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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35:21

10.19(야구)

1. 개요2. 경기 전의 상황3. 경기 내용
3.1. 1차전3.2. 2차전
4. 결과5. 여담

1. 개요

퍼시픽 리그 역사상 가장 길었던 1일 - 당시 경기를 다룬 테레비 아사히의 다큐멘터리 제목

1988년 10월 19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킨테츠 버팔로즈 롯데 오리온즈 더블헤더를 통칭하는 말. 경기 후에도 당사자들의 증언이 회자되고 저서로도 나오는 등 일본 프로야구 역사 상 최고의 명승부를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는 경기다.

2. 경기 전의 상황

<rowcolor=white>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8년 퍼시픽리그 1~2위(10월 18일까지)
<rowcolor=#fff> 순위 구단 경기 승률 승차
1위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심볼.svg 세이부 라이온즈 <rowcolor=#000> 130 73 51 6 .589 -
2위 파일:킨테츠 버팔로즈 화이트 심볼.svg 킨테츠 버팔로즈 <rowcolor=#000> 128 73 52 3 .584 0.5

1988년의 퍼시픽리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이부 라이온즈의 독주였다. 그러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까지 세이부와 8게임 차 2위였던 킨테츠가 반전을 일으킨다. 대마초 소지 혐의로 구속된 용병 리처드 데이비스를 퇴출시키고,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영입한 랄프 브라이언트[1]불과 74경기만에 34개의 홈런을 치는 말도 안되는 활약을 보이면서 팀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고, 확고부동한 에이스로 자리잡은 1987년 신인왕 좌완 아와노 히데유키[2]를 중심으로 한 선발진, 구원으로 전업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요시이 마사토까지 분발하며 맹렬한 기세로 세이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이부가 전 게임을 소화하고 킨테츠가 4게임을 남긴 10월 16일에는 승차가 불과 반 게임 차로 줄어들었다. 킨테츠는 4게임에서 3승을 기록하면 자력우승이 가능했으나,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10월 17일 경기에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128구 완투에도 불구하고 1-2로 패하며 롯데와의 3연전을 모두 이겨야 하는 벼랑 끝에 몰렸다. 일단 롯데와의 10월 18일 첫 경기에서 12-2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했고, 전설로 남을 10월 19일 마지막 더블헤더만이 남아 있었다.

당시 경우의 수는 간단했다. 킨테츠가 2전 전승하면 킨테츠가 8년 만의 리그 우승, 그 이외엔 세이부의 리그 4연패.

상대 팀 롯데 또한 킨테츠전 8연패[3]를 끊을 기회였기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상황. 그렇게 관중들 및 시청자들의 뜨거운 열기와 장엄한 분위기 속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3. 경기 내용

3.1. 1차전

1988.10.19(水) 15:00 | 카와사키 구장
<rowcolor=#ffffff>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킨테츠 오노 카즈요시 0 0 0 0 1 0 0 2 1 4 6 0
롯데 오가와 히로시 2 0 0 0 0 0 1 0 0 3 8 0
: 요시이 마사토 (10승 2패 24세이브)
: 우시지마 카즈히코 (1승 6패 25세이브)
세이브 : 아와노 히데유키 (14승 12패 1세이브)

롯데 선발은 잠수함 오가와 히로시[4], 킨테츠 선발은 좌완 오노 카즈요시.

롯데는 1회 공격에서 아이코 타케시[5]의 투런홈런으로 2점을 선취한다. 킨테츠는 5회 2사 후 스즈키 타카히사[6] 솔로홈런으로 1점을 만회했으나, 롯데는 7회 2사 1,3루에서 사토 켄이치의 2루타로 1점을 더 보태 1-3으로 승리를 굳히는 듯 했다.

그러나 킨테츠는 8회 1사 후 스즈키의 우전안타와 대타 가토 마사키의 볼넷으로 주자 1,2루를 만들었고, 여기서 두번째 대타 무라카미 타카유키가 좌측 펜스를 직격하는 2타점 적시타를 치며 3-3 동점을 만든다.[7] 그러나 계속된 2사 만루에서 브라이언트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역전에는 실패.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9회로 끝낸다는 룰이 있기 때문에 킨테츠는 9회초 공격에서 반드시 점수를 내야만 우승의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9회 초, 1아웃 후 베테랑 아와구치 켄지[8]가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치며 호투하던 오가와를 강판시켰다.[9] 롯데는 오가와를 대신해 마무리 우시지마 카즈히코를 등판시켰고, 킨테츠는 아와구치를 대주자 사토 준이치로 교체하며 승부수를 띄운다. 그러나 스즈키의 우전안타 때 2루 대주자 사토가 홈에서 런다운에 걸리며 투아웃.

여기서 킨테츠의 오기 아키라 감독은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은퇴를 선언한 베테랑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10]를 대타로 냈다. 나시다가 1볼 0스트라이크에서 짧은 중전안타를 쳤고, 2루주자 스즈키가 전력질주[11]로 홈에서 세이프되며 4대 3으로 천신만고 끝에 킨테츠가 역전에 성공했다.

킨테츠는 9회말 수비에서도 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마무리 요시이 마사토가 선두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다음 타자에게도 2-0으로 볼카운트가 몰리면서 위기에 빠진다. 이에 오기 감독은 요시이를 강판하고 이틀 전 128구 완투를 했던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를 등판시켰으나 아와노도 주자를 출루시키고 좌타자 아이코마저 데드볼로 출루시키면서 만루의 위기를 맞는다. 1점만 내주면 우승 가능성이 사라지는 상황. 그러나 아와노는 후속타자에게 극적인 헛스윙을 유도해내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우승을 위해 한 발짝을 내딛었다.[12]그리고 롯데는 소리소문없이 킨테츠전 9연패

3.2. 2차전

1988.10.19(水) 18:44 | 카와사키 구장
<rowcolor=#ffffff> 선발 1 2 3 4 5 6 7 8 9 10 R H E
킨테츠 타카야나기 이즈미 0 0 0 0 0 1 2 1 0 0 4 9 0
롯데 소노카와 카즈미 0 1 0 0 0 0 2 1 0 0 4 11 2

2차전은 1차전이 종료된 지 23분 뒤인 18시 44분에 플레이볼했다. 롯데 선발은 소노카와 카즈미, 킨테츠 선발은 타카야나기 이즈미.

킨테츠는 2회 말 빌 매들록[13]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하면서 선취점을 내줬으나, 6회 초 2사 1,2루[14]에서 벤 오글리비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고, 7회 초에는 후키이시 도쿠이치[15] 마키시 야스나가[16]의 솔로홈런으로 2점을 달아나며 3-1로 리드, 우승을 확정짓는 듯 했다. 그러나 7회 말 수비에서 호투하던 다카야나기가 오카베 아키히로에게 솔로홈런을 얻어맞자 요시이 마사토를 조기투입했으나, 1차전의 볼질로 불안한 조짐을 보이던 요시이가 니시무라 노리후미에게 2사 3루 상황에서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블론세이브를 기록, 다시 동점이 된다.

킨테츠는 8회 초 1사 후 주포 브라이언트의 솔로홈런으로 다시 4-3으로 앞서가는데 성공했으며, 이어진 8회 말 1사 후 오기 감독은 승리를 확실하게 매조지기 위해서 1차전에 이어 에이스 아와노를 하루에 2경기를 투입하는 아와노야 우야노, 여까지 왔는데... 초 강수로 나왔다. 그러나 이 초 강수는 아와노가 다카자와 히데아키에게 솔로홈런을 맞으며 4-4 동점이 되는 것으로 실패했으며, 아와노는 직후의 기억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고 마운드 위에서 고개를 떨구었다.[17]

9회초 공격에서 킨테츠는 2사 이후 1번타자 오오이시가 좌월 2루타로 찬스를 잡았고, 뒤이어 2번 아라이 역시 좌선상 총알같은 타구를 날리며 킨테츠가 다시 앞서가나 했다. 그러나 롯데의 3루수 미즈카미 요시오가 이 타구를 다이빙캐치로 잡아낸 뒤 1루로 빨랫줄 송구를 날려 타자 아라이를 아웃시키는 엄청난 호수비를 선보였고[18], 킨테츠는 통한의 아쉬움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9회 말 수비에서는 8회부터 던지고 있던 아와노가 선두타자 후루카와에게 우전안타, 다음 타자 하카마타에게는 포수 나시다와 싸인이 맞지 않으며 실책성 내야안타를 내주며 이번엔 롯데에게 무사 1,2루의 끝내기 찬스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와노가 번트 사인으로 인해 리드가 살짝 넓었던 2루주자 후루카와를 견제구로 잡아내면서 급한 불을 껐는데 이에 2루주자 후루카와와 아리토 미치요 롯데 감독이 2루심에게 주루방해라면서 무려 9분에 걸쳐서 시간끌기 항의를 했다[19]. 다행히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킨테츠는 무실점으로 9회말 수비를 마쳤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퍼시픽리그는 9회말까지 동점인 경우 최대 12회까지 연장전을 실시했지만, 9회 이후 경기시간이 4시간을 경과하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롯데 측의 9분간의 항의 때문에 9회말 종료시점에서 경기시간이 3시간 50분을 넘기는 바람에 10회 초 공격이 사실상 킨테츠의 마지막 공격기회이자 리그 우승 기회가 된 것이다.만약에 이 경기가 킨테츠와 세이부의 맞대결인데 이런 항의가 나왔으면 시간끌기를 이유로 퇴장당했을지도 모른다.[20][21]

그리고 운명의 연장 10회 초, 킨테츠는 선두 브라이언트가 2루수 니시무라의 실책으로 출루했으나 다음 타자 오글리비가 삼진으로 물러났고, 하타 코이치의 타구는 2루수 쪽으로 굴러갔으나 2루수 니시무라가 이번에는 정확하게 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을 성공시키며 득점에 실패했다.[22] 이 시점에서 경기시간은 플레이볼로부터 3시간 57분이 경과,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려면 3분 내에 롯데의 공격을 끝내야했으나 클리닝타임을 빼면 실질적 시간은 단 1분에 불과해, 사실상 세이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킨테츠 선수들도 이걸 모를리 없어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연장 10회 초가 끝난 지금, 4:4 동점인 채로..! 그렇다는 것은 킨테츠, 승리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이부 라이온즈, 4년 연속(우승)으로 6번째 우승 결정입니다![23]
킨테츠, 기적의 역전 우승의 길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더블헤더 중계를 맡았던 아사히 방송 아나운서 아베 노리유키[24], 10회 초 킨테츠가 무득점에 그치자

그러나 킨테츠의 우승 가능성이 사라진 것과는 별개로 롯데의 10회말 공격을 마무리해야 경기가 끝났다.[25] 킨테츠 선수들은 슬픔을 억누르며 10회말 수비에 나섰고, 무실점으로 롯데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며 4-4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그렇게 킨테츠는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지 못하면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4. 결과

<rowcolor=white>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8년 퍼시픽리그 1~2위
<rowcolor=#fff> 순위 구단 경기 승률 승차
우승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심볼.svg 세이부 라이온즈 <rowcolor=#000> 130 73 51 6 .589 -
2위 파일:킨테츠 버팔로즈 화이트 심볼.svg 킨테츠 버팔로즈 <rowcolor=#000> 130 74 52 4 .587 0.0

킨테츠는 불과 승률 2리 차이로 우승을 놓치고 말았고, 간신히 우승을 달성하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한 세이부 라이온즈 센트럴 리그 우승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1패로 꺾으며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5. 여담


[1] 당시 브라이언트는 용병 슬롯 두 자리를 차지하던 게리 레시치(주전 1루수), 곽원치(궈위엔치, 대만인 마무리 투수)에 밀려 2군에 있었다. [2]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코치. [3] 특이하게도 10월에만 7연패를 당했다. [4] 2004년 강도살인 사건을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다. [5]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였던 일본 대표팀 멤버 중 한 명이다. 은퇴 후 안드로스텐다이온 복용을 시인했다. [6]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킨테츠의 중심타선의 일원으로써 통산 192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2000년 은퇴 후 킨테츠의 2군 타격 코치를 맡았으나 2004년 5월 17일 급성 기관지염으로 향년 40세로 사망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역사상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 [7] 당시 무라카미는 주전이 아닌 덕아웃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무드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에 제대로 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8] 본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전 외야수였던 선수로 신인 시절 요미우리의 9연패(1965~1973)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1986년 트레이드로 킨테츠에 이적한 후에도 준주전으로 활약을 이어가다 킨테츠가 3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한 1989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은퇴 후엔 요미우리 등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했다. [9] 당시 타구가 약 10cm 차이로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상단에 맞았다. 당시 경기가 열린 가와사키 구장은 옛 인천 도원야구장처럼 펜스와의 거리가 짧은 대신 담장높이가 높았다 [10] 킨테츠의 최후의 감독이자 최후의 리그 우승 감독. 킨테츠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11] 당시 영상을 보면, 덩치가 있는 스즈키가 홈베이스에서 거의 묘기나 다름없는 다이빙을 선보인다. [12] 당시 아사히 방송 캐스터는 삼진을 잡자, "헛스윙 삼진! 킨테츠 승리! 우승을 향한 아주 큰 일보전진을 해냅니다!"라고 외쳤다. [13] 내셔널리그 타격왕을 4회 차지한 강타자 3루수로, 거물 용병으로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일본에 진출한 시점에 이미 37세였기 때문에 노쇠화로 기대만큼의 호성적은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퇴단한다. [14] 선두타자 9번 마키시가 루킹 삼진을 당했는데, 이 때의 판정을 두고 나카니시 후토시 킨테츠 수석코치가 심판에게 격렬히 항의하다 퇴장당했다. [15] 본래 이 해 킨테츠의 주전 3루수는 재일교포 3세 내야수인 가네무라 요시아키(김의명)이었지만, 가네무라가 6일 전 경기에서 손목 골절을 당해 시즌 아웃되는 바람에 은퇴를 준비중이었던 노장 후키이시가 선발출전하게 되었다. 후키이시는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며 이 홈런은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16] 사회인 야구 출신의 유격수로, 이 시즌이 데뷔 2년차였다. [17] 이 순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증언이 남아있다. 이와노는 포수의 직구 사인을 거부한 자기 탓이라고 자책했으며, 히데아키는 원래 우익수 쪽 방향을 노리고 직구를 기다리던 상황에서 스크류볼이 날아오자 방망이가 더 잘 돌았다고 회고했다. [18]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중계중이던 테레비 아사히의 아베 노리유키 캐스터는 이 수비 직후 "This is 프로야구(フローヤキュウ)!! 라고 소리쳤다. 그야말로 실점을 틀어막아버린 신들린 수비였던 것 [19] 후루카와가 2루로 귀루하는 과정에서 송구가 살짝 높았는데, 후루카와가 이 공이 빠지는줄 알고 스킵을 걸다가 베이스를 벗어나버린 상황에서 2루수 오오이시에게 태그당한 상황이었다. [20] 일정 시간을 넘긴 항의가 자동퇴장인 규칙 자체는 한참 뒤에 생겼지만 분위기상 심판이 직권으로 퇴장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21] 실제로 경기 내에서 양 측 간 신경전이 오고 갔으며 감독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했다. [22] 니시무라는 세이부의 독주보다는 킨테츠가 드라마를 완성하는게 좋겠다 싶어서 정위치가 아닌 2루에 붙어있다시피했는데, 하필 자기가 있는 쪽으로 공이 오는 바람에(...) 병살로 이닝이 끝났다. [23] 정확히는 통산 10번째였으나 앞의 4번은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대의 우승이라 세이부 이후로만 한정 시 6번째 우승이 된다. [24]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초창기 중계 음성을 맡기도 했던 유명 아나운서였다. 2017년 위암으로 향년 71세에 별세. [25] 리그 우승이 결정난 시점에서 이 경기를 보던 세이부 선수단에게 기자들이 몰려가자 감독이 아직 롯데의 공격이 남았다며 제지했다. [26] 오기 감독은 평소에 스스로 단 한번도 야구 시합에서 울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카네무라는 오기 감독이 시합 종료 직후, 덕아웃 뒤쪽의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눈물을 삼키던 것을 보았다고 한다. [27] 일본 최초의 리스 회사로 오릭스의 당시 회사명이었다. 브레이브스를 인수한 다음 해인 1989년에 사명을 오릭스로 변경했다. [28] 다만 한큐는 훗날 한신 전기철도를 자회사로 인수하게 되면서 한신 타이거스까지 덤으로 인수하게 된다. [29] 고베는 훗날 한큐 구단을 매입한 오릭스가 이곳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가 2004년 킨테츠와 합병하면서 다시 오사카로 연고지를 옮겼다. [30] 위에서 얘기한 세이부의 6년간 5번의 리그 우승 중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하지 못한 해가 이 해이다. 그러나 한큐는 그 해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패배했다. [31] 이 때, 방송예정되어 있다가 결방된 드라마는 범죄 수사극 떠돌이 형사 여정편 2화였다. [32] 그 날 원래는 리크루트 사건 보도와 조에츠선 화물열차 탈선사고, 상술한 한큐 브레이브스의 오릭스 매각 소식, 1년 전의 검은 월요일 주식 대폭락 이후 미국 월 스트리트 주식시장을 현지 취재한 특집 보도가 예정되어 있었고, 당시 오늘내일하던 쇼와 덴노의 건강 상태도 매일 보도되었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빅 뉴스인데 이걸 축소 보도해야 할 정도로 더블헤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났다는 소리다. [33] 게다가 원래는 야구 중계를 10분만 하려고 했으나 결국 중계 연장이 결정되면서 진짜로 드라마를 결방시키고 뉴스 스테이션도 야구 중계에 할애했었다. 공수 교대 중에 뉴스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당시 메인 캐스터인 쿠메 히로시는 뉴스 오프닝에서 "오늘 전해야 할 뉴스가 많습니다만 (실은 퍼시픽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이 지금 9회초 2사 주자 1,2루에 있는 상황이라서) 여기서 야구 중계를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고 이후 9회초가 득점 없이 끝나자 "어떤 프로가 될지 오늘 밤은 모릅니다만, 전할 소식도 많고..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34] 심지어 30.9%는 칸사이가 아닌 칸토 기준이었다. 킨테츠의 연고지 오사카와는 정반대에 있는 칸토에서도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인데, 당시 연고지인 롯데 팬들과 킨테츠한테 우승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었던 세이부 팬들도 이 경기를 TV로 봤을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기록이다. [35] 당시의 킨테츠 감독이 바로 더블헤더 1차전 승리를 결정지은 적시타를 날린 나시다 마사타카였다. 나시다는 2004년 킨테츠가 오릭스와의 흡수합병으로 해산할 때까지 감독을 역임하면서 팀의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36]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 오릭스의 감독이 바로 이 10.19와 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오기 아키라였다. 오기는 2001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가 2005년 양팀의 합병으로 생긴 오릭스 버팔로즈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그 해 2년 연속 최하위를 찍은 오릭스를 4위로 올려놓는 업적을 이뤘지만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37] 이후 14년 뒤인 2015년에 야쿠르트는 사상 5번째로 전년도 최하위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으나,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이대호가 중심타자로 있었던 소프트뱅크에게 14년 전 자신들이 킨테츠를 이겼던 스코어인 1승 4패로 압살당했다. 그리고 2021년과 2022년에 킨테츠를 합병한 오릭스와 야쿠르트가 2년 연속 최하위를 극복하고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을 이뤄내는 진기록을 만들었다. [38] 심지어 홈런을 쳐낸 투수는 궈타이위엔,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 세이부의 초특급 에이스들이었다. [39] 그나마도 오늘날처럼 세이브 수만 집계했다면 위의 1차전 패전투수인 우시지마 카즈히코에게 타이틀을 뺏길 판이었으나,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은 세이브 포인트가 가장 많은 투수한테 주는 제도였는지라 세이브가 우시지마보다 적은 대신 구원승이 우시지마보다 훨씬 더 많았던 요시이가 SP를 많이 얻어내며 타이틀을 수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