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21:35:46

김개남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94153e><colcolor=#ffd700> 배경 <colbgcolor=#fff,#191919> 삼정의 문란 · 동학 · 만석보 · 아편전쟁 · 청불전쟁
전개 장성 황룡촌 전투 · 전주 화약 · 갑오사변 · 갑오개혁 · 청일전쟁 · 우금치 전투
관련 인물 <colbgcolor=#94153e> 농민군 전봉준 · 김개남 · 손화중 · 최시형 · 손병희 · 김창수
조선 고종 · 조병갑 · 이용태 · 홍계훈
기타 인물 이홍장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오시마 요시마사
기타 사발통문 · 파랑새 · 갑오군정실기 }}}}}}}}}
<colbgcolor=#94153E><colcolor=#E7A026> 김개남
金開南[1]
파일:김개남장군.jpg
[2]
아명 김기선(金琪先)
본명 김기범(金箕範)
기선(箕先)
본관 도강 김씨[3]
출생 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산외이변면 정량동
(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4]
사망 1894년 12월 3일 (향년 41세)
전라도 전주부 부북면 검암리 숲정이
(現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숲정이성지)[5]
국적 조선
종교 동학
별칭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6]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 유시(遺屍) 했노."
그가 잡혀갔을 때 백성들이 부른 노래
조선 말기의 인물로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전봉준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기선(箕先).

2. 생애

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산외이변면 정량동(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에서 아버지 김대흠(金大欽)과 어머니 익산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농 가정으로 선비 대우를 받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김개남은 어릴 적부터 학문도 어느 정도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비하여 친화력과 담력도 큰 편이라서 개구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7] 성인이 된 김개남은 키가 작지만 총명하였다고 한다.

20대 후반이 되어서 김개남은 전봉준을 처음으로 만났고 30대가 되어서는 동학을 접한다. 이 시기 김개남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동학에 입교했으며 동학의 포교 활동이나 교조 신원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개남은 지도력이 뛰어나서 전라도 지역의 다른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데 앞장섰고 전라도 지역의 동학 집단에서 전봉준, 손화중 등의 인물처럼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된다.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김개남은 1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과 합류했으며 봉기 당시 손화중과 함께 부지도자 격의 위치에서 동학 농민군을 이끌었다.[8][9] 이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 화약이 체결되면서 농민군은 일시 해산되었지만 집강소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에서 농민 자치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 중에서도 강경파였으며 반(反) 봉건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다른 곳의 집강소에 비해 급진적인 모습을 넘어 과격했었다.[10] 동학 농민군을 조직해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 2차 봉기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에도 양반들의 민보군은 청나라군이나 동학 농민군보다는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협력하게 된다. 실제로 민보군은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을 경계하는 사림이 다수였지만 김개남의 과격함+명분론에 입각한 반청주의+깍뜻한 일본군의 대접으로 관군이나 일본군보다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게 된다.[11]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김개남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주목 우금치 전투 때도 김개남 부대는 참전하지 않았고 10월 경에야 움직였다. 김개남은 1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인솔하여 여러 수령들을 가렴주구의 혐의로 처형하고 북진하여 청주목 방면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청주성 전투에서 김개남의 부대는 관군과 싸우던 도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했고, 이후 연산으로 후퇴하여 전봉준의 부대와 합류하지만 전봉준 쪽도 우금치의 패배 이후 계속 쫓기는 처지였기에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의 농민군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와해된다.

김개남은 태인현 산내일변면 사승리(現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사승마을)에 있던 매부 서영기(徐永基)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임병찬의 고발로 인해 강화 진무영 소속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12] 결국 붙잡힌 김개남은 전주부로 압송된 뒤 이튿날인 1894년 12월 3일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전주부 부북면 검암리 숲정이(現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숲정이성지)에서 즉결 처형당해 효수되었고, 머리는 한성부로 보내져 3일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조리돌려졌다.[13][14]

3. 여담


파일:김개남.jpg

4. 대중매체에서



[1]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의미에서 '개남(開南)'으로 고쳤다고 한다. 《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金介男으로 각각 5차례 등장한다. 《 매천야록》에는 南으로도 소개되었다. [2] 원래 있던 사진은 실제와는 많이 다른 얼굴로 알려져있다. 김개남 장군의 사진인지에 대한 고증을 거쳐야 하기에 초상화로 대체한다. [3] 28세 영(永) 항렬. 족보명은 김영주(金永疇). [4] #.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713번지 지금실마을에도 김개남 장군 고택터가 있는데 어린 시절 이주하여 살아온 곳이라 한다. [5] # [6] 동학농민운동 시기. [7] 소문에 따르면 학문 분야에서는 병서 경세유표를 즐겨 읽었고 장난 분야에서는 돼지를 놓고 서리질을 했다고 하니 정말 범상치 않았던 같다. [8] 이 과정에서 김개남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천민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핍박받는 자들이 모인 부대답게 양반 같은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곤욕을 치른 양반들이 많았다. [9] 김개남의 부대는 가는 곳마다 양반들이 사는 집을 발견하면 몰려가서 양반들을 구타하고 양반들의 딸들을 끌고 와서 김개남의 부대원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래서 양반들이나 지주들은 김개남의 부대를 증오했으며 김개남의 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민보군'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싸우기까지 했다. [10] 김개남은 지역의 수령들과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전봉준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상종을 안 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라도에서만 설치되어 있던 집강소를 경상도에도 설치하려고 동학 농민군을 보내기도 했다. [11] 실제로 일본군은 겨우 1개 대대였고 관군의 전투 의지는 매우 낮은 상태였기에 주력은 양반들의 민보군이였고 일본군도 이들을 높게 대우하며 작전권도 일부 양도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12] 김개남의 친손자인 김환옥의 증언에 따르면 김개남의 힘이 세서 전라감사가 손발에 대못을 박아서 가둬놓았다고 한다. 이 말은 자신의 할머니인 김개남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 한다. [13] 하지만 이 사형은 전라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즉결처분이었는데, 동학농민운동 이전인 갑오개혁에서 그런 식의 사형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판결은 조선과 일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일본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이도재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선 정부가 경위를 해명하고 노력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14] 김개남이 처형된 이후 원수진 사람들이 김개남의 고기 내장을 빼앗아 씹기도 했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황현 매천야록은 전하고 있다. [15] 이건 다른 동학군 지도자인 전봉준 또한 마찬가지. [16]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인 한토마에서 어느 해외 거주 노인이 조선이 망한 것은 동학난 때문이다 라는 글을 올려서 많은 네티즌들의 논란을 산 일도 있었다. [17] 이 사진은 2001년 KBS 드라마 < 명성황후>에서 김옥균 사망 직후의 해설 장면에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