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9:22:14

히토바시라

1. 개요2. 역사와 사례
2.1. 호레키 강 치수사업2.2. 야마노이(山の井) 둑 건설2.3. 이타쿠라 구의 인주탑(人柱塔) 인골
3. 관련 전설들
3.1. 마루오카 성3.2. 마츠에 대교3.3. 마츠에 성3.4. 다이묘 관련 일화들
4. 창작물에서

1. 개요

히토바시라(人柱: 사람 기둥, 인주) 일본에서 전근대에 행해졌던 인신공양 행위이다. 댐, 다리 및 성과 같은 대규모 건축물 아래 또는 그 근처에 사람을 파묻어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서 건축물이 사람의 생명력을 먹어 안정되고 튼튼해져 적의 공격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파괴됨을 막고자 한 행위였다.

건축물의 안정성을 위해 귀중한 제물을 바치는 의식 자체는 일본만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확인되는 풍습이며 개중엔 단순 귀중품이 아닌 히토바시라의 정의와 같이 사람을 제물로 바친 사례도 존재한다. 다만 해당 문서에선 일본의 사례만을 다루는 것으로 한다.

현대인들이 보기엔 순장 등과 마찬가지로 워낙 충격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에 현대 일본에선 '히토바시라'를 '산 제물', '희생양'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2. 역사와 사례

히토바시라를 기록한 초기 문헌 중에는 일본서기가 있다. 닌토쿠 덴노 재위 11년(323년) 기타카와강과 마무타강이 범람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닌토쿠 덴노는 꿈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았는데 무사시 지방에 사는 '코와쿠비'라는 사람과 와치 지방에 사는 '코로모노 코'라는 사람을 두 강의 신들에게 각각 바쳐야만 범람을 막는 제방을 비로소 세울 수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이후 닌토쿠 덴노의 명으로 코와쿠비는 키타카와 강 급류에 그대로 던져졌고, 이후 사람들이 강의 신에게 곧바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 1명을 희생한 후 제방이 세워진 뒤 강의 범람이 신기하게도 멈추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모노 코는 희생을 피했다고 한다.

15세기 무로마치 시대에 작성된 강부기(康富記)[1]라는 기록물에서는 '나가라의 히토바시라'라는 유명한 인신공양 사례가 언급되었다. 나가라강을 지날 때 등에 어린 사내를 업고 있던 여인이 붙잡혀 큰 다리가 세워질 곳에 그대로 묻혔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히토바시라와 다른 인신공양 설화는 실제로 행해졌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 흔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로 실제 사례임이 확인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설화들 중 많은 경우는 세계의 다양한 인신공양 설화들처럼[2] 뜬소문이거나 각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 심심풀이나 아동 교육 혹은 상업적 목적으로 지어내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로 추정되고 있다.

히토바시라 풍습 관련 설화는 전근대 일본 지역에서 교량과 같이 복잡하고 위험하며 종종 치수와 관련된 건설에 주로 관련되어 자주 따라다녔다. 종종 히토바시라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자기 희생 정신'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에도 막부의 중앙 집권 체제와 법치 체제가 완성되고 성리학이 보급된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실질적인 공양 행위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으며, 일부 지역들에서는 좀 더 오래 지속되어 하술할 호레키강 치수 사업과 같이 18세기 중반까지 암암리에 이런 행위들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18세기 말이 되면 일본 전역에서 히토바시라 풍습의 명맥이 끊겼다. 덕분에 19세기 중반 들어선 사라진 옛 풍습 취급을 받았다.

2.1. 호레키 강 치수사업

1754년 지금 현재 기후현 와노우치 정에서, 호레키 강 치수사업 중 치수 공사가 어려워지자 지역 유지 마스야 이헤(舛屋伊兵衛)가 기초 기둥이 위에서 고정될 수 있을 때까지 기둥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히토바시라의 제물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당시 사람들은 마스야를 치수 공사의 성공적인 완공을 보장하고자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마스야 이헤의 무덤은 1971년 도도부현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

2.2. 야마노이(山の井) 둑 건설

후쿠오카 현 야메시에 있는 야마노이 공원(山の井公園) 상류에는 1652년 야마노이 둑을 건설을 할 때 히토바시라의 제물이 된 요시다 마을의 촌장 나카시마 쿠라노스케(中島内蔵助)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참고로 나카시마 쿠라노스케 또한 스스로 자원해서 히토바시라의 제물이 된 경우이다. #, # 한편 해당 마을에서는 나카시마 쿠라노스케를 기념하는 추모 행사가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마을 사람들이 나카시마를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2.3. 이타쿠라 구의 인주탑(人柱塔) 인골

1937년에 현재의 니가타현 조에츠시 남동부에 위치한 이타쿠라 구(板倉区)에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사찰인 정정사(正浄寺)에서 객토를 채굴하던 중, 오미카를 파서 내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의 뼈를 발견했다. 그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마을의 '산사태 제물(히토바시라) 전설'이 이곳에서 사실임이 증명되어 전국적으로 드문 발견이 됐다.

인주당이 있는 장소는 헤이안 초기, 죠로쿠산 류쇼의 무렵 천대종정사(나중에 토치기현으로 이주)가 있던 곳이다. 데라노무라(구 이타쿠라쵸에 합병)는 고대로부터 산사태가 많은 땅으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었다. 그 중 관련 전설은 이러하다.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절의 일이다. 신슈(信州: 나가노현)에서 어떤 객승이 사루쿠요지(猿供養寺) 마을에 가려고 쿠로쿠라(黒倉) 고개를 넘으려는 참인데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쳤다. 객승이 비를 피하고자 숲에 들어가 쉬는데, 가까이 있는 우바가 못(宇婆ヶ池)에 이무기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이무기들은 조로쿠산(丈六山)에 큰 산사태를 일으켜 자신들이 살 만한 커다란 못을 만들자고 하였다. 그런데 큰 이무기가 말하기를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고 강에서 48타타키(四十八タタキ)[3]를 행하고, 사람 하나를 히토바시라로 바치면 우리가 산을 무너트릴 수가 없어. 하지만 인간들이 알 리가 없지." 하였다. 객승은 이 대화를 듣고 놀라 도망치려 하였으나 이무기들에게 들켜 붙들리고 말았다. 이무기들은 객승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고, 장님에 벙어리라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으니[4] 결코 이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 하고 약조하여 겨우 풀려났다.

그런데 객승이 원 목적지인 사루쿠요지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잦은 산사태로 겪는 참상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그만 이무기들과 한 약조를 깨고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승려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다했지만, 누가 히토바시라가 될지만큼은 며칠이 지나도록 제대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객승은 "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몸인데도 이미 이무기들과 맺은 약속을 깨고 말았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또한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는 이런 광경을 어찌 승려로서 그냥 지나치리오? 중생들이 겪는 고통이 곧 내 한 몸의 고통이나 다름없소. 내가 히토바시라가 되어 이 곳의 지진을 막고 마을을 지키리라 다짐하니, 나 죽거든 7월 17일을 기일로 삼아 향화(香華) 공양이라도 올려주시오." 하였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7월 17일마다 객승을 기리며 공양해왔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자료를 보면 전설의 객승이 흙을 모아 만든 좁은 공간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자 마을 사람들이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 봉한 뒤 흙을 덮어 묻어버린 것 같다. 1961년에 니가타대학 의학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간사이계의 40~50세 정도인 남자의 유골이었다. 다리뼈는 발달했지만 팔 뼈는 다소 얇았다고 한다. 팔로 일을 하지는 않으나 많이 걸어다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감사의 의미로 산사태 제물 공양당(人柱供養堂)을 세웠다. 1974년 8월 1일에는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 인주공양당에는 발굴된 인골과 함께 위를 막았던 그 바위를 전시한다.

3. 관련 전설들

3.1. 마루오카 성

마루오카 성(丸岡城)은 일본의 오래된 옛 성인데 인간 기둥(人柱) 즉, 히토바시라 풍습으로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조카 시바타 카츠토요(柴田勝豊)가 1576년 마루오카에 성을 지을 때 성곽의 돌담들이 쌓인 횟수에 관계 없이 계속 무너졌다. 이런 사고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누군가를 인주(人柱)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그렇게 히토바시라의 제물로 자녀가 2명 있고 가난한 삶을 사는 외눈박이 여자 오시즈(お静)가 선택되었다. 오시즈는 자녀 중 한 명이 사무라이가 된다는 조건 하에서 인주가 되는 데 동의하고, 결국 성의 중앙 기둥 아래에 산 채로 묻혔다. 그 직후 축성 공사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카츠토요는 축성 이후 다른 지방으로 영지를 옮겼고, 오시즈의 아들 또한 결국 사무라이가 되지 못했다.

그 탓에 히토바시라로 희생된 원혼이 느끼고 해마다 4월에 봄비로 성의 해자를 넘치게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시즈의 슬픔의 눈물로 인한 비'라고 불렀고, 원한을 달래기 위해 작은 무덤을 세웠다는 시 한 수가 전해진다고 한다. 실제 마루오카 성벽이 불안정했던 것은 성을 잘못 설계한 탓인 듯하다. 모모야마 시대(1575-1600)에 지어진 이런 디자인은 초기 요새로서의 모습을 더 잘 나타내지만, 가파른 바닥에 고르지 못한 석재 말뚝들이 있어 성벽이 불안정했던 듯하다. 그래서 히토바시라를 실제로 행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3.2. 마츠에 대교

시마네현 마츠에시에 있는 마츠에 대교(松江大橋)는 전설에 따르면 처음 세울 때 히토바시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인근 공원에는 교량 건설 중에 사망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히토바시라로 희생된 '겐스케'란 사람을 기리는 '겐스케 기념비'가 함께 있다고 한다.

1607년 이즈모 지방에서 강 입구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으나 매번 공사가 실패했다. 강바닥이 흡사 다리의 기둥이 놓일 수 있는 단단한 바닥이 없는 듯, 낮에 기둥을 만들어놓으면 밤에 휩쓸려 사라지거나 강물에 매번 삼켜졌기 때문에, 다리를 지을 큰 돌이 허다하게 의미 없이 강에 버려지는 상황에 반복되었다. 결국 다리를 전부 짓기는 했지만, 공사가 끝나자마자 기둥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홍수 때마다 그 절반이 사라졌고, 보수 공사를 할 때마다 배들이 자주 난파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강을 달래기 위해 히토바시라를 행하기로 하였고, 가장 위험한 곳이자 강물의 흐름이 가장 강했던 가운데 기둥 아래의 강바닥에 사람을 산 채로 묻기로 하였다.

이 불쌍한 희생자는 사이카마치의 거리에서 살던 겐스케(源助)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희생 제물을 고를 때 하카마를 입고 마치[5] 없이 다리를 건너는 첫 번째 사람이 제물로 선택되도록 결정했다. 겐스케는 재수 없게도 하카마에 마치 없이 다리를 건너다가 그대로 희생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다리의 가장 가운데 기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겐스케-바시라(기둥)'이라고 불렸다.

어떤 사람들은 겐스케라는 이름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 방언에 의해 훼손된 시대의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전설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1891년 새 다리를 지을 때에도 겐스케 때처럼 새로운 희생자가 필요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지역 주민 수천 명이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될까봐 마을에 오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3.3. 마츠에 성

전설에 따르면 마츠에 성은 성의 돌담 아래에 어느 여자가 히토바시라로 묻혔다고 한다. 기록이나 전설로도 이름은 전하지 않고, 그저 춤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다고 할 뿐이다. 단순히 '마츠에의 처녀'라고 불린다. 성을 지은 후 오오시로야마 언덕이 흔들리고 성이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기 때문에 마츠에 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3.4. 다이묘 관련 일화들

센고쿠 시대에도 히토바시라가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몇몇 다이묘들이 이를 막은 일화가 남아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카메야마성 축성 당시 제물 대신 돌로 만든 불상을 묻었고,[6] 모리 모토나리는 백만일심이라 적힌 비석을,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보검을 묻었다. 이케다 나가요시는 제물로 뽑힌 시녀의 소장품을 묻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훈훈한 일화들과는 달리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미츠히데가 건립한 카메야마성을 받고 천수각을 새로 짓던 중 공사가 난항을 겪자 히토바시라를 행하였다고 하며, 이 혼령이 미츠히데가 심은 은행나무 주변을 떠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히데아키가 카메야마 성주였던 당시 영지 통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가신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행하였기에, 진실된 이야기라 하기는 어렵다.

4. 창작물에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외기국 관인을 지낸 '나카하라 야스토미(中原康富)'의 기록물이다. [2] 인신공양은 일본 지역 뿐만 아니라 인권이란 개념이 희박하던 고대에는 지역, 종교, 인종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풍습이었다. [3] 정확히 무엇인지는 일본에서도 모르지만, 나무를 박아 인근 산의 골짜기를 막는 행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4] 진짜로 장님에 벙어리란 소리가 아니라, 장님에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5] 옷의 주름을 수직으로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한 딱딱한 도구. [6] 이 불상들은 현재 코쿠분지라는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7] 여기의 히토바시라는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산 채로 사람을 기둥에 매달아서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서 땅에 뿌리거나 모래와 함께 시멘트에 섞어 공사현장에 파묻는 방식이었다. [8] 원문은 다이코쿠바시라(大黒柱). 일본 전통 가옥에서 집의 하중을 지지하는 가장 굵은 중심 기둥을 말한다. 일본 건축에만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어에는 여기에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9] 다이코쿠바시라를 '대들보'로 번역한 건 기본적으로 오역이라 할 수 있는데, 대들보는 들보들이 받은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하는 수평 부재로, 기둥인 다이코쿠바시라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대들보와 다이코쿠바시라는 각자 한국과 일본의 전통 건축에서 건물의 하중을 견디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재로 여겨졌으며. 집을 지탱한다는 점에서 파생되어 둘 다 집안의 가장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아예 없지는 않다. [10] 이에 아내가 '그럼... 어쩌란 말예요?!'라고 하는 장면이 짤방으로 쓰이곤 했다. [11] "우리 회사의 기둥이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