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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4:36:54

가자 공방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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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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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바티스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왕조군이 지키는 가자를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332년 8월, 알렉산드로스 3세는 7개월간의 포위 공격( 티레 공방전) 끝에 티레를 공략했다. 그 후 페니키아 전역을 공략한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부터 에게 해 까지의 영토 전부를 내주고 내 딸을 줄 테니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자"는 아케메네스 샤한샤 다리우스 3세의 제안을 거절한 뒤 이집트로 남하했다.[1]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해안 도시들은 티레의 말로를 전해듣고 감히 그에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그러나 페니키아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경로의 마지막 도시인 가자 만은 알렉산드로스의 입성을 거절했다.

가자를 지배하고 있던 환관 바티스는 아라비아 용병대를 모으고 장기적인 포위 공격에 대비해 물자를 충분히 비축해뒀다. 가자는 바다로부터 약 4km 떨어져 있었으며, 도시에서 해안 까지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고, 앞바다에는 숨은 위험이 적지 않았다. 또한 높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이 정도 방어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막아낼 수 있을 테고, 다리우스가 원군을 보내줄 거라고 확신해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를 에워싼 뒤, 성벽의 가장 취약해 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 공성 장비들을 조립하라고 명령했다. 기술자들은 도시를 받치고 있는 언덕이 너무 높아서 기습으로 점령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공격에 성공하면 적의 사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겠지만, 실패한다면 자신의 명성이 훼손될 것을 감안해 공격을 감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공성 장비들을 성벽 가까이에 설치할 수 있도록 도시 둘레에 성벽의 토대 높이만큼 토루를 쌓은 뒤 그 위에 공성 장비를 올리는 작전을 짰다. 이 작업은 성벽이 약해 보이는 남쪽 구역에 집중되었다.

토루가 충분한 높이로 완성되자, 그 위에 공성 장비를 올리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에 앞서 제의를 올리기 위해 알렉산드로스가 머리에 의식용 화관을 쓰고 첫 번째 희생제물을 바쳤다. 그때 맹금 한 마리가 제단 위로 날아오더니 발톱에 움켜쥐고 있던 돌 하나를 그의 머리 위로 떨어뜨려 명중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새는 나중에 투석기 줄에 걸려 붙잡혔다고 한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새가 역청과 황을 바른 탑에 달라붙어 꼼짝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충격을 입은 것 외엔 큰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이 징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궁금했다. 이에 종군 중이던 예언가 아리스탄드로스에게 물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전하는 이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전하의 안위를 보살펴야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따라 한동안 공성구들이 사정거리 밖에 배치된 곳 근처에 머물렀다. 얼마 후, 도시 수비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전개했다. 아라비아 병사들은 공성 장비를 불태우기 위해 아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리한 지점에서 투척 무기를 퍼부었고, 이로써 마케도니아군을 토루 밑으로 밀어내는 데 거의 성공했다. 이 광경을 눈앞에서 바라보자, 알렉산드로스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예언가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근위대의 선두에 서서 마케도니아군이 가장 곤경에 처한 전투 지점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해 적을 밀어붙였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이 순간 한 아라비아 병사가 항복하겠다며 무릎을 꿇고 장검을 내밀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 무기를 집어들려고 다가가는 순간, 병사가 벌떡 일어나 그의 목을 노려 휘둘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가까스로 피했고, 이 병사는 곧 근위대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적이 쏜 화살이 알렉산드로스의 갑옷을 뚫고 어깨를 관통했다고 한다.[2] 부상이 심각하여 쉽게 치료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오히려 도시가 함락된다는 다른 예언도 적중할 거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즈음 알렉산드로스가 가져오라고 한 공성 장비들이 배편으로 도착했다. 그는 너비 400m, 높이 17m의 토루를 쌓아 도시를 에워싸도록 한 뒤, 조립한 공성 장비들을 토루에 올려 공격하도록 했다. 이 공격으로 성벽에 상당한 손상을 입힐 수 있었고, 성벽의 여러 지점에 참호를 파고 적들 몰래 흙을 파내자 토대가 약화된 성벽의 여러 곳이 주저앉았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이 틈을 타 투척 무기를 집중적으로 포부으며 성벽에 돌격해, 수비대를 몰아냈다. 가자에 주둔한 수비대는 공격 부대의 3차례 공격에 맞서 끝까지 항전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중보병대를 전면에 내세워 4번째 공격을 가하자 끝내 밀려났다.

이리하여 도시가 함락되었지만, 가자 수비대는 마지막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우스 헥토르의 시체를 트로이 성벽 주위에 끌고 다녔던 것처럼 살아있는 바티스를 전차 뒤에 매달고 성벽 주위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교차검증되는 다른 기록은 없어서 신빙성이 없다. 가자 공방전은 2달간 이어졌으며, 수비대 1만 명이 전사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이웃 부족들을 가자에 정착시킨 뒤 이집트로 떠나 7일 만에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이집트의 페르시아인 총독 마자케스는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저항 없이 성문을 열어줬다. 알렉산드로스는 펠루시움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함대에게는 나일 강을 따라 상류의 멤피스까지 올라가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사막을 건너 헬리오폴리스로 향했다. 이후 이집트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멤피스에 입성했고, 이집트 신전 사제들로부터 파라오로 선포되었다. 그는 1년간 이집트에 머물며 행정체계를 개편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는 등 여러 사업을 주관했으며, 리비아의 암몬 신전을 방문하여 신탁을 받았다. 그 후 군대를 정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가우가멜라 전투를 벌였다.


[1] 일설에 따르면,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인 파르메니온은 "제가 왕이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나도 자네였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파르메니온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니 다리우스에게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야."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2] 반면 아리아노스의 기록에는 적이 쏜 투석기 화살에 어깨를 관통당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아라비아 병사의 암살 시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