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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SG 랜더스의 단장 김재현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LG 트윈스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4, 1998) |
성동초, 신일중, 1994년 2월 신일고를 졸업하고 고졸연고 자유계약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입단 과정에서 오키나와 007 작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비화가 있는데, 1993년 말 연세대 입학이 내정된 후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있던 김재현을 잡기 위해 LG 프런트가 급히 현지로 건너가 시한 만료 직전에[1][2] 계약한 사건이다. 때문에 이전부터 갈등이 있었던 대학과 프로 팀 간의 스카우팅 관련 논란이 극에 달했고, 입단 T/O를 채우기 위해 친구이자 신일고 동창인 포수 조인성이 연세대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3][4][5]
데뷔 시즌에 20-20을 달성하면서[6][7] 팀의 우승에 기여, 당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또한 80타점으로 전체 타점 2위에 올랐는데, 8월중 한때 타점 1위에 등극하기도 했으나 시즌 막판 다소 부진하며 87타점의 양준혁에게 역전당하고 말았다. 팀 역사상 타점왕 배출이 없는 LG가 타점왕 배출에 근접했던 사례이다. 1994 시즌은 LG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팀 역사상 최고의 대박을 친 해로 평가받는데, 그 해 입단한 선수들 중 1차 지명자이자 94시즌 신인왕으로 선정된 유격수 류지현[8]과 2차 6라운더로 입단해 당시 신인 최다 안타기록인 157안타를 기록한 1루수 서용빈,[9] 그리고 김재현 셋은 데뷔와 동시에 주전 자리를 꿰차며 팀의 V2에 크게 공헌했다. 다만 이 시즌 언론에서 김재현이 신인왕 수상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갔음에도 정작 신인왕 수상을 하지 못하고 물을 먹고 말았다. 고졸신인임에도 리그 역사상 신인 최초 20-20을 달성한 김재현의 임팩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김재현의 신인왕 수상을 유력시했지만 #당시 기사 정작 류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하자 당시 야구팬들의 반응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당시는 WAR 같은 2차 스탯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고 실제로 류지현은 득표에서 상당히 근소한 차이로 김재현을 제치기도 했다.[10] 당시 류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한 비결로 전 경기 출전과 1번타자로서의 공헌도를 높이 평가받았다는 식으로 기사화가 되긴 했지만, 그 시절만 해도 MVP나 신인왕, 골든글러브는 2차스탯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임팩트 + 클래식 스탯 + 팀 성적 버프로 투표하는게 대세였기 때문에 신인왕 투표 전에는 김재현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기사가 많이 나왔지만, 정작 류지현이 수상하는 바람에 김재현이 기자들한테 밉보인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도 나왔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당시 유격수에 이종범이라는 압도적인 선수가 있어서 서용빈이나 김재현이 골든글러브를 따낸데 반해 유지현은 골든글러브를 못 땄기 때문에 동정심리로 류지현에게 신인왕 득표가 많이 갔다는 말도 있다. 사실 이 쪽은 꽤 신빙성 있긴 하다. 류지현은 그 이종범 때문에 생각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았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적시타를 때려낸 후.[11] |
그러나 2년차였던 1995년 기량 하락을 시작으로 김재현의 LG 커리어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주요 사건으로는 1997년 시즌을 통째로 치료에 매달린 신장염과[12] 2000년 초 선수협 창립총회 참석과 일련의 선수협 관련 활동으로 인한 갈등, 그리고 2002 시즌 내내 그를 괴롭힌 고관절 부상 등이 있다. 특히 고관절 부상은 당시 커리어 하이 수준의 페이스를 보이던 그를 시즌아웃도 모자라 현역 은퇴의 기로에 놓이게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지만,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복귀해 한국시리즈 엔트리까지 들어갔다. 덕분에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성 타격을 하고 타점을 올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 1루로 간신히 걸어나가 팬들을 감동시킨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로 위에서 두번째 사진이 그 순간이다.
부상으로 자리를 비울 일이 많아지자 1999년 30-30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면서 등장한 이병규에게 가려지기 시작했다.[13] 고관절은 수술을 통해 치료를 마쳤지만, 2004년 FA 협상에서 구단이 고관절 부상 관련 '각서'[14]를 제시하자 LG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다. LG는 보상 선수로 SK 내야수 안재만을 받았다.
3. SK 와이번스
3.1. 2005 시즌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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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로 이적한 후 팀의 중심타선을 맡아 맹활약, 2005 시즌 타율 4위, 출루율 1위를 기록하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8년 이후 7년만의 수상이자 두번째 전성기를 이룬 쾌거로 화려한 재기를 알렸다.
3.2. 2006 시즌
2006년에는 SK 주장을 맡았으나, 팀 자체가 부진에 빠지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박재홍과 함께 무너진 팀을 이끌었다.[15] 반대로 2년차 신인 정근우와 최정의 성장은 김재현 및 나머지 선수들도 왕조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3.3.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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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부임한 은사 김성근 감독과 잠시 동안 좋지 않았던 관계에 트레이드를 시켜 달라고 했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16] 다만 시즌 내내 1할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최악의 활약을 했으나 베테랑 선수를 선호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김재현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넣었고 이에 김재현도 우승을 이끄는 활약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만약 한국시리즈 SK 타선에 김재현이 없었더라면 어지간히 고생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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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08 시즌
108경기에 출전해 타율 .310, 출루율 .426, 장타율 .488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2008년 한국시리즈에도 우승하며 커리어 3번째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3.5. 2009 시즌
2009년에는 부상당한 박경완을 대신해 주장[19]으로 취임했다. 신기하게 그 이후 방망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해 2009년 막판 SK 연승의 중심으로 활약했다.[20] 특히 9월 8일 KIA전 만루에 타석에 들어서 좌측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파울홈런을 쳐 야구계의 속설인 '파울홈런 다음은 삼진'을 떠오르게 했지만, 곧 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만루홈런을 터뜨려 1,600안타-2,500루타의 대기록을 달성, 7회 고의사구로 인한 개인통산 1,000사사구까지 묶어 하루에 대기록 3개를 세우며 노익장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3.6. 2010 시즌
2009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2010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항상 떠밀리듯 은퇴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여력이 있을 때 멋있게 은퇴하는 걸 꿈꿨다고.[21] 워낙에 뛰어난 선수인데다 말년 당시 기량도 여전히 출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팬들은 아쉬운 마음에 그의 은퇴를 말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선수 생명이 걸린 부상에서도 복귀했었을 만큼 확고한 그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인터뷰에서 은퇴를 미룰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는 항상 그럴 생각은 없다는 대답만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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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인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
2010년 12월 27일, SK 동료들이 나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깨워주었다는 말과 함께 코치 수업을 받은 뒤 SK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3.7. 은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은퇴한 나이가 36, 한국 나이로 37이다. 이병규, 이호준, 이승엽, 조인성 등 동년배 타자들이 40대까지 커리어를 이어간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르다. 특히 신일고 동창 조인성은 친구의 은퇴 1년 후 FA가 되어 SK로 이적하기도 했다. 아깝게 재회가 무산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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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은퇴식을 2011년 4월 중에 치를 예정이었지만, 빡빡한 코치 연수 때문에 계속 미뤄졌다. 2011년 6월 25일 문학 LG전, 드디어 은퇴식 날짜가 되긴 했는데 경기가 우천 취소되면서 그의 은퇴식도 동시에 빗물과 함께 쓸려가게 되었다. 그의 바람이 LG전에서의 은퇴였기에 일부러 LG전에 은퇴식을 치르기로 계획했던 터라 다음날인 26일날로 은퇴식을 미루었지만 장마로 경기가 연이어 취소되면서 물건너갔다. 어쩔 수 없이 9월 이후에 치러질 재편성 잔여경기[23] 중 주말 문학 LG 전에서 은퇴식을 하려고 했으나 잔여 경기들이 전부 평일 편성, 결국 은퇴식을 치른 날은 10월 1일 삼성전이었다. 김성근도 진즉 팀을 떠난 터라, SK 팬들이나 2002년을 두 사람과 함께한 LG 팬들 입장에선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2002년 우승을 백투백홈런으로 저지당한 악연, 2004년 11월, SK에 처음 입단하여 입던 푸른 유니폼이 겹쳐 보였을 상대 팀 삼성 앞에서 은퇴식을 열었으니 남남은 아닌것 같다.
김재현은 은퇴와 관련해 LG 공식 홈페이지 팬 커뮤니티 '쌍둥이마당'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SK 팬 페이지에는 아이디가 없어 처제 아이디로 올렸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김재현입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컴퓨터앞에 앉았는데, 무슨말부터 시작해야할지..... 올 한해 저희 에스케이 와이번스와 마지막 은퇴를 앞둔 김재현 이라는 야구선수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고개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야구 선수 김재현은 더 이상 보실 수 없겠지만 제가 17년 동안 사랑한 야구를 그리고 그 세월동안 보잘 것 없는 저를 응원해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몇 자 글로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문득 돌이켜보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데뷔 첫해 야구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우승을 하게 되어 너무도 많은 사랑을 팬 여러분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엘지트윈스에서 꼬박 10년을 함께했습니다. 고관절 수술을 하게 되면서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야구를 아프다는 핑계로 초라하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믿음과 저를 기다려주신 팬 분께 과연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돌아 왔을 때 팬 여러분이 제 등번호 7번을 들고 잘 돌아왔다고 응원해주시는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전보다 훨씬 야구를 절실하게 책임감 있게 소중하게 여기며 운동하게 된 것이... 정말 소중했습니다. 매 타석 타석마다.... 정들었던 친정팀을 떠나 에스케이와이번스로 이적 했을때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팀에 와서 적응하기 쉬울까 걱정도 했었지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우리 에스케이 와이번스 팬 여러분들과 부족한 저를 따라서 인천까지 응원을 와 주셨던 모든 팬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엘지에 있을 때나 에스케이에 있을 때나 팬 여러분들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십니다. 친정팀이라는 추억과 이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에스케이와이번스의 나의 소중한 동료들과 아름다운 팬 여러분들께 무어라 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그만두려하느냐 다시 아픈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데, 건강에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이 체력으로는 몇 년 더 뛰고도 남을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시점이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 떠날 수 있는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야구선수 김재현으로 지낸 그 순간을 아마 평생 동안 그리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야구선수 김재현을 오래 오래 기억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 할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글을 남길 일도 없을 것 같아 너무 길게 글을 남긴 것 같네요. 두서 없는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 순간 까지 저를 응원해주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준 우리 선수들과 팬 여러분께 다시한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장타율 | 출루율 |
1994 | LG | 125 | 463 | .289 |
134 (4위) |
26 (5위) |
3 |
21 (3위) |
80 (2위) |
81 (3위) |
21 | 55 |
.495 (4위) |
.376 |
1995 | 116 | 381 | .255 | 97 | 19 | 3 | 15 | 56 | 55 | 13 | 45 | .438 | .348 | |
1996 | 117 | 414 | .283 | 117 | 20 | 0 | 11 | 60 | 57 | 7 | 49 | .411 | .372 | |
1997 | 1군 기록 없음 | |||||||||||||
1998 | 122 | 482 | .295 | 142 |
31 (4위) |
3 | 16 | 76 | 70 | 8 | 47 | .471 | .364 | |
1999 | 121 | 453 | .287 | 130 | 17 | 1 | 21 | 94 | 75 | 8 | 54 | .468 | .371 | |
2000 | 131 | 464 | .308 | 143 |
32 (4위) |
2 | 11 | 62 | 83 | 6 | 81 | .457 |
.415 (5위) |
|
2001 | 126 | 428 | .325 | 139 | 29 | 1 | 8 | 61 | 81 | 10 | 88 | .453 |
.443 (4위) |
|
2002 | 98 | 296 | .334 | 99 | 14 | 0 | 16 | 61 | 50 | 11 | 54 | .544 | .462 | |
2003 | 50 | 143 | .308 | 44 | 8 | 0 | 6 | 21 | 13 | 0 | 17 | .490 | .392 | |
2004 | 120 | 373 | .300 | 112 | 18 | 3 | 14 | 62 | 56 | 1 | 66 | .477 | .415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장타율 | 출루율 |
2005 | SK | 120 | 400 |
.315 (4위) |
126 | 17 | 0 | 19 | 77 | 63 | 2 | 80 | .500 |
.445 (1위) |
2006 | 109 | 356 | .287 | 102 | 16 | 1 | 8 | 51 | 42 | 5 | 76 | .404 |
.418 (2위) |
|
2007 | 84 | 204 | .196 | 40 | 11 | 0 | 5 | 19 | 26 | 4 | 43 | .324 | .337 | |
2008 | 108 | 297 | .310 | 92 | 17 | 3 | 10 | 60 | 46 | 4 | 59 | .488 | .426 | |
2009 | 112 | 289 | .301 | 87 | 18 | 0 | 10 | 51 | 45 | 8 | 63 | .467 | .433 | |
2010 | 111 | 267 | .288 | 77 | 17 | 0 | 10 | 48 | 41 | 7 | 52 | .464 | .404 | |
KBO 통산 (17시즌) |
1770 | 5710 | .294 | 1681 | 310 | 20 | 201 | 939 | 884 | 115 |
931 (5위) |
.461 | .402 |
[1]
이 당시에는 고졸 선수는 지명 절차 없이 무한정 계약이 가능했고, 대신 일정한 날짜 내에서만 계약할 수 있었다.
[2]
1990년대는 고교 선수들을 상대로 대학과 프로 팀 간 스카우트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던 시기였다. 만약 대학 쪽에서 고교 졸업반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장학금 지원 및 동기들을 같이 데리고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뒤 코치 및 선배들을 동원해 다른 학교 및 프로 구단에게 뺏기지 않도록 지방 여관 등에 감금(!)시켜 놓으면, 이를 프로 팀 스카우터가 뒤를 밟은 뒤 해당 선수를 다시 빼돌려 선수의 부모에게 연락해 입단 계약금으로 상당히 높은 액수를 제시하는 등 웃지못할 촌극도 벌어지곤 했다. 실제로 김재현보다 2년 늦게 프로에 데뷔한
박진만도
고려대 진학이 거의 확정되었으나 막판에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터의 회유로 2억 8,000만원을 받고 현대에 입단했다. 이 외에도 코리안특급
박찬호도 고향팀
한화 이글스 스카우터진들이 눈에 불켜고 쫓아다녔고 당시 한양대 선배인
정민태가 박찬호를 부산에 있는
차명주의 집으로 피신시키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다.
[3]
이 당시 공식적인 계약금은 1억원이었으나,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한다. 거기다
고려대행이 확정된
김동주에 3억원 베팅을 한 구단이 있다는 설이 퍼지자 그게 사실이라면 김동주보다 한푼이라도 더 받는 조건으로 계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주는 예정대로 고대로 갔다.
[4]
원래 고대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나 부친의 뜻에 따라 연대로 가려고 했다고 한다.
[5]
4년 선배이자 프로 입단 동기인
류지현은
한양대 졸업반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계약 협상시 손해를 본 케이스인데, 아마추어 내내 국가대표 고정 멤버에다 대졸 1번픽으로 대부분 전문가들이 억대 계약을 예상했으나 이에 못 미치는 7천5백만원에 계약하였다. 거기다 팀이
007 작전까지 해가며 비싼 몸값에 고졸 후배를 모셔온데다 팀 레전드인
김재박의 상징적인 등번호 7번도 김재현에게 돌아가면서 류지현 입장에서는 빈정이 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둘은 시작부터 미묘한 관계로 입단 동기가 되었다. 류지현은 신인왕으로 위안 삼았다고 봐야겠다.
[6]
재미있는 건 김재현의 20홈런을 허용한 상대 투수가 프로 입단 동기생이자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는
이호준이었다는 사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던
이호준은 이후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그래서인지 김재현과 이호준은 상당히 친한 사이고, 김재현의 은퇴식에 시구를 맡은 선수 역시
이호준이었다. 이호준도 광주일고 졸업 후 연세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연세대 야구부 숙소 입소 후 강압적인 팀 분위기에 질려 연세대 입학을 번복하고 해태로 떠났다.
[7]
현재까지도
KBO 리그 역대 최연소 20-20 가입 기록이다. 당시 김재현의 나이는 만 18세 11개월 5일
[8]
입단 동기임에도 류지현과는 사이가 원래 그리 좋지 못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LG 시절 선수협 창단 이슈로 크게 틀어져서 김재현과 유지현이 서로 은퇴를 한 2010년대 초중반까지도 사이가 안 좋았다. 자세한건 하단 서술.
[9]
이 기록은 2017년
이정후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179안타) 무려 23년간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서용빈이 뛰던 당시는 1시즌 경기수가 지금보다 적은 126경기였다. 이정후도 실제로 서용빈의 안타 기록을 뛰어넘은 것은 128경기째이다.
[10]
물론 클래식 스탯만 따져도 류지현은 신인왕으로 손색없는 성적을 올렸다. 전 경기에 출전했으며 타율 .305와 15홈런 51타점 51도루로 신인 시즌이 무려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WAR에서도 해당 시즌 김재현보다 우위에 있다.
[11]
오른쪽은
김용국 당시 1루 코치. 사실 이때 충분히 2루까지 갔어야 했지만 고관절 무혈성 괴사로 인해 1루에도 간신히 갔을 정도로 상태가 최악이었고 엄청난 통증을 참고 표정이나마 안아픈것처럼 관리한것
[12]
이 때문에 군 면제를 받은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같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이자 비슷한 시기에 뛰었던
류지현,
박종호 등이 1995~1996년경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하는 바람에 홈 경기에만 출장했던 반면 김재현은 이 시기 대부분의 경기를 풀타임으로 뛴 데다 별도로 군 복무를 했다는 언급이 없다.
[13]
팀 커리어로는 김재현이 한국시리즈 우승 4회로 앞서지만, KBO 통산 기록은 안타와 타율같은 클래식 스탯과 수비력에서 이병규가 앞서고 국가대표 커리어도 이병규가 낫다. 다만 김재현이 홈런과
OPS에서 우위를 보이고, 볼넷은 거의 2배 가까이 앞서 있어 타자로써의 생산성 등 세이버매트리션으로 보면 김재현이 더 낫다. 실제로 통산 wRC+는 이병규가 119.2이고 김재현이 140.1로 상당히 앞서며 OPS 역시 이병규 0.818, 김재현 0.863으로 김재현이 더 높다. oWAR도 이병규 17시즌 55.26, 김재현 16시즌 54.42로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병규가 배드볼 히터이기도 하고 수비력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비슷한 스탯을 찍어주는 선수라면 최상위권 외야 수비를 선보이는 선수와 지명타자에서나 뛸 수 있는 선수 중 전자를 선택하는 게 당연지사.
[14]
요약하자면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 생명의 위험을 느낀 김재현은 당연히
FA 미아가 될지언정 그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한 뒤 SK로 이적해 버렸다.
그리고 LG는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15]
이 해 타율은 0.287에 그쳤지만 출루율은 무려 0.418을 기록하며 해당 부문 2위에 오르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다가 2006년은 KBO 역사상 유례없는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박재홍의 경우 타율 0.259로 부진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WAR의 경우 4.80을 기록하며 팀 내 1위였다.
[16]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을 정도였다고.
[17]
하나 재밌는 점이라면 캐스터가 한국은 일본식 발음인 캉코쿠라 하지만 한국시리즈는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시리즈라 발음한다. 아무래도 고유명사이기 때문인 듯 한데, 전체적으로 발음이 어려운
이병규를 제외하면 김성근이나 김재현 등 한국어 단어를 꽤 정확하게 발음한다.
[18]
그 해의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퍼펙트 게임까지 1이닝을 남겨놓았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과
모리 시게카즈 코치의 결정으로
이와세 히토키에게 마운드를 내줘야 했던 투수이다.
[19]
박경완은 이 해 광주 원정 경기 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되며 백업포수인
정상호가 포수로 첫 풀타임을 뛰게 된다.
[20]
SK 막판 대약진의 주역 김재현, KIA의 돌풍을 이끈
김상현, 그리고 WBC에서 대활약한 KIA의
이용규 등 LG 출신 선수들이 2009년 한국 야구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남 좋은 일만 해준 LG 팬들은 속이 쓰렸을지도. KIA나 SK의 팬들에게 '아리가또 LG', '믿고쓰는 쌍둥이표' 등 감사 아닌 감사를 받았지만 정작 팀은 2009년을 7위로 마무리한 LG 팬들의 마음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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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은 멋있게 은퇴하고 싶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과거부터 안고 살았던 고관절 부위와 잔부상 등으로 인해 원정길에 올라 장시간 버스를 탈 때마다 통증을 호소했고 그로 인해 매번 원정길마다
김성근 감독의 지시로 강성인 컨디셔닝 코치가 김재현을 전담 마크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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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의 동점 상황에서 흔들리는
오승환에게 적시타를 날려 제대로 일격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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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4일 문학 LG전은 코치 연수 스케줄과 맞지 않아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