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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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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게이의 은어2.2. 게이 포르노2.3. 게이 공간
2.3.1. 게이 공간의 성립조건2.3.2. 게이 공간의 역사
2.3.2.1. 90년대 이전의 게이 공간2.3.2.2. 90년대 이후의 게이 공간
2.4. 게이 앤썸
2.4.1. 나라별 게이앤썸
2.4.1.1. 한국2.4.1.2. 영미권2.4.1.3. 일본2.4.1.4. 중국2.4.1.5. 그 외

1. 개요

게이의 문화를 정리한 문서.

2. 내용

2.1. 게이의 은어

2.2. 게이 포르노

2.3. 게이 공간

게이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들에 대하여 다룬다. 서울 종로 3가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대표적이다. 그 외 부산 범일동, 대구 동대구역 일대, 대전 대흥동 일대, 광주 대인동 일대 등이 있다. 각 지역의 특징 및 업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게이바 문서를 참조하자.

다음의 업소들은 게이 전용 유흥업소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게이라고 다 이용하는 곳은 아니다. 일단 수요층이 워낙 적어 그 수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이용 연령대가 높다. 또한 종로3가나 이태원 같은 번화한 게이공간에 이런 업소는 많지 않다(호스트바는 예외). 2-30대 젊은 게이들은 찜방과 호빠 외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업소들이다.
과거에는 성매매를 하는 술집을 의미하였으나 최근에는 많이 이미지가 개선이 되어서 올초이스 등 호스트바 홍보 사이트에서 홍보를 하는 게이 호스트바도 나왔다. 성매매 금지 서약서를 작성하는 등 성매매 근절 운동을 하기도 하고 호스트바 영업실장들이 유튜브 방송도 하는 등 이미지 개선에 나서고 있다.
호스트바에 경우 1종 유흥 영업허가증과 사업자등록증이 있으면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다. 다만, 성매매가 있을경우 불법으로 처벌될수 있다. 단란주점 형태로 호스트바를 이용하는 경우 불법이다. 대표적으로 종로지역에서 유명한 게이 호스트바는 종로구 삼일대로 30길 21 지하1층에 있는 G2, 종로구 낙원동 121-1 번지에 있는 테라가 유명하다.

아래 업소들은 현행법상 불법의 소지가 많다. 성매매가 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

2.3.1. 게이 공간의 성립조건

동성애자 공동체의 성립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익명성과 접근성이다. 이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자이자, 수적으로도 적은 양적 소수자라는 측면에 기인한다. 정체성이 들어날 경우 실제로 사회적인 악조건에 처할 수 있는 만큼 익명성이 중요하고, 양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도심지에 비하여 보다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게 되는 만큼 더 큰 접근성이 요구된다. 도시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고 높은 인구 밀도와 각종 교통 인프라로 인해 접근성이 높은 공간이 많다. 따라서 도심지 근처나 기차역, 버스터미널 인근 등 유동인구가 매우 많은 지역은 게이 공간이 형성되기 적합한 장소다.

2.3.2. 게이 공간의 역사

2.3.2.1. 90년대 이전의 게이 공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명동 을지로→청계천 청계천→종로3가 종로3가
신당동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도 게이들의 공간이 존재했다. 당시 술집이라 하면 일반 가정집에서 술을 내놓고 파는 형태가 많았는데, 알음알음 게이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술집이 몇군데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양복점을 중심으로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과거에나 현재에나 게이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게이 커플이 꿈꾸는 로맨스는 마카오산 양복을 맞춰 입고 시모노세키행 유람선을 타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게이 공간에 대해 신뢰도 높은 기록이 시작되는 것은 1950년대부터이다. 이 역시 주로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들이지만 생존해 있는 이들의 증언이고 각종 신문 기사로도 확인된 사실들이어서 신뢰도가 보장되는 편이다. 전후 복구가 시작된 서울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였던 명동에 위치한 양장점들을 중심으로 게이들이 모였고 근처 백화점 옥상에 위치한 극장은 게이들이 크루징(Cruising) 장소로 애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버스터미널 화장실 역시 게이들이 크루징 장소로 애용하는 장소였다. 일부 지방도시들의 경우, 특히 기차역 부근이나 버스터미널에 게이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4] 이 당시 사람들은 “버스 터미널 3층 남자 화장실 두 번째 칸에 가면 호모가 검열삭제를 빨아준대”라거나 “OO극장 가장 뒷줄에 앉으면 호모가 검열삭제를 빨아준대” 같은 소문를 듣고 찾아갔다고 한다.

60년대 서울 도심지가 확장되자 양장점을 중심으로 한 공간은 쇠퇴하였고, 인쇄소가 몰려있는 을지로 뒷골목과 신당동으로 옮겨갔다. 을지로 인쇄거리는 시끄럽고 활기찬 장소이지만 밤에는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산했으므로 게이들이 비밀스럽게 모이기에 좋았다. 이 시기부터 양장점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점차 보기 힘들어지고 을지로와 신당동 골목에 드문드문 위치한 술집에 모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신당동의 게이 공간은 80년대까지 지속되었지만, 을지로의 공간은 오래지 않아 청계천 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질투>, <블루>와 같이 지금 보기엔 촌스럽지만 당시로선 꽤나 세련된 이름의 술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70년대, 청계천 변의 게이 공간이 다시 한 번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의 도시 계획이었다. 1960년대 말, 세운상가 건설을 비롯한 종로 개발 계획을 위해 속칭 ‘종삼’으로 불렸던 낙원동 일대 사창가를 ‘정화’하기로 하면서 이 거리가 비워졌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하나 둘 게이 술집들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종로3가 게이 공간의 시작이다.

파일:종삼.jpg
종로 3가 일대에 있었던 윤락가, '종삼'

7-80년대 종로 3가 동성애자 공간의 중심은 소위 ‘P살롱’ 혹은 ‘P극장’이라고 불렸던 < 파고다 극장>이었다. 파고다 극장은 크루징을 하는 장소로 유명했는데, 상영관 뒷편에 서서 크루징 상대를 물색하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일을 치렀다. 근처에는 <서있는 사람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게이바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 기형도는 심야에 파고다 극장에서 영화 <뽕2>를 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퀴어적 감수성을 담고 있는 그의 몇몇 작품과 함께 이 기묘한 사망 때문에 기형도가 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파고다 극장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극장이 아니어서 그 의심을 더 증폭시켰다. 물론 그의 친구들과 유가족들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진실은 고인만이 알 것이다.

파일:파고다극장.jpg
과거 파고다 극장이 있던 건물의 모습


현재 모습

파고다 극장은 당시 게이들의 크루징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혹시나 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은 크루징으로 만난 상대와 함께 일을 치른 후 그를 따라 근처 술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당시 종로 3가의 게이 술집들은 간판도 내걸지 않고 암암리에 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어 이런 가이드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술집 주인은 매상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술집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손님들 역시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기에 의리상 다른 술집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 가게들은 섬처럼 분리되어 존재했다. “게이 공간”이긴 하지만 “게이 공동체” 혹은 “게이 커뮤니티”라고 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80년대까지 게이 공간의 특징을 살펴보면 극장이나 버스터미널에서의 “크루징”과 비밀스럽게 격리되어 존재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리고 당시 사회가 동성애를 어떻게 대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80년대까지 게이들 중 스스로를 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미디어는 해외토픽이나 가십거리처럼 게이와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실었고, 해외로부터 “게이”라는 정체성을 수입해오기에는 너무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였다. 당시 동성애 관련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었던 미디어는 < 선데이 서울>이라는 B급 잡지였는데, 본래 이 잡지는 “바람난 유부녀들”, “성관념 자유로운 요즘 여대생들” 따위의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다루는 잡지였다.

해외토픽과 단신의 형태로 서구의 퇴폐한 문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짤막하게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실었던 < 선데이 서울>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동성애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후반이었다. 1985년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록 허드슨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전 세계가 에이즈의 공포로 떨기 시작했고,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3S정책을 펴면서 B급 잡지로서 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더 자극적인 소재로 눈을 돌린 것이 동성애였다.

당시 기사를 보면 “때자”와 “맞자” 같은 게이들의 은어도 소개하고 있고[5], 종로 3가에 밀집한 게이 술집들이 어떤지, 어떤 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지[6], 게이들의 삶은 어떠한지 성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선데이 서울은 파고다 극장을 "P극장"으로 이니셜 처리했는데, 성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던 퀘스쳐닝들은 그 기사를 보고 알음알음 "P극장"을 찾아 종로까지 왔으나 피카디리극장을 P극장으로 오인하고 한껏 긴장하고 상영관에 들어갔다가 아무 일 없이 영화가 끝나자 허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선데이 서울>은 성정체성에 관한 용어도 헛갈리고 있었는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Mto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들을 “게이”라 칭하고, 남성 동성애자들을 “호모”라고 칭했다. “호모”들이 에이즈 전염의 주범으로 찍히자 일반 남성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바 마담들이 “우린 호모가 아니라 게이”라고 변명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렇다보니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이들이 제대로 된 성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리 만무했다. 동성애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고 선정적이며 어둡게 자리 잡았고,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저 '남자와 자는 사람' 정도로 여기거나 동성애자임을 거부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시 동성애자들을 “동성애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면이 있다. 그들은 그저 가끔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남색가” 정도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고 때문에 게이 공간들 역시 단발적으로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3.2.2. 90년대 이후의 게이 공간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환경, 여성, 노동, 소수자 인권 등 운동권이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3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 “초동회”가 설립되었다. 초기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은 “게이”와 “ 레즈비언”, “ 호모”, “ 트랜스젠더”와 같은 용어 정립에 가장 신경썼으나 2000년 홍석천 커밍아웃 이전까지 대중을 상대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89년 등장한 PC통신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게이 공간이 형성되기 위한 조건인 익명성과 접근성 모두를 가진 기술적 진보였을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되었다. 온라인 공간은 새로운 동성애자 공간으로 급부상했다.

1995년 하이텔에 처음 만들어진 동성애자 게시판은 적어도 같은 동성애자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서구의 다양한 젠더 이론들과 정체성 개념들을 전달하였고 수많은 호모포비아들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게시판에 접속한 전국의 수많은 동성애자들에게 연대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공동체로서의 게이 커뮤니티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PC통신 회사측에서는 동성애자 게시판을 공식 게시판으로 등록하기를 거부했으나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호모포비아들이 모여 엄청난 접속자 수를 기록하는 해당 게시판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국 몇 년 뒤 공식 게시판으로 등록되기에 이른다. 이 게시판이 당시 동성애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력이었냐면, 이 게시판에서 처음으로 주최한 정모에 참가한 인원이 무려 1,000명에 이르렀다고 증언한다. 심지어는 제주도나 부산에서도 왔다고 하니, 그야말로 억눌려온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이 첫 정모는 종로가 아닌 이태원동에서 이루어졌다. 각종 매스미디어로부터 종로3가의 어둡고 폐쇄적이며 퇴폐적인 이미지만을 접해온 젊은 세대는 종로3가를 거부했다. 종로를 대신하여 그들이 선택한 곳은 외국인이 많고 (당시엔 '게이바'로 불렸던) 트랜스젠더바들이 모여있는 이태원이었다. (잘못된 용어로 여러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태원은 새로운 게이 공간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트랜스젠더 바가 많이 모여 있는 이태원 소방서 뒷골목 부근에 진짜 게이바들이 하나 둘 문을 열었는데, 그 모습이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웠던 종로 3가와는 많이 달랐다. 1층에 유리문을 달고 커다란 네온사인 간판을 건 채로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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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소방서 뒷편에 있는 이른바 "게이힐"의 모습

1997년에는 야간정액제와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첫 동성애자 웹사이트 <엑스존>[7]이 문을 열었고, 온라인 동성애자 모임은 게이, 레즈비언, 연령별, 지역별로 분화되어갔다. 동성애자들이 그들 스스로 담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동시에 저항적인, 새로운 퀴어 문화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전처럼 숨지 않았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동지”를 만났으며, 인터넷을 통해 종로와 이태원 업소들의 정보를 얻어 장소로 찾아왔다. 인터넷에서는 그들의 성 뿐 아니라 정치, 연예, 사회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새로운 세대의 외면 속에 종로3가는 위기에 처했다. 이태원의 등장은 종로의 변화를 촉발했다. 종로의 업소들 역시 이태원처럼 간판을 달고 공개적으로 영업하기 시작했고, 크루징 명소였던 파고다 극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인터넷으로 쉽게 같은 동네에 사는 동지를 찾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크루징 명소라는 것은 무의미해진 것이다.

종로3가 포차골목. 주말에는 이 포차들은 게이들의 차지가 된다. 이 근방에는 호프, 바, 소주방, 가라오케 등 수십여개에 이르는 게이업소들이 몰려있다.

PC통신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를 사실상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 결정론적 관점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환경의 차이가 기술의 영향력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미 1970년대 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체화하여 정치 세력화한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터넷의 등장은 크루징 수단의 확대에 불과했지만, 1990년대까지도 이렇다 할 게이 커뮤니티가 부재했던 한국의 경우 인터넷이 섬으로 존재했던 동성애자들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새로운 통신수단이 등장할 때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2.4. 게이 앤썸

게이사회에서 지지를 받는 노래. 주로 디바 가수들의 노래인 경우가 많으며, 자신에게 당당하고 틀에 박힌 사랑을 초월하며, 범세계적인 인류애를 지향하자는 내용의 메세지를 담은 노래인 경우가 많다.
노래제목 - 가수 / 게이 앤썸이 된 이유

2.4.1. 나라별 게이앤썸

2.4.1.1. 한국
2.4.1.2. 영미권
2.4.1.3. 일본
2.4.1.4. 중국
2.4.1.5. 그 외


[1] 엉덩국의 만화나 다른 매체들에서 나오는 모습은 당연히 왜곡된 것이다. 엉덩국 만화의 홍콩행 게이바는 서양의 SM바에 가까우며 거긴 동성애자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DS(지배/피지배 또는 가학/피학)가 기준일 뿐이다. 사실 SM바와도 거리가 멀다. 도미넌트 서브미시브가 오는 서양의 바에 채찍을 들고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에세머는 없다. [2] 일반적인 남성 전용 휴게텔과 달리 간판에 '남성 전용'이 아니라 '회원제' 휴게텔이라고 써 있다. [3] 아예 기혼자 바이섹슈얼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4]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모여있는 동대구 일대가 대표적인 예다. 한편, 부산의 경우 서울처럼 도심지인 서면과 멀지 않은 범일동에 게이 공간이 형성되었고, 광주 역시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대인동에 게이 공간이 위치해 있다. 대전은 대전역 부근에서부터 도심지인 은행동과 가까운 대전 대흥동 일대에 산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5] 현재도 "때짜", "마짜"라는 은어로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게이/은어 참조 [6] 물론 실명을 밝히지는 않고, 중견 정치인 K씨, 유명 배우 P씨라는 식이었다 [7] 2000년에 청보위로부터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정통윤이 해당 사유로 유해매체 표시를 하라고 요구하자 운영자가 이에 항의하며 사이트를 닫았다. 이후 운영자는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2002년에 기각되었다. 2003년에 헌법소원, 2004년 대법원까지 상고했으나 2007년 최종 기각되고 말았다. [8] 헤이예이예예예로 유명한 원곡 <What'up>을 부른 4 Non Blondes의 보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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