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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7 10:25:08

키로폴리스 공방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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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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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소그디아나인의 중심지인 키로폴리스를 공략한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3세 페르세폴리스를 공략하고 지난날 아테네를 파괴한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복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직적인 방화를 자행했다. 그 후 메디아 지역의 엑바타나에서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던 다리우스 3세를 향해 진격했다. 다리우스는 곧바로 도주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끈질긴 추격에 시달리다가 부하 베소스에게 배신당해 사륜마차에 갇혔다. 얼마 후 마케도니아군이 접근해오자, 베소스는 이에 맞서다 패배하자 다리우스를 창으로 찌르고 도주했다. 다리우스는 죽기 직전에 마케도니아 병사에게 물을 얻어먹고 감사를 표한 뒤 사망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자칭하며 샤한샤에 등극한 베소스를 잡고자 히르카니아, 마드리아, 아리아 일대를 거쳐 박트리아로 진군했다. 베소스는 스키타이인의 지원을 받고 청야전술을 구사하며 항전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추격해오자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를 평정한 뒤 옥수스 강을 건너려 했지만 베소스가 땟목을 만들 나무를 모조리 태워버려서 배를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가죽에 짚을 채운 배를 제작하여 강을 건너 베소스를 계속 추격했다. 결국 베소스의 부하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소스를 잡아서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겼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유를 추궁하자, 베소스는 "나는 공모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며, 당신에게 호의를 얻고 싶어서 그랬다."라고 변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분노해 베수스를 가차없이 채찍질하고 박트리아에 보냈다.

얼마 후, 타나이스 강 유역에서 식량을 구하러 갔던 병사들이 그 지역 유목 부족에게 습격당해 처참하게 죽은 사건이 벌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여 가장 기동성이 뛰어난 병사들을 이끌고 사방이 절벽으로 이뤄진 가파른 산속의 진지로 숨어든 그들을 공격했다. 적이 투척 무기를 퍼부으면서 많은 병사가 다쳤고, 알렉산드로스도 다리에 화살을 맞아 종아리뼈가 부러졌지만, 그는 끝까지 밀어붙여 진지를 점령해 수많은 이를 죽였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부족민 3만 명 중 살아서 도망친 이는 8,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타나이스 강 유역에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현재 후잔트)를 건설하여 스키타이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거점으로 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행보에 위협을 느낀 타나이스 강 유역의 부족들은 자기 도시에 주둔한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살해하며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베수스를 붙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줬던 스피타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라고 선동하자, 소그디아나인 대부분과 일부 박트리아인까지 마케도니아군에 저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반란을 진압하기로 하고, 주민들이 피신한 7개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많은 주민이 모여 있는 키로폴리스로 크라테로스를 파견해 도시 가까이 진을 친 후 참호를 파고 방책을 세운 뒤 공성 무기를 조립하라고 지시했다. 키로폴리스 수비대의 관심을 크라테로스의 부대에 집중시켜서 그들이 다른 도시로 지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자신은 숙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가자를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에 있던 모든 남자를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뒤이어 4개 도시를 잇따라 함락시키고 가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눈길은 소그디아나인이 거주하는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키로폴리스로 향했다. 이 도시는 키루스 2세가 세운 도시로, 성벽이 다른 곳보다 높게 둘러쳐져 있었고 주민 수도 다른 도시보다 훨씬 많았으며, 일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도시를 지켰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이 도시를 지키는 병사는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공성 무기를 총동원해 성벽을 부순 뒤 그 틈으로 밀고가려 했다. 그러다가 도시 주변에 흐르는 하천이 말라 있어 성벽의 토대 사이로 병사들이 기어들어갈 만한 틈이 나 있는 걸 확인하고 작전을 변경했다. 그는 공성 무기로 성벽을 계속 공격하게 해 적이 그쪽에 신경쓰게 한 뒤, 소수의 병사를 데리고 메마른 하천 바닥을 통해 성벽 밑으로 몸소 기어들어갔다. 그리하여 도시 안으로 잠입에 성공하자, 가장 가까운 문을 부수어 바깥의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수비대는 적이 진입하는 상황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고 격렬하게 항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머리와 목에 돌을 맞았고, 크라테로스는 화살을 맞았으며, 그 외에 많은 지휘관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결국 중앙의 성채로 달아났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8,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군은 성채를 둘러싸서 식량과 물을 완전히 차단했고, 결국 식수가 바닥나 저항할 여지를 상실한 수비대는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7번째 도시를 공략했다. 아리아노스가 인용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기록에 따르면, 7번째 도시는 키로폴리스의 함락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항복했다고 한다. 반면 아리스토불루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도시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로들을 여러 부대에 배당하여 포박해두고, 그 지역에 머무는 동안 그들을 계속 감시하게 했다. 그러던 중 스키타이의 일족인 샤카족들이 야크사르 강변에 집결하여 적의를 드러내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제압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야크사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