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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20:20:24

무지당

Know Nothing에서 넘어옴
파일:1024px-citizen_know_nothing.jpg
엉클 샘의 제일 어린 아들
시민
무지당

1. 개요2. 배경3. 흥망성쇠4. 기타5. 같이 보면 좋은 자료6. 참고 자료

1. 개요

무지당(Know Nothing)은 1850년대 미국에서 활동하던 제노포비아, 토착민주의적 집단이다. 이후 정치 정당(미국당)으로 발전한다.

2. 배경

파일:cwbwma.jpg
19세기 미국의 반이민주의 만평
위스키통을 뒤집어쓴 아일랜드인과 맥주통을 뒤집어쓴 독일인이 투표함을 훔쳐 달아나고 있다.

19세기 초중반 미국에 오는 이민자들은 아일랜드인 독일인들이 대다수였다.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대표되는 아일랜드의 참담한 현실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들이었고, 독일인들은 1848년 혁명, 산업화로 인한 노동착취, 사회주의 운동 등 정치 및 경제적 불안정을 견디지 못해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이었다. 이렇게 약 3천만에 달하는 이민자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였다.

아일랜드인과 독일인보다 먼저 살고있던 미국인들은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일거리를 놓고 경쟁해야 할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종교였다. 당시 미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이들은 개신교 신자였는데,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밀려드는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미국인들 중에는 이민으로 가톨릭 신자들의 세가 커지면 이들의 투표로 교황의 하수인이 미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걱정이 사실이건 아니건 미국인 사이에서 이민배척주의자(nativist)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민배척주의자들은 1844년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3. 흥망성쇠

1849년 뉴욕에서 성조기 기사단(Order of the Star-Spangled Banner, OSSB)이라는 비밀결사가 결성된다.[1] 반가톨릭주의 성향을 가진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남성만이 입단할 수 있었던 이 조직에는 여러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규칙은 만약 외부인이 성조기 기사단에 대해 물어보면 "난 아무것도 몰라(I know nothing)"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이 규칙에서 이들의 제일 잘 알려진 별명인 '무지당(Know Nothing)'이 생겨났다.

이들의 지지 세력은 여러 주에서 미국원주민당(Native American Party) 또는 그와 비슷한 이름으로 활동했고, 1855년부터는 미국당(American Party)을 공식 명칭으로 삼았지만 'Know Nothings'로만 불리는 일이 많았다. 종교적으로는 개신교 신자, 계층적으로는 하위 중산층과 숙련 근로자들을 주된 지지기반으로 삼았으며, 외국인 거지와 범죄자의 추방,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해 체류해야 하는 기간을 21년으로 연장, 학교에서 성경 읽기 의무화, 가톨릭 신자와 외국 출생자들의 선거권 및 공직에서 일할 권한 박탈 등을 주장했다. 가톨릭 신자와 이민자들이 북부 민주당의 주요 지지 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은 휘그당과 지지층을 상당 부분 공유했다.

이들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무지당원들은 시카고 시장, 메릴랜드 주지사, 로드아일랜드 주지사와 같은 요직에 올랐다. 1854년 선거는 남북갈등의 영향으로 북부 민주당과 북부 휘그당이 큰 타격을 입은 선거였고, 그 빈자리를 무지당과 신생 공화당, 반네브래스카당, 인민당, 자유토지당 등 많은 세력이 채웠다. 1854년 하원의원 선거 직후에는 51명의 하원의원이 무지당 소속이었다. 이는 민주당과 휘그당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가톨릭 꺼져 이민자 꺼져"만을 외치는 정당이 오래 갈리 없었고, 거기다 당시 미국인들은 가톨릭 이민자들보다 더 큰 문제, 즉 노예제로 분열되어 있었다. 1854년 이후 이민자의 수는 일시적으로 급감했지만, 캔자스에서는 노예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에 '피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준내전급 유혈충돌이 일어나면서 북부 유권자들은 반이민보다 반노예제가 훨씬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했다. 무지당에서 노예제에 대한 당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은 선명한 반노예제를 내세운 공화당에 비해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1856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전직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를 내보냈지만 21% 득표율로 공화당의 존 C. 프리몬트에게도 밀리는 3위에 머물고 30석 이상의 의석을 잃어 고작 하원의원 14명 당선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휘그당의 몰락 이후 민주당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이 공화당으로 집결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 무지당 세력의 대부분은 공화당으로 흡수되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 무지당 세력 또한 쇠락하여 1860년 선거에서는 대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전국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

4. 기타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등장인물인 윌리엄 커팅, 일명 도살자 빌은 무지당의 일원이자 갱단 두목, 권투선수, 도살자였던 윌리엄 풀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윌리엄 풀은 1855년 아일랜드계 권투선수 존 모리세이와 다투다가 루이스 베이커라는 남자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5. 같이 보면 좋은 자료

6. 참고 자료


[1] 사실 이 녀석들 전에도 연합 미국인 기사단(Order of United Americans)이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