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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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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조흥은행
朝興銀行 | Chohung Bank
파일:조흥은행 CI(1999-2006).svg 파일:조흥은행 CI(1999-2006) 화이트.svg
<colbgcolor=#025A64> 법인명 주식회사 조흥은행
株式會社 朝興銀行
Chohung Bank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설립일 1897년 2월 19일(한성은행, [age(1897-02-19)]주년)
상호 변경일 1943년 10월 1일(조흥은행)
2006년 4월 1일( 신한은행)[1]
후신 신한은행
업종명 국내은행
상장 여부 상장폐지
상장 시장 유가증권시장
( 1956년 3월 3일 ~ 2004년 7월 2일)
종목 코드 000010
본점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 14[2]
은행 코드 021
SWIFT 코드 CHOHKRSE
웹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웹 아카이브)

1. 개요2. 역대 로고3. 역사4. 역대 은행장5. 역대 슬로건6. 기업 정신
6.1. 기업 이념6.2. 경영 이념6.3. 행훈6.4. 경영 방침6.5. 조흥인의 행동 규범
7. 상징가
7.1. 조흥은행 행가7.2. 조흥찬가(나의 사랑 조흥!)
8. 여담9. 자회사10. 관계사11. 공익 재단12. 스포츠단13.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cndreams.com/news_img1_1331577523.jpg
옛 조흥은행 본점.[3]

신한금융그룹 계열 시중은행이자 한국 최초의 시중은행으로, 대한민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함께한 코스피시장 제1호 상장기업(종목코드 000010).[4] 舊 신한은행과 합병하여 현재는 존속법인으로 남아 있으나, 명칭이 사라졌다. 공동망 번호는 살아 있어서, 구 조흥은행 지점에서 수표를 뽑으면 021번을 아직도 볼 수 있고 현재 발행 중인 신한은행 직불카드 BIN에도 21번이 찍혀 나온다.

PC통신 명령어는 GO CHB였으며, 노조는 한국노총 금융노조 소속으로 신한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가 2008년에 구 신한은행 노조와 통합했다.

2. 역대 로고

파일:조흥은행 CI(1985-1999).svg 파일:조흥은행 CI(1999-2006).svg
<rowcolor=#ffffff> 1985~1997 1999~2006

3. 역사

1878년 제일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조선에 진출해 일본의 경제 침탈이 우려되면서 한국인들은 "근대적 금융기관을 설립해 자국 상공업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리하여 1894년 조선은행, 제국은행, 한흥은행 등이 설립했으나 한 해도 못 가 단명했고, 1897년 한성은행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순수 민족 자본 은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03년 민영에서 공립으로 개편됐으나 1910년 한일합병 뒤 주인은 일본인들에게 넘어갔고 1938년 해동은행 매수 후 1941년 경성합동은행, 1942년 동일은행[5]을 각각 합친 뒤 1943년에 조흥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했다.[6]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간 은행으로서 조상제한서 중에서 필두로 불리며 은행 업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광복 후에는 발권 은행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는데, 만약 실현되었다면 HSBC 스탠다드차타드가 발행하는 홍콩 달러처럼 조흥은행권 대한민국 원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7]

해방 이래 본행은 구 동일은행계 민씨 가문과 구 대구은행계 정씨 가문이 지배하며 주도권 다툼을 해왔다. 1957년 3월 입찰에서 민씨 집안이 관계사 조선맥주, 계성, 휘문학원,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전무 지분을 합해 7만 8천 주(40%)를 확보해 승리했으나, 조선맥주의 경영 위기로 조선제분 사장 윤석준에게 지분 5만 2천 주를 8천 환에 매각했다가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지분 55%를 인수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민간 지분이 정부로 환수되었다.

1963년 기존 본점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고,[8] 그 자리에 1966년에 건물을 신축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 및 1983년 영동개발진흥 사건 2연타로 타격을 맞아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82년 은행신용카드연합회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 1983년 3월 정부 소유 주식을 매각해 민영화된 이후 1984년 구 영동개발진흥 계열사였던 태평양투자금융을 인수하면서 사업확장을 시도해 같은 해 조원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하였다.

1985년 로고를 빨간 원이 세 개 쌓인 모양으로 변경했다. 1989년 조흥리스, 1990년 조흥시스템 등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고 1992년에 영진투자자문을 인수했다. 1994년 조흥경제연구소, 1995년 조흥파이낸스를 각각 설립 후 그해 7월부터 철도 승차권 자동 발매를 개시하였다. 동년 11월에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 은행 최고 법인 기업' 기록 인정서를 받았다. 1996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본점 옆에 '조흥 백주년 기념관'이란 빌딩을 준공하고 1997년 조흥백년재단을 세우고 광화문에 조흥금융박물관(現 신한은행 한국금융사박물관)을 개설했다.

위와 같은 무수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997년 한보사태로 우찬목 은행장이 구속되어 마가 끼기 시작했고, 결국 외환 위기 때 자산 건전도가 심하게 떨어져 퇴출 은행으로 찍혀 버렸다.[9] 이후 1998년에 조흥시스템을 청산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해 잘 수습해서 퇴출까지는 안 갔고,[10] 1999년 4월 충북은행, 9월에 강원은행 + 현대종금과 합병하면서 공적 자금 총 2조 7,000억 원이 투입되어 그레이트 1단계 퓨전을 단행하며 같은 해 5월 로고를 두 개의 바 사이에 들어있는 영문 로고로 변경했고, 6~7월 들어 조흥파이낸스와 조흥증권을 코미트창업투자와 대만 KGI그룹에 각각 파는 한편, 7월 은행권 최초로 인터넷뱅킹을 실시했다. 2000년 강은상호신용금고를 춘천상호신용금고에 팔고 베트남 퍼스트비나뱅크를 인수하며 공적 자금 수혜 대상 은행 중 유일하게 500억 원 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살아났다. 2001년 은행권 최초로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배드뱅크'를 설립했다.

객관적인 지표로도 독자 생존이 가능했고 정부의 매각 방침 또한 점진적인 분할 매각이었기 때문에 조흥은행은 당연히 독자 생존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2002년 여름까지만 해도 외자 유치 및 일부 계열사 해외매각 등의 계획을 세우면서 경영 안정화를 꾀하고 더 나아가 계열사를 모아 금융지주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2002년 10월 정부가 갑자기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신한 말고도 몇몇 컨소시엄이 있긴 했으나 정부는 합병을 통한 대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고[11] 결국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노골적으로 밀고 나간다.[12] 그 전에는 해외 매각이 여의치 않았던 서울은행을 아예 하나은행에 넘겨 대형화를 꾀한 일이 있긴 했다.

파일:클릭cnb.jpg
당연히 조흥은행은 노사 할 것 없이 난리났었다.[13] 노조의 파업은 일단 사측에서 표면적으로는 만류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조흥은행에 대한 애사심은 노사 모두 한마음이었기에 인수 즉시 신한은행과 대등 합병하고 명칭을 조흥은행으로 할 것을 요구한 건 노사가 한목소리였을 정도. 이에 신한금융지주 측은 노조와의 협의를 거쳐 통합은행 명칭은 조흥으로 하되 통추위에서 결정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합의문을 발표하지만 2005년 말 통추위는 밑줄친 부분만 갖고서 통합 은행 명칭을 신한은행으로 정해 버리며 2006년 4월 1일 합병이 확정됐다. 창립한 지 109년 만에 소멸된 셈이었다.

그러나 역사만은 이어졌다. 존속 법인을 조흥은행으로 정하는 역합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법인으로 따지면 구 신한은행이 사라지고,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한 것이 되었다. 비록 신한금융지주가 조흥은행을 인수하긴 했어도, 역사성만큼은 1982년에 설립된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에 설립연도 자체가 증손자뻘인 만큼 존속 법인은 조흥은행으로 정한 것이다. 때문에 현재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가 속속들이 다 나와 있다. 여지껏 은행 인수합병 사례 중에서는 피 인수 은행 역사가 비중 있게 다뤄진 유일한 케이스. 뿐만 아니라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재 신한은행 광교영업부에 가보면 신한은행 Since 1897이라는 문구도 달아 놓았는데 이는 결국 現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의 모든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14]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얘기가 다른데, 현재 신한은행은 창립 기념일을 애매모호하게 통합 출범일인 4월 1일로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첫 은행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우리은행에 별다른 대응을 안하고 있다. 2020년대 들어와서는 아예 'Since 1982', '신한은행 40주년'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등 구 신한을 노골적으로 계승하고 조흥은행을 흑역사로 묻고 있다.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도 한편으로는 조흥은행의 역사를 어떻게든 외면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셈이다.

4. 역대 은행장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b4e37> 파일:조흥은행 CI(1999-2006) 화이트.svg 조흥은행
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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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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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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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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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장철훈
제23대
위성복
직무 대행
이강륭
제24대
홍석주
제25대
최동수
신한은행 은행장 }}}}}}}}}

※ 1921 ~ 1928 / 1937 ~ 1951년까지는 '두취[15]', 1928 ~ 1937년까지는 '대표취체역[16]'이란 호칭으로 불렸음.

5. 역대 슬로건

6. 기업 정신

1993년 창립 96주년을 맞이해 확립했다.

6.1. 기업 이념

6.2. 경영 이념

6.3. 행훈

6.4. 경영 방침

2004년에 제정했다.

6.5. 조흥인의 행동 규범

7. 상징가

7.1. 조흥은행 행가

1948년 7월 24일에 제정했으며 작사는 육당 최남선, 작곡은 박태준이었다.
(1절)나라의 복판에 일어선 우리
믿음을 다듬고 정성을 쌓아 온겨레 살림을 버틸 양으로
언제고 씩씩한 이나라 조흥

(2절)나라의 핏줄을 지켜줄 우리
불리는 목숨과 늘리는 힘을 일마다 골고루 사무쳐주어
언제고 빛나는 이나라 조흥

7.2. 조흥찬가(나의 사랑 조흥!)

작사/작곡은 김민식이 맡았으며, 1993년 2월 19일에 제정되었다.
(1절)황금빛 내일을 창조하기 위하여 / 파도와 산맥을 뛰어넘는 우리들
뜨거운 가슴과 새로운 다짐으로 / 희망찬 출발의 북 우렁차게 울리자

(후렴)다함께 앞서가며 기쁨을 온누리에 / 아 그이름 조흥 나의 조흥이여
다함께 앞서가며 행복을 온누리에 / 아 그이름 조흥 나의 조흥이여

(2절)빛나는 전통은 뿌리내려 온 문화 / 창조와 도전은 열매되어간 일터
긍지와 믿음되어 너와 나 하나되어 / 찬란한 번영의 힘 꿈을 안고 달리자

8. 여담

파일:조흥은행 지점 모습.jpg
* 대한민국 은행 중 최초로 이니셜을 전면에 내세운 은행이다. 1999년 5월 3일 충청북도의 지방 은행이었던 충북은행과의 통합이 끝나고 공식 발족하면서 CHB 마크를 CI로 내세웠는데, 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매우 단순한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이후 여러 은행들이 이니셜 마케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신한은행은 은행 이름 앞에 이니셜을 붙이지 않고 있다.
파일:external/www.bioart.co.kr/choheung2.jpg
* 자동화 코너를 대한민국 은행 중 최초로 설치한 은행이다. 1990년 7월 20일 명동지점에 처음 설치한 이래 점차 확대해 갔고, 특히 지점에 딸린 게 아닌 단독 무인 점포(365 캐시로비)에 상당한 공을 들여서 2000년경 기준으로 전국 지점 수가 500여 개였는데 단독 무인 점포 수가 1,000여 개일 정도로 유독 무인 점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jcstar21_91066_1%5B1%5D.jpg
* 조흥은행 시절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된 은행으로 기네스 인증까지 받았었다. 또한 2003년 이전까지 외국계 지분이 없는 순수 토종은행이었다.

9. 자회사

아래 회사들은 2003년 신한금융그룹 매각 전 지닌 회사들이다.

10. 관계사

11. 공익 재단

12. 스포츠단

13. 관련 문헌



[1] 신한은행과의 합병 과정에서 조흥은행 법인이 존속하는 방식으로 합병되었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신한은행 법인은 조흥은행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2] 현 서울특별시 중구 청계천로 54 (삼각동 66-1) [3] 서울특별시 중구 청계천로 54 (삼각동)으로 청계천 광교 옆이며, 현재는 신한은행 광교영업부로 이용 중이다. 신축 당시 최신식 건물로 1층과 2층에는 당시로서는 최신 문물인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은행 거래는 무조건 창구에서만 하던 시절이기도 하니 새로 지은 본점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은행에 오는 이유라는 것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보려고 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지만 2층이 신한은행의 기업금융 전담 지점으로 바뀌어서 타기 어렵게 되었다. 길 건너편에는 iM뱅크 서울영업부가 있다. [4] 현재는 부채표 까스활명수 등으로 유명한 동화약품(000020)이 코스피 종목 코드 중 가장 앞서 있다. 해당 회사는 당연히 코스피 2호 상장기업이다. [5] 1931년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본가였던 조선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을 합쳐 만들어진 민족계 은행. [6] 참고로 조흥이라는 이름은 선을 하게 한다는 뜻이다. [7] 그러나 홍콩 달러는 현지 금융 관리국의 통제 하에 HSBC, 스탠다드차타드(SC), 중국은행 등이 각각 할당량에 맞춰서 발매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은행 혹은 관련 부처의 통제에 따라 조흥은행이 화폐 발행을 대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8] 본점 건물 화재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곳이 바로 조흥은행 야구단이었다. 화재 복구 과정에서 비용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이유로 졸지에 해체됐기 때문. 이 즈음 여자 농구단도 해체됐지만 본점 재건축이 끝난 1967년부터 다시 농구단을 운영하다가 1984년에 해체하면서 선수단이 한국빠이롯드로 넘어갔다. [9] 공교롭게도 1997년은 조흥은행이 창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10] 사실 수습을 잘 했다기보다는, 퇴출시키기에 규모가 커서 그랬던 것이다. 조흥은행 외에도 상업/ 한일/ 제일/ 서울은행 등의 부실 은행은 널렸지만, 이 은행들을 퇴출시켜 버리면 금융 시장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유발할 게 뻔했기 때문. 그래서 비교적 규모가 작거나 지방은행이었던 경기/ 대동/ 동남/ 충청/ 동화은행 5개가 퇴출된 것이다. [11] 정부의 논리는 한마디로 전세계에 내세울 만한 대형 금융기관 육성이었는데, 문제는 은행들의 자발적인 합병을 권장하는 차원을 넘어 대놓고 정부가 합병을 강요했던 거고 이 때문에 당시 금융권 노사 갈등이 매우 극심했다. 그나마 인수한 은행에서 피인수 은행 노조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는 양보를 하면서 잠잠했던 건데, 만약 이 때 노사 합의가 제대로 안되었거나 이행된 게 시원치 않았더라면 은행권 총파업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12] 실사 과정에서 신한 측이 매각 대금이 너무 높다는 이의를 제기하자 정부가 상당히 당황했었다. 그러다가 내놓은 결론이 신한금융지주의 주식도 매각 대금으로 받겠다는 것. 신한금융지주에 조흥은행이 매각되면서 일부 대금은 신한금융지주 주식으로 지급되었는데 이 주식의 가치가 계속 오르면서 2011년 예금보험공사가 신한금융지주의 주식을 모두 매각한 결과 총 회수금액이 무려 4조 7,000억 원. 공적자금 2조 7,000억 원보다 무려 2조 원을 더 회수했고, 회수율도 174%에 달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임기 말이었던 김대중과 측근 호남 낙하산 인사들이 신한은행 주주인 일본계 자금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의혹도 일부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나, 당시 매각에 반대하던 노조의 일방적 주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사실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13] 감정 싸움의 문제도 있었다. 애초 신한은행이 개설될 무렵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가면서 생긴 앙금과 역사도 짧은 상대에 합병당하는 것이 굴욕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간 덕분에 시스템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인포믹스라든지) 해서 전산 인프라의 통합이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 [14] 역합병에 따라 신한은행장이 구 조흥은행장 자리인 은행연합회 세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은행연합회의 순서는 산은-농협- 조상제한서-국책은행 코드순-후발시중은행 코드순-지방은행 코드순으로, 법인 계승과는 상관 없이 은행 합병 시 통합은행은 통합 주체 중 더 상석인 은행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울은행을 계승한 기존 법인을 걷어차고 KEB외환은행을 존속법인으로 정하여 통합된 하나은행이 서울은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15] 頭取(とうどり). 일본에서 은행장을 부를 때 쓰인다. [16] 代表取締役(だいひょうとりしめやく). 대표이사 일본식 한자어 표현. [17] 황족으로 고종황제의 사촌이다. [18] 1998년 8월 취임했지만 조흥은행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11월 말에 갑자기 사퇴해버렸다가 1999년 4월 재취임했다. 훗날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흥은행을 충북은행 강원은행과 합병하기 위해서. 애초에 위성복 행장이 전남 장흥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임 당시부터 매우 주목받는 실세 은행장이었는데, 이에 충북은행/강원은행쪽에서 "정부가 호남 출신 은행장 키우려고 지방은행을 죽이려 한다"는 반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충북/강원은행과의 합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심지어 흑자 전환까지 성공시킨걸 감안할 때 고향의 지역감정으로 곤욕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조흥은행장에 적임이었던 셈. [19] 2002년 3월 만 49세의 나이로 조흥은행장에 올랐는데, 1년 전인 2001년 3월 하영구 당시 씨티은행 서울지점장이 한미은행장으로 영입되면서 최초의 40대 행장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과 더불어 은행권 변혁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나마 한미은행은 칼라일 등의 외국 금융기관이 대주주였기 때문에 파격적인 인사가 가능했다지만, 조흥은행은 조상제한서 맏형격인데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대주주였기 때문에 더더욱 보수적인 이미지였던지라 홍석주 행장의 발탁이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던 것. 심지어 홍석주 행장은 일선 지점장 경력조차 전혀 없이 외자유치 등의 경영기획 부서에서만 근무해온 기획통이었고 이미 1년 전인 2001년 2월에는 2급 부장이 상무로 승진하여 전 은행권을 술렁거리게 했다. 기획부장(2급) → 상무이사 → 은행장 테크트리를 1년만에 달성한 것. 이런 고속 승진 탓에 일선 지점장들의 대다수가 은행장의 선배라는 기수 파괴 현상까지 벌어졌지만, 기획통 짬밥을 그냥 먹어온게 아니라는걸 반증하듯 앞으로의 경영 전략도 상당히 짜임새 있게 내놓으며 조흥은행의 독자생존을 진두지휘하면서 조흥은행 내부적으로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인 2003년 6월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면서 사퇴한 비운의 은행장으로 남게 되었다. 홍석주 행장의 기획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여럿 있는데 1번째는 1998년 재미교포 사업가 김종훈의 투자와 관련된 협의가 진행되던 당시 총 2조원 정도의 자금이 경영 정상화를 충족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과 2번째는 조흥은행의 매각대금 3조원 가량을 100% 현금으로 낼 곳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1번째 사례는 이후 조흥은행이 공적자금 2조 7천억원을 받아 불과 2년만인 2000년 상반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2번째 사례는 신한금융그룹이 자사 주식 일부를 매각대금으로 내놓으면서 홍석주 행장이 그야말로 작두를 타버린 격. 만약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지 않고 분할매각을 통해 독자생존했더라면 이후 금융업계가 어떻게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홍석주 행장이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속 승진을 한건 위성복 전 행장의 영향력이 컸다. 위성복 전 행장과 홍석주 행장의 출신지가 각각 전남 장흥과 광주광역시로 같은 호남 출신이었던데다 앞서 언급한대로 홍석주 행장의 기획부장 경력도 위성복 전 행장의 재임 시절이었고, 2002년 초에는 위성복 당시 행장의 연임을 위해 홍석주 상무가 정부의 반대를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킹 메이커를 자처했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로비가 씨알도 안 먹힌 탓에 위성복 행장의 연임은 물 건너갔고, 이에 새 은행장을 선임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는데 뜬금없이 홍석주 상무가 후보군에 포함된 뒤 면접에서 본인이 "2~3년 뒤에 도전해보겠다."는 말로 고사했지만 다음날 바로 홍석주 행장 선임이 결정된 것. 다분히 위성복 전 행장의 영향력에 대한 하마평이 있었고, 이후 매각 파동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위성복 전 행장의 수렴청정이 금융권에서 간간이 화두가 되었다. [20] 그런데 이 표어가 오티스 엘리베이터랑 많이 비슷하다. 참고로 오티스 엘리베이터의 경우 함께한 150년, 함께할 150년. [21] 참고로 MBC IBK기업은행, SBS KEB외환은행 하나은행이 주거래 은행이다. [22] 현재는 일부 지점을 제외한 신한은행 ATM이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대신 신한은행 제휴 롯데ATM으로 바뀌었다. [23] IC부는 국내 CD(현금지급)망을 위한 것이라서 직불망은 MS부만 가능. [24] 舊 호남비료 여자 농구단 인수. [25] 당년을 끝으로 한국빠이롯드로 구단이 넘어갔으며 다시 대웅제약이 인수해 운영하다가 외환 위기 때 해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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