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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7:35:25

대한청년단

(창당) 대한청년단 (해산)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
]]
(합당)

[[서북청년회|
서북청년회
]]
(합당)

청년조선총동맹

(합당)

국민회청년단

(합당)

(개별 합류)

대한독립청년단

(합당)

[[조선민족청년단|
대한민족청년단
]]
(합당)
파일:daehan.png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da251d> 대한청년단 (大韓靑年團)
약칭 한청(韓靑)
창당일 1948년 12월 19일
해산일 1953년 9월 10일
당사 주소 서울특별시
총재 이승만
단장 초대 신성모
2대 유석형
최고지도위원 장택상
지청천
전진한
노태준
유진산
서상천
강낙원
건설국장/감찰부국장 김두한
국회의원
10석 / 210석
도의원
34석 / 306석
시의원
40석 / 378석
읍의원
229석 / 1,115석
면의원
2,574석 / 16,051석
당색
적색 (#DA251D, Red)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이념 친이승만
냉전적 반공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1. 개요2. 창단 과정3. 활동4.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5. 1950년~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청년방위대6. 한청의 선언문7. 한청의 주요 인물
7.1. 초기 조직
8. 역대 선거 결과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ZoY7p32.jpg
1948년 12월 19일에 창단된 정치단체. 약칭으로 '한청'이라 한다.

2. 창단 과정

사건 순서 대한청년단의 창단 과정
1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 창단 서북청년회 청년조선총동맹[1] 조선민족청년단
2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각지에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좌익 청년단체들과의 경쟁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부 수립 이후 그 중요성은 이전보다 떨어졌다. 이승만은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덤으로 이범석, 지청천 같은 청년단체 지도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 19일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조선총동맹·국민회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2] 등 전국 20여 개의 청년단체를 흡수·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에 이승만, 최고지도위원에 장택상· 지청천· 전진한·서상천· 노태준· 유진산·강낙원, 단장에 신성모가 추대되었다.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은 처음에는 합류를 거부했지만, 이승만의 압박에 못이겨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족청계와 비족청계로 분열되었다.

여담으로, 김대중도 대한청년단 출신이다.[3]

3. 활동

대한청년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단원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켜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힘썼다. 대한청년단은 200만 단원을 확보하여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문화운동과 향토방위를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청년단체로서의 역할보다는 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활동에 치우쳤다. 1949년 대한민국의 예비 군조직인 호국군이 폐지되면서 같은 해 11월 정부와 협의하여 ‘청년방위대’를 조직하여 예비군사조직의 기능을 갖추었다. 1950년 1월 대한청년단은 내부 분열로 최고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어 신성모가 단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안호상으로 바뀌었다.

1950년 5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로 20여개의 ‘청년방위단’을 창설하여 조직 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직전에 한국전쟁을 맞게 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청년방위단은 국민방위군으로 개편되어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51년 1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고 5명의 주요간부가 처형되면서 대한청년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재건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심해졌고, 결국 1953년 9월 10일 해체되어 민병대에 편입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1년에 창당한 자유당 기원세력 중 하나이다. 1948년 지청천 대동청년단[4] 이승만의 청년단체 흡수, 통합 정책에 의해 일부 정치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들이 대한청년단에게 흡수 당하게 된다.

4.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

대한청년단은 한국 전쟁 당시,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단체이다.[5]
한국전쟁 당시 경남 마산지역의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학살에 관여한 , , 우익단체 간부들[6][7]
이름 소속/직위 기타
최철용 경남경찰국장( 경무관) 임기 1949년 6월 13일 ~ 1950년 4월 26일/국민회(한민회) 초대 선전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듦
하동 경찰서장/ 부산 경찰서장
조영운 마산경찰서장 1949년 12월 7일(부림극장에서 보도연맹 결성 당시)
정도환 마산경찰서 사찰계장
강상봉 마산경찰서 형사 1950년 보도연맹원 학살에 개입 후 1952년 대한민국 방위
포장 받음
1965년 진주 해륙물산(주) 대표이사/서부연탄공업사 대표
경남냉동주식회사 대표
1981년 마산의 경남에너지(주) 사장
1985년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1987년 재향경우회[8] 경남지부 회장
노장현 마산경찰서 형사
이유성 육군/마산지구 위무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중령
이유성 해군/마산지구 정보대장 대한민국 해군 대위
허태영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9] 마산파견대장
이우정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이진영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특무계장
노양환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부대
/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육군 상사
손문기 국민회(國民會) 마산 지부장 국민회(한민회) 초대 부회장 /미군 특무대(CIC)의 통역
1946년 12월 개원한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김순정 국민회(國民會) 마산 부지부장 보도연맹 보도부장
유석형 대한청년단 단장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듦
1952년 김종신 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1952년 4월 25일 1952년 지방선거 대한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 마산시의원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 1957년 4월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1957년 국민회(國民會) 지부장

5. 1950년~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청년방위대[1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5px-Shin_sung.jpg
신성모

대한청년단의 예전 단장이었던 신성모 6.25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다. 또한 신성모는 ' 국민방위군 사건'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대한청년단 출신이었던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1950년에 대한청년단의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는 동시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대한청년단의 고위 장교들은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하여 대량의 아사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방위군 참사의 원인은 이승만이 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자신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초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당시 사건을 한 교수는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_%EC%82%AC%EB%A0%B9%EA%B4%80_%EC%B4%9D%EC%82%B4%ED%98%95.jpg
1951년,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자로 총살당한다.

6. 한청의 선언문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至急)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도구배(徒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버리기를 맹세한다."

7. 한청의 주요 인물

7.1. 초기 조직

초대 단장 신성모
초대 건설국장/감찰부국장 김두한
초대 최고위원 장택상, 지청천, 전진한, 노태준, 유진산, 서상천, 강낙원

8. 역대 선거 결과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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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후신으로 비밀결사인 백의사의 대외조직. [2] 서북청년회와 청년조선총동맹은 시기적으로 더 앞선 우익청년단체 통합으로 인해 대부분의 인사가 대동청년단에 합류했지만 일부 잔류파를 중심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조직이 남아있었던 상황이었다. [3] 본래 건국준비위원회, 대한신민당 같은 중도좌파 성향 단체에 속해있었으나 신탁통치 지지, 소련에 대한 견해 차이로 탈당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에 대한 빨갱이 낙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에 대한 근거로 언급되기도 한다. 청년기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낙인 ‘빨갱이’ [4] # [5]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 [6]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 [7]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 [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721&cid=40942&categoryId=34509 [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51&cid=46624&categoryId=46624 [10] # [11] 선거 당시에는 대한청년단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1년 뒤에 치러진 재선거에서 1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