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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5:08:46

개조파

국민당 개조동지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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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국국민당
주요 파벌
황포파
장제스
광서파
리쭝런, 바이충시
광동파
천밍수, 천지탕
서산회의파
린썬, 셰츠, 쩌우루
개조파
왕징웨이
중국국민당 개조동지회
中國國民黨改組同志會
Reorganization Comrades Association
파일:중국국민당 개조동지회 깃발.png
수장 왕징웨이
지도자 천궁보[1]
창설 1928년[설립시기]
해체 1931년 1월 1일(명목)
1932년 초(실질)[3]
이념 삼민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반제국주의
장제스
스펙트럼 좌익 (국민당 좌파)
회원 수 1,000명 이상(1929년 1월)
10,000명 이상(1929년 10월)
1. 개요2. 배경3. 활동
3.1. 개조파의 형성과 활동3.2. 제3차 전국대표대회3.3. 반장전쟁과 공식적인 해산3.4. 제1차 양광사변부터 영월합작까지3.5. 장왕합작과 최종적인 와해
4. 사상(1928년)5. 조직 구조6. 기타7. 소속 인물8. 참고문헌9.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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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약칭 개조파(改組派). 국민혁명이 완수되며 장제스가 정권을 장악한 1928년부터 장왕합작이 이루어진 1932년까지 활동한 중국국민당의 파벌이다. 장제스가 장악한 국민당을 다시 쑨원 시절의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려는 목적을 갖고 활동했다.

2. 배경

영한합작으로 국민당 좌파, 국민당 우파, 서산회의파의 갈등은 일단락되고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영한합작은 실질적으로 난징정부에 우한 국민정부가 일방적으로 흡수되는 형식이었고 따라서 국민정부는 난징정부 출신의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가 주도하게 된다. 반면 우한정부 출신인 국민당 좌파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돌아가지 못하자 좌파의 거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후한민의 광동파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당 좌파는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해체한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제2차 장왕합작 이뤄지리라 기대했지만, 국민당 좌파가 지배하던 광동에서 공산당이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면서 국민당 좌파는 국민당 우파에 의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왕징웨이가 폭동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여 외유를 떠나자 좌파는 우파의 공격에 원활히 대처할 수 없었고, 좌파는 크게 위축되어 1928년 2월 3일부터 7일까지 소집된 4차 전체회의에서 광저우 폭동으로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는 물론 좌파의 지도자급인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까지 회의해 참석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전체회의의 인원수 31명 중 좌파에 속하는 인물은 10명에 불과하여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4중전회에서는 회의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국민정부 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서 좌파는 왼전히 배제되었고 북벌을 이유로 좌파의 핵심이던 민중운동의 정지,[4] 탈급진화를 결의하고, 그 대신 국가 경제를 부흥하여 제국주의에는 그 이후에 대처하자는 민족자강 노선이 채택된다.이렇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국민당 좌파는 새로운 이념적 모습을 가지기로 한다.[5]

3. 활동

3.1. 개조파의 형성과 활동

왕징웨이는 영한합작 이후 공산당의 광저우 폭동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프랑스로 외유를 떠난 상태였다. 이에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천궁보, 구멍위, 왕파친과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 바이윈티, 왕러핑, 주지청, 중앙감찰위원회 위원 판윈차오, 구정타오 등 왕징웨이 측근들은 1927년 10월부터 개조파의 기틀이 되는 활동을 시작했고,[6] 1928년 중[설립시기] 상하이에서 집회를 갖고 3일간의 토론을 거쳐 비밀리에 중국국민당 개조동지회 본부(中國國民黨改組同志會總部)를 설립하여 당 중앙에 조금씩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개조파가 주도한 '개조운동'은 1924년 1월 1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 즉 쑨원 시절의 국민당 개진·개조 당시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당내 민주주의를 되돌리고 민중운동 지원, 불평등조약 철폐를 통해 민주국가 수립을 지향하자는 운동이었으며, 곧 1928년 4월부터 왕징웨이가 줄곧 주장한 내용이었다.[8]

국민당 내의 지식인과 젊은 학생들이 주축이 된 개조동지회의 이러한 당내 민주주의 요구는 국민당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한때는 중국의 19개 성과 5개의 주요 도시에 그 지부가 세워졌으며, 거의 모든 지방당부를 장악했고 심지어는 프랑스, 일본, 베트남, 홍콩, 싱가포르 등 타국에도 진출하여 회원 수가 1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개조파는 국민당 내에서 가장 큰 문인(文人) 파벌이었으며, 왕징웨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개조파와 긴밀히 접촉했음에도 정식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개조동지회는 천궁보가 이끌게 된다.

왕징웨이가 개조동지회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는 왕징웨이는 천궁보의 좌익적 사상이 깊게 든 개조동지회와 이념적으로 일치하지 않았으며, 좌파 중 가장 급진적인 편이었던 천궁보와 함께했을 때 국민당 우파에게 공격받을 것을 우려했다고 생각된다.[9] 왕징웨이는 스스로를 국민당의 지도자일 뿐 특정 파벌의 지도자는 아니라고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개조파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정치적 계산을 통해 자신과 개조파의 연관성을 굳이 부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개조동지회와 왕징웨이의 관계는 몹시 모호하여 1929년 중반까지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으며 난징 당중앙과 협력하기 위해 귀국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파일:개조동지회가 발행한 간행물.jpg
개조동지회가 발행한 간행물인 <혁명평론>과 <전진>

상술했듯 4중전회에서는 민중운동 정지가 결의되었으나 1928년 5월 제남 사건 이후 다시 전개되기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반일운동은 이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제 물건을 보이콧하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개조파는 학생 세력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10] 또한 노동운동도 점차 활성화되어[11] 개조파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개조파도 여러 간행물을 발행하여 자신의 의견을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 천궁보의 <혁명평론>과 구멍위의 <전진>이 가장 유명하였는데, 그 중 <전진>은 대단히 인기있어 당일 판매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개조동지회는 2계 5중전회를 앞두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때맞춰 국민혁명이 완수되자 개조파는 북벌이 끝났으니 다시 민중운동은 재개되어야 한다며 민중운동의 활성화와 정치분회의 철폐를 내세웠다. 그러나 장제스는 정치분회의 폐지는 받아들였으나 민중운동의 금지에 대해서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군벌들은 반대로 정치분회를 폐지하고 중앙집권과 군비 감축을 추구하는 장제스에 반발하여[12] 2계 5중전회의 최종 심사일인 8월 14일에는 양 측의 보이콧의 결과로 48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20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권 장악에 위기를 느낀 장제스가 국민당 우파와의 협력을 모색하고 후한민 쑨커를 불러와 장호합작을 꾸리자 개조파는 완전히 소외되었다. 1928년 10월 인선된 5원장 중 좌파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으며,[13] 10월 28일 난징 당중앙은 1929년 초 소집될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대표 다수를 당중앙이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당중앙이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주도권을 독점하자 개조파는 심각한 불만을 표했다. 장제스도 1928년 9월 천궁보의 개조파 잡지 <혁명평론>을 폐간시키고[14] 1929년 1월에는 아예 천궁보에게 압력을 넣어 유럽으로 강제 외유를 보내는 등 국민당 좌파와 거리를 두었다.[15]

그러나 난징 당중앙은 이들을 탄압할 법적 권한, 조직력, 군사력이 있었다. 장제스는 개조파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껴 개조파가 발행하는 간행물 단속, 개조파 당원 제명, 지방당 개편을 통해 지방당에서의 개조파 영향력을 뿌리뽑는 한편 직접 납치와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후한민도 1929년 말 개조파는 정치적 힘이 전혀 없는 정치 파벌이며, 소문을 퍼뜨리고 불화를 일으키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장제스는 개조파를 국민당 좌파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며[16] 여러 연설을 통해 개조파의 영향력을 일축했다.[17]
지금의 개조파는 (정치 현상을) 조종할 만큼의 영향력도 없고, 성공할 힘도 없다. 그들은 혁명사에 어떠한 유익한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들의 힘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미치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을 버린 이유이다. 중국 안팎의 사람들에게 개조파의 영향이 미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사실, 개조파는 10년 전의 정학계[18]와 비슷하다. 당과 국가를 배신하고 군벌들과 협력하며 혁명가 행세를 하는 반동적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중략) 개조파는 일정한 이념에 따라 지도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회주의에 따라 활동할 뿐이기에, 어떠한 혁명적 힘이나 혁명정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
1929년 6월 17일, 장제스,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

3.2. 제3차 전국대표대회

상술했듯 난징 당중앙이 1928년 10월 28일 통과시킨 전국대표대회 대표를 직접 임명하는 결의안에 의해 결국 406명의 대표 중 81.2%에 달하는 인원인 333명이 당중앙에 의해 선출되면서 난징 지도부는 전국대표대회에 대한 통제권을 대부분 확보하였다. 원래 1929년 3월 15일에 열리기로 예정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국공결렬 이후 처음 열리는 전국대표대회였으며, 그만큼 중요한 대회였다. 이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이전에 결의된 제4차, 5차 전체회의의 안건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조치는 엄천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랴오둥, 후난, 후베이, 베이핑, 쓰촨의 지방당은 대놓고 난징의 방식에 반대를 선언했고, 저장, 푸젠, 광둥, 지린, 산둥, 난징, 상하이, 톈진, 한커우, 하얼빈, 프랑스 해외당지부 등 산하의 여러 당기관이 난징에 항의했다. 한커우와 후베이, 장시는 참여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격렬한 반대 시위에 당황한 장제스는 뒤늦게 좌익을 달래려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중앙집행위원, 중앙감찰위원 의석을 약속했지만 국민당 좌파는 단호히 거부했으며 왕징웨이 역시 3월 11일 <당무정치선언>을 발표하며 3차 전국대표대회 반대를 선언했다.

1929년 3월 14일 개조동지회 소속의 반장파 몇몇이 난징의 국민당원회의를 장악하여 친장파와 유혈충돌까지 생기는 등 반대가 거세지자 난징 당중앙은 지방당에서 반중앙 인사들을 내쫓고 친장파 인사로 교체하는 한편 일부 당 간부들도 난징으로 소환하여 당 노선에 따르라는 지시를 내리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래도 이 방식이 효과가 있었는지, 3월 18일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기존 난징 지도부의 노선과 안건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더불어 천궁보, 간나이광의 제명, 구멍위의 3년간 당원정지, 왕징웨이에게는 서면 경고를 전함으로써 개조파에 대한 탄압을 이어갔지만 반장세력은 굳건히 반중앙의 노선을 유지했고, 이들은 이후 2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3차 전국대표대회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 덕에 개조파의 세가 크게 불어나는 이득(?)도 있었다.[19] 한편 그동안 개조위원회는 외유를 떠나있던 왕징웨이에게 중국으로 돌아오길 촉구하였다. 1929년 6월 천궁보가 귀국하였으며, 10월 왕징웨이 또한 마지못해 청을 들어주는 척 중국으로 돌아왔다.

3.3. 반장전쟁과 공식적인 해산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왕징웨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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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가 귀국하고, 1929년 3월을 기점으로 그동안 천궁보가 이끌던 개조동지회와 국민당 좌파 세력의 주도권이 왕징웨이에게 넘어감에 따라 개조파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천궁보는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반면 왕징웨이는 민주주의에 더 가까웠고 천궁보도 왕징웨이의 의견에 따라 점차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20] 따라서 1930년 초부터 개조동지회 또한 민주주의를 중점으로 두었다.

한편 장제스는 1929년 편견회의를 개최해서 군벌들의 세력을 축소하려 시도했다. 그러자 그동안 겉으로는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던 군벌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점차 내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조파는 1929년 1월 열린 개조동지회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결의에 따라 군벌과는 동맹할 생각이 없었고, 실제로 첫 번째 반장전쟁인 제1차 장계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중립을 지켰으나 현실적으로 군벌 세력 없이는 장제스를 타도할 수 없었고, 장제스를 타도하지 못하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개조파의 일부 지도자들은 군벌과 연합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왕징웨이도 1929년 초부터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군벌 세력을 이용해 난징을 타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21]
중국 국민혁명이 인민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전술적 관점에서는, 중국 혁명은 군사력의 활용이라는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중국혁명은 유럽혁명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성공한 많은 혁명은 군사력이 불필요했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 혁명이 반드시 인민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중요성도 알아야 한다.
1929년 1월 1일, 왕징웨이, 동료 왕모우궁에게 보낸 편지에서.

뒤이어 그는 <민의>의 논설에서 중국군을 민중과 협력하는 '무장동지'와 그렇지 않은 '군벌'로 분류하고, 중국에는 군벌이 대부분이지만 무장동지도 적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협력의 밑그림을 그렸고, 일부 개조파는 민주세력 육성을 위해 가능한 큰 전선을 구축해야 하며, 민주세력과 가까운 군벌과는 연합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1929년 5월 왕러핑 등 개조파 요인들은 상하이에서 '호당구국군'으로 이루어진 '중국국민당 호당혁명대동맹'을 조직했다. 9월 24일, 2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22]들은 당중앙을 대놓고 적대시하며 난징의 장제스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고, 이에 난징 당중앙은 1929년 10월, 12월 회의를 통해 이들을 국민당에서 영구제명하기로 결의했지만 장파쿠이, 탕성즈, 리쭝런과 쓰촨 일부, 안휘, 장쑤 등 반장세력이 여기에 호응했고 이들은 호당구국군을 칭하며 장제스에게 봉기했다. 그러나 옌시산은 모호하게 중립을 지켰고 호당구국군을 칭한 제2차 장계전쟁, 제2차 장풍전쟁, 장당전쟁에서 반장세력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되었다.[23] 그러다 마침내 옌시산이 반장전쟁의 최절정이라 할 수 있는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왕징웨이와 개조파 또한 반장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나 개조파는 그동안 당이 군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는데, 당의 통제를 벗어나 역으로 당에게 반기를 든 군벌과 동맹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개조파 강령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왕징웨이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군벌과의 동맹은 개조파 내에서도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4] 천궁보 또한 산서군벌 옌시산과 협력하려는 왕징웨이를 만류했으나, 왕징웨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조파가 중원대전에 합류하자 많은 개조동지회 구성원들은 이에 실망하여 개조파를 떠났고, 북중국을 제외한 동지회 지부의 활동이 멎었으며 산동지부는 신규 당원을 모집할 수조차 없었다.
파일:1930년 옌시산과 왕징웨이.jpg
옌시산이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한 1930년 9월 9일, 베이핑에서 만난 옌시산과 왕징웨이

한편, 반장의 대열에 서산회의파가 참여하려 하자 1930년 4월부터 6월까지 서산회의파 대표 쩌우루, 셰츠와 개조파 대표 천궁보는 당 정당성 문제를 놓고 타이위안에서 만나 열띤 논쟁을 펼친다.[25] 그러나 협상에 진전이 없자 왕징웨이는 천궁보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 동시에 양측이 통합할 수 있는 확대회의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 서산회의파가 동의하면서 서산회의파도 반장진영에 합류한다.[26]

왕징웨이는 확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30년 7월 23일 홍콩에서 베이핑으로 갔고, 개조동지회 본부 또한 상하이에서 베이핑으로 이동한다. 왕징웨이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확대회의 30명 중 개조파는 12석(40%)를 차지해 가장 인원이 많았고, 상무위원회에서 42%, 선전부는 40%, 조직부와 대중교육위원회의 다수를 개조파가 차지한다.[27] 확대회의는 선언문에서 장제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당원에게는 통일된 당을, 국민에게는 통일된 국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라 선언하며 난징이 독점했던 기존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무효 처리하고 새로운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할 것이라 발표했다. 또한 7월 28일 확대회의에서 기초조건으로 정치개혁 7대 주장을 통과시켰다.
1. 국민회의의 소집을 준비하고, 여기에 각종 직업단체가 참여하게 한다.
1. 「건국대강」에 따라 기본대법(그 명칭은 헌법 제정 전까지 약법으로 칭함)을 제정하여 정부조직을 구성하고 인민의 공적·사적 권리를 보장하며, 그 법은 국민회의를 통해 공동으로 승인한다. 긴급한 상황하에선 확대회의를 통해 약법을 공포하고, 장래에 국민회의에서 추인할 수 있다.
1. 민중운동, 민중조직은 응당 「건국대강」의 지방자치에 관한 내용을 따라 공산당이 야기한 계급투쟁의 화근을 막아야 한다.
1. 각급 당부가 정부의 정치행위를 다룰 때는 지도·감독의 위치에 서되, 직접 정무에 간섭하지는 않는다.
1. 당부가 민의기관을 대체하지 않는다.
1. 총리의 유교는 소위 이당치국으로, 당의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뜻하니 응당 인재를 중앙에 집중시키고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1.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대하여 「건국대강」에 따라 균권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중앙집권이나 지방분권으로 치우쳐져서는 안 된다.

덕분에 확대회의는 개조파가 원하던 대로 당과 국가의 민주주의 건설을 목표로 삼게 되지만 이 무렵, 기존 확실한 좌익적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개조파는 옌시산과 서산회의파에 맞춰 계속해서 이념적 입장을 변화한 결과 완전히 퇴색되어 '반장제스'라는 공통분모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천궁보도 회고록에서 확대회의가 소집될 무렵에 개조동지회의 정신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비통해했다.[28] 실제로 이 시기 개조파는 그동안 내세우던 정책 주장이 쏙 빠지고 세력 확장에만 급급하여 국민당 자체의 이념인 이당치국의 원칙까지 느슨하게 해석할 정도로 의도가 굴절된다.[29]

이후 베이핑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왕징웨이는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헌법인 중화민국약법초안(약칭 태원약법)을 작성했다. 이 약법에서 그는 당의 군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30] 당 통치의 이상인 민주집권적 통치를 복구하고자 한 것은 물론,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조항을 몹시 풍부하게 넣었다. 결국 1930년 10월 27일, 다음과 같이 말하며 베이핑 확대회의에서 약법을 공포했다.
1928년부터 중국국민당 군사력으로 나라를 통일했다. 그 이후로 인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정치권력은 분열되고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이유는 임시약법이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자유과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약법이 없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과 지방의 권력의 경계가 모호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결함은 국내의 격변을 일으키기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30년 10월 27일, 왕징웨이, 베이핑에서 열린 확대회의에서.[31]

그러나 태원약법은 상당히 민주적이었지만, 장제스의 난징정부와 차별화를 목표로 한 선전성 요소가 짙었다. 특히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은 지방자치의 미비하여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고 평가된다. 게다가 장쉐량이 장제스를 지지하며 참전하자 개조동지회 또한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직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정기 회의를 열 수도 없었으며 개조동지회를 탈퇴하는 회원들의 수가 점차 많아졌다. 왕징웨이도 전황이 영 좋지 않자 11월 3일 타이위안을 빠져나와 11월 중순 영국령 홍콩으로 돌아갔고, 1931년 1월 1일 그곳에서 개조동지회의 해산을 선언하며 개조동지회는 정식으로 해산된다. 많은 개조동지회 중급 간부들은 개조동지회와 같은 혁명적 조직이 없으면 혁명적 이상 또한 달성할 수 없다며 왕징웨이에게 동지회의 해산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왕징웨이는 이미 해산을 결심한 상태였기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32]

하지만 당해 5월에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임시회의에서 개조파가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로써 공식적인 조직은 와해되었지만, 개조파는 장왕합작 시기까지 활동을 지속한다.

3.4. 제1차 양광사변부터 영월합작까지

확대회의와 개조동지회가 해산되자 좌파의 힘은 약해졌고 좌파 지도자들과 평단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개조파는 거의 소진되어 몇 년 전 농민부터 학생, 지식인을 아우르던 거대한 규모의 지지층과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던 전성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이제는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국민당 좌파의 이념을 잃어버린 한낱 정치 파벌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었다.

개조파의 첫 반장 시도는 큰 대가와 함께 수포로 돌아갔지만 곧 다시 반장파에 기회가 찾아온다. 장제스의 동맹이던 후한민은 장제스가 자신과 같은 우익 당권파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 약법 제정를 서두르자[33] 이것에 항의했는데 장제스가 탕산에 온 후한민을 감금하는 이른바 탕산 사건을 일으킨다. 광동 사람들은 같은 광동 출신들과의 유대감이 매우 끈끈했는데, 후한민이 바로 광동 출신이였다. 같은 광동 출신으로 광동인들의 마스코트와 같았던 입법원장 후한민이 갇히자 광동파는 몹시 분노하며 장제스의 하야와 후한민의 석방을 요구하여 다시 한번 반장의 전운이 감돈다. 그러자 장제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산회의파, 계계군벌, 상계군벌 등 살아남은 반장 세력이 총집합한다. 난징 지도부도 분열되어 공직에 전념하던 반장파인 구잉펀(국민정부문관장), 쑨커(철도부장), 왕충후이(사법원장), 린썬(입법원장) 등도 광둥으로 흘러들어온다.

왕징웨이는 1931년 3월 4일과 14일 두 차례의 성명에서 장제스 정부와 위안스카이 정부를 비교하면서 둘 다 같은 종류의 군사 독재에 속한다고 밝히며 당과 인민의 현재 목표는 장제스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일단은 말하였으나, 사실 당시 왕징웨이는 후한민은 장제스 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은 주요 인물이기 때문에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반장을 위해 후한민과 광동파와 화해하기로 결심했고, 5월 1일 그는 지금이야말로 장제스를 토벌할 마지막 기회이며, "모든 혁명동지들이 결집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단결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구구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장제스를 반대하는 모든 민주 세력을 통합시킬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보를 당에 보내며 광둥과 협력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작 시기부터 내려온 우익 반장파와 좌익 개조파 사이에 불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왕징웨이도 처음엔 광둥을 외부에서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직접 광둥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징웨이의 명망은 광둥에 모인 군벌 잔챙이들과 비교가 될 리 없었고 후한민 역시 왕징웨이는 반장 진영에서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을 비밀리에 전했다. 따라서 광동파 구잉펀과 등택여는 왕징웨이가 광동과 뜻을 같이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동료들을 설득하였고 왕징웨이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반장에 적극적이고 단결을 강조하는 문장을 여럿 발표하였다. 양 인물들의 노력 덕에 왕징웨이의 이미지가 좀 나아지자 때가 됐다고 판단한 왕징웨이는 비밀리에 상하이에서 광동과 가까운 홍콩으로 건너가 반장파들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다. 1931년 5월 24일 새벽 홍콩으로 향해 온 쑨커, 쉬충즈, 진우인도 왕징웨이의 집에 모여 반장의 대열에 합류하여 이들은 같이 반장을 위한 앞으로의 향동을 준비한다. 5월 27일, 결국 제1차 양광사변이 일어났고, 이들은 장제스에 맞서는 광저우 국민정부를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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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이후 열병식을 거행하는 왕징웨이

그러나 군벌들과 우익 파벌은 왕징웨이를 이용만 하고 싶었을 뿐 반장 진영에서 좌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후한민은 광둥성을 지배하고 있던 천지탕에게 연락해 왕징웨이를 제외한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 등 개조파의 핵심 인물이 광저우로 입성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것은 물론, 다른 우익 반장파도 개조파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같은 반장파 중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신세인 것. 어쨌든 부유한 광둥마저 반장으로 돌아갔으니 상황은 개조파에게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임시회의에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자제하고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기존 개조파가 불법이라고 규정한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6월 24일에는 다시 한번 개조동지회를 복원하려는 국민당 좌파가 쓴 편지에 그는 다음 날 (파벌 형성이 광저우 정부에 분열을 야기할까 우려하여) "국민당의 모든 파벌 조직을 해체하고 모두 함께 광둥과 협력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5월부터 12월까지의 비상회의 기간 동안 좌익은 광둥 세력들과 화친하지 못했고[34] 광둥은 그를 냉대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실세였던 천지탕은 왕징웨이를 자신의 정부에 참여시키면서 그의 영향력을 이용했고 덕분에 4월 25일 장파쿠이의 지지를 얻으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천지탕은 더 이상 왕징웨이의 지지를 얻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왕징웨이를 권력에서 몰아냈다.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17명 중 좌파는 왕징웨이 하나 뿐이었으며 위원회 산하의 재무부, 외교부, 화교위원회, 정무위원회, 재정위원회에서 개조파는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좌파는 그저 명목상의 영향력만 있을 뿐, 제대로된 권력 하나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회의에 참가한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개조파는 회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 했으나 광동파에게 제지당했고, 왕징웨이는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했으며 좌파는 광저우 정부의 정책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장제스와 반장파의 평화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되고,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하야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영월합작이 성사된다. 1932년 1월 1일 광동파 쑨커 내각이 개각되고 국민정부 주석에는 서산회의파 린썬이 선출된다.

3.5. 장왕합작과 최종적인 와해

장왕합작의 기류는 만주사변 전야인 10월 5일부터 관찰되었다. 왕징웨이는 그날 영월합작을 위해 상하이로 가던 중 천궁보와 홍콩에서 만나 자신은 적절한 순간에 광둥에서 나올 것이며, 장제스의 심복인 쑹쯔원에게 연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 천궁보는 장왕합작이 임박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1931년 9월 23일 대중 조직과 28일 당 집회에서 한 연설에서만 해도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먼저 권좌에서 물러나야 난징과 광저우의 통합이 빨라지고, 그래야만 일본에 대항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제남 사건, 중동로 사건에서의 난징 중앙의 약한 대응을 구실로 장제스를 공격하고 만주사변이 시작된 이번에는 장제스가 국가를 팔고 항복할 수도 있다며 비난했다.[35] 정작 8년 뒤에는 자신이 그렇게 된다 덧붙여 그는 인민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장제스를 끌어내릴 것을 촉구했으며 그래야만 일본에 맞서 국가가 단결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이때만 해도 강력한 반장제스 의지를 보인 그였지만, 이후 10월 5일 타협의 가능성을 보인 것으로 보아 9월 28일~29일 홍콩에서 열린 광저우와 난징의 예비회담에서 합작의 가능성을 생각한 듯하다.

여러 이유 중 하나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왕징웨이도 느긋하게 이념 싸움만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외세에 맞서 단결하는 것이 더 시급해졌고, 단결을 위해서는 난징 중앙과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제 정책 차이로 난징과 싸우지 않을 것을 선언했고, 1932년 1월 1일 천궁보도 좌파는 난징과 통합될 것이며, 이번 통합은 중국 인민과 국민당의 생존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따라서 만주사변을 계기로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정치적 입장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또한 자신을 냉대한 광저우 정부에 대한 불만도 한몫했다. 광동시장 정천구(Ch’eng T’ien-ku)의 회고록에서 왕징웨이는 천궁보에게 처음 자신이 광둥에 오면 이용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광둥으로 간 것은 장제스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후한민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광동파가 자신을 방해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10월 5일에는 자신이 광둥에 참여한 것은 바이충시 장파쿠이가 자신에게 광저우로 가서 그들과 천지탕 사이의 연결창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광둥의 왕징웨이 무시가 겹치고 설상가상으로 영월합작에서마저 개조파가 제대로 된 자리 하나를 받지 못하자 결국 왕징웨이는 빡칠대로 빡치며 영월합작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1931년 10월 21일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측근 쑹쯔원과 접촉했고, 10월~11월 후한민과의 비공식 회담에서 자신은 광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뜻을 전했다. 그의 말대로 11월 7일 상하이의 평화회담이 끝나자 왕징웨이는 치료를 명목으로 그대로 상하이에 남으며 광동 측에서 이탈하게 된다. 한편 쑨커는 중화민국이 건국 이래로 고질적인 문제였던 재정확보에 실패하고[36]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며 쑨커는 하야하게 된다.[37] 그리고 후임 행정원장으로 왕징웨이가 화려하게 복귀하며 제3차 장왕합작이 수립된다.

합작이 성사되자 국민당 좌파는 즉시 내각에 입각하여 공직을 얻는다. 왕징웨이 자신과 구멍위, 천궁보, 왕파친, 주지청, 파이윈티, 허샹닝, 천슈젠, 간나이광[비개조파]은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천비쥔[비개조파], 판윈차오, 구정타오는 중앙감찰위원회 위원, 천궁보는 실업부장, 구멍위는 철도부장 등 적지 않은 수의 국민당 좌파가 출세한다.[40] 왕징웨이가 국민당 개조와 반장을 버리고 장제스와 함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결국 개조파는 장왕합작 이후 완전히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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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원장 왕징웨이

4. 사상(1928년)

1928년 개조동지회의 사상은 특히 천궁보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천궁보는 <지금 국가자본을 건설하는 방법>에서 개조파가 권력을 잡았을 때 실시할 정책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이 시기 개조파는 제1차 국공합작 시절의 '혁명적 이상'을 표현하고 쑨원의 교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핵심만 요약하면, 민중운동을 기반으로 25감조와 지방자치를 실현해 혁명세력을 양성하고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자본을 적극적으로 확보하여 이 과정에서 계급의 차별성을 소멸시켜 민생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어디까지나 개조파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만 이룰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개조파는 장제스가 장악한 당권을 얻으려 투쟁의 길로 들어서다, 결국에는 군벌과 연합하는 방식으로 비틀어지고 만다.

그러나 1929년~1931년 개조파는 왕징웨이가 주도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좌파적 사상이 옅어지고 민주주의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

5. 조직 구조

개조동지회의 구조는 성립 당시에는 총무부, 조직부, 홍보부 세 부서가 있었지만 이내 늘어났고, 국민당의 강령과 좌파 지도자 왕러핑이 설명한 개념을 기반으로 조직되어 국민당의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개조동지회의 규칙에는 12개의 장이 있었는데, 그 중 첫 장는 회원가입에 대한 규정이다. 비밀단체답게 모든 개인은 최소한 2명의 회원의 추천을 받아 가입할 수 있었으며, 그러고도 1~3개월 간의 수습 기간 이후 상부의 승인을 받고서야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신규 회원에게는 개조동지회의 목표를 알리는 8가지 항목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비밀리에 국민당 개조를 준비한다.
1. 쑨원의 혁명정신을 기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
1.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국민당의 기본 세력으로 인정하고,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을 확립한다.
1. 국민당 중심의 삼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1. 반제국주의 운동을 계속한다.
1. 대중운동을 복원한다.
1. 당내 공산주의자와 기타 부패하고 변질된 파벌과 조직을 제거한다.
1. 삼민주의 국제조직을 창설한다.

규칙의 제2장은 개조동지회의 전반적인 조직 구조에 관한 내용이다. 조직의 가장 최소 단위는 3~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직의 규모에 따라 크게 5개의 분류가 있었다. 제3장은 전국대회와 협회 총본부의 구조와 권한을 설명하였다. 제4장과 제12장에서는 규모에 따라 나뉘어진 다섯 분류의 상세한 권력 구조, 제8장에서는 의회 대표와 집행위원회 위원의 임기, 제9장, 제10장, 제11장에서는 조직의 규율과 파벌, 회비 및 기타 지침에 대해 다루어져 있다.

개조동지회는 회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개인의 모든 활동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개조동지회의 결정에 대한 질문은 불허되었으며, 다양한 정책과 진행 상황을 보고하기 위한 최소 규모끼리의 회의는 매주 열렸고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동지회 간부들은 단일하고 통일된 이념, 엄격한 규율, 조직에 대한 복종, 대중과의 연결에 대해 연수를 받았다. 또한 학교, 당 조직, 대중 조직에서 회원 수를 늘려갔다.

그러나 철저한 규율이 무색하게 실제 운영은 꽤나 느슨했다. 간부들은 조직을 이끌 체계적인 계획이 없었고 본부와 지방 조직이 통신이 되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으며 개조동지회의 영향력이 강한 상하이, 난징, 베이핑, 간쑤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매주 열려야 할 회의도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 조직임에도 보안이 좋지 않아 관련 정보가 유출된 적도 있었다. 1929년 1월 열린 개조동지회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천궁보 역시 회고록에서 개조파의 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왕파친 선생은 이제 늙었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성실하지만 생각이 부족하다. 주지청 선생은 용맹한 사람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판윈차오는, 비판적인 생각은 잘 하지만 건설적인 생각이 부족하다. 따라서 남은 사람은 왕러핑 뿐이다. 그러나 왕러핑은 행동이 너무 지나치다. 그의 행동은 때때로 충동적이고 신중하지 못하며, 그의 정책은 모순되는 경향이 있다. (중략) 구멍위는, 건강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조언가가 될 수는 있지만 좋은 지도자는 될 수 없다. 이것이 개조파의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은 (개조파의 미래에 대해) 낙관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그저 암울하게만 볼 뿐이다.
천궁보의 회고록.

하지만 이러한 조직적 결함은 크지 않았으며, 동지회는 여전히 신속히 발전해 나갔다. 개조동지회는 여러 군벌과 소기업들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42] 또 반장 운동을 위해 군벌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기도 했다.[43] 그러나 상업 및 산업 분야에서 주요 자금을 확보한 덕에 재정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6. 기타

7. 소속 인물

8. 참고문헌

9. 관련문서



[1] 개조동지회는 왕징웨이를 지지했고 왕징웨이 자신도 개조파에게 여러 지시를 내리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참여는 하지 않았다. 때문에 개조동지회의 실무는 천궁보가 이끌었다. [설립시기] 설립 시기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있는데, 천궁보는 1928년 말에 설립되었다고 말했지만 협회 자체 문서와 개조파 간부 판이수이(Fan Yii-sui)는 1928년 5월에 설립되었다고 하였고, 로팡충(Lo Fang-chung)은 1928년 중반 이전, 호한웬(Ho Han-wen)은 3월 또는 4월 경, 배경한 교수의 <왕징웨이 연구>에서는 1월, 위키피디아 등의 매체에서는 11월이라는 둥 각자 제각각이다. [3] 제3차 장왕합작 이후 점차 소멸하였다. [4] 당시 회의 참가자에 따르면 민중운동의 정지에 좌익의 합의도 있었다고 했지만, 당시 좌파는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5] 한편 쑹칭링 덩옌다는 국민당을 버리고 제3당 운동을 일으키며 국민당을 이탈했다. [6] 일본의 연구자 新地比呂志는 개조파 준비기를 「中國國民黨所代表的是什麼(중국국민당소대표적시십마)」를 집필한 1927년 10월부터 <혁명평론> 첫 호가 나온 1928년 5월까지로 설정하고 개조파가 정식으로 조직을 갖춘 것은 1928년 11월이었다고 규정했다. [설립시기] [8] 동시에 민주정치를 이행하지 않고 군권을 바탕으로 독재를 펼치는 장제스에 대항하는 반장운동이기도 했다. [9] 실제로 개조동지회의 초기 이념은 천궁보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좌파적인건 사실이었고, 당시 국민당 내에서 민중운동에 조금이라도 지지나 동정심을 보이면 바로 공산당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에 천궁보는 국민당 우익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왕징웨이 역시 이따금씩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했다. [10] 학생들은 경제적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투쟁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지식인 계층이라는 점에서 학생 단체는 개조파가 쉽게 장악하기 좋았다. [11] 1928년 상하이에서 쟁의가 생긴 공장수는 5433개,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는 20만 4563명, 투쟁에 따른 손실 연노동일수는 204만 9826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12] 정치분회는 국민당의 지방 영향력 행사가 제한적이던 군벌시대 동안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데 기여했지만, 군벌들이 정치분회의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중앙의 권력이 분산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는데 5중전회에서는 1928년 말까지 정치분회를 전부 폐지하고 군사의 전권을 중앙에 일임, 군비는 총예산의 50%를 넘지 못한다는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당의 권력 확장을 꾀했다. 또한 후한민의 건의에 따라 군정을 끝내고 훈정을 결정한 회의이기도 했다. [13] 여기서 후한민이 입법원 원장, 쑨커는 고시원 부원장, 서산회의파 린썬 장지는 각각 입법원 부원장과 사법원 부원장에 취임했다. [14] 아이러니한 점은, 개조파가 형성된 초기 장제스는 개조파를 이용해 정적들에게 타격을 줄 요량으로 쑹쯔원을 통해 비밀리에 <혁명평론>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혁명평론>에서 국민당 비난이 심해지고 장호합작을 통해 좌파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없어지자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기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15] 이후 <혁명평론>을 집필한 논객들은 새로운 간행물인 <민중선봉>을 만들어 1929년 1월부터 2월까지 출판하였는데, 천궁보는 이 강제 외유 때문에 <민중선봉>에 자주 글을 쓰지 못하였다. 반면 1928년 6월 1일부터 발행된 구멍위의 <전진>은 5월 7일부터 발행을 시작한 <혁명평론>보단 온건하였기에 1929년 1월까지 출판을 지속한다. [16] 물론 천비쥔, 간나이광과 같이 개조동지회에 가입하지 않은 국민당 좌파도 있었다. [17] 그러나 장제스가 베이핑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개조파 지지를 중단하고 중앙정부를 지지하며 학업에 열중하라"고 호소해야 할 정도로 개조파의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18] 1914년 8월 세워진 황싱의 구사연구회에서 계승된 북양정부, 국민정부의 파벌이다. [19] 천궁보는 회고록에서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없었다면 개조파가 이후 만큼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20] 물론 민생주의 발전, 비자본주의의 발전, 유물론의 개념 등 기존 자신의 이론 중 핵심 내용은 바꾸지 않았지만 왕징웨이와의 별다른 권력 투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망 높은 왕징웨이가 없다면 개조파가 와해될 것을 우려했으며 무엇보다 천궁보는 왕징웨이에게 큰 충성심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1] 훗날 천궁보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프랑스에 있던 1929년 4월~5월 사이 왕징웨이는 군벌과 손잡기로 결정했다고 하였다. [22]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이미 끝난 후였기 때문에 실권은 2계 중앙집행위원이 아닌 3계 중앙집행위원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개조파는 3전대회의 정당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2전대회에 선임되었던 2계 중앙집행위원들을 고집했고, 이를 통해 당의 정통성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23] 훗날 천궁보는 회고록에서 펑위샹, 옌시산, 탕성즈가 힘을 합했다면 장제스를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성공했다 했을지라도 개조파가 이 군벌들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4] 다만 1929년 6월 15일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군벌이 군벌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 "대중을 각성시켜야 군벌을 타도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군벌에 대한 기존의 입장은 유지하긴 했다. [25] 서산회의파와 국민당 좌파는 1925년 갈라져 따로 제2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각각 상하이 당중앙과 광저우 당중앙을 설립한다. 서산회의파는 당헌에 의하면 당중앙 선거는 최소 2년마다 실시해야 했는데, 광저우 당중앙은 2년 넘게 집권했기 때문에 광저우 당중앙의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1930년 6월 6일 천궁보는 당헌은 중앙당의 정당성이 2년의 임기 후 종료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국민혁명은 모두 광저우 당중앙이 주도했다고 이 주장을 일축하였다. [26] 그러나 천궁보는 이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서산회의파가 반장진영에 들어오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광저우 당중앙의 정당성을 지키고 싶어했고, 후에 왕징웨이가 아니었으면 계속 자신의 비타협적인 주장을 밀고 나갔을 것이라 회고했다. [27] 화북은 이전부터 좌파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 개조파가 활동하기 유리했다. 또한 옌시산과 펑위샹의 측근 일부가 개조동지회의 간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옌시산은 서산회의파와 가까웠고, 좌파는 펑위샹과 가까웠다. [28] 천궁보는 1929년 1월 <중국국민혁명의 앞길>에서 지금 군벌과 협력하려는 기회주의적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기회주의는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올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참담한 실패만 겪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고 이후에도 일관되게 군벌과의 연합을 반대했다. 그러나 왕징웨이가 군벌과의 연합을 천명하고 이 때문에 개조동지회의 이념까지 사라지자 천궁보는 확대회의 내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방관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했다. 이는 당시 왕징웨이와 천궁보의 불화설로 보도되기도 했다. [29] 왕징웨이는 1930년 7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정복할 목적이 아니라면 국민당 이외의 정당을 승인한다고 하였다. 이후 28일에는 국민당 정책에 타 정당 창당 금지 조항은 없으니 원칙적으로는 다른 정파가 있을 수는 있지만 개조시기에는 국민당 일당통치를 인정해야 한다며 24일의 주장보단 이당치국에 복귀한 모양새를 보였지만, 여전히 느슨하게 해석하였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30] 비록 군벌과 힘을 합치긴 했지만 왕징웨이도 군벌이 중국 민주주의의 적임을 간과하지 않았다. 때문에 약법에도 이러한 내용이 들어가게 된 것. [31] 한편 난징 중앙은 "최근 공포된 여러 법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 "쑨원의 가르침이 일종의 임시약법이다"라며 훈정시기에는 임시약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왕징웨이는 동의하지 않았다. [32] 개조동지회가 해산된 이후 왕징웨이는 더 이상 국민당 개조를 내세우지 않았다. [33] 훈정시기 약법제정은 화북의 3당 세력, 즉 중국 청년당, 진보당, 후스 등 자유주의 세력의 요구였다. [34] 다만 서산회의파 쑨커 파벌과는 비교적 원만히 지냈다. 하지만 서산회의파는 1927년 이후 사실상 소진된 파벌이었고, 쑨커 파벌은 개조파와 마찬가지로 천지탕의 제지를 받았다. 정부 밖에서 좌익을 지지해줄 군대인 리쭝런 장파쿠이조차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연합은 광동파-당 원로 파벌 연합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35] 실제로 장제스는 중국 국내의 반장전쟁에는 단호히 대응했지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서는 부저항주의를 고수할 뿐이었다. 물론 중앙정부도 1931년 11월 진저우 침공을 계기로 적극적 대응으로 선회하지만, 그동안의 정책의 뿌리가 부저항주의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36] 장제스의 사퇴와 함께 쑹쯔원과 재정부 인사들도 사임했다. 때문에 상하이 은행과 금융계에서 정부의 신용이 떨어졌고 정부에 대한 대출을 꺼리게 된다. 재정이 부족해지자 군사를 원활히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결국 대일정책마저 처리할 수 없었다. [37] 이후 그 누구도 다시는 장제스 축출을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장제스는 본인의 일기에서 반대파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자신을 쫓아내기만 급급하며 정작 자신이 하야하면 아무것도 하질 못해 돌아오라고 사정한다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비개조파] 국민당 좌파에는 속했지만 개조동지회 회원은 아니었다. [비개조파] [40] 그 밖에도 간나이광은 내정부 차장, 구정타오는 실업부 차장, 위친룽, 차오웨이모는 외교관, 쩡중밍은 철도부 차장 및 왕징웨이의 개인 비서로 임명되었다. [41] 제3차 전국대표대회로 개조파는 당에서 축출되었는데 이제 와서 대중운동조직에게 중앙당이 아닌 소수 정파인 자신들을 지지하라고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훌륭한 정치수단을 두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42] 초기에는 쑹쯔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광동군벌 리푸린(李富林)은 좌익 학교인 타루 대학(Ta-lu University) 창립 당시 15,000엔을 건넸고, 1929년~1930년에도 40만 엔을 건넸다. 중원대전 시기 옌시산 또한 50만 엔을 지원해주었다. 또한 Nanyang Brothers Tobacco Company는 3,300엔을 지원하였고 개조동지회의 지도자 급인 왕러핑과 주지청에게는 1만 엔, 왕징웨이와 천궁보에게는 12만 홍콩달러 어치의 대출을 제공하였다. [43] 이초포(宜材波, Yii Tso-po)에게 10만 엔, 펑위샹에게 50만 엔, 장파쿠이 리쭝런에게 12만 엔을 지급하였다. [44] 다만 실제로 그가 공산당을 용인한 것은 아니고, 당시 쑨원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국공합작에 찬성하면 권력과 가까워지도록 하고 반대로 국공합작을 반대하면 권력과 멀어지게 조치하는 정치적 상황을 잘 알아차리고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공산당을 반대하지 않는 척 연기한 것이다. 덕분에 후한민은 권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쑨원이 만든 이른바 친위 조직인 중앙정치위원회(중앙정치위원회는 본래 당 강령에도 없는 조직이었지만,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노동지파'들을 쑨원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보로딘의 계략에 따라 쑨원의 심복들로만 구성하여 만든 조직이다. 이후 이 정치위원회는 국민당 2전대회 전까지 중앙집행위원회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위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45] 그러나 장제스는 쿠데타 이전까지는 후한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계산을 통해 친좌파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기에 공산당이 속을 만 하긴 했다. [46] 다만 천궁보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계급투쟁에 열렬히 반대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47] 중국은 아직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아 아직 계급이 나눠지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 노동자는 그저 직업일 뿐이라고 하였다. [48] 다만 왕징웨이의 실제 견해는 구멍위의 의견에 더 가까웠다. "국민당은 특정 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사람의 정당"이라 말한 적이 있으며, 1927년 11월 11일 광저우에서 한 연설에서는 중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뚜렷한 계급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소부르주아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오해가 일어나는 일이 많다며 '농민', '노동자', '소부르주아'라는 표현 대신 '생산자 계급'이라는 표현을 제안하였다. [49] 개조파의 거물 이론가였던 천궁보가 자리를 비우자 이 자리를 구멍위의 사상이 대체하게 된다. 천궁보는 이후 제1차 양광사변 때 돌아와 다시 왕징웨이와 힘을 합한다. [50] 언론이 이 소문을 보도하자 천궁보는 즉시 왕징웨이에게 편지를 써 자신은 왕징웨이에게 비교가 될 수 없다고 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