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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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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가족 관계
연호 강희
능묘 경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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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린 시절3.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4.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5. 대만 평정6. 루스 차르국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다7.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8.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
8.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8.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8.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8.4. 문화 사업8.5. 종교
9. 사생활
9.1. 장기집권9.2. 서양 문물 애호9.3. 클래식 애호가9.4. 자식 교육
10. 말년
10.1. 강희제의 유조 진위 여부
11. 사후1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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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희제의 생애를 다룬 문서다.

2. 어린 시절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조아킴 부베[1]

강희제는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 자금성의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3남이자 후궁인 서비 동(佟)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로써 강희제는 청나라 역대 황제 중 처음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난 황제가 되었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책을 잘 읽고 활도 잘 쏘는 등 다재다능해서 조모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사랑을 받았다.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강희제가 영특함으로 인해 순치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강희제 본인은 환갑이 되었고을 때 부모 슬하에서 하루도 기쁨을 얻은 적이 없는 게 평생의 한이라고 술회하며 순치제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음을 암시했다.[2]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 순치제의 4남으로 강희제의 이복 동생인 영친왕(榮親王)이 생후 3개월 만에 이름도 짓지 못하고 요절하자 강희제가 황태자로 정해졌지만, 공식적인 건 아니었다. 강희제가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서비 동씨가 승은공 동도뢰(佟圖賴)[3]의 딸로 개국 공신 집안 출신이고[4], 당시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위로 황차자 복전이 있었고, 복전의 생모 동악씨는 후금5대신 하화례와 누르하치의 적장녀 아이신기오로 눈철의 직계 자손이었지만 복전은 한쪽 눈에 장애가 있어서 황위를 잇기 부적합했다.

3.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

그해 11월, 갑자기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졌다. 현비 동고씨가 천연두에 걸렸으며 히오완예이 역시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히오완예이는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러나 차도가 나아지지 않은 채 현비 동고씨가 결국 죽자, 순치제는 즉시 그녀를 효헌단경황후 동고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로 올리고 신주를 태묘에 올린 다음 자신이 아끼던 태감을 오대산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그녀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후 아직 젊은 순치제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세상사에 지쳐버리고 의욕을 상실한 순치제는 급속도로 병에 굴복해버렸고,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다.

히오완예이가 8세가 되던 해인 1661년 2월,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황제는 아담 샬에게 만약 자기가 살아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담 샬도 그를 구할 순 없었다. 죽어가는 순치제는 거듭 아담 샬에게 누가 황위를 계승하면 좋을지, 현명한 판단을 부탁했다. 아담 샬이 조용히 불러준 이름은 다름 아닌 히오완예이로 이미 천연두를 한번 앓고 난 뒤여서 오랜 재위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5][6] 순치제는 망설였지만 이에 동의하고 사망했다.

1661년 2월 5일 순치제가 사망하자 히오완예이의 할머니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는 아들이 붕어하자 크게 놀라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각지의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을 불러 모아 후사를 논의하였다. 2월 7일에 청나라 조정은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적으로 알리고 국상을 준비하였으며 2월 17일에 세조(世祖)의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그 능을 효릉(孝陵)이라 하였다. 이후 유조에 따라 황태자 히오완예이가 새 황제로 추대되어 청나라 제4대 황제로 즉위했다.

강희제는 어머니 강비 퉁기야씨와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를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7]인 1662년에 연호를 순치(順治)에서 안녕과 평화를 뜻하는 강(康)'과, 조화와 흥성을 뜻하는 '희(熙)'자를 써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하는 연호 강희(康熙)로 개원했다.

4.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

파일:1280px-清世祖朝服像.jpg
청년기 강희제의 어진.

즉위 당시 너무 어려서 정황기 출신 감국 대신 겸 이부 상서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 혁사리 색니), 양황기 출신 병부 상서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鼇拜, 과이가 오배), 정백기 출신 형부 상서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 납란 소극살합), 양황기 출신 호부 상서 니오후루 어빌룬(鈕祜祿 遏必隆, 뉴호록 알필륭)의 보정 대신 4인과 최종 결정권자 효장태황태후가 대리 통치를 담당했으며, 이 중 오보이가 다른 셋을 제치고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이들이 보정대신으로 임명된 배경은 이렇다. 순치제 연간동안 중앙집권정책과 한인등용을 놓고 순치제는 효장태후와 만주 원로대신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오보이와 어빌룬은 양황기의 원로대신이자 효장태후 파벌의 핵심인사였고[8] 정황기의 소닌과 정백기의 숙사하는 순치제의 총신이었다.[9] 효장태후는 자신의 측근인 오보이와 어빌룬에게 힘을 실어주면서도 순치제의 파벌을 다독이기 위해 소닌의 손녀를 황후로 간택하고[10][11] 숙사하를 보정대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하지만 오보이는 효장태후에게 팽당하게 된다. 강희제가 부친처럼 한시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인 유학자들을 회유하고자 유학자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오보이는 강경한 한인등용 반대론자였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여전히 한족 문화를 혐오했지만 순치연간보다 한인등용에 대해 온건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패착으로, 오보이는 효장태후의 뒷배를 믿고 방자하게 굴며 황권을 위협했고, 숙사하를 죽이면서[12] 선을 넘어버렸다.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와 권력 남용은 성장 중이던 강희제에게 당연히 위험했다. 결국 오보이의 측근들은 조정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차출되었고[13] 오보이 자신은 1669년 강희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었다.[14] 이후 16세의 강희제는 죽을 때까지 직접 나라를 다스렸다.

통치 실권을 쥔 강희제가 처음부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했던 한족 무장인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3인은 이 공적을 통해 사실상 자치를 할 수 있는 왕 직위를 받으며 이른바 삼번(三藩)을 형성하였다. 각각 오삼계의 운귀(운남, 귀주), 경중명의 복건, 상가희의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강남 일대에서 왕 직위를 받은 뒤 사실상의 반(半) 독립 왕국을 세워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 정부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이 청 정부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삼번은 강희제의 의도와 조정의 변화로 긴장했다. 순치제의 측근인 소닌이 죽고, 역시 순치제의 측근이자 오삼계와 사돈 관계인 숙사하도 죽으면서 삼번 유지론자인 강력한 중신들이 조정에서 사라지고, 강희제는 삼번 폐지론자인 나라 밍주(납란 명주)와 푸차 미스간(부찰 미사간)의 의견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15]

이런 가운데 강희제가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 삼번왕 중 하나인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이는 상가희가 본디 요동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고향을 보고 싶어진 것. 강희제는 이것을 대범하게 받아들여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지배하던 번을 없애버리는, 즉 철번(撤藩, 번왕국을 폐지함)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가희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 하지만 상가희는 본인이 왕위를 물러나고 싶다고 하였고 황제가 이런 무리한 제안을 들어준 구도였기에[16] 철회하기도 그런지라 일단은 황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에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자신도 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강희제는 상가희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강희제가 우리를 제거하려 하는구나'라고 판단해 이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673년에 터진 이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오삼계는 자칭 주나라의 황제가 되어 직접 군을 이끌고 청나라 군을 농락하며 강남 일대를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여기에 경중명의 번왕 자리를 세습했던 경정충이 합세하고, 상가희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17] 장남 상지신이 아버지 상가희를 감금하고 반란에 가담하면서 난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18]

이로 인해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하였다. 친청반민족행위자 출신인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조차 이념적으로 어필하는 바가 적은데다가 오삼계가 갑자기 급사하는[19] 천운을 맞이한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오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20] 결국 8년 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 일족의 근거지였던 쿤밍이 함락되고 오삼계의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청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로서 1644년 입관(入關)한 후 약 40년 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 조선은 숙종 치세로, 이 삼번의 난 때 윤휴 북벌을 무척 지지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북벌론을 좋아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보면 알겠지만 삼번의 난의 주동자들은 명분이 매우 적었고 조선 또한 기껏해야 이유가 오랑캐들에게 복수하자는 정도고 삼번과는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연계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강희제가 능력 있는 황제라서 승산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여튼 당시 조선 조정은 남인들과 윤휴를 숙청하는 고육책까지 써 북벌론을 잠재웠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현종시기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일어나 조선에선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지사 복선군 이남이 청나라로 찾아갔는데, 이때 강희제가 복선군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군주에게 전하도록 하라.

5. 대만 평정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동안 강희제는 북방의 압박도 받았다. 제정 러시아의 왕조가 지원해주던 러시아 탐험가들이 동방을 개척하는 시기였고, 시베리아를 지나 청나라의 북방 영토인 만주 내몽골로의 확장을 노렸다, 이에 몽골계인 오이라트 계열의 부족 연합체인 준가르가 러시아에 협력하면서 일거에 청의 북변(北邊) 치안은 위태로워졌다.

이에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을 통해 남방의 변란 위협을 모조리 제거한 뒤에 북방 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만과 펑후 제도의 36개 섬은 정성공이 네덜란드 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 정경이 세운 동녕 왕국( 명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번의 난에도 가세했을 만큼 큰 위협이었기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정경이 죽자 풍석범이라는 인물이 정극상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사태가 변한다. 정극상은 고작 12살이라 실권은 풍석범이 쥐고 있었는데 몹시 전횡을 휘둘러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때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고 수군을 잘 다루고 적을 잘 아는 수사제독(水師提督) 시랑(施琅)을 파견하여 동녕 왕국을 무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랑이 과거에 정경의 부하였다는 것이다.[21] 이 때문에 그가 배신할 것이니 뭐니 하는 말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그를 불러 경을 믿는다고 말하였고, 이에 감격한 시랑은 맡은 일을 멋들어지게 해치웠다. 강희제가 그 후에 행한 조치도 멋들어지고 영리한 행동이었는데,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것이다. 정성공&정경이 반 만주족 감정을 내세웠으니 '사실 우리도 그런 사람 아니랍니다.'라고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강희제가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펑후해전에서 승리하고 그렇게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된다.

6. 루스 차르국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다

당시의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는 모피 무역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가는 무장 탐험가와 개척자들을 후원했고, 무장 탐험가들은 청나라와 사사건건 충돌했는데 당연히 청나라 정부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나선정벌이 있었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물론 청나라쯤 되는 거대한 나라가 소규모 탐험대에게 그렇게 깨졌던 이유는 순전히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나선 정벌 당시 조총병으로 한정해도 주력은 엄연히 청군이었다.

어쨌든 1658년 청군은 조선군과 함께 스테파노프의 탐험대를 격파하고 스테파노프도 죽여버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는 러시아의 탐험대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1665년 체르니코프스키가 아르바진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 요새를 세우고 수령이 되어 10년간 통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르바진은 체르니코프스키의 통치하에 꽤나 번영했기 때문에 이웃 네르친스크에 식량을 대 줄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조정을 고무시켰다.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청나라는 관리들을 파견해 러시아인들이 청나라 영토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으나 이 정도로 끝날 리는 당연히 없었다.

1667년, 아르바진 근처 한 부족의 수장인 간티무르가 15년 전 청나라에게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 제국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강희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계속 놔둔다면 청나라의 영향력이 상실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고, 러시아도 청에 사절을 보내는 등 서로 간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한편 그동안 청은 북방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1674년부터 지린에 팔기주방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1676년 청 조정에 도착한 러시아 사절에게 간티무르를 송환할 것을 요청했다. 허나 러시아 사절은 이를 거부했고, 청은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표명했으나 이후 6년 간 소규모 충돌 몇 차례 외에는 별 일이 없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청이 이 지역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오판한 것. 러시아는 아무르 강에 군사를 보내고 아르군 강까지 활동 범위를 높이는 등 도발 수위를 높여 갔다.

청은 당시 삼번의 난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런 도발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는 좀 더 신중히 상황을 지켜봤고, 이후 1683년 대만의 동녕 왕국이 복속되어 남방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특히 강희제가 신경 쓴 점은 러시아가 준가르의 갈단 체렝과 손을 잡을 것인지의 문제였다. 강희제는 준비하는 동안 병기와 식량을 구축하고, 조총을 개조했으며, 홍이포보다 강한 대포를 주조하고, 역참제를 정비하며 조선소를 건설해 대형 범선을 건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 1683년 이번원 상서 아이신기오로 아무훌랑(Aisin Gioro Amuhulang, 愛新覺羅 阿穆珊琅)은 러시아군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러시아는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러시아의 뚱한 반응에 청은 즉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청은 정예 기병 1,000여 기를 보내 아르바진을 포위했다. 아르바진의 군사는 450명으로 아무리 수성 측이 공성 측보다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나 머릿수, 무기의 질과 양[22] 등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아르바진의 암담한 상황이 전해지자 헤이룽 강 상류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보트를 타고 아르바진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상륙도 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치밀하게 준비한 청군은 혹시나 올 지원병에 대비해 잠수병들을 미리 투입한 상태였다. 잠수병은 등패와 칼로 무장한 상태로 물 속에서는 깊은 곳까지 잠수해 러시아군의 사격으로부터 피했고 사격이 멈추면 즉시 튀어나와 칼을 휘둘러대고는 적이 반격이 할때면 즉시 잠수하고는 했다. 결국 지원은 잠수병들의 활약으로 완전히 실패하여 아르바진에게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의 포위를 풀었는데, 이때 러시아군은 간신히 도망쳤고 아르바진은 초토화되었다. 당시 아르바진의 군사령관은 톨부진으로, 그는 네르친스크로 후퇴했다. 이때 톨부진은 네르친스크로 가던 도중 구원병을 만났다. 네르친스크 독군 블라소프였는데, 블라소프와 힘을 합친 톨부진은 다시 아르바진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군은 아르바진을 불태운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 상태였다. 이에 이들은 안심하고 아르바진에 들어가 요새를 재정비하고 장기전을 치를 준비를 했다. 1686년 강희제는 아르바진 요새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탐을 한 바, 과연 요새는 재건되어 있었다. 이에 강희제는 지난 번보다 두배많은 2,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

아무리 청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해대도 악착같이 내려오는 러시아 탐험대를 완전히 막으려면 이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 했다. 따라서 강희제는 장기전을 치러 이들의 의지를 박살낼 준비를 하길 원했고, 청군 사령관에게 아르바진 주변에 해자를 파라고 명령했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을 포위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포위된 아르바진은 보급이 완전히 끊겼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영부영 보급품만 축내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러시아군은 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해자를 뗏목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 무기의 질과 양, 군사의 수 등 모든 면에서 청군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해자를 건너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격과 포격이 러시아군에게 쏟아졌고, 결국 러시아군은 해자를 거의 건너지를 못했다. 심지어는 이 와중에 톨부진이 전사하였다. 기껏 상륙해 봤자 소규모의 군인들만 생존하였을 뿐인지라 청군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전멸했다. 결국 톨부진이 전사한 이후 네르친스크 지원군 사령관 바이돈이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았지만 그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르바진의 군사와 네르친스크의 군사를 합쳐 총 800명의 군사를 거느렸던 탐험대는 해자에서 벌어진 청군과의 교전에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들 중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0명뿐이었다. 사실 만약 강희제가 이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남은 군사들을 죽이는 것도 청군에게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나, 혹시나 러시아와 갈단의 연합을 우려한 강희제는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하여 러시아에 서신을 보내었다.

1686년 9월, 이에 대한 답변이 청에 도착하였다. 1687년에 청군이 퇴각함으로써 아르바진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계속되는 패배와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23] 때문에 러시아는 만주로 영토 확장을 포기하였고 대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했다. 1689년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아무르강 이북 지역[24]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했다.

조약을 맺을 당시 러시아의 전권 대사는 골로빈이었다. 골로빈은 1687년 8월 셀렌기스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대화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셀렌기스크에서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셀렌기스크는 갈단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러한 골로빈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국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Heseri Songgotu, 赫舍里 索額圖)[25]는 골로빈에게 네르친스크에 도착했음을 알렸고, 곧이어 8월 19일에 그는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였다. 이후 송고투와 골로빈은 협정에 따라 냉병기로 간단히 무장한 채 회담장을 호위하고 있는 경호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잡담을 잠시 나눈 뒤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골로빈의 사절은 1,000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선교사 출신 통역사, 10,000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절단과 동행한 상태였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져 회담장에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풀어졌고 이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조약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 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양측에게 긍정적인 조약이었다. 이후 양측은 외몽골과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의 '대등 - 평등' 조약으로, 한자로 된 문서는 전혀 작성되지 않았고,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만주어문을 기준으로 노어문과 라틴어문이 작성되었다. 양국은 라틴어문에 날인했다.[26][27] 북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2명이 통역으로 참가했다. 러시아 측의 협상단과 당시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화이(華夷) 개념에 입각하지 않은 매우 독특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훗날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자 러시아도 이때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28], 수용되었으며 2차 아편전쟁 때는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얻어낸다.

7.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

어쨌거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킨 강희제는 친정을 하여 북정(北征)에 나서 오이라트 부족 계통인 세계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Züüngar)를 토벌하였다. 준가르의 갈단 칸은 외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가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88년 갈단은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어 외몽골의 할하족을 공격하였다. 이에 할하족은 죽을 힘을 다해 고비 사막을 건너 이 소식을 전했다. 이에 강희제는 직접 대군을 동원하여 고비 사막 너머에 사는 할하족의 복종을 받았다. 첫번째 원정에서 팔기군이 전면전에서 패하고 강희제 본인도 병에 걸리는 등 고전하였지만 화력덕후답게 서양산 대포의 힘으로[29] 갈단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강희제는 갈단을 추격하려 했지만 군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서 포기했다. 갈단은 포기하지 않고 1695년에 다시 한 번 군대를 진군시켰지만, 미리 정보망을 통해 이를 알고 있던 강희제는 전 병력을 이끌고 갈단을 추격하여 대포와 총으로 공격하였고, 갈단은 병력의 절반과 부인을 잃은채 서쪽으로 도망쳤다.

강희제가 3번째 원정에 나서려고 했을 때 모든 신하들은, "비루한 갈단은 이제 곧 죽을 텐데 사막으로 가서 고생을 하지 마시라"며 막았고,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강희제가 좋아하는 사냥 계획을 잡기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취소시킨 강희제는 다시 8만의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리고 차오모도 전투에서 강희제는 갈단의 준가르군을 섬멸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갈단은 1697년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3회에 걸친 친정을 통해 강희제는 준가르 군대를 격파하여 위협을 제거하였고, 1697년 외몽골 지역 전체를 제패해서 엄청난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때 강희제가 환관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갈단은 죽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다. 이제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 해 동안 짐은 3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난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천신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갈단이 없었다면 짐은 하루도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조너선 스펜스, <강희제>에서 재인용.

그리고 몽골은 일찍이 후금에 복속된 내몽골은 물론 외몽골까지 복속되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몽골의 전통을 존중하여 몽골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과거 내몽골의 차하르 족과 결혼 동맹을 맺어 만주-몽골을 일체화한 것처럼 몽골 공주를 만주 귀족들의 아내로 맞도록 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민족인 몽골족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역대 황후들 중 몽골 출신이 상당히 많다.[30] 어쨌거나 1697년 이후 청은 러시아가 대두할 때까지 명나라가 당한 것과 같은 북로(北擄)의 참변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갈단의 조카인 체왕 랍탄은 후에 대담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강희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패배를 당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번째 황자 윤정을 대장군왕으로 삼고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쫒아내는 데 성공했다.[31]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를 자신들의 손으로 세워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다. 사실 강희제가 티베트 불교를 챙겼던 이유는 예전에 갈단이 차지하고 있던 '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뺏어서 몽골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갈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티베트 불교와 조화된 덕분이었는데, 만주족 티베트 불교를 손에 넣게 됨에 따라 몽골은 정신적으로 만주족 휘하에 들어간 셈이다.

8.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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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의 강희제

이상과 같은 전쟁을 마친 뒤 강희제는 전력으로 내치에 임했다. 강희제는 효율적인 중국 통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족 지식인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는데, 지식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 고생을 많이 했다. 사절을 보내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까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 와서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아예 도망쳐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에 강희제는 쓸만한 한족 관료를 얻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또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에게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여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려야만 했다.

강희제의 학구열과 호기심은 유명해 대신들에게 잇따라 질문 공세를 퍼부어 쩔쩔매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서양 문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여 예수회 선교사로 대표되는 당대의 유럽인들은 강희제의 풍부한 지식과 교양에 감탄해 " 가톨릭을 믿지 않는 점만 빼면 최고의 군주"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래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은 중국 군주는 오로지 강희제 뿐이었으며, 이것을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애호하여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했다. 강희제는 여러 선교사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지리와 역사, 기하학, 근대 수학 등을 배웠고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역법 역시 배웠다.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우려 했으며 하프시코드까지 친 적도 있다. 또한 강희제는 저녁을 먹은 후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학 계산을 하며 자기가 푼 문제가 맞는 걸 기뻐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강희제 시대에 활약한 유럽인은 아담 샬(Adam Schall, 1592년 ~ 1666년)을 시작으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8년 ~1688년),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 1645년 ~ 1703년),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중국명 장성(張誠), 1654년~ 1707년) 등이 있다. 서양인들은 주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경우가 많았으며, 천문 역법(曆法)의 계산과 도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황여전람도(皇輿展覽圖)'와 같은 세밀한 세계 지도가 중국에 등장한 것도 이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인들의 활동은 예수회의 성공을 시기한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고발로 교황청이 유교적 예식을 채용하지 않도록 지시함에 따라 1693년부터 20년 이상 배척받게 된다. 이 유럽인들에 대한 배척은 1720년에 교황이 보낸 특사 덕택에 겨우 해소되었다.

강희제는 명대의 1년치 궁정 예산으로 당대의 국가 통치를 위한 예산을 꾸려갔을 정도로 간소한 정부를 운영했으며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다.[32] 명나라 시기 수만 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스스로도 될 수 있으면 옷을 꿰매 입으며 모범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에서 "강희제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인데도 그런 군주답지 않게 매우 검소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하고 평가를 내렸다.

8.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강희제는 홍무제 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 중에 주원장의 효릉에서 3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존경심을 표현할 겸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강희제는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 등용만 해도 그렇고, 삼번의 난 진압 중에서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다.[33]

강희제는 직접 중국의 여러 지역을 시찰하여 강남을 6회나 순행(巡行)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남부 지역을 직접 관찰하였다. 보통 역대 중국 군주의 시찰이나 순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많았지만, 강희제는 호위 군사도 대폭 줄이고 소요되는 지출비 자체도 경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배려는 물론 민생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처였지만 동시에 아직 만주족 통치에 반감과 적개심을 가진 강남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기도 했다.

또 이후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편찬하며 본기, 열전, 지, 표 등이 완성될 때마다 전부 다 살펴보고, 과도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자에게는 주의를 주면서 말했다.
"짐은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하지만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처했다. 강희제 시기에 나온 두 번의 문자의 옥 사건인 명사안, 남산안이 대표 사례이다.

8.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강희제가 아직 어린 시절, 죄를 지은 관리에게 강희제는 노하여 사형을 명했는데, 그 관리는 허리가 잘려서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래서 허리를 잘랐는데 당연히 사형수는 즉사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서서히 죽어갔다.[34]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강희제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본래 강희제 통치 초반에 정권을 잡은 구왈기야 오보이는 사람을 마구 죽였고, 강희제 역시 오보이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오보이에게서 정권을 찾아오고 그에게 내린 처벌은 사형이 아니라 연금, 구족 몰살이 아니라 타지로 이주시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년 황제의 아량을 칭찬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청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북쪽에 쪼그라들게 했을 법한 반란인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그 처벌은 오직 최고 우두머리들에게만 내려졌다.

그렇다면 부하로서 반란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대신 그곳을 바탕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약간의 시간을 준 뒤 그 자식들도 아무 문제없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청나라 하면 떠오르는 사상 탄압인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도 있었지만, 그 규모는 강희제 때가 제일 작았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매우 커진 것이다. 강희제 본인은 문인들을 많이 보호해 준 편.

청나라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그 때문에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다. 강희제는 물론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단순히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냐면, 청나라가 지배하는 만주와 전 중국(하북·중원·강남)·내몽골·대만에서 사형이 집행된 사람 수다. 이 시기 청나라의 인구는 1억 명 이상을 향해 증가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인구, 즉, 호구 조사에 들어가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다. 그 정도로 큰 영토에 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가 이 정도(0퍼센트대에 수렴)였던 것이다.[35][36]

강희제는 사형이 선고된 죄인에 대한 집행 재가 요청이 올라오면 판결문을 여러 번 꼼꼼히 읽어보고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68년 같은 경우에는 본래 48명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희제가 이를 더 줄인 것이다.

자신이 글자 하나를 그으면, 사람의 목숨이 이에 따라 살아나고 죽게 된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강희제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정말 더없이 신중하게 임했다. 어마어마한 재물에 커다란 궁궐에 살고 있는 강희제였지만, 몇 번을 살피고 살펴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었다.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노라. 형부에서 판결 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도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옥에 가두어 잠시 처형을 미루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하도록 하라.
죄인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
아, 그러나 감옥 안에서 몇 달간 살다 보면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과천선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니라. 그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죄인들에 대한 강희제의 측은지심은 대단했는데, 어느 날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보고 놀라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烏喇)로 유배된 죄인들이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그리고 능력도 없도다.
게다가 그들은 남방 사람이 아닌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으로 와서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불쌍하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요양(遼陽) 같은 지역에 유배된 것만 해도 죗값을 치렀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라!
죄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본래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도다. 그런데 그들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고통받다가 죽게 될 것이니 어찌 본래의 뜻과 동일하겠는가?
앞으로 사형을 면한 죄인들은 모두 상양보로 유배시키고, 샹양보로 보내야 할 죄인들을 요양으로 보내도록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오라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에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라. 형부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짐의 뜻을 헤아려 이 규정에 따르도록 하라.
강희제는 죄인들의 고통에 깊게 관심을 가져,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덥지 않도록 옥을 시원하게 해주고 청소해 주는 한편, 죄인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면 의사를 보내주었고, 만약 관리가 이를 모른 척 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크게 처벌했다.
10월부터 1월까지는 겨울인 데다가 유배당하는 죄인들은 모두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니, 몹시 추울 것이니라. 그들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얼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니 불쌍하기 그지없도다. 앞으로는 10월에서 1월과 한여름인 6월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내지 마라.
이상의 내용은 수신제가 - 등예쥔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강희제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힘으로 지키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된다.
위엄으로 지키려는 자는 능히 일국을 지킬 수 있다.
허나 덕으로 지키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

8.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요약하자면 단순한 선정보다는 명암이 있는 정책이다.

강희 50년인 1711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라는 것은 사람의 머릿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세금도 더 걷어 들이게 되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정세가 더 이상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강희 연간의 중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 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조세의 일원화를 통해 징세 체계가 단순해졌고, 인구 증가에 따라 1인당 조세 부담 액수가 상대적으로 감면됐기 때문이었다.[37]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 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이리하여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결국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저항이 극심했다. 그 뒷이야기는 옹정제 문서에서 확인하자.

강희제는 전쟁이 일어나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으며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이는 강희제의 검소함과 유럽과의 무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데, 그 덕에 재정 상황이 상당히 풍족해졌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뭄이 든 지역의 세금 면제는 당연하고 산불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값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심지어는 강희 51년에는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어 여지껏 세금 꼬박꼬박 낸 나머지 지역들의 그 해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38]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세상을 떠날 당시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강희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강희 50년 경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했는데,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은의 블랙홀이 된 것[39]과 강희제 치하 청나라 조정의 정책적 성공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정은제는 강희-옹정기간에만 적절한 조치였고, 이후 시기가 되면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하여 조정의 인민 장악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이게 또 지정은제가 초래한 문제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외세의 공세에 재정 지출이 증가해야함에도 고정된 세금량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는 강희제부터 시작된 화기의 쇠퇴와 더불어 청 멸망의 주 원인이 되었다. 물론 제도 개혁은 후대 황제들의 몫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필 명군으로 이름난 강희제[40]가 세운 정책이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대명률 때문에 제도개혁에 어려움을 겪은 명과도 비슷한 부분.

8.4. 문화 사업

만주족이지만 유교, 그리고 성리학에 매우 박식하고 심취했던 강희제는 스스로도 유학자였고, 경연과 조회에서 유학자들과 키배를 떠서 발라버리기도 했다. 더욱이 치세 당초부터 송나라 주자(朱子)를 존중하여 그 저술을 출판하고 이에 의해 군신 간의 도덕을 강조했다. 또 고급 문관 시험에 해당되는 과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지식인의 희망에 부합하려고 했다. 세종대왕처럼 책벌레이기도 해서 아픈 와중에도 책을 보는 것을 놓지 않았으며, 글씨도 제법 잘 써 소림사의 현판을 친히 쓰기도 했다. 또 1679년 특별 시험을 행하여 50명의 재야 인재를 고관에 임용했다. 그중 40%는 상공업의 진보와 함께 고도로 문화가 발달한 강소성, 절강성 출신 문인이 차지했다.

수많은 문화 사업에 손을 댄 강희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유사 이래 모든 도서를 모아다가 영구 보존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조(前朝)의 역사인 '명사(明史)', 광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인 '도서집성(圖書集成)' 등 편찬을 위하여 특별 관청을 설치하고 광범위한 학자에게 직책을 주었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중국 최초의 위도를 사용한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

이 중에 백미는 단연 《 강희자전(康熙字典)》.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학자들과 대신들이 수년 동안 노가다를 뛰며 만든 대작이다. 강희자전의 지은이는 장옥서(張玉書), 진정경 등 30명으로, 모두 42권이고, 글자 수가 47,000자 남짓 된다. 글자 배열 순서는 먼저 나와 있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이 부수가 몇 획이냐에 따라 배열한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강희자전 순서'라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뒷날의 부수별 한자 사전의 본보기가 되었다.[41] 이는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자전이었으며 현대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업이었다.

8.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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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골수 성리학자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배우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만주족 황실은 전통적으로 불교[42] 신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아서 가톨릭 전도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강희제 본인도 1693년 학질에 걸려 앓다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측이 제공한 약재로 완쾌되고 보니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개인적인 신임도 두터웠다.

이미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단순한 종교를 넘어 정치, 사회적 철학으로써의 위상을 누리고 있는 유교의 가르침을 배워 그에 맞추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납득하게 하는 '현지화' 방식을 택했는데[43]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방침은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마테오 리치 사후 예수회 중국지구 회장 직무를 계승한 롱고바르도(N. Longobardo)가 조상제사 허용 여부와 ‘Deus’에 대한 중국어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수도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1628년 1월 가정(嘉定) 회의를 개최했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Deus’에 대한 용어로 ‘천’(天), ‘상제’(上帝), ‘두사’(斗斯)[44]를 금지시키고,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통일할 것, 다른 하나는 부모와 조상, 위대한 스승에 대한 효도와 공경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조상 제사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다. 논점이 된 것은 기독교의 유일신인 여호와(Deus)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유명한 한자 번역어 '천주(天主)' 그리고 '상제(上帝)'라는 용어의 적법성에 대한 것, 그리고 제사 허용 문제였다. 예수회와 예수회를 제외한 여러 수도회 간에 1634년부터 1742년까지 있었던 ‘Deus’의 용어 사용,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례와 관련한 교리상 현지 적응주의 적용 여부와 기독교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중국의례논쟁(中國儀禮論爭, Controversia de ritibus)이라 한다.

문제의 촉발은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모랄레스(Juan Batista de Morales, 1597-1664)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633년부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다 6년만인 1639년에 추방되는데, 복건성 복안에서 전교 선생이었던 중국인 왕다두(王達竇)를 통해 중국의 조상 제사라는 것을 접하고, 마테오 리치와는 달리 "이런 건 모두 미신적인 종교 의례"라 단정해 17개 조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했다. 이어 1643년 모랄레스 본인이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당시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교 방법의 가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우르바노 8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급서했고, 후임이 된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종교재판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안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중국식 의례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를 로마로 보내서 중국에서의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고 문화, 정치적 의례일 뿐이지 종교적 의미가 결코 없음을 강조했고, 이걸 금지시키게 되면 중국에서의 전도도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훈령을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16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다시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3년 뒤인 1659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다시 인노첸시오 10세의 훈령과 알렉산데르 7세의 훈령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의, 10년 뒤인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도미니코회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Domingo Fernandez de Navarrete, 1610~1689)가 1674년 로마로 돌아가 정식으로 "예수회 저것들이 중국에서 전도하는 것에 대해 교황청에서 나서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1676년에는 예수회의 노선을 비판하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예수회에 불만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의례 논쟁의 무대를 중국 내부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고, 기존 명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명한 판단력을 발휘해 왕조교체기 중국에서 살아남아서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 왕조의 신임을 얻는데도 성공한다. 서양에서도 포르투갈이 쇠퇴하면서 이전까지 주로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남유럽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동방으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이 새롭게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로 넘어갔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의 쇠퇴로 기존에 포르투갈이 교황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던 중국에서의 선교관할권을 차지해 동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전도의 '판'을 주도하고자 했던 프랑스 왕정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45] 어떻게 생각하면 프랑스 절대왕정과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대립이 중국에서 전례논쟁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존에 바티칸 교황으로부터 선교관할권을 인정받아 활동하던 포르투갈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루이 14세 1685년 중국으로 파견한 장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1643~1710), 죠아생 부베(Joachim Bouvet), 장-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등 다섯 명의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는 중국에서 ‘궁정 수학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몽골 원정 중에 학질에 걸려 고생하던 강희제에게 약재를 구해 주어 강희제를 치료해 주고 그 신임을 얻어 황제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며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펴나갔다. 강희제 자신이 몸소 북경의 천주교당에 '경천(敬天)'[46]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는데, 이는 가톨릭의 천주(여호와)를 중국의 전통적인 천(天)과 동치시켜 판단하였으며[47] 또한 기독교의 전통이 동아시아권 전통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동치되는 개념이니만큼 당연히 동아시아권의 전통인 조상 제사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의식이자 서로 교류가 가능한 의례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다시금 전례 논쟁의 불이 붙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684년 복건의 종좌대목(주교)에 임명된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1652~1730)로부터였다.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꽉 막힌 꼴통이었던 메그로 주교는 1693년 3월 20일 그는 자신이 관장하는 교구 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표현하는 용어인 ‘데우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천’이나 ‘상제’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또한 조상 제사나 공자에 대한 석전례에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예전 도미니코회가 주장한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에 북경에 거주하던 예수회 소속 그리말디(P. Grimaldi), 토마스(A. Thomas), 페레이라(T. Pereira), 제르비용 등의 선교사들이 1700년 11월 30일, 직접 황제인 강희제에게 직소해 중국에서의 의례 문제에 대해 본인들이 잘못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강희제의 대답은 “니들 고쳐야 할 거 아무 것도 없는데?”라는, 사실상 예수회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문제는 본격적으로 바티칸의 교황과 중국의 황제, 양자간의 정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예수회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강희제에게 청원한 것에 대해 교황은 교황대로 "니들 입장 지지를 왜 교회가 아니라 중국 황제한테 구하고 앉았냐? 니들이 예수님 따르는 성직자지, 황제 모시는 환관이야?"라고 불쾌해했고, 황제는 또 황제대로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교황이나 선교사들을 두고 "종교 단체가 지금 어디서 자꾸 우리 전통 문화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시비를 걸어? 그리고 이미 얘기 다 끝난 걸 저것들은 왜 자꾸 들고 나오는 거야?"고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1704년 11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기존 회칙에서 한 술 더 떠서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Deus에 대한 번역어로 오직 ‘천주’만을 허락하고, 기존 중국의 전통인 공자에 대한 석전 및 조상 제사를 모조리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에 참석, 집전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울러 조상 제사에 사용되는 신주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을 회칙으로 선포하면서, 추기경이었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 ~ 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희제에게 요청했다. 문제는 그게 가톨릭 신자들에게나 당연한 말이었지 강희제나 다른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강희제는 자신을 찾아온 교황의 특사 투르농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48]에게 신임받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大淸)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쯤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얘기하자면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된다니, 그럼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니네들은 여태껏 니들끼리도 서로 신임을 못할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도한 거네?”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또한 특사가 말한 '교황에게 신임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안의 수도자와 신자를 관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강희제는 “중국에 10년 이상 거주한 자로서 짐이 보기에 중국인의 생활과 언어, 풍습을 익히 아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49] 중국 내의 기독교 신자들을 감독할 인물이라면 교황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사 허용 문제에 대해서도 강희제의 뜻은 강고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기에 존경받는 것이지, 행복이나 벼슬, 재물을 얻으려고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는다. 조상 숭배는 사랑과 추모의 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조상의 은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낱 미물조차도 죽은 어미를 위해 여러 날을 슬퍼하는데,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무관심한 서양인들은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중국인에 견줄 만 하겠는가? 우리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덕을 숭앙한 그의 원칙과 교육 체계, '윗사람과 조상을 공경하라' 하신 가르침 때문이다. 너희가 너희의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행위 때문이 아니더냐?

투르농 이 사람이 그래도 중간에서 대처를 잘 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마테오 리치에 비하면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전략적인 외교술로 협상을 해내는 능력도 모자랐던 게 문제였다. 투르농 이 사람은 1705년 12월 4일 북경에 도착해서 보니 분위기도 그렇고 강희제를 설득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문제는 그러면서 앞서 교구 내의 중국식 제사 의례를 금지해 중국에서 전례 문제를 재촉발시킨 당사자이기도 했던 메그로를 중국통이랍시고 강희제에게 추천했다. 결국 투르농은 중국을 벗어나기도 전인 12월 17일 남경에서 강희제가 “중국의 글자도 하나 읽을 줄 모르고, 중국어도 잘하지 못해서 대화할 때는 통역이 붙어 있어야만 하는, 이런 사람들이 감히 중국 경서의 도리를 운운하다니, 마치 문밖에 서서 집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놈이 그 집안의 일을 토론하는 것마냥 그 하는 말이 조금도 근거가 없도다[50][51]며 메그로를 쫓아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1707년 1월 25일 ‘남경 명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 금지 명령과 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묻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강희제는 투르농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전도 사역 활동을 희망하는 선교사들은 '영구히 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기재된 인표(印票)를 소지할 것, 인표를 발급받으려면 마테오 리치가 정한 규율을 따를 것을 선서하도록 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기존 훈령보다도 더 강경한 어조로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 조치를 담은 칙서 '그날들(Ex illa die)'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 의례에 대한 7개 조항’으로, ‘천주’ 이외의 용어 사용 금지, 중국 전통 조상 제사 및 공자에 대한 석전 금지[52]였다. 강희제 역시 한문으로 번역된 이 칙서를 접하고 "이것들이 한자도 모르는 주제에 건방지게 중국의 도덕 체계가 잘못됐네 어쩌네 논하려 드네?"라며 제대로 격노해 1717년 4월 16일 금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황제의 분노가 담긴 금교 조치로 각지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기독교 신자에 대한 체포 조치 등 탄압을 시작한 지방관들도 생겨났다.

유교식 제사에 대한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우상숭배 규정 및 금지 회칙이나 이를 따라서 중국식 전통을 거부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앞으로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중국에 살 사람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53] 물론 베이징 안의 천주당도 강희제 치세에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서양인 선교사들도 그곳에 상주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 11세의 훈령을 가지고 두 번째 교황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 1685~1741)[54]는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해, 강희제를 알현하고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도 허용 및 중국 전통 의례 관련 금지령을 실시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강희제는 “내가 중국에서 기독교 전도를 금지한 것은 너희 법왕이 낸 「그날들」(Ex illa die)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메차바르바는 고육지책으로 교황의 칙서를 변형시켜서라도[55] 강희제와 타협하려 했는데, 1721년 1월 14일 이른바 ‘준행8조’(准行八條)를 강희제에게 제시했지만 강희제는 자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메차바르바는 강희제의 생각을 더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중국을 떠났고, 이듬해 강희제는 붕어했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강희제보다 더욱 기독교에 대해 가혹한 인물이었는데[56] 1724년 흠천감에서 천문 분야에 종사하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중국 바깥으로 추방시키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렸으며,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것도 금했다. 건륭제 때에 '대교안'이라고 해서 선교사들이 조정의 금령을 어기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전도하다 발각되어, 11개 성(省)에서 천주교도 400여 명, 선교사 18명이 체포돼 심문을 받았다. 다만 이들 가운데 옥중에서 병사한 사람을 빼면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57] 중국인 신자들은 장형 및 변방 유배라는 꽤 가혹한 처벌을 받은 반면 선교사들은 종신금고형에 처했다가 1년도 안 되어 사면하고 풀어 주는데[58] 표면적으로는 ‘법외시은(法外施恩)’ 내지 ‘법외지인(法外之仁)’이라고 해서 중국 사정을 잘 모르고 국법에 어두운 외국인들(법외)이니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풀어 준다는 것이 이유였고, 가톨릭이 기존 청 왕조의 지배 체제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은데다 천문, 역법 관장이나 의료 같은 서양 기물로 황제가 '봉사'를 받은 게 있다 보니 그런 천주교에 대해서 갑자기 "너네 앞으로 믿지 마라"라고 해 버리면 그동안 황제가 해 온 행위, 도덕적 정당성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 #

이후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를 선포해 1715년의 칙서 준수[59]와 함께 더 이상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지시킴으로써 의례논쟁을 종식시켰고, 1773년 7월 21일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예수회 수도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만주국(滿洲國)의 공자 숭배에 대해 교황 비오 11세 1935년에 천주교인의 공자공경 예식 참여를 허용했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했으며,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선포해 공자에 대한 석전례, 조상에 대한 제사 거행 및 참여가 허용되게 되었다. #

9. 사생활

9.1. 장기집권

재위기간을 보면 알수 있듯이 62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했는데 이는 청나라는 물론 중원을 지배했던 군주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것이다.[60]

심지어 하도 아버지가 오래 집권하니까 황태자가 불만을 품고 깽판치다 결국 잘리기도 했다.

9.2. 서양 문물 애호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사물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즐겨 탐독하고, 천문학, 지도 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다양한 공학적, 의학적, 예술적, 천문학적인 이해를 구했다.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로부터는 기하학을 배웠으며, 프랑스 출신의 제르비용과 조아킴 부베, 포르투갈 출신의 페레이라 등에게서는 수학을 배웠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인 부베는 강희 21년 중국에 들어와 근 30여년이나 강희제에게 의학, 화학, 물리학의 상식과 라틴어 고전을 가르쳤다.[61]

당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강희제는 그들로부터 서양의 역사와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배우게 된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계산기도 이용했는데,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처음 발명했던 바로 그 초창기형 기계식 계산기를 썼었다.

벨기에인 예수회 선교사인 앙투안느에게 고차 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비부호화된 대수법인 '차근법'을 배우기도 했고[62]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풀이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거기다 즐겨 하던 취미가 술 먹고 잔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불러서 수학 문제 풀면서 정답이 맞으면 좋아하는 것이었다.

또 강희제는 서양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몽골 원정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 하다가 간신히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서양 의학에 대한 책도 좀 뒤적거려보고 양약을 자신에게 써보기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반면에 도사들이 찾아와 "불로장생...", "이거 드시면 신선..." 같은 말을 하면 화를 내면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신을 배격하는 태도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고별상유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나는 편이다.[63]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9.3. 클래식 애호가

마테오 리치 만력제 시대에 클라비코드를 선물한 이래 클래식 음악이 중국에 소개되고 있었지만, 그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사람은 바로 강희제이다.

서양 음악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여럿 두었으며, 직접 작곡도 하였다. 벨기에 출신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신부는 청나라의 천문기관인 흠천감에서 천문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강희제에게 음악도 가르쳤다. 페르비스트 신부가 강희제에게 포르투갈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토머스 페라이라 신부가 음악의 천재라며 음악 선생으로 추천하였다. 강희제를 알현한 페라이라 신부는 하프시코드와 작은 오르간을 강희제에게 선물하고, 중국 음악을 서양식으로 편곡하여 들려줘 강희제를 놀라게 하였다.

1708년 페라이라 신부가 세상을 떠난 이후 3년간 음악 교사가 없었다가,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 출신의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를 음악 교사로 추천하여 강희제의 세번째 음악 선생이 되었다.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는 강희제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그를 시기했던 대신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강희제가 노년일때 억울하게 투옥되었다가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 누명을 벗고 석방되었다. 이후 페드리니는 옹정제의 음악 교사로도 일하였다.

국가원수 치고 음악을 직접 작곡한 사람이 적다는 것을 고려하면 강희제의 서양 음악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었던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예시가 있다면 프리드리히 대왕.[64]

9.4. 자식 교육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황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식들 교육 관련으로 항상 한 말이 있다.
"적잖은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 과도하게 귀염만 받고 자라기 때문에 커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나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가 된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곧 자손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손이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

옹정제는 나중에 강희제의 이런 말들을 모아 「성조인황제정훈격언(聖祖仁皇帝庭訓格言)」을 내기도 하는데 내용은 강희제에 대한 칭찬 및 찬양 + 강희제의 격언들이다.
상서방(上書房)은 이런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선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우게 했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배우게 함과 동시에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가르쳤다.

강희제는 이곳에 내각 대학사와 한림원 출신의 최고의 학자들을 직접 선발하여 투입했는데 명재상 장정옥의 아들인 대학사 장영, 이학(理學)의 대가 웅사이, 예부상서 탕빈, 만주어 학자 서원몽 등 다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강희제 시절의 선교사 부베는 황자들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자들의 교육은 한림원에서 가장 학식이 넒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모두 청년 시절부터 궁정에서 특별히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자들의 모든 활동과 학습을 친히 관리하고 점검했다. 그는 황자들이 쓴 글을 직접 읽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내용을 구술하게 했다.

황제는 특히 황자들의 도덕성 함양과 신체 단련을 중시했다. 그래서 황자들이 철이 들 무렵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하여 그런 기예들을 오락 겸 취미로 삼게 했다.

그는 황자들이 너무 귀하게만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고생을 해 봄으로써 강해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것들은 제르비용 신부가 6년 전 황제를 수행하여 달단산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전해준 이야기다.

군왕은 처음에는 맏아들과 셋째, 넷째 황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갈 때면, 그 밖의 황자 4명도 동행하게 했는데, 어린 황자는 9살이었다. 사냥을 하는 1달 동안 어린 황자들은 황제와 함께 하루 종일 말 위에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견뎌야 했다.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과 쇠뇌를 들고 사냥하는 황자들은 민첩하고 용감했다. 그들 가운데 사냥을 못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 사냥을 나온 가장 어린 황자도 작은 화살로 사슴 2마리를 잡았다.

황자들은 모두 한어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단기간에 익혀나갔다. 그 즈음 막내 황자도 이미 사서 중 3권을 떼고 마지막 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황자들이 유럽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라게 만들었다.

황자들 주위의 신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 (황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조차 감춰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끔찍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이렇게 우수한 재능을 갖춘 황자들을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입관 전 팔기왕들과 황자들의 정치 활동 방침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희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황자들이 대신들과 교류하며 황위를 다투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10. 말년

엄청난 업적을 이룩한 강희제의 말년은 행복하지만은 못했다. 오랜 통치로 황제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고[65] 황태자의 비행과 황자들의 암투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희제 사망 5년전에는 강희제의 적모이면서 황자들의 적조모이자 모후황태후인 효혜장황후도 사망하면서 더욱 심리적으로 고통에 내몰리게 되었다.

강희제는 아들 35명과 딸 20명[66]을 두었는데, 이 중 허서리 소닌의 손녀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67]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68] 윤잉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했다. 유일한 적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강희제는 황태자를 10대까지 건청궁에서 직접 길렀고 황태자에게 수많은 봉읍을 하사하며 건청궁 인근에 동궁인 육경궁(毓慶宮)을 지은 뒤 그곳에 거주하게 했고,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차별적인 특전을 주고 다른 황자들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하였다.[69] 그리고 재정이 부족할 때도 자신이 쓰는 비용을 줄일 지언정 황태자에게 할양된 비용만은 줄이지 않았다.

그러나 잘생기고 완벽한 황태자로 칭송받던[70] 윤잉은 30대를 넘어서면서 직무에 태만해지기 시작했고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다.[71] 강희제는 윤잉의 시종들을 처형하거나 교체하는 등 꾸짖으면서도 그의 비행에 속만 끓일 뿐이었다. 허서리 송고투가 강희 42년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윤잉의 비행은 더욱 심해졌다.[72][73]

본래 만주사회는 적서의 구분이 지엄했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서자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중용받지 못했다.[74] 그런데 강희제의 시대에 들어서면 서자들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열린다. 이전 시대엔 서자가 패륵이 되기도 힘들었는데 강희제 시대의 서자들은 친왕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렇다보니 예전 같으면 윤잉에게 고개를 들지도 못했을 서자들이 적장자이자 공동통치자인 윤잉에게 도전할 마음을 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윤잉은 이러한 위태로운 환경과 강희제의 집착적인 애정[75], 외가인 허서리씨의 몰락으로 점점 정신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76]

이때 형제들의 암투가 매우 극심했는데, 황자들은 개국 공신 허서리 소닌의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와 황태자 인청(윤잉), 13황자 인샹(윤상)이 속한 황태자당(皇太子黨)에 대항해서 다른 황자들과 많은 대신들은 반태자파벌을 형성했다. 서자이지만 맏아들인 황장자 인지(윤제)[77]와 나라 밍주[78]가 속한 황장자당(皇長子黨)이 처음으로 황태자당에 맞섰고, 뒤이어 4황자 인전(윤진)[79], 8황자 인스(윤사), 9황자 인탕(윤당), 10황자 인아(윤아) 등이 속한 황팔자당(皇八子黨)도 존재했다.[80]

황18자 윤개가 중병에 걸려 강희제가 쾌유를 기원하고 있을 때 윤잉이 강희제의 막사 안을 염탐했는데 이 사실을 윤제에게 고발당했다. 윤잉은 강희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고 폐위당했다.[81]

강희제는 이전부터 윤잉을 폐위할지 고민하고 있었으나 성급하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분란을 낳았다. 강희제 자신은 윤잉을 폐위하고 여러 날 동안 식사도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으며, 대신들은 윤잉이 갑자기 반역죄로 폐위되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조정대신들 사이에서 윤사를 태자로 옹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윤제도 윤사를 태자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강희제가 윤사를 경계하는 양상이 시작된다. 강희 말년의 황위 다툼은 어떻게든 8황자 인스(윤사)를 태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강희제의 발악이나 다름없다.
윤잉을 구금했을 때 윤제가 아뢰었다. 윤잉은 행실이 추잡하고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관상가 장명덕이 일찍이 윤사는 귀해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제 윤잉을 죽이려고 하니 부황께서 손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강희 47년 9월 25일

강희제는 평소에 행실이 포악하고 윤잉을 미워하던 윤제가 자신의 앞에서 윤잉에 대한 살의를 표출한 것도 모자라 윤제 본인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피력하는 대신 윤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강희제는 황장자 윤제가 윤잉의 태자 자리를 노린다고 여겨 경계하고 명주와의 친교에 주의를 주었으며 윤잉을 폐위한 자리에서 윤제에게 황위가 너에게 갈 일은 없다고 딱 잘라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윤제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윤사를 지지하자 강희제는 반태자당의 진짜 당수는 윤제가 아니라 윤사이며 윤잉이 인심을 잃은만큼 윤사가 인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82] 비록 윤잉을 폐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윤잉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강희제는 윤잉이 인심을 잃은 것이 윤사의 탓인양 갈구며 미워했고, 윤잉을 모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윤사를 체포했을 때도 14황자 윤정이 윤사를 옹호하자 칼을 뽑아 윤정을 베려고 할 정도로 분노했다.

이후 강희 47년 11월 14일, 강희제가 윤잉을 다시 복위시키고자 창춘원에 조정 대신들 30여 명을 불러모아 황태자감이 될만한 황자를 추대한다면 자신도 이를 따르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여진족이 지도자의 사후에 그 자식들 가운데서 차기 후계자를 추대하는 상속 풍습과 숭덕제, 순치제가 의정왕회의에서 차기 황제로 추대받아 즉위했던 전통을 계승하여 윤잉의 정통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83] 그러나 대신들은 이미 반역죄를 짓고 각종 비행으로 인심을 잃은 윤잉을 지지할 마음이 없었고 만장일치로 윤사를 지지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충격을 받고 다음날 꿈에서 효장태황태후와 효성인황후가 나타나 윤잉을 걱정했다며 윤잉의 광증이 곧 나을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전날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이듬해 강희제는 윤잉을 태자로 복위시켰으나 윤잉이 병부와 형부의 측근들과 함께 모반을 계획한 사실이 발각됐고 강희 51년 다시 폐위된다. 윤잉은 서인으로 강등된 후 함안궁의 냉궁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감금당했다.[84]

하지만 윤잉이 폐위된 후에도 강희제는 윤사를 증오하며 온갖 비방과 저주를 퍼부었다.[85] 강희제는 윤사가 윤잉을 모해했다고 철썩 같이 믿었고, 윤사를 지지하는 세력이 너무도 막대하여 정국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강희제는 윤사를 절대 황태자로 책립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무튼 강희제의 치세 말년은 이런저런 문제가 이어져 강희제는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 수도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 수도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1722년, 강희제는 65세 이상의 노인을 자금성에 초청하는 행사인 천수연(千叟宴)을 주최한 뒤 얼마 안 되어 오한과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보이더니 12월 경,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10.1. 강희제의 유조 진위 여부

강희제는 황태자를 두지 않고 있다가[86] 죽기 직전에야 황4자 인전을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이 황4자가 바로 옹정제다. 이는 청조 특유의 후계 제도인 태자밀건(太子密建)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태자밀건 제도는 황태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기에 모든 황자들로 하여금 행실을 조심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정황상 강희제의 이러한 후계 지명은 큰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 강희제의 임종 당시 곁에 롱코도(융과다)만이 있어서 그가 강희제의 유조를 받았기 때문이다.[87]

옹정제가 즉위한 후 갈수록 여론이 악화되면서 강희제가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 윤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는(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주장을 각색한 것이 바로 강희제 독살설 및 전위 조서 위조설이다.[88] 그러나 당대 민간에서 떠돌던 전위 조서 유조설과 현대 전위 조서설은 차이가 있다. 애초에 강희제의 유조는 원래 유언이다.
무엇보다도 학계에서 강희제의 유조 진위 여부를 놓고 아직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민간의 유조 조작설 때문이 아니라 옹정제 즉위 이전의 기록물에서 강희제의 유조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만주, 한문 기록물을 통틀어도 강희제의 유조는 옹정제 즉위 이후에만 언급이 된다. 그리고 옹정제가 즉위한 후 발표된 전위 조서 한문판 2부, 만문판 2부가 남아 있으나 한문판 중 한 부는 낙관이 찍혀져 있지 않고 만문판은 두 부 모두 수정된 흔적이 있고 심지어 누구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내용조차 없다. 그렇기에 현재 남아있는 전위 조서는 옹정제의 즉위 정당성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옹정제가 유조를 조작했고 황14자 윤정이 원래 황위 계승자였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황14자 윤정은 티베트 원정 등에서 공을 세웠고 실제로도 강희제의 신임을 받았다. 다른 황자들이 하오기 소속이었던 것과 달리 윤정은 황제 직속기인 정황기 소속이었고, 티베트 측에서는 윤정이 황태자로 기록되기도 하였다.[89] 반대로 옹정제의 경우엔 황자 시절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점은 황위 찬탈설과 황위 합법 계승설 모두 인정하고 있다.[90] 그리고 옹정제는 즉위할 때 40대 초반이라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제위 안정성 면에서 위험하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러나 옹정제가 강희제의 지명을 받아서 즉위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비록 강희 56년 이후로 강희제와 윤사의 관계가 꽤 회복되기는 했으나 강희제에게 있어서 윤사는 정적이었다. 그런데 윤정은 윤사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옹정제는 원래 윤사와 친밀하여 윤사의 황위 계승을 은근히 지지했던 정황이 있으나 점점 자신이 황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가졌고 강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윤사와 척을 졌다.[91] 그러므로 강희제의 입장에서는 옹정제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정은 형제들 중 어린 편이라 황제로 즉위하면 형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강희제의 유조를 전달한 롱코도가 옹정제와 원래 친분이 없었으므로 롱코도 입장에선 유조를 조작하면서까지 옹정제를 도와줄 이유가 없다는 점[92]이 결정적인 근거로 거론된다.[93]

제3의 설로 강희제는 유조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옹정제 즉위 이전의 기록물에서 유조에 대한 기록을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94]

결국 강희제가 후계자로 염두에 둔 황자가 누구든 옹정제의 즉위 과정은 논란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청나라 상층부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옹정제가 정말로 합법적으로 즉위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 결과 옹정제 즉위 초의 만주 지배층은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황8자당에 속한 황족들과 강희제의 중신들은 옹정제에게 불복하다 숙청당했다.[95][96] 옹정조의 황실 내부 갈등은 옹정제 본인의 가정까지 미쳐 어머니 효공인황후가 황태후 책립을 거부하고 장자[97] 홍시가 윤사의 편에 서서 아버지의 대척점에 서다 아버지의 정적의 양자가 되어 종적을 박탈당한다는 전무후무한 사태까지 일어났다.[98] 비록 옹정제가 반대파를 숙청하여 불만을 억눌렀으나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99] 만주 지배층들 사이에서 원성이 들끓었고 건륭제는 즉위 직후 숙청된 황족, 대신들의 신원을 복위시키며 만주 지배층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단결을 이끌어냈다.

11. 사후

망국 군주가 그렇듯이 강희제 역시 청나라가 멸망한 뒤로 무덤이 무참히 도굴당했다. 강희제는 재위 15주년인 1676년에 무덤인 경릉을 완공하여 청나라 황제 역사상 최초로 시체를 태워 화장하지 않고 대신 부장품들과 함께 묻었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도굴꾼들에게 참혹하게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지하수에 침수되어 버린 탓에 훼손이 상당했다. 동릉 도굴 사건 때도 구덩이를 파기만 해도 물이 뿜어져나오는 바람에 병사들이 포기하며 도굴만은 피하는듯 했지만, 1949년에 아예 국가 주도로 중국 공산당이 도굴을 벌여버리면서 모조리 털렸다. 강희제와 그 후궁들의 시신은 도굴꾼들이 시체 안에 숨긴 보물을 찾겠답시고 헤집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부장품은 보석 쪼가리 하나 남지않고 모조리 사라졌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부서진 관곽과 돌덩어리들 뿐이다. 시신조차도 함풍제, 동치제의 시신과 같이 아무 데나 내팽겨쳐버려 아예 사라졌다. 지금은 청동릉이라고 하여 청나라 여러 황제들 무덤으로 기리고 있지만 당연히 시신이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12. 여담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사 현종(顯宗, 1659년 ~ 1674년), 숙종(肅宗, 1674년 ~ 1720년), 경종(景宗, 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흠좀무한 성과를 내었다.[100] 성군 강희제 관련 포스트

강희제의 측근인 조아킴 부베는 그의 외모를 키가 조금 크며 약간 살이 찐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고[101] 이마가 넒고 코와 눈이 작다고 묘사했다. 성격은 매우 부드럽고 정중했다고 한다.

식생활로는 폭식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주로 신선한 채소 위주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틈틈이 닭고기와 양고기를 먹기도 했다. 특히 짠 음식과 젓갈을 최대한 먹지 않고 음식을 싱겁게 먹었으며 야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담배는 효장문황후와 상의하여 금연에 성공하고 술은 적게 마셨다.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키려고 후원을 산책하거나 서양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관람하고 독서를 하고 낚시를 하는 취미생활도 가졌다. 환관들에게 명나라 야사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제갈량 출사표 중 후출사표 중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 #


[1] Joachim Bouvet, 1656년 7월 18일 ~ 1730년 6월 28일 중국 이름은 백진(白晉)·백진(白進)·명원(明遠)으로 프랑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다.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서 강희제에게 유클리드 기하학과 해부학 등을 강의했으며, 강희제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 [2] 강희제는 어릴 적 황궁의 관례에 따라 천연두를 피해서 유모와 함께 자금성 밖에서 컸고, 차기 황제로 지명되어 자금성으로 돌아온 후에 곧 생모를 잃어 친부모와 보낸 시간이 정말로 적었다. 현재 연구자들은 적서의 구분이 지엄한 만주사회 특성상 순치제가 서자인 강희제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본다. 거기다 순치제는 강희제의 생모 서비 동씨보다는 현비 동고씨를 총애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본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기에 더더욱 강희제에게는 애정을 쏟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 한족화된 여진족의 후손으로 퉁기야 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후손인 동국강과 동국유는 한인 팔기에 소속되었다가 강희제 즉위 후 특명으로 일족이 양황기로 편입되어 정식으로 만주족이 된다. [4] 동도뢰 일가는 효장태후의 파벌인 양황기와도 친밀했다. [5] 천연두에 한 번 걸렸다가 나으면 다시 걸리지 않는, 즉 천연두가 면역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옛날부터 발견되어 있었던 오랜 상식이었다. 이걸 응용하여 고안한 인두법이 오랫동안 예방법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치사율이 낮지 않았고, 훗날의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치사율을 극적으로 낮추어 고안한 예방법이 바로 지금의 우두법이다. [6] 효장태후가 미리 아담 샬에게 히오완예이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고한다. [7] 중국은 전통적으로 즉위 다음해에 개원하는 유년칭원법을 채택해왔다. 중국에서 즉위년칭원법은 전임 황제를 축출하고 반정으로 즉위했다거나 전임 황제가 실정 및 학정을 했다거나 해서 그해의 정통성을 부정해야 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썼었다. 반면 일본은 새 천황 즉위 직후 바로 개원하는 즉위년칭원법이 전통이었다. [8] 효장태후는 양황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정황기는 효장태후에게 충성하는 파벌과 순치제에게 충성하는 파벌로 갈렸다. [9] 순치제는 도르곤 개인은 증오했지만 그의 한인 등용 정책 기조는 계승했고, 그의 당여인 정백기인들과 도르곤의 친동생인 도도의 양백기인들과 호오거의 정람기인들을 중용했다. [10] 소닌은 순치제의 총신이었지만 효장태후와 각을 세우지 않았고 양황기 대신들과도 무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11] 이때 다른 세 보정대신들이 자기 가문의 여식이 황후가 되지 못해 불만을 품고 허서리씨를 하인(허서리씨는 명문가는 맞으나 후금에 포섭되기 전 하다부 속하에 있던 가문이다)의 딸이라며 반대했으나 효장태황태후가 단호한 태도로 나오자 바로 고개를 숙인다. [12] 강희제가 성장하면서 보정을 그만두고 친정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었던 시기였다. 소닌이 죽은 후 효장태황태후가 친정을 미루자고 한 번 거절했지만 보정대신들이 다시 주청을 올리자 친정을 윤허한다. 그 직후 숙사하가 순치제의 능지기를 하겠다며 물러나고자 했는데, 오보이가 숙사하의 죄상을 나열하며 교수형을 밀어붙인다. [13] 오보이도 이에 반발하지 않았다. [14] 오보이와 어빌룬 개인은 권력을 잃고 실각했지만 그들의 가문은 거의 피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난지 몇년 후에 어빌룬의 딸인 효소인황후가 강희제의 계후가 된 것이다. [15] 청초기 투항자들과 삼번을 이끄는 가문들이 긴밀한 관계에 있어 청태종은 이들을 황족에 가깝게 우대했고, 순치제는 이런 기조를 이어가는 동시에 효장태후와 몽골 코르친부, 양황기와 일부 정황기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삼번에 자신의 자매와 화석유가공주 같은 양녀들을 하가시키는 등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여들었다. 이 때문에 허서리 송고투와 마기야 투하이 같은 순치제의 측근 대신들은 삼번 유지를 주장하였으나 강희제는 효장태후의 후원으로 옹립되어 삼번 철폐론자였다. [16] 엄밀히 말해서 경중명이 손자인 경정충까지 3대세습을 해서 세습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17] 처음에 상가희는 장남인 상지신을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에게 왕위를 세습해줄 것을 청했다. 그런데 삼번의 난이 일어난 뒤 강희제가 상가희가 반란에 가담하는 것만은 막기 위해 그가 원하는대로 세습을 허락한다고 말을 바꾸는 사신을 보냈을 때 상지신이 그들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그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상지신 대신 차남 상지효를 밀었다. [18] 비록 상가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가희는 충격 속에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나중에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19] 반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예순을 넘긴 고령인데다 반란이 장기전이 되면서 젊은 강희제에게야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지만 늙은 오삼계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20] 그 당시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밖에 없는 것이 만주족들이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고, 청나라의 명령으로 남명정권을 없애겠다고 운남을 지나 미얀마북부까지 공격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 자기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갑자기 명나라 부활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21] 녹정기에서 위소보에게 불쌍하게 당하는 그 인물이다. [22] 강희제는 기병들에게 강력한 대포를 딸려 보냈다. [23] 당시 러시아는 이복 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를 압박해, 이반 5세가 공동 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도록 만든 상태였고, 나선 정벌의 복수도 소피아가 막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네르친스크 조약 역시 소피아가 체결했다. [24] 우다 강 주변은 미결정지 [25] 허서리 소닌의 아들이다. [26] 이전에 이곳에 라틴어문이 초안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맞다면 출처 요망 [27] 네르친스크 조약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와 청조는 자국어(노어, 만주어) 문서와 함께 라틴어 문서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28] 표트르 대제 문서에도 나와 있는데,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무효라고 생각했다. 황제였던 표트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권한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된 직후 소피아는 자기 애인과 함께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를 완전히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여 수녀원에 갇힌다. [29] 강희제는 서양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당시 중국에 들어오던 가톨릭 선교사들로부터 이런저런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30]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이러한 강희제의 방식을 두고 '체제'는 야만인들을 다루는 중화주의의 행정적 경험이었고, '토대'는 만주의 칸들에게 몽골의 칸들이 복속하는 유목민과 유목민 사이의 관계였다고 표현했다. [31] 이 시기가 되면서 강희제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분쟁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황자들 중 한명을 지휘관으로 파견해서 전쟁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과거 강희제가 자신의 형과 동생을 대장군으로 몽골에 파견했다가 대패하며 망신만 당하고 돌아오자 강희제가 단단히 빡쳐서 이들을 처벌한 적이 있었다. 이후 친정으로 갈단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또다시 일부러 황자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황자도 몇 명 없었는데, 가장 유력하였던 인물이 14황자였다. 그리고 14황자는 동복형 4황자가 아닌 이복형 8황자의 파벌에 속한 인물이기도 하였는데, 8황자 윤사를 비호하다 분노한 강희제에게 칼로 베여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윤정은 원정을 떠나있는 사이에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키면서 제위를 강탈당한채 북경으로 소환된다. [32] 황제가 강남을 오가면서 총신들의 집에 머무르는 식으로 숙식을 해 비용 절감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황제를 모셔야 하는 신하는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황제와 수행원들 접대에 허리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강희제는 손자 건륭제와는 달리 최소한의 인원으로 강남의 유학자들을 회유하는 차원에서 간 것이지만, 최소한으로 했어도 적은 인원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황제가 자신을 모시면서 든 비용은 내무부에 청구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말해주었지만, 돈을 청구한다는 것은 감히 황제에게 "너님 모시느라 돈 많이 썼으니 좀 메워주셈."이라고 말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서야 진짜로 돈을 청구할 간 큰 인간은 없었다. 이때문에 강희제의 순방 때마다 자주 자신의 집에서 황제를 모셔야 했던 총신 위동정은 허리가 휘다 못해 빚더미에 앉아 국고에서 돈을 빌리고도 그것을 갚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게 강희제 말기에 부정부패 전수조사를 하던 황4자 옹친왕(훗날의 옹정제)에게 걸려 황제의 총신이 국가 돈을 떼먹었다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 정황을 알게 된 강희제는 내탕금으로 갚아주었고, 이를 지켜본 옹정제는 즉위 후에도 순방을 나가지 않고 내치에 집중하는 황제가 되었다. [33] 개국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구성원 모두가 실전경험을 쌓던 팔기군이 남명이 패망하면서부터는 기강을 잃고 해이해졌다. 팔기군은 강희 원년 영력제가 오삼계에게 목졸려 죽은 이래 10여년의 세월을 탱자탱자 놀았다. 거기에 또 한가지 원인으로는 복건과 광동의 반란세력이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쌓는 바닷사람들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만주족은 예로부터 자체 해군력이 없어서 명의 수군을 귀순시켜 쓰는 편이었고, 팔기한군도 이들이 한족 포병대와 함께 증편된 것이었다. [34] 뇌와 심장이 분리되지 않고 상반신이 통째로 남아 있으니 의식이 멀쩡한 채 피를 콸콸콸 흘리다가 과다출혈로 실혈사하게 된다. 그래서 요참형은 어떻게 보면 참수형보다도 훨씬 잔혹한 사형법이었다. [35]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 해 사형당하는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6천 명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인구 증가 수치를 따져보아도 매우 많은 편. [36] 비슷하다기엔 뭐하지만 만력제 시기에는 줄줄이 사형 집행 건수가 0명인 해가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건 당시가 태평성대였다기보다 만력제가 일을 안 해서이다.(…) 유교권에서 사형은 최고 군주의 결재가 있어야만 집행이 가능했는데 황제가 결재 자체를 안해버리니 사형수들이 옥에서 죽거나 시효인 20년이 지나 석방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 [37] 1. 성세자생인정으로 정세가 고정됐는데, 2. 여기에 탄정입묘로 고정된 정세와 토지에 부과된 정세, 토지 기반의 지세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정세 부담이 현격하게 감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38] 쉽게 말하면 다른데는 다 면제받아봤는데 얘네만 못받았으면 억울할 테니 너네도 올해는 내지 말라는 것. 재정이 풍족했음은 사실 이 말 하나로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니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39]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은의 1/4 내지 1/3을 빨아들였다고 한다. 아편전쟁은 이렇게 빨려 들어가고도 돌지 않는 은을 털어 무역 적자를 메우려는 영국 극단적인 조치가 일으킨 결과였다. [40] 건륭제가 할아버지인 강희제를 매우 숭배했다. [41] 유니코드의 한자 영역도 강희자전 부수 순서를 따른다. [42] 입관 전부터 불교를 믿었고 입관한 뒤에는 중국식 선불교에 더해 티베트 불교도 수용했다. [43] 당장 마테오 리치 본인도 선교사로써의 사제복이 아니라 중국의 유학자들이 입는 유건에 도포를 입고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44] Deus의 중국어 음역이다. [45]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바티칸에 대해 독립적인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에서 의례논쟁이 심화해 가면서 기존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방침이 유럽에서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조차도 프랑스 국적의 선교사들은 오히려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한학(漢學)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유가 사상과 크리스트교 사이의 접점을 강조하는 노선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도 노선을 ‘색은주의(Figurism)’라고 해서, 기존 마테오 리치가 세웠던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한 층 더 심화시킨 것이었다. [46] 따져 보면 기독교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문구인 게 잠언에서는 "지혜의 근본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고, 과거 제사장들은 "야훼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하였다. [47] 이는 어느 정도 마테오 리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48]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교황을 법왕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9] 조너선 스펜서 ‘강희제’ [50] 쑹녠선 저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역사비평사, 2020년. 명색이 '교황이 보낸 특사'가 '중국통'이라며 내세운 샤를 메그로는 정작 강희제가 제시한 한자 몇 글자와 < 천주실의>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천주실의>는 투르농이나 메그로와 같은 기독교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지은 기독교 교리 개설서로, 한문에 소양이 있다면 서양인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쉽게 쓰인 책이었으며, 강희제 본인은 다른 선교사들조차도 "이제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철인군주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서양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라틴어까지 공부할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교황의 특사라고 찾아온 인간이 이런 인간을 '중국통'이랍시고 자신에게 내세우니 강희제로서는 "이것들이 지금 날 뭘로 보는 거야?" 식으로 더욱 빡칠 수밖에. 현대 기준에서 보아도 명백하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존중, 예의 하나 없는 결례였다. [51] 덧붙여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에 대해서도 강희제는 자신이 옆에 두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에게 "서양인들은 예수가 전한 애제 시기에 태어났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노예와 주인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여 신성한 물질을 마신다고 하는데, 어째서 신은 꼭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아들과 인류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냐?"라고 물었는데, 페르비스트는 이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52] 다만 망자의 이름 위에 반드시 ‘천주교효경부모지도리’(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고 쓰면 위패 사용이 허락됐다. [53] 강희제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 중국이 바티칸 교황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주교 서임권을 부정하고 중국 정부가 주교 서임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중국 정책과도 비슷하다. [54] 교황에 의해 명목상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서품되었다. [55]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고 조선-일본간 국교를 재개시키려고 하면서 벌렸던 국서 위조와 비슷했다. [56] 기독교를 전도하는 선교사들에게 "나도 그럼 티베트 불교 스님들 몇 명 너네 나라에 보내서 불교 전도하게 해 볼까? 니들 그 사람들한테 무슨 말 하고 어떻게 접대할래?"라고 따져 물었다. [57] 대교안과 관련해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없다는 거지 건륭제 시절에 처형당한 사람도 분명 있었다. 조선처럼 대대적으로 박해를 안 했을 뿐. [58] 쉽게 말해 ‘선교사 니들 각자의 종교의 자유는 허용할 거고 중국에 오는 것도 막지 않겠지만 (우리가 허가한 사람이 아닌 한) 다른 사람한테 전도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비슷한 처분이었다. 현재 중국 당국이 가톨릭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59]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중국 전통 의례 금지 사안을 숙지하고 준수하겠다고 서약해야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60] 여담으로 적모이자 모후황태후인 효혜장황후도 청나라 역사상 가장 장수한 정실 황후이자 모후황태후이다. 실제로도 강희제가 사망하기 불과 5년 전인 1717년에 사망하였다. [61]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中 [62] 본래 중국에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방법으로 '천원술'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명나라를 거치면서 그 방법이 잊혀졌지만 강희제가 매곡성이라는 신하에게 "서양 사람들이 말하길, 이것이 동양에서 전파됐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조사해보아라." 라고 명하여 천원술과 차근법이 같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 [63] 중국사에서는 황제가 도사들이나 돌팔이 의사들이 갖다 바친 걸 덥석 먹었다가 죽은 사례가 여럿 있었다. 당장 강희제가 황제가 되기 불과 20~30년 전에 명나라의 태창제도 도사가 바친 환약을 먹었다가 즉위 한 달만에 죽어버렸다. 태창제의 이러한 미신적 면모를 강력히 비판한 후대인이 있었는데, 바로 강희제 본인이었다. [64] 다만 둘이 처한 환경을 고려했을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고전, 옛날 음악 애호가였고 강희제는 지극히 힙스터스러운 취향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65] 고지혈증과 부스럼에 걸렸고 몽골 원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받았다. 이때문에 당시 황태자였던 윤잉한테 양위할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병이 낫고 나서 바로 취소했다. [66] 성인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아들 20명, 딸 8명. [67] 금슬이 좋아서 강희제가 사랑한 황후였다. 윤잉을 낳은지 얼마 안되어 산고로 22살에 요절했다. [68] 계보상으로는 차남이었으나 형 승호가 3살에 요절하여 실제로는 윤잉이 맏이었다. [69] 강희제의 윤잉에 대한 사랑은, 윤잉이 적자인 탓도 있지만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과거의 상처와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경험 때문으로 측된다. [70] 조아킴 부베의 평이다. [71] 실제로 윤잉은 여성을 굉장히 좋아해서 황태자비인 구왈기야씨외에 첩을 13명이나 두었고, 그 첩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만 해도 9남 14녀나 되었다. [72] 기록이 모호하기 때문에 송고투가 정말로 반역을 도모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강희제는 윤잉의 권위를 계속 강화하다가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이르자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윤잉의 측근들을 꾸짖었으며, 윤잉에 대한 강한 통제욕 때문에 자신과 윤잉 사이에서 끼어드는 송고투를 못마땅해했다. 송고투가 왜 처형되었든 그 이후로 윤잉의 비행이 더욱 극심해지고 반항적인 행동이 잦았던 것은 분명하다. [73] 대신들과 형제들을 폭행하고, 외번 몽골로 출새할 때 온갖 말썽을 일으키고, 유모와 그 아비인 내무부 총관 능보와 함께 부정축재 등등 [74] 누르하치의 정비 4인의 소생인 아닌 서자들 중에선 그나마 지위가 높은 측복진 소생인 7남 아바타이만이 군왕까지 올라 출세했다. 홍타이지의 숭덕오궁 소생이 아닌 서자들 중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그들의 생모가 본래 적실이었다가 폐출되어서 측생자로 격하된 경우였다. [75] 강희제는 윤잉에게 편애를 넘어 강한 통제욕을 가졌고 다른 누구와도 가까워지길 바라지 않았으며 그에게 끊임없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고방식을 주입시키려고 했다. 윤잉이 무릎을 꿇고 강론하는 스승들을 배려해서 시립하게 하면 강희제는 황태자의 신분을 강조하며 스승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라서 다른 황자, 공주와 주고 받은 편지에도 애정이 담겨있지만, 윤잉에게 보낸 편지는 이게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연애편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달달하다. [76] 정확히 언제 한 말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윤잉이 측근들에게 "40년 동안 황태자인 경우가 나 외에 누가 있나?"라며 투덜거린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77] 중국어 발음으로는 인티. [78] 예허나라 밍주와 윤제의 어머니인 혜비가 사촌이라는 야사의 기록이 있었으나 혜비 나라씨는 만주 정황기 포의 우라나라씨로 밝혀졌다. [79] 20세기까지 옹정제가 강희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윤잉을 은근히 옹호했기 때문에 황태자 윤잉의 소극적인 지지자라는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장된 설이다. 옹정제는 2차 태자 폐위에서 다른 황자들, 황8자당의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공신 명단에 올랐다. 또한, 옹정제는 1차 태자 폐위 전까지 옆집 이웃인 윤사와 친밀하게 지냈고 윤사, 윤당, 윤아와 같이 창춘원 부근에 별장을 지을 정도로 막연한 사이였다. [80] 윤사는 윤제와 친밀했고, 윤잉과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1차 태자 폐위 이전까지 윤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황자들은 태자 윤잉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 윤잉과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았다. [81] 강희제는 윤잉이 외종조부의 복수를 위해 반역을 일으키려했다고 믿었다. [82] 1차 태자 폐위 이후 윤제와 황장자당은 모두 윤사를 지지했다. [83] 만주대신들은 고유의 전통을 무시하고 한족의 전통을 따라 태자가 된 윤잉을 마뜩찮아했기 때문에 강희제가 이 점을 의식한 것이다. [84] 윤잉은 강희제 사후에도 강희제의 명령을 받은 옹정제가 감금과 서인 강등을 풀어주지 않아서, 감금된 지 12년 째인 옹정 2년에 5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나마 강희제가 유언으로 윤잉의 목숨만은 보전하고 윤잉의 맏아들도 친왕으로 임명해주라는 명을 내려서, 옹정제는 윤잉의 사후에나마 장례를 황족의 예로 치러주면서 그의 황족 지위를 복원시켜주었다. 시호 밀(密)을 추가한 이밀친왕(理密親王)이라고 복권되었는데 이는 순박하지만 과오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타국인 조선왕조실록에까지 누이들을 강간했다는 어마어마한 악담이 기록될 정도의 난봉꾼에게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순박했다"는 시호는 엄청 후하게 쳐준 셈. 윤잉의 맏아들 이친왕 홍석은 옹정제 살아생전에는 가독을 이어받은 계승자가 고아가 된 어린 동생들과 조카들을 부양해야한다는 관습에 따라 후히 대우받으면서 살았지만 옹정제 사후 건륭제가 즉위한 연간에 정통성 논란이 불거졌다. 그리고 홍석이 내무부 속하의 사아를 본따서 사사로이 설치하고, 옹정제의 숙청에 반감을 품은 황족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건륭제는 홍석을 유폐시키고 홍석과 어울린 황족들을 처벌하기는 했으나 나중에 용서해주었다. [85] '윤사는 신자고 천부의 혈통이다', '짐은 훗날 개돼지 같은 황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윤사에게 양위를 할 날이 올까 두렵다', '황자들이 신하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짐이 임종할 때 건청궁을 두고 쟁탈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86] 특히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하고 나서 황태자 옹립을 얘기하면 지위고하를 가리지않고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기에 신하들은 후계자를 언급할수도 없었다. [87]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부찰 마제가 강희제의 유언을 직접 들은 것으로 나온다. 청조의 기록과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란도 많은 편. [88] 이것은 대의각미록에서도 언급된 설이다.강희제의 독살설과 조서 위조설은 민간에서 옹정제에 대해 평판이 나빴던 탓이 크다. 옹정제는 그 업적과 별개로 문자의 옥과 가혹한 숙청 때문에 민간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여사낭이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전설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89] 옹정제는 즉위한 후 강희제와 윤정이 주고받은 서신을 전부 압수했는데, 서신에 윤정의 황위 계승에 대한 언급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해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게 중론이다. [90] 옹정제는 강희제가 죽기 직전 제천행사에 단독으로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중책을 맡은 적도 없고, 눈에 띄는 성과를 낸 적도 없다. [91] 강희 55년 윤사가 창춘원에서 중병에 걸려 위독할 때 옹정제가 강희제의 눈치를 봐서 황9자 윤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사를 집으로 데려갔다. 한문 기록에서는 두 사람의 친분에 대한 흔적이 아주 약간 남아있지만, 만주 기록에서는 옹정제가 윤사를 숙청할 때 두 사람이 예전에 친했던 시절의 일을 거론하며 서로 진실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92] 바로 이 점이 롱코도가 옹정제에게 숙청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롱코도는 원래 옹정제의 측근이 아니었고, 그의 가문 퉁갸씨는 황8자당이었다. [93] 롱코도가 왜 옹정제의 즉위를 지지했는지는 학자들의 입장마다 다르지만 두 사람이 원래 친분이 없다는 건 모두 동의하고 있다. [94] 청나라의 공식적인 기록물 양은 매우 방대하고 중요한 기록은 만주어로만 기술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모든 기록을 해석하기는 커녕 다 보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위 주장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현재로써는 옹정제 즉위 이전의 기록에서 강희제의 유조를 찾지 못했지만 기록 보관소 어딘가에 유조가 묻혀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 [95] 다만 황9자 윤당, 황14자 윤정 등은 민간에서 반란 제의를 받아도 끝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옹정제의 즉위 과정이 의문스럽기는 해도 황위를 찬탈했다는 증거도 없고, 집안일 때문에 나라를 분열시킬 수는 없다고 여겼다. [96]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황14자 윤정은 옹정제에게 항명하거나 면전에서 처벌하라고 도발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옹정제는 그를 죽이지 않고 유폐시켰다. 그러나 옹정제에게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장자인 홍춘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윤정이 윤사에게 돈을 준 일을 고발하는 등 여러가지로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건륭제 즉위 직후 홍춘은 작위 삭탈되고 유폐된다. [97] 황3자지만 앞의 형들이 일찍 죽어서 실질적인 장자였다. [98] 옹정제는 즉위 초에 스승을 택하는 데 신경을 쓰는 등 홍시와 관계 개선을 꾀했으나 갈수록 부자 관계는 악화되었고 옹정 3년 무렵에 홍시는 사실상 내쳐졌고 이후로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옹정제는 윤사의 종적을 박탈하면서 홍시의 종적도 박탈한다. [99] 만주 명문가들만이 아니라 황자들, 하오기왕들 상당수가 타격을 받았다. [100] 현종 시대에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을 무렵 파견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는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번에 다 굶어 죽게 됐대매? 그게 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서 그런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강희제와 청나라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 이 대목은 최근에도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종종 쓰인다. [101] 이는 강희제가 어린 시절에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이다. 물론 초상화는 미화를 위해 강희제의 얼굴에 있는 마마자국을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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