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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9:13:23

히메유리 학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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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유리 학도대로 동원되기 전인 1944년 봄 노다 교장을 둘러싼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학생들

1. 개요2. 설명3. 이후4. 기타

1. 개요

ひめゆり[ruby(學徒隊,ruby=がくとたい)]

1944년 12월 오키나와현의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1 고등여학교의 교사ㆍ학생으로 구성된 부대의 간호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육군 소속 여학생 학도대.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1 고등여학교는 사실상 시설과 교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를 같이 일컫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제1고등여학교의 교지명인 '오토히메(乙姫)'와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의 교지명 '시로유리(白百合)'를 합쳐서 '히메유리'라는 명칭을 썼다. 히메유리 외에도 비슷한 성격의 8개 학도대가 있었다고 한다.

2. 설명

미군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15~19세 여학생 222명(여자부 150명, 제1고등여학교 50명 가량)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슈리 주변의 하에바루 일본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육군은 "일주일만 복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간호복무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징집했지만 실제로는 90여일 동안 고통을 당했고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오키나와 사범학교 남자부 학생 360명은 '철혈근황대'를 조직했는데 남자부 부장인 '나카무라' 부장은 이미 일본으로 빤쓰런했다. 여자부 부장 겸 현립 제1고등여학교 교장인 '니시오카 가즈요시'는 군 사령관의 말동무를 해야 한다며 군사령부 참모진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노다 교장이 남자부와 여자부를 모두 이끌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노다 교장이 철혈근황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여학생과 인솔교사들만 남게 되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 중에서 50명은 졸업반이었고 차출된 후 6일째인 3월 29일 하에바루 육군 병원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여학생 중에서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이피스트 군속,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다.[1] 그나마 이들은 5월 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하에바루는 오키나와 전체를 관장할 목적의 대형 병원이었으나 전투가 시작되자 여러 방공호 속에 나뉘어 틀어박혔으며 며칠에 한번 순회진료 하는 군의무관의 유일한 치료는 붕대 갈기와 사지절단뿐이었다. 이런 방공호도 미어터져 기껏 일선에서 환자를 데려와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분통을 터트리면서 환자만 병원 입구에 놔 두고 가는 일이 보통이었다.

병원에서 예과 3학년과 본과 1학년생들은 군간호사[2]들을 도와 간호 업무를 하였고 그 이하로는 방공호 파기나 시체 처리 등을 하였다. 병원 운영에 꼭 필요한 위생병들을 돌격대로 구성해 돌격시키는 미친 행위가 이어지면서 그들이 해야 하는 업무까지 여학생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방공호를 나가 이동해야 하는 식사 수령, 물 긷기도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실제로 이 과정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었던 슈리가 함락되면서 5월 26일 오키나와 남쪽 마카베촌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환자들은 데려갈 수 없어 '승홍정'이라는 이름의 염화제2수은 독약을 약이라며 나눠주었다.[3] # # 걸을 수 있는 경상자들은 이미 전선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부축받고서야 겨우 걷는 어정쩡한 환자들만 병원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중도에 쓰러지면 독극물이 주사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마카베까지 갔지만 환자들을 수용할 대피호가 없어 육군 병원을 해산하고 환자들에겐 원대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본부 방공호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병원장 사토 대좌마저 전사하였다.[4] 여학생들은 본부, 제1외과, 제2외과, 제3외과 방공호 등 4곳으로 나뉘어 수용되었다.

6월 18일 군부는 방공호에 갇혀 있던 히메유리 학도대에게도 돌연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몸뻬 종군복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다함께 교가를 불렀다. 병사들은 물론 주민들마저 이들을 걱정하면서 제발 포로만은 되지 말라고 거듭 애원하였다.

해산명령은 사실상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에 학생들을 버린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으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일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사격이나 폭격이나 자살 종용 등으로 인해 사망했다. 전체 사망자의 80%가 이 일주일 동안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제3외과가 숨어 있던 이하라 동굴 방공호가 화공(일명 너구리 몰이)를 당하자 탈출하지 못하고 6월 19일 아침에 여학생 32명, 군간호사 17명 등 거의 대부분이 사망하였다. 학도대를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탑이 바로 이 방공호 앞에 세워졌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한편 제2외과 방공호는 6월 18일 너구리 몰이를 당했지만 일부는 살아서 빠져나왔고 제1외과는 6월 19일 오전 3시 해산한 후 방공호에서 나와 흩어졌다.

이렇게 해서 제3외과는 거의 전멸했고 제1외과, 제2외과 그리고 본부 소속이었던 여학생 100여명이 기얀 해안 인근을 헤매다가 자결하거나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갔다. 6월 21일 오후 2시에는 제1고등여학교 다이라 마쓰시로 교사와 그가 인솔했던 학생 10명이 공식적으로 집단 자결을 명받아 기얀 해안에서 자결하였다. 미군에 수용된 후에도 이전에 입었던 부상이 악화되거나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6월 23일에는 우지시마 미쓰루 사령관과 조 이사무 참모장이 자결하여 사실상 전투가 끝났다.[5]

그럼에도 끈질기게 8월 22일까지 방공호에 숨어 있던 세 여학생[6]들이 일본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항복하였다.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240명 중 136명이 사망했다.

3. 이후

1946년 4월 4일 이들을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의 탑이 건립되었다. 건립 장소는 이들이 가장 많이 사망한 제3외과 방공호 이하라 동굴 앞이었으며 이때 제3외과 방공호에서 여학생들의 뼈가 수습되었다. 탑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가가 새겨졌다.
무덤 속 베개 딱딱하더라도
편히 잠들기를 기원하노라
함께 공부한 우리는

히메유리 탑 외에도 144명의 종군간호사를 기념하는 탑, 오키나와 사범대학 남자부(철혈근황대) 기념탑, 오키나와 현립 제2고등여학교 기념탑, 슈리고등여학교 기념탑도 세워졌다. 이들도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이다.

이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당시의 생존자가 관장을 지낸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이 운영 중이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생존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군 당국에서 강요한,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본군 위안부로서 학대당했다는 증언과 주장도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것도 부인하고 있다.

자국민을 죽음으로 몬 당시 일본 군부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 등의 문제로 현재도 상당히 논란이 되는 사건이다.

극우 세력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를 미군의 희생양인 양 미화한다.

4. 기타



[1] 남자들만 있으면 적적하다고 '필사병'이라는 이름으로 여학생을 각종 부서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였으먀 고급 장교들은 신변을 돌봐줘야 한다며 여성을 한 명씩 두었는데 없는 장교가 드물 정도였다. [2] 민간 병원과 가정에서 자격증이 있는 자들을 동원하였다. [3] 모든 물자가 부족했지만 어떻게 된 게 자살용 수류탄과 독극물 주사만은 넉넉하여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지급되었다. 방공호에서 어린 아이가 울면서 소리를 내면 병사들의 지시로 어머니도 울면서 아이게게 독극물을 주사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여학생들도 자살용 수류탄을 지참하고 있었다. [4] 일본 해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방공호에서 전멸한 후 육군이 섬의 남쪽의 방공호를 중심으로 흩어져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5] 이들과 함께 있었던 여자부 부장 니시오카는 자결하는 대신 여학생들 앞에 나타나 일장 연설 후 개별 행동하자며 도망쳤다. [6] 제1외과 여학생들로 다 죽어서 비어있던 제3외과 방공호에 숨어 들었다. 여기엔 종군 간호사와 위생병들도 약간 있었다. [7] 직역하면 섬노래라는 뜻으로, 본래 아마미 군도의 전통 민요를 이르는 말이다.