala Solís) 대통령 재임기(1879~1883)에 발발한 마타갈파 원주민 반란을 제외하면 니카라과는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다.

보수당 정권은 1893년 자유당 군벌 호세 산토스 셀라야(José Santos Zelaya)의 혁명으로 무너졌다. 1909년까지 나라를 통치한 셀라야는 1894년 영국이 통치하던 동해안 지역을 재통합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업적을 쌓지 못했다. 셀라야의 반교권주의 정책도 과거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재건하려는 시도도 정치적 자원만 낭비할 뿐 오히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의 어그로를 끌었다. 1909년 보다못한 보수당이 동해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셀라야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1911년 보수당의 아돌포 디아스 레시노스(Adolfo Díaz Recinos) 집권을 계기로 니카라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1912년 일부 보수당 인사와 자유당이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자 수세에 몰린 디아스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여 미 해병대를 니카라과에 받아들였다. 정부군과 연합한 미국은 반군을 간단히 찍어눌렀고, 1916년에는 브라이언-차모로 조약(Bryan–Chamorro Treaty)을 체결하여 니카라과 운하 건설권과 폰세카 만의 군사기지 건설권을 따냈다.

멕시코의 지원을 받은 자유당은 미 해병대가 1925년 8월 철군하자마자 바로 이듬해부터 내란을 일으켰다. 정부의 요청을 받은 미 해병대가 다시 파견되었고 미국의 중재 하에 양당은 1927년 5월 4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평화조약의 최대 의의는 미국의 감독 하의 1928년 선거, 보수당과 자유당 군벌의 무장해제 및 니카라과 헌병대(Guardia Nacional de Nicaragua)의 창설이다.[14] 1928년 선거로 자유당의 전직 군벌 호세 마리아 몬카다(José María Moncada)가 당선되었다. 또한 이전의 보수당과 자유당 군벌과 숫자, 장비, 조직력, 훈련도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헌병대의 존재로 이전처럼 군벌들이 사병으로 정권 장악을 획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신에 그 헌병대의 사령관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1927년 평화조약 체결로 자유당과 보수당의 군벌들은 무장을 해제했지만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를 비롯한 극소수 자유당 군벌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니카라과 정부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933년 1월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이 군비를 줄이기 위해 철군하고 같은 해 2월 산디노가 니카라과 정부에 항복했다. 산디노는 이듬해 2월 소모사에게 암살되었다. 1936년 소모사는 자유당 대통령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Juan Bautista Sacasa)까지 몰아내고 1979년까지 이어질 소모사 가문의 독재 시대를 열었다.[15]


[1] 카노바스 총리는 다행히도 1897년 8월 8일에 암살을 당해서(...)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아작나는 꼴은 안 보고 갔다. [2] 미나스제라이스는 낙농업 위주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1공화국의 정치를 따로 "커피와 우유의 정치(Política do café com leite)"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스제라이스도 커피 위주 경제였다. 다만 브라질 낙농업의 중심지인 것은 맞다. [3] 1967년 브라질 연방 공화국으로 다시 국명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4] 2공화국과 3공화국은 바르가스 시대를 가리킨다. [5] 원주민들의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치와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을 사슬에 묶어서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렸다. [6] 독수리 의자에 앉은 사람이 비야, 모자를 잡은 사람이 사파타이다.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두 혁명가의 표정이 다르며 관련 일화가 있는데,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뒤 비야는 이 자리에 앉아 본 후 사파타에게 앉아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사파타는 "나는 이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모든 야심을 없애기 위해 그 의자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7]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를 비교대조한 그림이다. [8] 다만 1921년 미국이 추가로 2,500만 달러를 추가 지불하긴 했다. [9] 파나마 할양 건은 의외로 경제에 별다른 악영향이 없었다. 파나마와 콜롬비아 본토를 가로막은 다리엔 갭 때문에 사실상 해외 주나 다름없었고 통신도 교통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장 파나마 독립선언 소식을 입수한게 11월 6일인데 이때 미국은 이미 파나마 독립을 승인한 후였다. 파나마 운하 통관료에 콜롬비아 경제가 크게 의존했다면 모를까, 착공 전에 분리독립했으니 의존할 건덕지 자체도 없었다. [10] 당시 노동운동가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하청회사로 고용하는 관행을 중지하라, 노동자를 의무적, 집단적으로 보험에 가입시켜라, 근무 중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에 보상하라, 위생적인 기숙사에 살게 하고 주 6일제를 시행하라, 월 100페소 미만을 받는 노동자의 일일 임금을 인상하라, 주급제를 시행하라, 관리사무소를 폐쇄하라, 급여를 쿠폰이 아니라 돈으로 지급하라, 의료서비스를 향상하라. 바나나 학살 사건은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에도 언급된다. [11] 오늘날의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 [12] 다리엔 갭 문서 참조 [13] 스페인의 국토는 1/3이 산지이고, 평균 해발고도는 스위스 다음으로 높은 660m나 된다. 특히 카스티야-레온 왕국에 속했던 영토들은 산지가 많았다. [14] 니카라과 헌병대는 1925년 창설된 경찰대(Constabularia)가 이름만 바뀐 것이다. 기존 정규군은 1926년 사실상 해체되었다. [15] 후대에 지나치게 신화화된 산디노의 본질은 가장 마지막에 무장투쟁을 포기한 자유당 군벌이라는것 뿐이다. 정치적으로 산디노는 그의 지지 정당이었던 자유당 정권과 그 핵심인사인 몬카다와 사카사마저 미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하여 장기적으로 자유당 정권의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그의 군대는 미 해병대와 친미 헌병대에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1926~1933년간 집계된 미 해병대 전사자가 136명이고 니카라과 헌병대 전사자가 75명이데 그마저도 거의 절반 가량이 비전투 사망자였다. 화룡점정으로 항복 조건으로 헌병대의 해체를 내걸어 소모사의 어그로까지 끌어 자신의 명줄을 재촉했다. 그의 최대 의의는 거의 30년이 지난 뒤 조직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자기 이름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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