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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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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희
高容姬
파일:external/res.heraldm.com/20120610000204_0.jpg
아명 고희훈(高姬勳)[1]
출생 1952년 6월 26일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노지구 후나바시초 75[출처J]
사망 2004년 5월 24일 (항년 51세)
프랑스 파리
묘소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대성산[3]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본관 제주 고씨[4]
가족 증조부 고두행(1833~1910)
종조부 고영호(1867~1894)
조부 고영옥(1876~1945)
큰아버지 고경찬(1903~1998)
큰아버지 고경원(1909~1997)
아버지 고경택(1913~1999)
적모 청주 한씨(1915~1975?)[5]
어머니 이맹인(1913~?)[6]
숙부 고경선(1920~1945)[7]
오빠 고동훈(1951년생)[8]
여동생 고용숙(1958년생)
배우자 김정일
시아버지 김일성, 시어머니 김정숙
장남 김정철, 차남 김정은, 장녀 김여정
손녀 김주애
신장 158cm[9]
학력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
종교 무종교
파일:고용희 사진.jpg
중년 시절의 고용희.

1. 개요2. 이름에 관해3. 생애
3.1. 출생과 집안 배경3.2. 북송 후
4. 백두혈통 일가와의 관계
4.1. 김정일과의 관계4.2. 김정은과의 관계
4.2.1. 김정은의 약점
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북한 김정일의 비공식적 아내 중 한 명이자,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의 모친. 과거 고영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바 있다.

2. 이름에 관해

오랫동안 한국의 언론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을 '고영희'라고 소개해 왔다. 그러나 혁명열사릉의 묘비에 고용희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고희'로 정정되었으며, 정부에서도 '고용희'가 맞다고 최종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고용희의 제부 리강이 KBS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처형의 이름은 '고용희'가 맞으며, 아내의 이름도 '고영숙'이 아니라 '고용숙'이다"라고 말했다. 얼굴 용(容) 자 돌림이라는 것. 사실 과거 김정은을 김정운으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고용희는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해 북한 대중에게 이름이 잘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구전으로 알려지면서 이름이 오기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고영희라는 이름이 '째포'로 잘 알려져서 후에 우상화를 진행하며 고의로 고용희라고 이름을 다르게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1972년 로동신문에 이름이 실렸을 때도 '고용희'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점을 보면 그냥 한국에서 실수한 듯 하다.

그녀의 곁에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 또한 일본인이다 보니 한국어 발음 중 'ㅓ'와 'ㅗ', 'ㅕ'와 'ㅛ'를 헷갈려서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도 후지모토의 증언 때문에 오랫동안 김정'운'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북한이 후계 체제를 공식화하면서 김정은으로 수정. 게다가 북한의 어, 오, 여, 요 발음과 남한의 발음이 다르기도 하다. 북한의 ㅗ와 ㅛ 발음은 남한의 발음보다 조음 위치가 높아 남한 사람이 들으면 ㅓ와 ㅕ 발음처럼 들리며, 평안도 사람 중엔 더 나아가 아예 ㅗ와 ㅓ를 동일하게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고용희'도 '고영희'처럼 발음하는 것이다. 'ㅓ'를 'ㅗ'로 발음한다는 설은 과거의 주장이거나, '오마니(어머니)' 같은 사투리의 어휘의 영향을 받은 주장일 수는 있으나 유래가 불분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문화어 문서 참고. 나중에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의 초청을 받고 북한에 가서 고용희의 묘를 참배한 후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었던 정성장 박사(현재 북한센터장)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이름 표기에 오류가 있었다고 정정했다.[출처J]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으로서 한때 북한에서 김정일을 이모부라고 부른 북한 내 최상위 로열 패밀리였던 이한영은 본인 수기인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에서 고용희를 기존처럼 '고영희'라고 서술했다. 성격이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고 대담한 이한영이 딱히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북한에 있었을 당시 가족들 사이에서 그저 '고영희'라고 소리나는 대로 불리었던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ㅛ'를 'ㅕ'처럼 발음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한영 입장에서는 고용희가 자기 혈육도 아니고 건너건너야 닿는 관계다. 게다가 이한영의 모친인 성혜랑은 고용희를 방치코라는 멸칭으로 불렀는데 코가 방망이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고용희는 자신과 경쟁 관계인 성혜림 일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이한영이 고용희의 이름을 문자로 확인할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리춘히의 사례 때문에 북한에서 '희'를 '히'로 표기하니 고용희도 '고용히'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북한에서 무조건 '희'를 '히'로 표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고용히' 설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3. 생애

3.1. 출생과 집안 배경

파일:1434343.jpg
차남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가계도[11]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 고경택의 7녀로, 1952년 6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고용희가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는 친인척들과 주민들의 증언이 보도되기도 했다. 기사.

고씨종문회 회장의 확인으로는 본관이 제주 고씨 영곡공파라고 한다. 그녀의 할아버지 고경택의 허묘를 비롯한 김정은 외가의 가족묘가 제주도에 남아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12]

고용희는 어린 시절을 오사카 이쿠노구 이카이노에서 살았다. 이때 일본의 인기 여가수인 와다 아키코와 아주 친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이 여자관계가 복잡했다.[13] 때문에 고용희에게는 여러 이복남매가 있었는데, 특별히 사상적인 이유 없이 여자문제와 밀항 사업 등 범죄행위를 해 일본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자, 그 당시 조총련이 추진했던 재일교포 북송 운동에 동참해, 고용희가 10세 때였던 1962년 10월 21일 제99차 귀환선을 타고 고용희를 포함해 아버지의 부인 중 한 명인 어머니 이맹인과 낳은 자식 3명만 데리고 함경북도 명간군에 정착했다.

한편, 앞서 말한 것처럼 오사카가 아닌 목포가 고향이라는 말도 있다. 고경택이 광복 즈음하여 일제 부역 전력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제주도에서 목포로 쫓겨났고, 거기서 한씨 부인과 재혼해서 슬하에 고용희(고영희)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3.2. 북송 후

파일:external/shindonga.donga.com/201209210500020_1.jpg
북한 화보잡지 <조선> 1973년 3월호에 실린 고용희 일가족의 모습.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무용과를 졸업하고 1971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고 이름을 고용희로 개명했다. 1972년에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는다. 73년 만수대예술단이 일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면서, 일본 출신이던 고용희가 주목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선출된 이후부터 권력강화를 위해 측근들과 비밀연회를 가졌는데, 이때 이후의 기쁨조의 원조격으로 만수대 예술단에서도 가장 미모와 재능이 뛰어난 여성들을 공연조로 뽑아 연회에 참석시켰고, 함께 뽑힌 고용희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김정일의 옆자리에 앉는 고정 파트너가 되었다. 이후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밀회를 즐기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차 안에서 즐겨 들었던 한국 노래가 심수봉의 < 그때 그 사람>. 이후에도 고용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1976년 동거를 시작해 성혜림의 뒤를 잇는 김정일의 비공식 부인이 된다. 1979년 창광동 관저의 안주인이 되었고, 이후 유방암에 걸려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4년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사후에는 김정일의 개인비서였던 김옥이 사실상 차기 부인이 되었다.

4. 백두혈통 일가와의 관계

===# 가계도 #===
한성희
홍일천
김혜경


2
신정희
(리씨)
김혜순
리혜경
김솔희
홍영숙
서영라
김이순
장길선
김영숙
김춘송
(자녀)
(부인)
(장남)

3
(셋째)
(아들)
(남편)
(딸)
(딸)
김경진
김인강
(부인)
김은송
김성강
(부인)
(자녀)
제갈순복
김송죽
김백연
김형록
김영성
(부인)
(부인)
김정현
(부인)
김원주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4.1. 김정일과의 관계

야행성에 수면이 적은[14] 김정일의 생활패턴에 맞추어 잠도 줄이고 항상 서류 정리나 잔심부름 등을 성심껏 도맡아하면서 내조했고, 김정일의 주변 부하들에게도 항상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변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 외에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김옥과 거의 친자매처럼 지냈으며, 자신이 병약해지자 김옥에게 "내가 죽으면 나 대신 장군님과 자식들을 보필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질투심이나 욕심없이 오로지 내조에만 신경쓴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고 한다. 당연히 김정일은 이런 고용희를 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그녀의 조언이나 부탁도 잘 받아들였고, 해외에 다녀오는 것도 자유롭게 허락했다.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무려 13년 동안 김정일 가족의 밥상을 책임져 왔고, 그때의 경험으로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은이 될 것이라는 걸 유일하게 맞혔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회고하면서 쓴 책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고용희가 김정일의 총애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일화 몇 가지를 공개했다.

어느 날 함경남도 함흥시의 72호 초대소에서 김정일이 연회를 가지고 있는 와중에, 김정일을 경호해야 하는 군관이 대담하게도 경계 근무 중에 몰래 빠져나가 술을 마시다가 그 모습을 김정일에게 걸렸다고 한다. 김정일이 "지금 술 마시냐"고 혼을 내자 얼마나 취한 것인지 그 군관은 김정일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고, 너무 놀란 김정일은 '내 목숨도 여기까지인가'라고 생각하면서 굳어버렸다. 그 일촉즉발의 사태에서 고용희가 군관을 뒤에서 공격해 총을 떨어뜨리게 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 다른 경비원들이 몰려와 그 문제의 군관을 사살해 김정일을 구해냈다고. 이후 김정일은 측근들과의 비밀 연회에서 자주 고용희에게 이 사건을 거론하며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김일성이 죽었을 때 멘붕한 김정일이 자기 집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집무실 책상 위에 권총을 올려놓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고용희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해서 얼른 권총을 치워버린 일도 있었다고. 이 때문에 고용희가 수술을 받을 때 김정일이 고용희를 걱정하면서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둘의 관계는 좋았다.

후지모토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 배우 하라 세츠코를 닮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영향으로 김정일이 없을 때 자신에게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칭송하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며, 요리사인 자신에게도 공손하게 대하고 고향에도 방문할 수 있게 돕는 등 자상하고 배려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지모토는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고용희의 사망에 관해 언급하면서 "나는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고 적어놓기까지 했다. 또한 메기 요리와 강냉이 국수를 자주 만들었는데, 요리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생전에 여름마다 김정일에게 강냉이( 옥수수) 냉면을 직접 만들어 줬는데 김정일은 이 냉면을 별미로 여기며 즐겨먹었다고 한다.

반면 이한영의 수기인 <김정일 로열패밀리>(예전 이름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에 따르면 이한영네 가족, 즉 김정남의 외가 쪽 사람들은 고용희를 '방치코'라는 별명 겸 은어로 불렀다고 한다. 방치는 곤봉이나 방망이의 북한(함경도와 평안도 사투리)식 표현이다. 예를 들어 : 빨래방망이 - 빨래방치, 도깨비방망이-도깨비방치; 고용희의 코가 마치 방망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성혜랑과 이한영쪽 일가에서 고영희의 외모를 비하하는 경멸적인 표현이다. 여기에 더해서 고용희가 재일동포인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 별명은 김정남의 어머니인 성혜림이 붙인 건 아니고 성혜림의 언니이자 이한영의 어머니인 성혜랑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4.2. 김정은과의 관계

파일:external/upload.njdaily.cn/1340871884608.jpg
파일:external/g0.hexunimg.cn/165839458.jpg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21702712_1.jpg
아들 김정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고용희. 왼쪽에 삽으로 땅을 파는 어린아이가 김정은이다.

김정은을 낳고 나서는 김정은을 스위스 유학보냈고, 김정은을 최고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군대로 보내어 빡세게 군생활을 시키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일찍 사망하면서 아들이 최고지도자로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김정은이 원산시를 관광도시로 개발시키는 이유도, 유년기를 원산에서 보낸 기억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4.2.1. 김정은의 약점

그녀의 아들 김정은이 지도자 자리를 계승한 후 한때는 그녀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건드리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유튜브에 고용희를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라며 찬양하는 다큐멘터리[15]가 업로드된 것. # 하지만 문제의 다큐멘터리는 며칠 만에 신속히 삭제되었다. 참배계획이 담긴 문건, 우상화한 시 등이 공개되었으나 # 2024년까지 본명도 공개되지 않은 채 대대적인 우상화 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사실상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사회에서 재일교포들은 하층민 취급을 받기 때문에, 혈통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우상화를 한다고 해봐야 비웃음거리만 될뿐 오히려 김정은 본인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16] 2024년 김정은이 선대를 격하시키며 자신을 우상화하려 해도 어머니에 대한 우상화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다.[17]

현재 김정은에게 고용희의 출신 성분은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고위층 인사를 제외하고는 남조선계, 즉 남한 지역 출신 집안을 좀 더 하위 계층으로 분류한다. 게다가 재일교포 출신은 하위계층임과 동시에 일반 주민에게까지 '일제의 자본주의 물을 먹은 간첩 같은 사람들' 정도로 이미지가 안 좋다. 그런데 고용희는 남조선 집안( 제주도) + 재일교포로서, 최악의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고용희의 아버지는 일본군에게 군복을 납품하던 친일 자본가였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가장 완벽한 적대계층인 셈이다. 그런 '적대계층'을 어머니로 둔 김정은 역시 '적대계층'의 피를 타고난 것이 된다. 이것이 어느 의미에서는 김정은의 입지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요소인데,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에서 제일 중점을 두는 것이 김일성이 일제강점기에 했다는 (매우 과장된) 항일투쟁이란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김정은은 '수령님'과 싸우던 왜놈들에게 군복을 납품하며 왜놈들을 돕던 친일 반역분자의 자손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게다가 고용희는 김일성으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한 여자이다.[18] 다시 말해서, 김정은에게는 김일성 집안인 백두혈통의 '순수한' 피가 흐르지 않는다.[19] 마찬가지로 고용희가 예술단의 무용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딴따라의 자식이라는 약점이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미 북한 전 주민들에게 소문이 나서,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고 있으며 또한 고용희의 아버지, 즉 김정은의 외할아버지인 고경택이 친일파였다는 극비 문건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링크, 김정은 외할아버지는 친일파). 친형인 고경찬, 부친인 고영옥 역시 마찬가지. 당시 직위들은 면장, 종사랑. 숭일이어야만 가능했었던 직위들이었다( 링크). 다만, 고경택이 일한 군복 공장이 일본군에 군복을 납품했다는 것만으로 고경택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도 있다. 링크 참고로 고경택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군복을 납품하던 '히로타 군복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다.

거기다가, 고용희가 오사카 출신 재일교포이자 남조선 출신 친일 자본가의 딸이라는 점은 "수령님의 어머니를 모함하려는 남조선 것들의 조작"이라고 받아칠 수 있다고 쳐도, 고용희를 내세울 만한 명분이 전혀 없다. 김일성의 아내들은 북한 사회에서 지도자의 부인으로 봐줄만한 인물들이었다. 지금까지 김일성의 부인으로 칭송되는 인물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은 남편의 혁명동지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동북항일연군에서 취사병으로 군복무를 했고, 해방 이후에도 김일성의 부인으로 알려졌다. 물론 항일 활동에 대한 역사를 다시 갈아엎은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김정숙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활동한 여장군이다. 이것은 날조지만, 확실한건 김정숙은 함경도 출신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 결혼한 후처 김성애는 김정숙만큼 업적이 있는 위인으로 칭송되진 않았고 그럴만한 업적도 없었지만 역시 평안도 출신에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과 연을 맺은 시기는 몰라도 아이를 낳고 결혼한건 명백히 김정숙 사후이며 북한 사회에 김일성의 부인으로 알려진 것도 김정숙이 죽은지 10년 가까이 흘러서였다. 그리고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 중앙위원장[20]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며 정계 활동을 했다. 당연히 정식으로 결혼했으니 외국 정상이 와도 영부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고용희는 얘기가 다르다. 우선 남조선 출신 집안에 일제 공장의 관리직이었다는 사실까진 숨기면 될 수도 있다. 남한 출신이라는 것이 북한 사회에서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 영향을 크게 주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북한 당국이 재일 동포들을 데려온 이유는 노동자가 부족해서이다. 그렇기에 기득권에 진출하는건 의도적으로 막지만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는건 아니다. 첫 천리마 작업반 칭호를 받고 김일성을 여러번 만나며 로력영웅에 오른 진응원도 남한 뿌리라는걸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따라서 고용희의 출신까지는 고용희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덮을수는 있다.

하지만 제일 크게 걸리는 것은 기쁨조, 무용수로서 김정일의 눈에 든 첩이라는 점. 김일성은 고용희와 김정은의 존재를 몰랐다는건 결국 김정일도 집안에선 고용희를 숨겨야하는 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출신까지 안좋은 마당에 북한 사회에서 생각하는 미덕의 기준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다. 만약 고용희의 부친이 재일 교포에 남한 뿌리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을 열심히 한 로력영웅이었다던가, 김일성을 목숨걸고 지킨 공화국영웅이었다던가 해서 김정일의 아내가 되었다면 몰라라, 비밀 연회에서 기쁨조로 눈에 띈것을 무슨 수로 띄운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김정일이 비밀 연회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북한 사회에서는 알려져있지도 않거니와 기득권에서도 철저한 비밀이다. 고용희는 김정일을 만나 김정은을 낳은 모든 경위가 애시당초 북한 사회에 알릴 수 없는 존재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이 김정일과 비슷하게 가수 출신인 리설주를 아내로 두었지만, 한번 섣불리 고용희/리설주를 미화했다가 북한 여론의 뭇매를 호되게 맞은 경험 때문인지 아직까지 미화나 극존칭을 자제하고 있고 리설주는 자주 등장시켜서 반대여론을 서서히 잠재울 방침이다.[21]

2024년 기사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이 집권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생모에 대한 우상화는커녕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아서 김정은의 어머니가 '비천한' 출신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고 한다. 2010년대 후반 중국 국경지대 마을에서 탈북한 모 탈북자가 자기 고향에서 김정은 어머니가 한라산 줄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국경지대는 장마당을 통한 밀수를 통해 김정은의 어머니가 남한계 재일교포라는 것이 알음알음 알려졌던 모양이다. 모 탈북자는 중국에서 일하던 당시 김정은이 처음 존재가 공표되었을 당시 어느 북한 고위 인사가 김정은 어머니가 재일교포라는 것을 듣고 그날 밤 잠을 못 잤다며 하소연했다고 증언했는데, 북한 주민들에게 고용희의 정체가 알려진다는 게 얼마나 정통성에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있다.

5. 여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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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출생 당시의 이름이라고 한다. 고경택의 아들들이 모두 ○훈(勳) 돌림을 쓰는데 이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출처J] 정성장,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은 고영희 아닌 '고용희' 확인"」, 중앙일보, 2013. 11. 5. #. [3] 대성산유희장 뒷산에 있다. [4] 시조 77세손, 중시조 32세손. 영곡공파(靈谷公派) 18세.( 족보) [5] 한영순(韓永順)의 딸이다. [6] 출처 [7] 어선의 좌초로 인해 익사하여 향년 25세로 요절하였다. 몰년이 할아버지 고영옥과 같아서 할아버지도 숙부와 함께 어선좌초로 인해 같이 사망했을 수도 있으나, 고영옥은 9월 6일에, 고경선은 11월 21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 일명 고상훈(高相勳)). [9] 출처 오영희의 증언 [출처J] [11] 김정남이 생존했을 당시에 만들어진 가계도이기에 살아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피살된다. 거기다가 김정남과 김정은은 이복형제이므로 김정은은 성혜림-성혜랑 일가와 혈연관계가 전혀 없다. 또한 이 당시 김정은의 딸 김주애는 존재만 확인됐을 뿐 사진 등 신상 정보가 공개되기 전이었다. [12] 일본에서 지낼 때의 통명은 다카다 히메(高田 姬) 또는 고용자(高容子)이며, 1962년 북송 이후 이름의 '자'를 '희'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 이후 북한 여성의 이름 끝에 '자()'를 붙이지 못하게 했고, 이미 子를 쓰던 여성들도 개명하라고 지시했다.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 때문. 기사. [13] 동북아시아 전역이 19세기까지는 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일처제가 명문화되었어도 축첩 문화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한국에서도 4.19 이후 들어서 장면 정권이 첩을 둔 고위공직자들을 퇴출시키면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14] 정말 의외이겠지만 김정일은 엄청난 워커홀릭이었다. 물론 북한 당국에서 선전하는 대로 인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일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김일성으로부터 부여받은 세습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후대에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불철주야 일했던 것일 뿐이다. 즉, 북한 당국에서 선전하는 "잠은 쪽잠이 가장 달고 밥은 줴기밥이 가장 맛있다"는 김정일의 교시가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15] 2011년 제작되었다. 여기서 고용희의 실명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16] 심지어 고용희의 뒷배경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고용희의 인생의 흐름 자체를 대체역사 수준으로 완전히 새로 뜯어고쳐야만 겨우 북한에서 선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17] 2024년 5월 31일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 따르면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 차원에서 비공개, 비조직 녹화편집물을 단속하면서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를 회수해 삭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 [18] 이 때문에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김정은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당연히 김정은이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오는 사진이나 문건 등은 전부 조작된 것들이다. [19] 덤으로 김일성도 북한 입장에서는 적대계층 중의 적대계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모 강반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에 친부 김형직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누구보다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즉, 김정은은 누구보다도 순수한(?) 적대계층 혈통을 타고난 셈이다. 그리고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은 북한에서는 '개만도 못한 인간쓰레기'라고 불리는 존재이니, 일반적인 북한인이었으면 김정은은 가문 자체가 소멸했을 인물이었던 셈이다. [20] 당시엔 여성동맹의 수장도 비서라고 불렀지만 현재는 위원장이다. [21] 물론(?) 리설주는 핵심계층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