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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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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Empire of Korea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파일:대한제국 국장.svg
국기 국장[1]
파일:vhrwhdkorea1876.png
1868년 ~
성립 이전
조선
국가 용비어천가 → 애국가[2]
위치 한반도, 만주, 몽골, 극동 연방관구[3], 허난성 일부, 청(화북지역)
역사 제1차 조청전쟁, 봉천 조약, 제2차 조청전쟁,
조러전쟁, 천명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수도 한성부
면적 10,169,167 km²[4]
행정구역 11도 1부[5]
인구 약 8000만[6]
민족 한민족: 조선인, 만주인, 한인, 몽골인, 러시아인
언어 근대 한국어, 만주어, 몽골어, 러시아어, 중국어
문자 한자, 한글, 만주 문자, 몽골 문자
종교 유교(성리학), 대승불교, 티베트 불교,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천도교, 원시 종교[7]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8], 총리제, 양원제, 다당제, 연방제
국가원수 황제
역대 황제 고종 이하응(추존), 고조 이형, 선종 이원철
역대 섭정 및 총리 이하응, 박규수, 유홍기, 김윤식
다수당 대한당
소수당 조선애국당 → 국민당
국성 전주 이씨(李)
소속 기구 범아시아 조약기구
연호 광무 → 서력
통화

1. 개요2. 영토3. 범아시아 조약기구
3.1. 일주일제3.2. 아시아주의3.3. 분리주의
4. 군사5. 산업6. 외교7. 내치
7.1. 개화7.2. 민족주의7.3. 공화주의7.4. 공산주의7.5. 유교 민주주의7.6. 종교의 자유7.7. 의회 제도 및 정당 정치7.8. 도량형
8. 문화
8.1. 동학8.2. 건축8.3. 병술보고서8.4. 만국박람회
9. 기타

[clearfix]

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 등장하는 조선 왕조 대한제국을 의미한다.

주인공 환생 수혜자 불변의 제0순위. 주인공의 강경한 개혁 및 여러 차례의 도박수에 힘입어 근대화에 성공, 서구 열강으로부터 문명국 취급 및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접어들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구는 2천만이 조금 못 되고[9], 현역병이 14만 명인데, 이형의 총동원령 선포에 자발적으로 입대한 병력만 1개월 만에 5만 명이라고 한다. 그것도 징집연령대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이들을 거르고 걸렀는데도 그 정도가 입대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50만 명까지 병력이 증강되었는데, 이 중 반절은 중원에 주둔하고 있고, 나머지는 베이징 일대와 만주, 본토인 한반도에 주둔하는 중. 전쟁이 끝나면서 총동원령을 해제하여 정규군을 20만으로 줄이지만, 몽골 지역에 있던 의용군을 흡수하여 다시 50만을 유지한다.

이 밖에도 영토나 경제, 개화 등등에서 원 역사의 조선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근대화를 계속하는 열강으로 등극했다. 심지어 참호전을 포함해서 군용 격투술이나 국제체육대회 같은 일부 분야는 세계 최초로 시도하면서 트렌드를 주도하게 된다. 본인은 열강들 사이에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위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파급력은 어마어마한 ' 드레드노트급 전함 조기 등판 계획'은 이형이 유럽 국가들의 건함 경쟁을 촉발시켜 외부로 국력을 팽창시키는 걸 억제하고, 일본과는 국력의 격차를 계속 유지하거나 더 벌리려는 의도로 추진된다. 여기에 더해 범아시아 조약기구 가맹국들 간의 육·해군 연합훈련을 계획, 아시아주의를 제창하는 등 시대를 앞선 방식으로 대한제국 중심의 아시아 패권 질서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 영토

여러 차례의 국운을 건 전쟁들에서 승리한 대한제국의 직접 통치 영토는 일단 한반도 + 만주 + 연해주 + 카간으로서 즉위한 몽골 지역이며 중원의 하남 지역 직할령도 확보한 상태다.

거기에 중원을 9개 번국으로 나누고 황실의 전주 이씨를 번왕으로 즉위시켜 사실상 대한제국의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러시아 제국과의 평화협정으로 예니세이 강 이동 지방 전체의 시베리아를 획득, 한성근 중장을 시베리아 부왕으로 임명해 영토화했다.

일본 대영제국과의 밀약에 따라 경제권, 외교권 등을 장악해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군사권은 일단 표면적으로 독립을 유지했지만 영국과 대한제국의 간섭 때문에 강제로 해군만, 그것도 국가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키우고 있어 독립적인 군사 육성을 못 하게 되었다. 거기다 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한양에 있고 대한제국의 입김이 아주 강하게 미치므로 해군만 갖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라도 하지 않는 한 독립적인 군사 운용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유구는 일본과의 공동 보호국으로 선포해 군사권, 외교권을 장악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일본은 대한제국의 위성국가니 사실상 대한제국의 보호령이나 다름없다. 대만은 일단 영국이 장악하고 있으나, 대만 왕이 이형의 형 흥친왕이며 행정적 실무 또한 총리인 흥선군 이하응이 주도하고 있다. 또한 위 국가들을 범아시아 조약기구라는, 대한제국이 주축으로 창설한 국제기구에 종속시켜 정치, 외교, 경제권 등을 장악하였다. 다만 대만은 영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좀 애매했던 것이 애초에 조약기구에 가입한 것 자체가 영국의 감시 목적이 있었다. 그 영국의 영향력 자체가 얼마 못 가 박살났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에는 베를린에서 열린 종전협상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박규수 총리가 러시아 제국 전권대사 알렉산드르 대공과 '종전 조약'을 체결해 한-러 국경의 기준을 예니세이 강으로 정하면서, 극동 시베리아 일대는 대한제국 직할령, 캄차카 반도는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알렉산드로 대공이 '동경 115도'로 제안했는데 네르친스크가 동경 116도 정도이니 예니세이 강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물론 러시아에 예상되었고 매출금(?)면에서 버텼지만. 체결 조건으로 900만 달러가 러시아 제국에 지급돼야 하는데, 이 금액은 명목상 조약의 핵심 안건인 캄차카 반도를 가져가는 일본에게 떠넘겨졌다. 그리고 일본은 영국에 빚을 져서 이 땅을 구입해야 하고, 경제대공황에 빠진 영국은 대한제국에게 빚을 져서 그 금액을 얻어와야 하는 상황.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프랑스와의 동맹의 대가로 받았다. 실질적 지배는 여전히 프랑스가 하고 있었으나, 유럽의 정세 변화로 인도차이나를 조용히 영향력 아래로 넣었다. 또한 미 합중국과 같이 하와이 왕국의 공동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강역은 직할령으로 한반도 + 만주 + 연해주 + 몽골 + 동시베리아에 달했고 여기에 더해 청왕으로 봉해진 공친왕이 만주족의 지위 보장을 부탁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죽고나면 청나라를 사위인 고종에게 넘기겠다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하면서 장래에는 화북과 산동까지 대한제국의 직할령으로 흡수될 예정이었으나 혁흔의 사후 너무 달라진 정체성으로 합병이 아닌 몽골과 같은 동군연합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괴뢰국 또는 간접적 지배 지역으로 티베트, 위구르를 뺀 중국 대륙 + 일본 열도 + 사할린 + 캄차카 반도 + 유구 + 대만 + 베트남 + 라오스 + 캄보디아 + 하와이라는,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대적할 이가 없는 절대 패권세력으로 급부상한다.

다만 작가가 그 당시 만주, 몽골, 러시아의 영역과 현대 만주, 몽골, 러시아의 영역을 혼동한 나머지 설정 지도에서 한국의 영역을 오기, 표현한 점이 옥의 티. 그리고 중간중간의 서술 과정에서도 그러한 차이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소설을 쓰다보니 이상하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10]

시대상 행정구역의 변화에 따라 지도를 바꾸지는 않는 듯. 예를 들어 만주의 경우에도 현대 행정구역에 따른 설정을 했는데 이 당시 만주라는 개념은 장성 이북과 이동에서 대흥안령 산맥을 기준하여 대흥안령 산맥의 이서지방은 몽골, 이동지방은 만주였다. 하지만 그런 현대 행정구역과 그당시 행정구역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몽골은 현재 몽골공화국 영역, 그러니까 외몽골 지방을 몽골에 편입시켰으나 그당시 몽골의 주요 영역은 엄연하게 지금 현재 중국내 내몽골자치주 영역이 몽골 영역이고 몽골이라고 칭하면 현대 내몽골과 외몽골을 통합시킨 영역에 중국 당국이 자치주의 힘을 줄이기 위해 영역을 축소시킨 일부분까지 포함해야 그 당시 영역인데 오인하다보니 직할 영역이 대폭 작아졌다. 최소한 중국에 속하는 지역에서 내몽골자치주 영역은 죄다 직할로 표기하고 소설이 진행돼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고증 오류가 잦다.

러시아의 예니세이 강의 경우에도 앙가라강이 비록 길이는 더 길지만 그 강을 지류로 치고 예니세이강의 본류로 이야기 하면 훨씬 서쪽에 국경이 그려지는데 그렇지 않다. 현재 러시아에 속하는 투바 공화국의 경우 그 당시 엄연하게 예니세이강 본류 동쪽이지만 러시아 영역으로 표기 되어있고, 그 전에 투바 공화국은 몽골이다. 몽골이지만 러시아가 2차 대전 이후 강제로 러시아에 편입시킨 몽골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바이칼호 인근의 경우에도 몽골 영역이지만 러시아가 편입시킨 땅이다.

3. 범아시아 조약기구

파일:qjadktldkwhgkqrlrn1876.png

대한제국의 주도로 대한제국·청·일본·몽골·대만·유구까지 포함한 국가들의 협력기구. 본래 대만, 유구는 다른 열강의 영역이라 가입하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대만은 영국이 가입시켰고, 유구는 정식 가입국은 아니어도 대한제국과 일본의 보호령이라 사실상 그 일부에 가깝다. 영국에서는 프로이센이 관세동맹으로 그랬듯이 아시아 세력을 모아 영국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지 않을까 경계하였으며, 이 때문에 대만을 가입시켰다. 아시아, 특히 대한제국 백성들은 그냥 천조체제의 근대적 형식의 변주로 여기고 있다. 희한하게도 미국은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칭기즈칸 독트린이라고 명명하는데 이형이 스스로를 대초원과 몽골, 만주의 카간이라고 자칭하기 때문인 듯하다.
창설 목적은 아시아의 발전과 공생을 위한 경제협력과 공동방위. 타 국가의 시선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군사연합이지만, 대한제국·청·몽골이야 어쨌든 일본, 유구, 대만은 굳이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일 원한도 이유도 없고, 국경을 맞대는 삼국도 될 수 있으면 러시아와의 확전은 피하려 하기에 공동방위는 강제되지 않는다. 일단 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부 무역관리기관 같은 산하 기구들이 한성에 설치되는 등 대놓고 대한제국이 주도하지만 공동사령부에 각국 장교들이 참여하고 일부 산하 기구들이 가맹국에 설치되는[11] 바 그냥 뺏기는 것 같지는 않으므로 좀 찜찜해하는 정도로 그럭저럭 받아들여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이루어진 가맹국 정상들 간의 2차 회동에서는 단오 축제 개최권의 가맹국 내 경합, 가맹국의 육/해군 연합훈련을 추진하는 등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 양면에서 대한제국 중심의 아시아 패권 질서 형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김가진의 아시아주의, 주인공의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전창혁의 일주일제가 발표되면서 이러한 질서 형성에 필요한 사상적 기반도 마련되었다.
이 방식은 표면적으로나마 가맹국의 자치권을 완전히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19세기식 식민통치와는 전혀 다르다. 미래인인 이형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통치방식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고 폐해는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척 및 유지를 위한 막대한 군사비, 식민 정부 운용을 위한 경제적, 행정적 비용을 지출할 역량도, 이유도 없으니 100년 후에나 등장할 여러 국제기구를 참고해서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보호장벽을 극한까지 없애버리고, 그렇게 드러난 맨살에 빨대를 꽂아 내용물만 빨아먹자는 것이다. 21세기에는 경우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얼마나 종속될 수 있는지 누구나 알지만, 19세기 사람들이 보기엔 익숙지 않은 방식이라 각 가맹국들은 등에 빨대가 꽂힌 줄도 모르거나 꽂힌 줄은 알아도 '이 정도면 참을 만하지.' 하며 빨대의 크기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형은 이런 조약기구의 본 목적이 드러나려면 최소 10년은 더 있어야 할 것이고, 그때쯤이면 이미 상당한 종속화가 이뤄졌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즉 당시 국가 상황과 세계 정세, 그리고 미래 제국주의의 몰락을 알고 있는 이형이 대한제국 주도의 패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만든,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방식과 비교하면 실제로도 매우 온화하다. 비록 정치, 외교, 군사 등 다방면에서 대한제국의 강한 입김이 미칠 것이고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동화정책이 실시되긴 하겠으나, 자체적인 정부도 있고 그 자치권도 상당히 보장되기 때문에 19세기~20세기 초반에 실제로 발생했던 각종 탄압 및 착취는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단적으로 말해 팔다리 자르고 장기 털어가서 크게 한탕하는 대신, 어쨌든 먹여살려주고 건강관리도 어느 정도 해주는 대신 꾸준히 피를 빨아먹겠다는 것이다. 당장 사지 절단을 면한 입장에서는 온화하게 보일 수밖에.[12] 300화 전후로 이런 면이 매우 부각되어, 아시아 식량농업기구는 각국의 식량 생산에 있어 필요한 각종 정책 조율과 무역을 관장하며 아시아 경제를 블록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고,[13][14] 이는 종주국인 대한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고 있다. 단순히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상호 발전을 꾀하되 항상 그 정점에 서는, 전에 없던 새로운 국제 질서를 본 서양의 여러 반제국주의 지식인들이 깊은 인상을 받을 정도이다.

특히나 식량농업기구는 아주 전체에 질소비료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신농유업 사업을 전담하게 되면서 아주 전체에서 말 그대로 초국가적인 권위와 추진력을 보여줬는데 이를 통해 일어난 일본의 문제를[15] 황제 이형이 일부러 식농기구와 의견이 불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주기구의 초법적인 힘과 공정성을 보여줬다.[16]

3.1. 일주일제

작중에서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대한 시선이 열강에서는 칭기즈칸 독트린이라던가, 북독일 연방과 같은 관세동맹이나 특이한 형태의 동군연합 정도였고, 아시아 학자들도 변형된 천조체제나 고대 주나라 천하질서라고 요약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시각은 성균관대학교 교수 전창혁( 전봉준의 아버지)이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분석해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변화한다. 요약하면 하나의 대륙에 하나의 황제가 있다. 인도와 호주의 영국, 유럽과 아프리카의 프랑스, 동토의 러시아, 중동의 오스만, 아메리카의 미국, 아시아의 대한이란 각 대륙의 큰형님 격 국가들이 식민경제 같은 약탈과 압제를 하지 않아도 협력과 교류로 충분히 발전과 공존을 병행할 수 있다는 이론.[17]

전창혁은 유학자로서 아직 입헌군주제나 의회제에 딱히 우호적이지 않은 입장이라 일대륙 일황제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내용은 의회제 국가인 미국이나 유럽의 입헌군주정 국가의 지식인들도 별 반감 없이 이해할 수 있게 쓰여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전창혁의 일주일제 논문에서는 하나의 지역강국이 중심이 되어 질서를 갖추고 주변국들이 협력하는 체제에 중심을 두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2. 아시아주의

현실 역사에서는 일본이 명분[18]으로 내세웠다가 제국주의, 민족주의를 가속시켜 망하게 만들었던 그것. 그러나 이형은 아시아주의를 내세워서 만든 조약기구 내에서 이미 가맹국들의 자치와 생존권을 보장해줌으로써 현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지도를 끌어내고 있다. 초창기부터 일본의 관료들도 명안이라고 감탄하는 등 아시아가 힘을 합쳐 외부에 대항하자는 논리는 당시 서양의 수탈에 시달리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필요성이 부각되어 잘 먹혔다. 대한제국이 계속되는 승전으로 열강들을 상대로 아시아의 자유를 보장받고, 천명대전과 한러전쟁에서도 아시아를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아시아 전체의 지식인들이 대한제국의 발전=아시아의 발전이란 의식을 가지고, 유구 인근과 청에서 실시된 합동군사훈련을 본 이후로는 경제, 외교, 문화 전 분야에서 아시아 조약기구와 그 맹주 대한제국의 패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정치적 목적을 제외하더라도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준 몽골, 청, 만주와 다른 열강에 비해 훨씬 더 존중받는 게 확실한 일본, 류구, 대만 입장에서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조선애국당 등의 급진단체와 민족주의를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생겨나자 이형은 공식적으로 혈통이 아닌 사상과 언어, 문화가 중요하다는 문화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해 아시아 유림층의 지지로 추가적인 행정력과 전파인력을 확보한다.

아시아주의의 범위를 아시아 전체로 확대할 기미가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아시아 각국들에 적당히 기구들을 설립함과 동시에 미국에서는 흥선왕 이하응이 아시아인 전체의 중심인물이 되어주는 등 국적을 떠나서 외국에서는 아시아인으로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보인다.

계속되는 상호교류와 발전으로 인해 아시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아시아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으며, 특히 중원 지역에서 그 신념이 굳건하다. 당장 중화제국으로 인한 풍년 속의 기근에 쌀 지원을 한 것이 범아시아 조약기구였으며, 아시아 전체가 농업과 문화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고, 외부의 적엔 합동군사훈련으로 대항하며 반역만 하지 않으면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 모습에 아시아주의는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커지고 있다.

대한제국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는 중원의 중화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좌절감을 안겨주는 것이, 대한제국에서 각국의 자치권을 존중해 내정에 손을 안 대는지라 대한제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이는 거라곤 아시아주의를 믿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동포들뿐, 대한제국은 중원 내에 흔적도 없다 보니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울 수도 없기 때문. 차라리 내정간섭이나 수탈을 했다면 눈에 띄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대한제국과는 싸우지도 못하고 애꿏은 동포들만 공격하는 현실에 절망해버리며, 아시아주의자들의 세력은 반대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도 '군신' 관계를 요구한 것이 아닌 '형제' 관계로서 대한제국이 큰형으로서 이끌고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구분지었다. 동아시아권에서 형제와 군신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지 않기에 겉의 명분뿐일지라도 각국에게는 자치권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확실히 받고 있으며, 심지어 대한제국 내 유림조차도 그리 생각할 정도.

아시아 내에서는 대한제국도 아시아주의라는 대의를 내세우는 만큼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각국의 목소리를 내는 기관이 되도록 하며, 일본의 원화통일 제안을 거부할 때를 제외하면 대한제국의 특권인 거부권조차 전혀 쓰지 않고 있다.

3.3. 분리주의

321화부터 묘사되는 현황. 10대 초반에 즉위해 재위 2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30대인 젊고 건강한 황제, 안정된 후계 구도, 14만km에 육박한 철도망[19], 상비군 30만과 후장식 야포 1천문에 달하는 군사력에 의해 대한제국이 안정되었고,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경제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한성은 빛의 도시라 자칭할 만큼 유럽의 대도시에 맞먹도록 성장했다. 전근대 제국이라면 안정기에 진입했다고 하겠지만 대한제국에는 분리주의라는 위협요소가 존재한다.

이는 특히 한족 젊은이들이 대한제국으로 유학을 와 민족주의를 배우면서 한성의 화려함을 경험하고 10년 전 범아시아 조약기구 창설 당시 약속했던 낙수효과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발생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역시 약탈자에 불과하며, 이제는 없어져야 할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중 설명된 분리주의자의 주장은 이제 서양에서 침략하러 안 오니까 대한제국도 필요없다는 영길리제 아편과 태평천국 난장판이 그리운 듯한 무용론이거나 한성은 그렇게 발전하는데 제 고향은 여전히 시골 마을이라는 것 등이라, 딱히 독립해도 독립국 대도시만 발전하고 시골 마을은 낙후한 채 남아 있을 상황과 차이가 없다. 분리주의자들이야 모를 일이지만 대한제국의 황실 본관인 전주마저 황제가 먹고살게는 해 줘야겠지 할 만큼 낙후될 예정인 판이다.[20]

그러나 이는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유학을 통해 아시아주의자가 된 한족 출신 젊은 학자[21]들에게 반박당하는데다 고향이나 이웃나라에서 소작쟁의, 파업, 폭동을 종용하는 것을 관리하는 경찰력은 다른 제후국에서 차출된 경력이다. 근거는 고향 사람을 봐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척 봐도 대놓고 싸움 붙일 작정이다. 게다가 각 제후국의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각 제후국 정부일 뿐이므로 딱히 맞서 싸울 상대(대한제국의 탐관오리나 일본군의 헌병 같은)도 보이지 않으며, 애초에 착취할 생각이라면 데려다가 교육시켜 줄 이유가 없다. 백성들조차 아편과 태평천국으로 난장판이던 청조 말기보다는 살기 편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감정도 과거 이형이 계획한 대로 집안 막내가 대한제국에 일하러 가서 용돈을 보내주니 가세가 좀 폈다 싶은 막연하고 우호적인 감상인데다 제후국들의 목표도 군사안보, 지하자원 채굴, 대륙철도 부설, 태평양 해상무역 등 각각 다르니 협력이란 요원하다. 심지어 한족 국가가 아홉 개나 되니까 숫자가 많아 회맹에서 세력이 큰데 왜 힘을 줄이려고 하냐며 현 상황을 지지하는 중화 자치론자도 존재한다. 분리주의자들은 이들을 분열주의자라고 부르지만 각 제후국들은 이러한 자치론자들을 우대하고 있다. 다만 초국이 너무 크니까 두세개 정도로 더 분리하자는 자치론자들을 초국에서 우대하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형과 그 휘하의 대한제국 정부는 분리주의를 강렬하게 경계 중이다. 일본이 대한제국 원화를 기반으로 아시아 공동화폐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바 있는데, 이것이 대한제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환율로 각국간의 경제적 균형을 맞추는 기능이 사라져 경제 선도국에 부가 집중되게 만든다. EU소속 남유럽 국가들 경제가 붕괴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거다. 당대인들은 공동화폐를 채용하면 편할 것이라거나, 일본처럼 비교적 체급이 큰 쪽이 유리하다는 정도의 생각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거부권까지 동원해 저지한 것은 가장 발전된 대한제국이 아시아의 모든 경제력을 흡입해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곧 제후국 백성들의 불만 → 분리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권력자는 이형 하나뿐이다. 거부권을 써서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제후국들 상당수, 혹은 강국들이 찬성했다는 의미가 된다. 분리주의자들이 대한제국이 아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제시한 사례인 만큼 회맹에서 대한제국이 거부권을 행사한 흔치 않은, 혹은 유일한 안건인 듯하며, 이를 감안하면 대한제국은 '빌미를 잡히지 않도록' 거부권 행사와 같은 강권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같은 논쟁에서 언급된 것에 의하면 대한제국에서 제안했다가 제후국들의 반대로 부결된 건도 있는 듯.

여담으로 대한제국 교육부는 국정원과 별개로 가난하지만 가능성 있는 유학생들을 찾는 정보기관을 운영한다. 1년에 10명 이하지만 가난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뜻을 알아주는 은사를 만나 출세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니, 대한에 가서 개천에서 용 났다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식 국가시책이 아니라 운 좋게 은사를 만나서라는 점이 2배로 악랄하다. 제후국의 가난하고 가능성 있는 유학생들에게 정책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 감정적 은혜를 입히는 거니까. 기득권층이었던 유학생들은 벌써 친한화했으니 비록 소수라 해도 빈민 출신의, 빈민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계층마저 분할시키는 것이다.

중화를 유지하던 핵심 소프트파워였던 한자는 점차 한글에 밀려나고 있고, 현대라면 소수민족이라 불릴 비한족 중심 제후국이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슬람교도 등 중화 독립에 관심없거나 아예 반대하는 사람도 많으며, 분리주의자 중 독립론자들도 중화를 부활시키면 제후국들 중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될지, 황제를 다시 모실지 공화국을 할지 연방제로 지방자치를 할지 분리주의자들의 사상은 사분오열돼 있다. 게다가 힘이 아니라 논리로 싸우는 분위기가 조성돼서 누군가 강자가 억지로 세력을 통일할 가능성까지 없어졌다. 어떻게 논리로 이겨도 진 쪽이 논리를 재정비해서 다시 들고 나오면 처음부터다.

뿐만 아니라, 각 제후국을 전문화, 분업화시켜 중원을 경제적으로도 분열시키려는 정책이 공식적으로 진행중이다. 대외적으로는 '아담 스미스의 분업화가 공장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증진시켰으니 대륙 수준으로 키워서 실현하면 아주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핑계를 대나, 실제로는 그걸 통해 아홉 제후국이 전부 다른 산업에 집중하게 해 타국에 대한 동질감을 못 얻게 하기 위한 계획이다. 아울러 각 제후국이 바나나 공화국화 되어 대한제국이 없이는 무너지는 수준까지 몰리게 될 것을 이형은 당연히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서양 경제학자들은 대륙 사이즈 결제사회학 실험을 공짜로 해준다는 사실에 부왘중

마지막 단계로 진시황릉의 위치를 알고 있던 이형이 러시아의 독한 술을 야밤에 몰래 들이켜서 다음날 숙취로 초췌해진 모습으로 기겁을 하며 일어나서 신하들을 소집한다. 그리고는 꿈에 진시황이 나타나서 자신을 꾸짖었다고 한다. 몽골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가다가 장안에서 습격을 당해서 요양하던 때, 자신이 이때 죽을 운명이었으나 할 일이 남아있다고 실랑이를 벌였고 이때 흑룡이 나타나 저승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흑룡이 크게 울며 진시황으로 변해 자기소개를 하고는, 천하통일을 했더니 아들은 환관 손에 죽고 능이 파헤쳐지자 크게 후회하여 귀신이 되었고, 2000년이나 지나 되돌릴 수 없음에 한탄하며 자신의 능(진시황릉)을 찾아 제사를 올려달라고, 증원을 평정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어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거냐고 꿈에서 말했다 하며 능의 위치를 알려주고 파보라 시행하게 했고,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전설로만 전해지던 진시황릉이 진짜로 발견되자 기겁해서 황제를 부르고 제사를 지내고 하는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 진시황릉의 묘비에 이형이 천하 분열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을 새겨넣어서 쐐기를 박은 것. 특히 군사력에 몰빵한데다 오랜 문명화의 결과 토질이 황폐화돼서 농업도 미비해 경제적으로 뒤처진 게 영 자존심 상했던 진국 사람들이 진시황릉 발견을 근거로 다른 중화 국가들을 멸시하고 다른 중화 국가들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로 멸시하게 되면서 중화의 화합은 영영 물건너 갔다. 결국 진나라는 타 제후국과는 별개의 민족주의를 완성했다는 듯.

그리고 여기까지가 전부 의도적인 것이었다! 아시아주의와 중화 자치론은 물론, 분리주의조차 자생해서 엉뚱한 쪽으로 튀지 않도록 관리 가능하게 키워낸 것. 아시아에서는 상상도 못하고, 수백 년 비슷한 짓을 해 온 영국 정도에서는 자기들보다 한술 더 뜬다고 눈치채고 연구하는 것 같지만, 제국주의 식민지로 시작한 대영제국이 아시아 조약 체제를 도입하면 성장한 식민지들이 독립해버리는지라 자국 식민지 통치에는 써먹을 수 없다. 영국에서도 아시아 위협론자들은 식민지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영국과 아시아 전체를 성장시켜 항상 맨 앞에 서는 대한제국의 미래 격차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도 발생했는데, 일본에서는 아주에서 영향력(표결 숫자)을 키우기 위해 반 자주적 섬들을 독립시키자는 분리주의 의견이 나오고, 만주에서는 중원계 제후국들의 국수주의에 영향을 받아 조선인과 한인들에게서 만주를 지키자는 내용이 나온다. 대한제국으로서는 만주와 한반도를 합해 둬야 유사시에 일본 및 기타 제후국들을 압도할 수 있기에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분리주의가 발현하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그나마 대한제국의 황후가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나라 황실의 최고위 거물인 공친왕의 딸이며 황후가 낳은 자녀들이 황족이고, 황태자는 절반은 만주족에 황태자비 역시 애신각라 가문 출신이라는 것으로 만주족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이외에 만주족 고위층들이 대한제국 내 행정관들로 들어가기도 하는 등 만주족들 중 가진 자들은 이미 대한제국 내에서 기득권층이 되었으며, 가난한 만주족들의 구심점 역할이 사실상 없다. 또한 대한제국 내에서 특별한 행사 때 공식적으로 조선어와 만주어를 내세우는 식으로 만주어를 중요하게 대우하는 등 만주족들이 자신들이 노예로 전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만드는 장치를 여러 개 사용하고 있다.

재위 초기에는 후손을 생각이나 할까 싶었던 이형 역시 자식을 얻고부터는 실로 착실한 아버지가 되어, 민주주의와 백성의 시대에 자손들이 목잘리거나 해외로 망명가 비참하게 사는 꼴을 피하고자 장래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황실을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장래 국민의 시대가 오더라도 대한제국에게 황실이 필요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지금껏 쌓아올린 대한제국과 아주기구 체제를 단단하게 굳히는 것이다. 술을 줄이고, 승마 같은 위험한 운동도 피하고 전국적으로 보급중인 국민체조를 틈틈이 하는 등 노력중이라고.

4. 군사

5. 산업

6. 외교

열강들에게 여기저기 뜯어먹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참한 원 역사와 달리 동북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열강들과 대등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기술과 자본이 열악해 많은 이권을 투자 유치 명목으로 내줬지만, 따갚되에 능한데다 사학도 출신인 주인공 덕분에 장기적으론 큰 효과를 보고 있다. 그렇게 유치한 자본을 볼모 삼아 미국을 대한제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 가맹국에 이롭게 조종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등 열강들을 하나씩 벗겨먹으려 한다.

한편으로는 국정원이나 군사정보국 같은 정보기관들을 통해 중화제국 영향권에서 대한제국에 이익이나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수집해 본국으로 보내거나 위협이 될 만한 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미국 공사로 파견된 민치상의 실책과 이를 이용한 존 피어폰트 모건의 농간, 천명대전에서의 대승리 때문에 미국에는 심각한 아시아 버블이 발생했다. 미국 경제가 연착륙하려면 이 버블이 터진 뒤에도 대한제국이 버텨야 하기 때문에 미국은 꼼짝없이 대한제국을 지원해야 한다.

천명대전에서 승리한 뒤에는 중화제국을 멸망시키고 태평천국과 구 중화제국령 영토들을 9개의 번국으로 쪼갠 뒤 왕실 종친들을 왕으로 봉하고, 반항하는 세력들은 대한제국 직할령으로 삼은 낙읍 일대, 다시 말해 화중의 하남성 일대에 주둔할 대한제국군으로 진압할 태세를 갖추며, 태평천국을 번국에 포함시키되 구실만 생기면 곧바로 토벌할 생각을 하는 등 남중국 일대를 영향권에 넣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 계획대로 태평천국이 선제공격을 하자 단숨에 홍천귀복을 제거하고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유럽전쟁에 온 신경이 간 러시아 정부 대신 러시아의 극동지역 수뇌부와 밀약을 맺어 반 대한제국 성향의 몽골족들을 승전 제물로 내주는 대신,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확보한다.

유럽대전 종전협정에 승전국으로 참가, 협의는 베를린에서 하지만 마지막 조인은 자금성에서 하게 되었다. 이는 이형이 더 이상 암약 못 하게 무대 위로 끌어올리려는 영국의 계획...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내정 정비가 워낙 시급해서 이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겨야 했던 터라 내각 총리대신 박규수가 전권대사로 참석하게 되어 뜻하지 않게 회피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견된 박규수가 알렉산드르 대공과 캄차카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과 영국에게 엿을 먹이는 동시에 대한제국의 이득을 극대화하고, 이 조약이 서유럽 금융공황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파급효과와 맞물려 이번에는 대한제국이 자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카네기 측)까지 끌어들여 영국과 일본에게 엿을 먹이게 되었다.

다행히 영국과의 교섭이 매우 원만하게 타결되어 검은 월요일 전 기준으로 총 300만 달러 상당의 24K 금괴와 560만 달러 가량의 14K 금괴를 영국 국채 매입 대금과 차관으로 제공하는 대신, 대한제국의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대한 대영제국의 전면적 협력을 약속받고, 주한 영국 공사인 토마스와 디즈레일리 등 영국 본국의 정계에도 친한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더해 영국에 엄청나게 큰 마음의 빚을 안기면서 대영제국과 확고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밑바탕을 튼튼하게 다지며 대한제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 확립에 더욱 가속도를 붙인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4세가 루이와의 대화를 통해 아시아 방면의 사정을 검토하고는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대한제국에 매각, 그 대금으로 아프리카를 정복해 대한제국과 함께 유라시아 동서 양쪽에서 러시아와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양 진출을 저지하는 대전략을 구상하고 있기에 영-프 양국 간의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다.[39] 원 역사에서 대한제국이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180도 다르다.

단점은 유학풍 명분의식에 젖은 관료, 의원들이 아직 열강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국제정세도 잘 모르면서 무조건 친프랑스 노선을 타는 모습을 보인다. 친영파는 강남 사태로 발언력을 잃었고, 이에 이형은 김가진을 통해 독일과의 관계수립에 나서기로 한다. 이형의 즉위 20년이 지나고 난 뒤에는 젊은 개화파였던 친불계 정치가들이 기득권이 되어, 여전히 군권을 움켜쥐고 있는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방향으로 고였다가, 어느 공무원 예정 프랑스 유학생이 생각없이 한양 한복판에서 삼색기를 휘두르며 혁명을 외친 사건 때문에 기회만 노리던 친영파, 친미파, 친독파에게 어그로를 끌었고, 어느 정도 세력을 내 주게 되었다. 문제의 유학생은 황제의 자비로 풀려났지만 산을 타다가 호환을 당했다고 한다. 왜 산에 갔는지, 대충 해수구제사업 끝낸 대한제국에서 어디서 갑자기 범이 나왔는지는 불명. 시간이 흐르면서 이형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어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따른 논쟁이 벌어지는 정도까지는 발전한다.

7. 내치

7.1. 개화

실제 역사에서는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문에 외세의 등장에 거부감이 많았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천주교를 승인하며 프랑스를 초청했고, 이렇게 들어온 프랑스군이 청나라와 전쟁에서 조선을 지원하고 도우면서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다. 거기다 영국과 미국 등의 열강도 주인공의 승전과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오면서 조선 백성들은 이들을 침략자가 아닌 멀리서 온 손님처럼 여기고 서양 문물도 접하게 된다.

물론 기존의 사대부 층에서는 오랑캐와 웬 소통이냐며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이하응이 주도한 대숙청을 계기로 찍소리도 못하고 갈려나간다. 군제개혁 때는 서양 군복을 입고 단발을 하라는 프랑스 고문관들의 지시에 병졸들이 불만을 품지만, 주인공이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서양 군복을 입으면서 원래의 단발령 사태보다 원만하게 넘어간다.[40] 이때 주인공의 솔선수범에 감동한 프랑스군의 루이 베르그송 대령은 친한파가 되었고[41], 프랑스 역시 다른 열강들보다 조선에 후한 지원을 펼친다.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루이 베르그송은 조선에서 배운 참호전 교리를 당대 기준에서 극한으로 발전시킨 덕에 보불전쟁에서 구국의 영웅이 되었으니 여느 열강들 중에서 대한제국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듯하다.

소양공주의 법회와 종로 사찰 부지 불하를 계기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세속적인 일에 소극적이었던 불교계, 지금까지 개화에 부정적이었던 유림들도 자발적으로 개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불교나 천주교에서는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셔야 우리도 산다."라는 마음에 나선다면, 유림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불교와 천주교에 빠질 것을 우려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한 것. 실제로 이형이 박규수의 항의 아닌 항의에 도발에 가까운 핀잔으로 되갚아줬는데, 이게 유림들에게 가르치지도 않는 유림은 유림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는 전방위 도발이자, 학교도 많이 세워줬으니 거기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라는 메시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유림들이 본격적으로 교육계에 뛰어든다. 아무튼 민간에서 이런 자발적인 활동이 정부의 근대화, 산업화 시책과 맞물리면서 새마을 운동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덕분에 해당 에피소드를 소개한 편의 소제목은 '잘 살아보세'.

다만 급격히 개화가 실시되면서 외국인에게 등쳐 먹힐 가능성이 급속도록 치솟는 중. 당장 정부의 높으신 분들도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전무하다 보니 서양인들의 혓바닥에 놀아나서 국가 기간시설( 경부선)을 담보로 월 2할 복리의 국채를 발행하는 어이없는 짓을 저질러 이형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을 정도. 일단 이형이 살아있는 동안 정부 레벨의 대형사고는 막을 수 있지만, 민간 레벨에서는 삐끗하면 패가망신하는 길로 굴러떨어질 사람이 줄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판.

그나마 다행인 건 서유럽 금융공황의 여파로 미국까지 경기가 나빠지자 아시아, 정확히는 대한제국으로 본사를 옮긴 카네기가 귀화하려는 마음이 강해짐에 따라, 그가 완전히 귀화하면 이형이 그를 시작으로 외국인 사업가들의 사업에 개입,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체계 등을 개선하는 식으로 부의 재분배를 강화해 서민경제 개선과 민족자본가 육성에 힘을 쓸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때문에 이형은 하루 빨리 카네기가 대한제국으로 귀화하길 바라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림들도 그 동안 젖어있던 유교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시국에 맞춰 유연하게 변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의 중심인 조선의 역량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그 원인이다. 그간 조선에서 누려왔던 자신들의 기득권이 근대화 과정에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제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커다란 기득권이 된 이상 조선이 몰락하면 조선의 기득권층으로서 누구보다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받던 자신들이 1차로 큰 타격을 받는다는 현실에 눈을 뜬 것. 여기에 더해 대한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을 통해 유럽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을 접하면서 위기의식이 형성됐고, 조선(+만주)의 객관적 국력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도덕성으로 범아시아 조약기구 내 가맹국들을 아울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때문에 대만에서 이하응이 친 사고에 경악한 유림은 이로 인해 범아시아 조약기구 내 가맹국들이 대한제국에서 돌아서는 걸 막고, 대한제국의 정점인 이형에게 돌아가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황제인 이형이 아닌 황실 종친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식으로 이하응 탄핵에 대한 집단 주청을 올린다. 그러나 유림들의 덕을 강조한 아시아주의는 인문주의와 힘을 강조하는 젊은 세대의 반발을 사서 세대갈등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7.2. 민족주의

전쟁영웅인 황제, 강대국들 상대로 3번의 승전[42], 영토 확장, 천조국 자리 차지[43], 부패한 정치가들 대량 숙청, 민생안정 등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흘러 민족주의 열풍으로 번졌다. 이형은 민심에 둔하기도 하지만 만주 확장으로 인해 민족주의에 따라오는 팽창 욕구가 알아서 채워지고 있었고 근대화하느라 힘이 쌓일 틈도 없이 소비하고 있어서 깨닫지 못했으나, 내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차선책으로 실시한 금모으기 운동이나 총동원령 시행이 너무나 쉽게 진행되자 감을 잡는다.

이형의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에 부정적이던 유림조차 이 성과를 보고 놀라 민족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났으며, 기존 대한제국인 외에 이민자들도 강제 군징집 및 한국어 교육에 의한 문화동화 작업으로 인해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러시아 극동지역 출신의 슬라브 백인계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바람에 들떠서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입대했을 정도.아마 이 세계의 대한제국에는 분명 황제교가 있을거다 박규수는 백성들이 이토록 나랏일에 호응한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했지만, 사학도로써 지나친 민족주의와 패권주의의 위험성[44]을 알고 있는 이형은 적절히 가라앉힐 고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천명대전 이후 북방에 둔전을 마련하며 제대로 된 토지대장 등이 없었던 몽골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하는 짓을 보면 그야말로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의 행패와 비슷하다.

게다가 조선애국당(!?)이라는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적 정당까지 만들어졌다. 강남 일대에서 고아들에게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다물학당을 만들어 국채 매입과 국가의 개혁정책을 홍보하고, 귀환병들의 영웅담을 담은 신문을 작성하며 지지를 얻더니 종로구에 의원을 당선시켜 의회에 진출했다. 여러모로 극우 파시즘 정당들의 행보와 비슷한 이 모습 때문에 파시즘의 물결이 대한제국을 강타할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고 독자들은 조선판 나치당이냐고 뜨악했다.

하지만 199화를 통해 조선애국당 의원 중 한 명이 역모로 참수당한 김응균의 서자인 김가진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조선애국당이 안동 김씨의 마지막 남은 역량을 총집결해 만든 정당이라는 게 드러난다. 신생 정당이 겨우 몇 년 만에 '근대화 물결에 맞춘 활동'을 그렇게 대규모로 할 수 있는 건 프랑스와 영국에 파견되어 현지의 의회 제도 등을 보고 배웠을 김병학-김병국 형제의 막후 지도와, 반역으로서 털리면서도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아 어느 정도 잔존한 재력 덕분이 큰 듯.

여기에 더해 2차 회동에서 이하응이 천자 즉위를 재차 권유하나, 국민들의 정치 참여와 의식수준 향상이 당연한 수순이기에 원 역사에서 나온 UN+ NATO를 통한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 모델을 벤치마킹하는 게 훨씬 대한제국에 이롭다는 걸 잘 아는 이형은 이를 단호하게 기각,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통한 대한제국 중심의 패권질서 수립 의지를 재차 밝힌다.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에 대해 의견을 구하면서 역량을 시험하고자 부른 김홍집과의 대화 중 태자의 교육 상태를 의논하던 고종은 "짐이 특출나게 유능한 거지, 한민족 자체가 유능한게 아니다. 우생학을 절대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우생학의 허구성과 그것이 불러온 끔찍한 결과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45]

7.3. 공화주의

아시아주의, 분리주의와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상. 앞선 두 사상은 사실 대한제국의 지원이 근본이라 통제가 쉽지만 이 공화주의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공화주의도 몇 부류로 나뉘는데 미국의 공화제를 요순시대의 이상향으로 보는 부류가 그 첫 번째다. 그러나 이들은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 유림 세력에게도 시대착오적이란 평가를 받으며 외면받고 있고, 실제 미국 유학파들은 미국은 요순시대의 이상향이 아닌 철저한 근대 패권주의 국가이며 돈을 중시하는 곳임을 알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한제국에 혁명이 벌어질 경우 득보다 실이 많음을 알기에 완전한 공화국보다는 대한제국에 의회제도와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입헌군주국을 세우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46]

두 번째 부류는 프랑스 대혁명에 경도된 세력이다. 일찍이 조선이 처음 문호를 개방한 것도 프랑스라서 프랑스 유학도 많이들 갔고 이에 따라 그 영향을 받은 것인데, 현재 집권 세력이 바로 그 친불파인 이상 혁명 시 오히려 축출될 위치인지라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거기다 이형이 폭군이긴 하나 나라가 엄청나게 부강해진 건 사실이라 혁명 세력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도 힘들다. 한 번은 젊은 프랑스 유학생이 끓는 혈기를 못 참고 대한 만세라며 공화주의를 부르짖다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빌미로 친미, 친영, 친독파에서 달려들어 물었고 결국 이형이 나서 중재했지만, 친불파는 예전과 같은 독주체제를 잃고 요직의 일부를 양보해야 했다. 애초에 혁명의 본고장인 프랑스조차 지금은 군주국인지라 황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상 혁명을 일으킬 명분도 부족하다.

세 번째 부류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인데 이쪽이 다른 세력들보다 더 큰 잠재적 위협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대한제국의 위상이 매우 높아서 민중들이 대한제국 체제 전복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정통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못쓰고 수정주의 쪽인 유교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7.4. 공산주의

작중 마르크스가 처형되어 공산주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바, 끝없는 전쟁에 신음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세계 혁명론이 발전 중인 듯하며, 아시아에도 전파되었다. 다만 전통 유학적 사고방식과 결합해 혁명론보다는 복지제도 확충 쪽으로 전개 중. 스스로를 유교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제국에서도 하층 노동자들은 고기는 커녕 무 조각도 없는 국에 푸석한 안남미를 말아 훌훌 넘기는 상태이니 제후국들의 하층 노동자 상태 및 대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쪽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것도 다른 열강의 식민지인 대우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상태. 현재 동학이 교세 확장을 위해 사회주의와 협력하는 상태가 되었다.

7.5. 유교 민주주의

아시아에서는 온건 우파, 유럽 기준으로는 간신히 극렬을 면한 좌파에 속하는 사상. 병술보고서의 완성과 국민보험 제도의 도입으로 완성된 이념으로, 전창혁을 비롯한 성균관의 정치학자들이 정립한 사상이다.

기존의 공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과는 달리 순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단 유학에 근거를 둔 이론답게 괴력난신을 철저히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서양의 합리적 인간관과 비슷한 인간관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악으로 보는 게 실로 성악설 기반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유교 민주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이 혼란을 야기하므로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상은 비록 유학의 주류였던 기존 성리학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유림의 세대교체로 인해 유림에서도 지지를 받는 편. 실제로 신진 선비들은 외양이건 사상이건 모던 보이와 선비의 중간 정도에 있기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유교 민주주의가 성균관에서 나온 사상이기도 하고...

7.6. 종교의 자유

애초에 고종은 즉위 전에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에게 병오년 참극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이는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빙의했다는 위화감을 더 큰 충격으로 덮을 의도로 한 일이었으나, 이런 맹세를 했다는 핑계가 있어서 천주교는 물론이고 (훗날의 일이지만) 불교에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개항을 하기 위해선 더더욱 천주교 박해를 멈춰야 했고, 프랑스를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파트너로 여겼기에 그들의 국교인 천주교 박해를 엄히 금했다. 황후인 소양공주 또한 티벳 불교 신자이기에 불교가 힘을 얻고 한성 내에 사원까지 세우자 유자들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항의했고, 잊고 있었던 이형은 휙 내던지듯 종교의 자유를 허한다. 이에 따지고 들어온 박규수 포함 유림들에게도 "백성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유림들이면 그들이 불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주면 될 것이 아닌가?" 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그들이 자청해 개화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한편 미국 순방에 나선 이하응이 자신을 환영해주는 아시아인들을 보고 감동해 마음을 고쳐먹고, 남은 여생을 서부에서 보내며 그들의 권익향상에 힘쓸 것을 결심했다. 이후 1천 명의 아시아인들과 함께 장로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것으로 대한제국 황가는 유교도(작중 언급에 따르면 이교도; 고종), 불교도(소양황후), 천주교도(부대부인 민씨, 제 2황자 이강), 개신교도(흥선대원군)로 총 4개의 종교 신도로 구성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비난하는 행위를 황실 모욕죄로 처벌하며 종교의 자유는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7.7. 의회 제도 및 정당 정치

무진개혁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총리제를 채택하면서 의회와 정당이 생겼으며 선거제도도 갖추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황제와 황제로부터 임명된 총리의 권한이 높았으며,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무지한 백성들이 그저 인기투표로 생각한 상태. 이 때문에 투표함이 거리에 아무렇게 설치되는 등 비밀투표는 불가, 하급관리 1명이 수천의 유권자를 담당하니 절차와 관리도 건성, 행인들은 심심풀이로 2~3장 이상 투표하는데 무효처리도 되지 않는 등 그야말로 총제국 난국. 거기다 관영정당인 대한당이 후보를 내면 당연히 백성들이 투표하여 당선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종로구에서 조선애국당의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생기면서 관영정당인 대한당 의원들 사이에 1명이나마 조선애국당 의원이 들어온 상황이다. 그리고 민족주의 부분에서 전술된 것처럼 그 조선애국당 의원 한 명이 김가진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조선애국당이 안동 김씨의 마지막 남은 역량을 총집결해서 만든 정당이라는 게 드러난다. 따라서 제대로된 입헌군주제와 총리제가 되려면 갈길이 멀었다. 적어도 고종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야 틀이 잡히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47]

게다가, 박규수의 은퇴로 공석이 된 총리대신 자리에 민승호를 추천하는 의원들이 나오는 걸 통해 함양과 인천에서 프랑스와의 교역권에 개입해 부를 착복하는 민씨 일가[48]가 의원들에게 뇌물을 공여하고 권력까지 잡으려는 모습이 드러나자 이를 괘씸히 여긴 고종이 임시 총리로 유홍기 의원을 세우며 제동을 건다. 구한말에 민씨 척족들이 뭘 했는지 이형이 모를 리 없으니 이들의 행보에 대해서 제동을 많이 걸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친일파와 더불어 이형에게 내부의 암적 존재로 간주되어 견제대상이 되었고, 결국 숙청당한다.

이후 대한애국당은 이형의 지원하에 국민군과 국민주권론을 주장하며 만주족을 비롯해 다문화를 추구하는 국민당으로 개명되었으며, 선거에서 의석수 3분의 1을 차지하며 대한당과 함께 양당의 축으로 성장할 기미를 보이는 중이다.

7.8. 도량형

미국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을 대한제국에 사절을 보낸 직후, 이형은 공사로서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앙리 벨로네를 불러서 야드파운드법 대신 프랑스가 개발한 도량형인 미터법을 채택할 것이고, 미터법을 중심으로 세계 도량형을 편성하겠다고 했다.(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대업적이긴 하다.) 컨테이너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촌구석 황제가 도입해봤자 유럽에서는 신경도 안 쓸 것이므로 전부 프랑스에게 밀어주어 실리만 챙기기로 했지만, 실록에는 남을 것이다.

8. 문화

폭군판 새마을 운동과 산업의 발전으로 부가 축적되며 자본을 가진 계층이 자발적으로 선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화 산업의 기반에는 자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경우에도 돈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잉여 활동을 할 수 있다. 작중 조선 민중들이 극도의 빈곤이나 기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니 망하더라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귀족처럼 집안에 화가를 고용해서 조상님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명문가가 나왔는가 하면, 짝퉁인 줄 모르고 아름다운 서양화를 긁어모으는 졸부들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문화의 도입과 흡수가 가속도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유럽 정세가 개판 오 분 전임을 가만하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아시아로 오는 프랑스 예술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49] 한편으로 오페라를 흉내 내는 극단들도 나타나고, 최고의 판소리꾼을 지망하는 이들도 나타나 이전 시대보다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다.[50] 스포츠에 있어 노동 계층은 축구를 즐기기 시작했고, 만주에서는 경마가 활성화된 듯. 축구나 경마는 군사 훈련이나 군마 양성에도 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이형은 기술교류와 문화교류 두 고삐를 모두 잡을 겸해서 자신의 즉위 30주년(1차 회맹에서 17년 후)에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한다. 장소는 전주. 이거 하나 때문에 범아주 조약기구의 모든 국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차라리 한성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조선이 개국된 이래 풍패지향이라 불리는 전주에서 행한 만국박람회가 망해버리면 그건 전주가 본관인 대한제국 황실의 망신이 되기 때문. 이와 별개로 고종이 전주를 선정한 건 한성의 부동산 시세 문제도 있지만, 경부 축선 중심으로 개발될 대한제국령 조선의 미래를 감안해 명색이 황가의 고향으로서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고자 내린 결정이다. 각국의 기술과 문화를 전 세계에 공개하되, 어차피 서양 열강에 비하면 뒤떨어질 것은 뻔하니 일반 민중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도록 주의하라는 명은 덤. 결국은 분열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80년대 되면서 한양은 각국의 문물들이 들어오고 프랑스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전한 유흥문화로 파리와 같은 도시가 되어가는 중이다. 가로등 덕분에 밤에도 시내가 활발하고, 동대문 거래소에는 유구 같은 소국의 1년치 예산이 하루 만에 거래되고, 명동에 건설된 어용 백화점과 할인점에는 세계 각국의 향수들을 비롯한 여러 물자가 풍부하다고 묘사된다. 카페도 도입됐는지 성균관 대학생들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론한다고 서술이 되었다.

즉위 30년을 맞이해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도 재건하려고 한다. 원 역사에서는 대원군 시기 무리한 재건으로 당백전이라는 희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걸 알기에 미루던 건데, 이강의 결혼을 계기로 재건하면서 시대변화에 따라 수도와 전기를 달고, 색목인 며느리를 위해 서양식 별궁을 짓기로 한다. 미영전쟁을 막기 위해 한국으로 달려오던 모건은 궁전 하나 짓는 게 이제 와서라니 사치가 뭔지도 모르는 황제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냐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8.1. 동학

이형의 즉위 이후, 계속되는 승전과 개혁으로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사라지고 학정을 벌이던 탐관오리들이 숙청되면서 한동안 크게 교세를 잃었다. 또한 기독교의 공인과 확산으로 외국과 연줄이 있는 교회들의 확장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2대 교주 최시형은 한울교로 개칭하고 교단에서 종교적 색채를 줄이고, 현실참여를 위해 삼청 원칙[51]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 시민단체가 되었다. 이에 신흥 자본가들과 동학이 역적 혐의로 숙청된 일을 기억하는 관료와 의원들이 동학 처벌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이형이 3번이나 거부하면서 동학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신하들과 유학자들은 저 개망나니 황제가 이제는 세 번이나 말을 듣고 말로 답할 만큼 점잖아졌다고 감동하면서,[52] 행정적인 방법으로 동학을 탄압했다. 감동은 감동이고 역적은 역적이고 괜히 체포해서 구속 가능한 한도까지 가둬놓는다거나, 이리저리 허가를 안 내준다거나...

정치참여가 정부의 경계를 샀음을 알게 된 동학 수뇌부는 최시형의 비정치 복귀파와 손병희의 적극적 정치참여 분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손병희의 동학은 프랑스 유학파들 중 사회주의자들을 흡수하고 유교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운다. 이들은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자는 사유재산 부정론자들까지 끌어안고 사회주의란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였다면 말 그대로 정부의 숙청 대상이 이름표를 단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들은 일반 사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 공권력이 경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절하게 개입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뿌리부터 사회주의의 성인 마르크스를 숭상하는 유럽 본토 사회주의의 공감대를 얻기 힘든 이 의견은 일본과 달리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형은 사회주의와 공화주의가 제정과는 상극임을 알기에 그들의 정치참여는 금지하지만 복지제도를 정비한다. 현실 역사에서 왕당파인 비스마르크도 사회주의 세력 대두에 대응해 최초의 사회복지를 만들었듯이 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온건 개혁을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대응 방법이다.

8.2. 건축

한반도에는 거의 무제한급으로 석회가 넘쳐나고, 산업화 과정에서 철강왕 카네기와 손잡으며 대량의 철강을 쏟아내기 위해 석회공장을 대량으로 지은데다, 소양강댐을 대표로 하는 거대 토목공사 사업에 콘크리트를 대량으로 쏟아붓는가 하면, 각 지역의 저수지 공사에도 시멘트를 보내며 콘크리트를 이용한 건축기술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한양은 아예 콘크리트로 다시 지어진 수준일 정도.

여기에 더해 현대의 상식을 지닌 이형이 원래 역사에서 1920년대에나 나오는 현대식 마천루의 개념을 거의 50년 앞서 제시하면서, 정주의 마천루 천궁(天宮)을 시작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현대식 마천루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천궁은 건축가들이 당시 부족한 철근 콘크리트의 기술력에 계산에 계산을 거듭해서 최소한의 두께로 벽을 만드는 것으로 타협했지만, 이형은 마음에 썩 들지 않았고[53], 결국 그 후, 1888년 개성에 30층 높이로 세워진 한국 증권거래소를 시작으로 완전한 현대식 마천루가 들어선다. 이때 흡족해한 이형 덕분에 조선의 건축 방향성은 마천루로 쏠리고, 결국 건축가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현대식 건물의 아이디어를 내고 짓는 등[54] 압도적으로 발전된 미래지향적 건축이념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결국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미래주의의 고향이라 부를 정도로 혁신적인 건축물들을 잔뜩 짓게 된다.

그 절정은 마포에 설립된 황립 중앙도서관. 지상 16층, 지하 2층 구조의 이 도서관은 1층을 기준으로 각 층마다 좌우로 6도씩 어긋나게 쌓인 책을 이미지해 건축되었으며, 이형은 시키지 않아도 잘 짓는다며 아파트 단지를 짓게 해도 되겠다는 평을 내렸다. 얼핏 그 말을 들은 건축가들이 또 뭘 시키냐고 공포에 떨었지만 알고보니 그냥 큼직큼직하고 세세하게 나눠진 연립주택이었는지라 마천루에 비하면 쉬워서, 건축가들이 알아서 설계도를 마개조중.

8.3. 병술보고서

동학교도들이 세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끌어들여 정치활동 참여를 시도하자, 그걸 막음과 동시에 복지를 실시해서 노동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든 통계자료다. 백성들을 빈곤층, 중산층, 부유층으로 분류한 뒤 각 계층의 소득 평균과 생계 유지에 필요한 최저소득을 파악하게 했다고. 컴퓨터도 없이 이 짓을 하느라 아시아 전역에서 수만 명의 산관(수학자)들을 끌어모아 10년이나 걸려 만들었으며, 작성 도중 관료 수백 명이 과로사하거나 은퇴에 몰렸을 정도.세종대왕도 울고갈 정도다 그 과정에서 기계식 계산기가 도입되고 각종 개선이 이뤄지는 등 국가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긴 했다. 모티브가 된 것은 원 역사의 영국에서 1941년 계획되어 에니그마 해독을 위해 발전한 초창기 컴퓨터를 동원해가며 1942년 완성된 베버리지 보고서.

복지제도를 설치하기 위해 만들었다지만 다른 열강들을 엿먹이는 효과가 더 큰 악독한 흉기다. 대한제국이 전후 이러한 복지제도를 실시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 하층민들에게도 동요가 가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들의 손에 총이 들려있다. 그렇다고 대충 땜빵으로 눈속임을 하려 하면 성에 안 찰 테고, 과하게 복지예산을 책정하면 전후복구와 이후 발전에 방해되어 대한제국과의 성장경쟁에서 발목이 잡힌다는 사악한 계획.

심지어 보고서 발표와 그에 따른 사회보험의 실행 과정에서 발생한 논란에 대공청회라는 카드를 들이밀면서 자국에 진짜배기 정당정치의 씨앗을 심는다.[55] 이는 사상투쟁과 정치토론으로 더욱 발전해 자국의 사회 보장, 위신 상승, 정치 개혁, 외국 발목 잡기가 동시에 가능한 일석사조의 흉악한 물건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 보고서가 조선에 큰 영향을 가져오는 에피소드에서 국밥 1그릇 관련 드립[56]이 나오는데, 덕분에 빅맥지수가 아닌 국밥지수라는 말이 댓글에 달렸다.

8.4. 만국박람회

이형이 낸 아이디어로 전주에서 개최되기로 하였는데 이는 서울이나 부산쪽은 나중에 산업화로 반드시 발전하게 되니 전주가 이에 뒤쳐지면 그래도 황가의 시조가 되는 땅인데 낙후된 시골이면 곤란하니 문화도시로라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전주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첫 박람회는 이형 즉위 30주년을 맞아 전주에서 개최된 아주 최대의 국제행사였으며 유럽의 세계대전 여파로 유럽은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구색만 냈다.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은 아주인들만의 모임이나 마찬가지인 아주 박람회라고 비하하지만 아주 지식인들은 이제 아주가 유럽 없이도 당당히 세계적 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첫 박람회는 세계대전 도중이었기에 정부에서도 많은 우려를 하여 유럽은 몰라도 아주의 관람객이라도 끌어들이고자 노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거나 교통비를 일부 부담하는등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이에 무색하게 유럽에서도 제법 많은 참가자,관람객들이 모였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전쟁 때문이었다. 정부들은 전쟁에 바빠 이름만 올리거나 사소한것만 만들어 구색을 냈지만 민간인들은 달랐는데 부자들은 피난을 위해서,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서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우리 나라의 이름을 알리는 것 또한 애국' 이라는 구실로 민간참가자로 전시품을 채웠고 중산층이나 하층민들은 아시아까지 가면 징병관들이 오지 않으니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관람객이 되어 온것이다.

대한제국이 전혀 관계하지 않았음에도 대만에서 시작해 일본의 지지를 얻고, 상해에서 설립된 아주예술위원회가 앞장서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끝에 공자-석가-옥황 등의 아시아의 갖가지 종교의 성인과 신들이 모인 만신전이 만들어지고 전주에 모인 예술가들로 전주가 예술의 도시로 화하는 등 갖가지 호황을 이끌어내고 있다.

9. 기타



[1] 이화. 이화는 전주 이씨의 상징인 오얏나무(자두) 꽃을 의미한다. [2] 작곡은 이탈리아 작곡가가 맡았고, 가사는 원래 용비어천가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이형이 현대의 애국가를 차용해서 개사하였다. 가사는 조선에 편향되었거나 대한제국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차용되었다. 주인공 曰 새마을 노래같다고. [3] 사할린 캄차카 반도를 제외함. [4] 오늘날의 캐나다보다 크고 러시아보다 작다. [5] 조선 8도, 한양 1부, 그리고 만주 3도. 동시베리아는 서백리 부왕으로 몽골과 청은 동군연합으로 관리한다. [6] 495화, 한국위협론 기준. 대한제국 4,584만명, 청 3,389만명. 이외에도 아주대륙내 조선계 및 만주계 인구가 210만명 이상 분포 , [7] 극동 및 시베리아 지역 한정 [8] 헌법에서 입헌군주제를 명시하긴 하였으나, 제국 성립 초창기에는 황제의 권위가 워낙 막강하고 국민들의 의식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전제군주제와 같이 굴러간다. [9] 319화 기준으로 4천만을 넘었다. [10] 본작 작가만의 문제는 아닌게, 이쪽 바닥에서 많이 언급되는 타 유명 작가의 경우도 지리설정 면에서는 구멍이 좀 많이 보인다. 아무래도 대하대체역사물의 특성상 다른 설정들에 비해 지리적 배경에 대한 지식과 설정은 다소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긴 하다. [11] 대표적으로 일본에 극동보건기구가 설치되었다. [12] 그래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반농담 반진심으로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거다. 물론 진작부터 식민지화는 관심도 없던 이형은 자기 나라 피를 뽑아가겠다는데 만세를 부르는 요시노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13] 식량농업기구를 통하여 각국은 농작물을 기르는 노하우나 지식을 주고받으며 어업과 목축업 등 거래도 활발하며 사실상 일차사업을 모두 주관하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사상이 뿌리 깊은 아시아권에서 이런 대규모 협력은 사실상 하나의 공동경제체로 활성화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서로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하게 만들고 있다. 일차산업이 대다수인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사실상 경제 외교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14] 더욱이 농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현대 농업은 생물학, 화학과 같은 각종 기초과학 뿐 아니라 도로, 철도, 댐 등 각종 토목 공학, 고도의 경영학 등이 적용되어야 가능한 복합 산업이다. 아시아 식량농업기구는 이러한 영역을 모두 주도적으로 진행할 권한이 있고 아시아 각지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거의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등 매우 강력한 기관으로 묘사된다. 사실상 아시아 공동 경제개발 (및 대한제국의 종주화)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인 셈. [15] 아직 영주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각 번주들이 식농기구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아 끈질기게 방해하고 사보타주를 가했다. 이에 수십년간 혼슈의 에도 정부가 홋카이도를 차별하자 원한과 야심이 쌓인 마쓰마에 번은 독자적으로 식농기구의 개입을 환영하면서 에도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의사를 보인다. [16] 당연히 한국 정부가 미리 짜고 친 일이었다. 심지어 일본 정부의 모순적 태도를 비난한 식농기구 부총재는 일본인이었다고. [17] 일주일제론에서 말하는 대륙은 지리적 개념이 아닌 문화적 또는 문명적 권역 개념으로 통하는 듯하다. [18]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경우 대동아 공영권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를 몰아내고 번영과 평화를 누리자."라는 내용을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제국이 팽창주의와 생존권을 통해 식민지 수탈 등의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이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주장의 매우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였다. [19] 차기 10년에 30만km를 넘는 대륙철도망이 완성될 계획이다. [20] 만국박람회 개최의 나비효과로 문화예술의 번영지가 되면서 번영했다. [21] 보통은 기존 기득권 출신에 못해도 한국 영주권, 심지어는 시민권을 따낸 경우까지 있다. [22] 디자인 자체는 프랑스 제국의 것과 유사하며 상의는 흑색, 하의는 어두운 남색, 안감은 흑갈색. [23] 조선은 동쪽에 있는 나라니 청룡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쓰는 게 맞다는 이유. 정작 이 당시 프랑스 군복이 청색 계통인 점을 생각하면 묘하다. [24] 1차 대전 때 컬러풀한 군복을 유지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영국도 보어 전쟁에서 눈에 잘 띄는 붉은 군복을 입다 피해를 보면서 위장색의 필요성을 깨닫고 카키색 군복으로 바꾸었다. 다만 프랑스 군의 블루톤 군복은 전장에서 의외로 눈에 잘 안 띄는 편이었다. 개전 직전에 통과돼 1915년 바로 보급된 이 연하늘색 군복은 하늘이나 돌 색에 나름 잘 묻어가는 편이었는데, 하필 모자와 바지가 붉은색인 게 문제였다.(…) 결국 나중에는 케피 모자 상단을 제외하곤 붉은색이 상당수 사라지게 된다. [25] 나중에 가서 군함을 직접 건조하려면 조선소가 필요한데, 군수 수요로만 조선소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물선이나 여객선 등을 건조해야 조선소가 유지-발전하는데, 현재의 대한제국으로서는 이 두 선박으로 조선소를 유지할 만한 해운 수요가 사실상 없다. [26] 분명히 대한제국이 직접 통치하는 만주와 한반도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운산 금광이 본격적으로 가동돼 미친듯이 금을 쏟아내고, 러시아를 극동에서 축출한 뒤 만주 평원에 미국 중서부 부럽지 않은 대농장을 일궈서 인구를 늘리며, 석유 관련 기술들이 개발되어 대경유전과 발해만 유전에서 석유를 뽑아낸다면 대한제국 자체 역량만으로 충분한 강대국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동군연합식으로 통치하는 몽골에 무지막지하게 매장된 광물까지 파낸다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27] 작중 묘사를 보면 술시중을 들게 했을 뿐, 그보다 더 심한 건 묘사되지 않는 걸 보아 큰 문제는 안 일으킨 듯 하지만 그들을 대체한 민병대는... [28] 엔필드의 경우 미국은 내전 방지 목적으로 매각을 시도했고, 철도 수주에서 미국 회사에 우선권을 주는 걸 대가로 소총 1자루당 탄약 60발을 더해서 1만 달러에 매각했다. [29] 물론 개틀링이 정칙 채용되며 미트라예즈는 생산되지 않고 샤스포만 라이센스 생산을 시작했다. [30] 대한제국이 프랑스의 탄환 규격을 따른다는 건 프랑스 제 탄환을 수입할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탄환을 수입한다는 것은 당장은 프랑스와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현실에 비유하자면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과 동일한 NATO 탄약 표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별 말 없이 넘어가준 것. [31] 다만 이형이 항공쪽에서도 손을 써두었는지 소설 종결 무렵 복엽기 편대들이 비행하는 묘사가 나옴에 따라 아마 현 역사에 나온 전투기들이나 항공기들은 물론 기술수준이 기존 역사에 비해 빠르게 등장하고 크게 발전할것으로 보인다(...). [32] 포항의 제철소 건설 당시에는 호랑이 등의 맹수들이 습격할 일이 없고, 양반들의 선산이 없어서 부지 확보와 건설은 쉬웠지만 전문 인력이 없기에 장인 100명이 미국으로 가서 카네기 제철소에서 10년 동안 기술연수를 받고 카네기 제철소 소속 엔지니어 20명이 파견되었던 상태다. 당연히 모든 면에서 해외에 의존해야 했다. [33] 그나마 카네기는 이형의 지시를 잘 따르고 있어 조선인 장인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작정이다. [34] 덤으로 일본 국내 곡물상인들도 망했지만, 곡물 무역상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35] 현대 한국인들은 이미 다 깔린 치수 인프라와 이미 개척된 땅을 가지고 밭 좀 갈아서 씨 뿌리는 영세농이 농업의 전부인 줄 알지만 실제로 현대 농업은 치산, 치수, 수송, 보관, 가공이 종합적으로 연계되는 어마 무시한 산업영역이다. 일본이 조선을 수탈한 수단 중 하나도 토지 자체의 수탈과 수리조합을 통한 저수지, 수로 건설 및 이용료 착취였다. [36] 대한제국도 거부권이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다 보니 다수결에 밀려서 대한제국이 반대해도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위에도 설명했듯이 사실상 경제외교의 장으로 여겨지는 중. [37] 항의하다가 황명이란 단어가 나오자 태도가 바뀌는 게 개그 포인트. 한 학자는 아주 연구기금에 속한 연구원에다가 봉천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얻었다고 자랑하면서 식농기구에 협력을 거부하다가 황명이라는 말에 진작 말하지 왜 사람 무안하게 하냐며 바로 따른다. [38] 서양 국가들의 가정: 저렇게 동원된 2천만 명이 농기구가 아니라 총을 든다면?뭐긴 2차세계대전 독소전 후반을 보는 거지 [39] 영-프-한 삼국이 뭉치게 되면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는 동(대한제국의 태평양 방면.), 서(북대서양 출입구인 GIUK+F와 중대서양 출입구인 지브롤터.), 남(영국령 인도의 인도양 방면.) 삼면에서 바다로 진출할 길이 막힌다. 북쪽엔 북극뿐이고, 그 중 반은 캄차카 조약 때문에 대한제국에 넘어갔다. [40] 원래 현실의 단발령도 고종과 왕태자였던 순종이 먼저 머리를 자르면서 시작했으나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이때는 하필 을미사변 직후라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던 탓에 왕이 먼저 상투를 자르면서 의도했던 "폐하께서 솔선수범하여 자르셨으니 우리도 따르자"가 아니라 "폐하께서 상투를 잘리셨다"고 받아들였던 것. 그러나 이곳에서는 대국이라던 청나라를 발라버린 소년영웅 국왕이 먼저 자른 것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단발령하면 "목이 잘릴지언정 머리를 잘릴 순 없다!" 라고 외치는 것만 생각나겠지만 그건 을미개혁 얘기고 광무개혁 시기에도 단발령이 있었지만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41] 동시에 병졸들이 입는 군복은 병사들의 군복이라면서 대령이 일단 자기 외투를 벗어준 뒤 급하게 본국에 요청해서 대원수용 군복을 한 벌 구해왔다. 프랑스 본국에서 만든 게 아니라 상하이 조계에서 만든 거라 조금 조잡하기는 해도 체구가 조금 작은 주인공에게 맞춘 터라 움직이기도 편한 데다가 극동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품이라고 묘사된다. [42] 청을 상대로 2연승( 제1차 조청전쟁, 제2차 조청전쟁), 러시아를 상대로 1승( 조러전쟁). [43] 대한제국 백성들이 범아시아 조약기구 결성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청(만주+한족), 일본, 몽골, 유구라는 기존 세계관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였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 청나라를 두들겨패던 서역의 강국 영길리조차 대한을 아시아의 대표로 인정했다. [44] 아직 소년인 이완용부터가 이 위험성을 짐작하고 자신이 권력을 틀어쥘 도구로 써먹을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45] 위험성도 위험성이겠지만 또 이게 잘 나가는 나라에서 성행하기 쉽다. 우생학이 완전히 판치던 국가들을 보면 전부 하나같이 열강 내지는 강대국들이었다. [46] 이형이 장차 노리는 것도 대한제국의 입헌군주국화다. 물론 이형의 지지도가 이미 너무 높아서 그가 황제로 있는 동안은 절대 무리. 아무리 일러도 한두 세대쯤 뒤에나 실현될 구상이다. 부탄처럼 통치자가 민주화를 요구하고 국민이 반대하는 양상이 나올 수도. [47] 일본에서 최후의 번벌내각으로 평가되는 3차 카츠라 내각이 호헌운동에 휩싸여 무너지고 1차 야마모토 내각이 수립되는 것이 1913년의 일이다. 외교라든가 돈 문제는 이형의 사기적인 지식으로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대중들의 지식과 의식은 치트키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대한제국 역시 비슷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나마 대한제국은 나름대로 붕당정치의 역사와 경험이 있으니 정당정치의 기반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48] 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라서 프랑스 외방 전교회와 친밀한 관계인 터라 민씨 일가에게 줄을 대면 프랑스 상인들과 밀가루-설탕 등을 교역하는 게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49] 실제 역사에서도 번잡하고 요란한 유럽을 떠나 타이티 같은 휴양지에 이민을 온 예술가나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50] 사실 조선 후기에도 양반이나 학식 있는 상민 출신의 광대나 판소리꾼들이 아주 없진 않은데, 이들을 더러 '비가비'라 불렀다. [51] 황제의, 국제사회의, 민중의 말을 들으라는 내용. 제일 먼저 나오는 게 황제다. [52] 폭군이라는 것에 걸맞게 고종은 유학자들이고 신하들이고 하는 말을 그동안 잘 안 들어먹었다. 물론 고종 입장에서도 당연하지만... 물론 그럼에도 아무도 반발을 못한건 당연하겠지만 고종 1인의 능력으로 저 엄청난 업적을 세워놔 도저히 반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다. 그러니 말도 안 들어먹는 황제에 대해 속으로만 꿍시렁거릴 찰나에 고종이 세 번이나 점잖게 들어준다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리가 없다. [53] 그래도 건축가 한 명당 한화 2500원씩을 포상금으로 내렸다. 이 시점에서 한성의 집값이 평균 1000원이다. [54] 작중에 언급된 내용만 봐도 빌딩의 기둥을 중앙에 크게 하나 만들거나, 마천루 중앙을 비워놓은 도넛형 건물 등등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55]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배운 이형 입장에서는 한없이 절대왕정에 가까운,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즉시 절대왕정으로 전환될 현 대한제국의 체제는 훗날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프랑스 의회 민주주의 수준(보불전쟁 이전 기준)의, '왕 앞에서라도 할 말은 하는' 자유분방함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시행하는 것. [56] 기초생활비에 대해서 '이거 0이 하나 더 붙은거 아니냐'는 의문을 표하는 양반을 '지금 국밥 한그릇 가격이 얼만지는 알고 그딴 소리를 하냐'면서 깠다. [57] 사실 신분상은 평민이 아니긴 하다. 애초에 여흥 민씨에 무엇보다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여흥부대부인도 여흥 민씨로 심지어 6대조만 올라가면 민자영과 같은 조상이 나올 정도로 비교적 가까운 사이다. [58] 기실 이 세계관에서는 원 역사에서 죄를 저지른 인물치고 순탄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제대로 자리먹은 사람은 개념인이 되었고... [59] 실제 역사에서의 소련과 같은 테크를 탄다. 붕괴 시기도 비슷하다. [60]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처럼 육지에 떨어진 게 아니라, 해상의 미 해군 함대를 대상으로 한국이 투하했다. 이후 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 [61] 아프리카 식민통치를 재건하려는 영국 왕실 휘하 인도 제국과 넬슨 만델라의 남아프리카 공산당이 맞붙었다. 결국 남아프리카 공산당이 승리하여 희망봉 루트가 공산 진영에 넘어갔고, 이에 대한제국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62] 여러모로 현실의 베트남 전쟁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63]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도 동양을 제패한 다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과 전쟁을 하려고 했다. 다만 미국에게 지는 바람에 그 허황된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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